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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을 기다리는 자세

동문교회 손세용 목사님 | 2018-12-02 즐겨찾기에 추가

조회수 : 16 | 추천수 : 0

페이지 링크주소 : https://www.shematv.com/tv/7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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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을 기다리는 자세"
2018년 12월 2일 대림절 예배
베드로후서 3 : 8 - