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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라

동문교회 손세용 목사님 | 2018-04-22 즐겨찾기에 추가

조회수 : 11 | 추천수 : 0

페이지 링크주소 : https://www.shematv.com/tv/6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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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라"
2018년 4월 22일 주일예배
로마서 15 : 1 - 7 ; 잠언 22 : 2


영국의 극작가이자 평론가인 벤 존슨은 어디서든 마음에 들지 않는 음식이 나오면 가차없이 독설을 퍼붓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백작의 만찬에 초대받았는데 음식이 자기 구미에 맞지 않자 존슨은 험담을 쏟아냈습니다. "사람을 불러놓고 이걸 먹으라고 주다니, 이 음식은 영락없이 돼지 먹이로군!" 그 말을 들은 백작 부인이 말했습니다. "어머나! 제가 봐도 영락없는 돼지 먹이네요. 그래서 한 접시 더 드려야겠군요!" 그 후로 벤 존슨은 음식에 대한 독설을 삼가게 되었답니다. 사람은 제 아무리 똑똑해도 덕이 없으면 어디에서나 환영받지 못하는 법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실수담을 말했습니다. 10년 만에 친구를 만난다는 생각에 한껏 멋을 부리고 집을 나섰다. 들뜬 마음에 잠을 제대로 못 자 얼굴이 좀 부어 있었지만 그건 문제 될 게 아니었다. 그런 내 기분을 아는지 어젯밤 어렵게 허락을 받아 낸 남편의 승용차가 '반짝'하며 나를 부르는 듯했다. 그런데 열쇠를 꽂는 순간, 아뿔싸! 차 문이 열리지 않았다. 경비아저씨 힘까지 빌려 보았지만, 너무 힘껏 돌려 댄 바람에 열쇠만 휘어질 뿐 문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결국 열쇠 집에 연락해 열쇠를 다시 만들어 시동을 거는데 성공했다. 약속 시간보다 한참 늦게 도착했지만 수수한 옷차림의 친구는 반갑게 날 맞아 주었다. 우리는 일산 자유로를 신나게 달리면서 학창시절이며 아이들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밥을 먹으면서도 얘기를 끊일 줄 몰랐다. 그런데 식사를 하고 나와 보니 내 차가 보이질 않았다. '오늘은 차가 왜 이렇게 말썽이지.' 한참을 살피다 보니 어찌된 일인가? 내가 타고 온 차가 있긴 한데 글쎄 차번호가 틀렸다. 그제야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여태 남의 차를 타고 다녔던 것이다. 그 날 저녁, 주스 한 상자를 사들고 차 주인을 찾아갔다. 너무 부끄럽고 미안해 아무 말도 못하고 이마에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하루 종일 없어진 차를 찾아 헤맨 아저씨는 어이가 없으셨던지 "살다보면 그런 일도 생길 수 있지요"하며 허허 웃으셨다. 너무 기분이 좋으면 이런 실수도할 수 있는 걸까?


[논어(論語)]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계강자(季康子)가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무도한 죄인은 사형으로 엄히 다스려서 백성으로 하여금 겁이 나서라도 유덕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합니다. "그대 스스로가 착하고자 하면 백성은 저절로 착해질 것이오.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라 하였으니 바람을 맞으면 풀은 반드시 머리를 숙이는 법이오." 공자의 대답처럼 죄인을 다루는데 무조건 포악한 수단으로만 나아간다면 그것은 이미 바람일 수가 없고, 그 포악함 밑에는 풀잎은 다만 눕는 척할 뿐입니다. 그래서 청렴 결백하면서도 너그러워야 하고, 어질면서도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고 공자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로마서 15장은 14장에서 이어진 내용으로, 고기 먹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당시 시장에서 파는 고기는 거의가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던 것으로 먼저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다가 그것을 시장에서 팔았습니다. 그래서 우상에게 제사지낸 그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는 것이며, 또한 이것을 먹는다는 것은 우상숭배에 참여한 것으로 여겨져서, 이 문제가 당시엔 교회에서 논란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그들을 위하여 죽으셨으니 먹는 문제로 그들을 망하게 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롬14:3). 바울은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영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를 용서하고 영접해야 한다'며, 특히 믿음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감싸고 용납하라고 권면합니다.


본문 2절에서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덕이란 먼저 하나님 앞에 선하고, 자기 자신한테 선하고, 이웃에 대해서 선한 것, 이 세 관계가 합쳐져서 온전해질 때에 이것을 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부득불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나도 좋고 저도 좋으면 이것은 이상적이지만, 그럴 수 없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를 버리고 저를 택하는 것이 덕입니다. 또 저도 좋고 하나님께도 좋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할 때면 부득불 하나님 편을 택해야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덕을 이루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덕을 세우기 위한 세 가지 자세를 가르쳐줍니다. 첫째,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말씀합니다. 본문 1절입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15:1). 여기서 '믿음이 강한 자'란 '영적으로 강한 사람'을 뜻하는 말로서,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강한 자 편에 넣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모두 강한 자인 셈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강한 자로서,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감싸안고 그 약점을 자기 몫으로 담당하라고 합니다.


어른은 어린이와 싸우거나 같은 수준에서 다투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씨름하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아들이 이깁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져주기 때문입니다. 그렇듯이, 믿음이 강한 사람은 아직 믿음이 약한 사람의 약점이나 허물을 함부로 탓해선 안됩니다. 그가 잘못한 것까지도 내 책임인 것처럼 담당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며, 함께 아파하고 같이 고통을 나누어야 합니다. 더더욱 믿지 않는 사람들은 천국의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기에 그들을 이해하고 양보해야 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아직 미숙한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대할 때, 먼저 믿고 믿음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입장에 있는 사람이 남의 약점을 감당하고 책임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저들이 아직 약한 자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의 위치에 서서 '아, 그 입장에서는 그렇겠다. 처음 믿으니까 그럴 수 있겠다. 그런 환경에서는 그렇겠다'고 이해해줘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기다려줘야 합니다. 너무 빨리 속단할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모르느냐?' 이래선 안됩니다. 아직 모르지만, 조금 있으면 알게 됩니다. '그것도 못하느냐?'가 아닙니다. 좀더 기다리면 그도 넉넉히 할 때가 올 것입니다. 또, 어떤 경우에도 '너한테 실망했다. 너는 고작 그 정도밖에는 안 되는구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다'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미국의 어느 목사님이 몹시 시장하여 아내와 함께 자주 가던 식당에 갔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음식이 나오지 않다가, 오랜만에 나온 음식이 주문한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음식이 나왔는데 서비스가 엉망이라서 팁을 주지 않으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10센트, 아니면 15센트면 충분해요.' 하지만 하나님은 "이번 기회가 선을 베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말고 말씀하셔서 '나는 이 직원에게 팁을 주는 게 아니라 그 삶 속에 씨앗을 뿌리는 거야.'라고 마음먹고 30달러 식사에 20달러를 팁으로 주었습니다. 몇 주 후 편지 한 통이 왔습니다. "저를 기억하세요? 최악의 서비스를 받으실 때 음식 나른 여자랍니다." 그녀는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는데, 십대 후반에 교회를 떠났다가, TV에서 그 목사님을 보았습니다. "목사님이 저희 식당에 오셨을 때 주문이 뒤죽박죽이면 대개는 화를 내고 나가버리는데, 두 분은 짜증 한번 내지 않고 많은 팁까지 주셨습니다. 이제 저의 삶은 제자리로 돌아왔어요. 주일마다 목사님 교회에 나가고 있습니다."


둘째, 자신의 기쁨이나 유익보다 이웃의 기쁨과 유익을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롬15:2-3). 1절에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지 말라 함입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마음을 갖지 말아야 덕을 이루게 됩니다. 내 기쁨만 추구하려고 하면, 다른 사람에게 슬픔과 아픔을 주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자랑을 하지 말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가만히 보면 내가 나를 자랑하다 보면 다른 사람 정죄하기 쉽습니다. 내가 잘한다고 하는 순간에 다른 사람 못한다는 말이 되어버립니다. 나는 지금 분명히 내가 할 수 있다는 말밖에 안 했으나 이 말은 곧 다른 사람 못한다는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덕을 세우려면 자기 자랑을 말 것이고,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생각을 버려야 됩니다. 자기 중심적인 기쁨을 추구하지 말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내 감정대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내 기분대로만 살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음식을 먹을 때에 사실은 입맛에 안 맞고, 마음에 안 맞아도 우리가 먹습니다. 왜요? 만들어준 사람의 기분을 위해서입니다.


옛날에 심방 많이 다닐 때에 참 어려운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자꾸 먹을 것을 내주는데 다 먹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 때는 하루에 커피를 열 잔을 넘게 마십니다. 가난하고 어렵던 때, 어느 목사님이 심방을 하는데, 점심 식사시간에 어느 가정에서 국수를 끓어 내놓았더랍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국수는 좋아하는데, 그 국수 위에 고명으로 호박을 썰어서 데쳐서 올려놓았는데, 그 호박은 평소에 잘 먹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호박을 걷어내고 먹을 수는 없고 해서, 눈을 질끈 감고 호박을 걷어서 한 입에 넣고 씹어 삼켰습니다. 그랬더니 그 모습을 보더니 "아이고, 우리 목사님 호박 잘 잡수시네"하면서, 한 그릇 더 올려주더랍니다. 그래도 먹어야 하는 것은 덕을 이루기 위해서 입니다. 사실은 맛이 없지만 맛이 있다고 하고, 먹고 싶지 않아도 먹어야 하는 것, 이게 덕입니다. 웃고 싶지 않아도 웃어야 합니다. 남 웃을 때에 같이 웃어야지, 남 다 웃는데 가만히 있으면 덕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내 기분대로 살다보면 덕을 이루지 못합니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기분 나는 대로 행동하면 결국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여 덕을 세우지 못합니다. 그런고로 자기 감정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게 덕이 될까 안될까, 상대방에게 이로울까 해로울까, 이래서 되는가 안 되는가…' 적어도 몇 번 생각을 하고 나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게 덕을 이루는 것입니다.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이면 기분에 내키지 않아도 해야 합니다. 마땅히 가야 하는 길이면 가는 것입니다. 마땅히 먹어야 하는 일이면 먹는 것입니다. 이런 훈련이 되어야 덕을 이루는 것입니다. 기분 나는 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의지 주도적이야 합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기쁨을 구할 것이 아니라, 이웃을 기쁘게 하도록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2절에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우리 가운데 각 사람은 선을 위하여 자기 이웃을 기쁘게 하고 덕을 세우자"라는 뜻입니다. 이웃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의 유익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참된 일치를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에도 보면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고전13:5)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기쁨보다는 다른 이웃의 기쁨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위해 희생해주길 바라지만, 성경은 신앙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신앙이 약한 사람을 위해 양보하고 희생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 주님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롬15:3). 주님의 심정은 "너만 구원받을 수 있고, 네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기쁘고 내 모든 것을 희생하고 포기하며 죽을 수 있다"며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조엘 오스틴의 책 [Become a better You]에 실린 글입니다. 우리 교회 청소년 성가대의 한 대원은 철저히 망가진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감옥에 있었고 어머니는 심각한 약물 중독자였다. 따뜻한 관심과 보살핌은 전혀 받을 수 없었다. 이 아이를 눈여겨본 우리 교회 한 부부는 같은 또래 아들을 둔 부모로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교회에 나와 그에게 사랑과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이는 점차 가족의 의미를 깨닫고 부부의 사랑을 받아들였다. 전에는 한번도 교회에 가본 적이 없었지만 어느새 교회 생활에 재미 붙였다. 이제 교회에 가는 시간이야말로 그가 가장 고대하는 시간이 되었다. 나중에 이 아이는 청소년 성가대에 들어와 누구보다도 열심히 찬양했다. 이제 이 부부는 성가대 연습을 위해 주일뿐 아니라 주중에도 아이를 데려와야 했다. 시간과 노력과 에너지가 배로 들었으나 부부는 조금도 불평하지 않고 기꺼이 씨앗을 뿌렸다. 그 후 아이는 집안에서 일어난 끔찍한 비극으로 엄마를 잃는 엄청난 일을 겪게 되었다. 바로 앞에서 엄마가 죽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그 상심이 얼마나 컸을까? 장례식을 마치고 이틀 후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 앞으로의 계획을 의논했다. 그런데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가족들이 그의 방에 가 문을 열어보니 아이는 성가 테이프를 들으며 다음 주일 찬양을 연습하고 있었다. 누군가 관심을 쏟아주지 않았다면 이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마음씨 좋은 부부가 시간을 내서 돌봐주지 않았다면 이 상황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부부가 너무 바빴다면? "주일 예배에는 데려다줄 수 있지만 성가대 연습까지 챙겨줄 수는 없어. 그것까지는 우리가 알 바 아냐." 부부가 이런 태도를 품었다면? 하지만 부부는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했다. 소년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자신들의 시간과 자원을 희생했다. 진짜 삶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가까운 것은 상처 입은 사람들을 돕는 마음이다. 마음은 굴뚝같지만 시간이 없는가? 친구와 이웃과 가난한 사람을 위해 시간을 낼 수 없을 정도로 바쁘다면 그건 너무 바쁜 것이다.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성경은 말세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을 거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너무 바쁘고 성공에만 눈이 멀어 자기 필요를 채우는 데만 급급할 뿐 남들을 돕지 않을 것이다. 우리만큼은 그래서는 안 된다. 주위에는 우리의 사랑과 격려를 애타게 기다리는 상한 마음들이 가득하다. 순간의 기적을 놓쳐서는 안 된다. 우리의 시간과 노력이 급히 필요한 사람들이 주위에 있을지도 모른다.


셋째, 서로 받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7절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15:7). 여러분, 인간관계에서 왜 용납하는 것이 중요합니까? 우리가 수용해야만 교제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14장에서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고 강조한 것은 형제를 판단하면 반드시 인간관계가 상처를 입게 됩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주님은 우리에 대한 기대가 우리의 삶 속에서 전혀 채워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우리를 받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주님의 기대에 못 미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조건 없이 받아 주셨습니다. 마치 탕자가 먼 나라에서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먼저 뛰어나와서 아들을 끌어안고 아무 조건 없이 그를 받아 주셨던 것처럼, 우리를 먼저 받아주셨습니다. 아버지의 엄청난 사랑을 받은 탕자는 아버지께 죄송하고 미안해서 이제는 아버지의 기대에 합당하게 살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받아 주기 위해서는 우리의 기대를 유보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 주었으면 하는 우리의 기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있는 모습 그대로를 먼저 받아 주어야 합니다. 인간관계에 상처가 생기는 이유는 기대가 많기 때문입니다. 진정 믿음이 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도리어 모든 사람을 용납하고 수용하며,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룹니다. 사도 바울은 제사 음식을 먹는 문제를 이야기하다가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롬14:15)했고,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8:13)라며, 믿음이 약한 형제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안토니 드 멜로는 [새 소리가 들리느냐]는 책에서 '하나님의 사랑법'을 이렇게 들려줍니다. "나는 몇 년 동안 신경질적이었다. 불안과 좌절에 빠졌었고, 이기적이었다. 모두가 나를 변덕쟁이라고 했으며, 신경질이 너무 지나치다 고 말하였다. 내가 그들을 괴롭혔다는 말에 나는 동의하고서 마음을 고쳐먹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는데도 나 자신을 개조할 수는 없었다. 가장 쓰라렸던 일은 제일 친한 친구마저 내가 너무 신경질만 부려 왔다고 말했을 때였다. 그 역시 나의 개심을 고집했다. 나는 이번에도 그에게 수긍은 했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무력해졌고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말하였다. '바꾸지 말게나. 자넨 그대로 있어야 하네. 바꾸고 말고 할게 있겠어? 나는 자네다운 자네를 좋아하네. 자넬 더욱 사랑할 여력도 없네만.' 이 말이 음악처럼 내 귓전을 울렸다. '바꾸지 말아라. 절대 바꾸지 말아라.... 나는 널 사랑해.' 그래서 나는 안심했고, 생기를 되찾았다. 그리고 오, 그 얼마나 놀라운가, 내가 바뀐 것이다! 지금은, 내가 바뀌든 바뀌지 않든 나를 사랑해 주는 누군가를 발견할 때까지 실제로 내가 바뀔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하나님 당신은 이런 식으로 절 사랑하시지요?"


우리가 그분의 사랑 속에 녹아서 새로운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의 변화를 먼저 조건으로 제시하지 말고, 그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주님께 영광 돌려야 할 것입니다.


영국 엘리자베스 1세가 당시 남아프리카연방의 통합을 위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남아프리카 추장 여러 명을 영국왕실에 초청하여 만찬을 열었습니다. 사전에 오리엔테이션이 있었지만 추장 한 명이 포크와 나이프가 불편하여 손으로 음식을 먹기 시작하자, 함께 있던 영국 각료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긴장했습니다. 그때 여왕이 빙그레 웃더니 나이프와 포크를 제쳐놓고 손으로 음식을 먹기 시작하더랍니다. 그러자 모든 만찬객들이 여왕을 따라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고 합니다. 아프리카 추장들은 기분 좋게 식사했고 여왕의 남아프리카 통합제의에 흔쾌히 협력을 다짐하였습니다. 여왕은 그 날 더 큰 그림을 본 것입니다. 만일 그 날 여왕이 이 손님들에게 무례하다고 책망을 했다면 얼마나 국가적으로 더 큰 손해를 보았을까요? 지혜로운 여왕이 아니었습니까! 우리교회 모든 교우들이 이런 큰 그림을 보며, 큰사랑으로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마더 테레사의 [그래도 사랑하라]라는 시입니다. "사람들은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사랑하라./ 당신이 선한 일을 하면 이기적인 동기에서 하는 것이라고 비난받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은 일을 하라./ 당신이 성실하면 거짓된 친구들과 참된 적을 만날 것이다. 그래도 사랑하라./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받을 것이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당신이 여러 해 동안 만든 것이 하룻밤에 무너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만들어라./ 사람들은 도움이 필요하면서도 도와주면 공격할지 모른다. 그래도 도와주어라./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면 당신은 발길로 차일 것이다. 그래도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나누어주어라."


남편 없이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여인이 돈 만원을 들고 동네 구멍가게로 분유를 사러 갔습니다. 분유 한 통을 계산대로 가져가니 주인은 16,000원이라고 합니다. 힘없이 돌아서는 아이 엄마를 보고 가게주인은 분유통을 제자리에 올려놓다가 슬며시 떨어뜨리고는 아이엄마를 불러 '찌그러진 분유는 반값'이라고 말합니다. 아이엄마의 만원을 받고 분유와 거스름 돈 2천 원을 주자, 아이엄마는 고마운 마음으로 분유를 얻었고 주인은 8천원에 행복을 얻었습니다. 천국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부자는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지혜자는 말합니다.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잠22:2). 세상에는 강한 자도 약한 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서로 화평을 이루고 덕을 세우기 위해 강한 자는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서로의 기쁨과 유익을 구하며, 서로를 받아들일 때,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롬15:5-6)하신 주님의 뜻을 이룰 때, 우리 안에 평화가 넘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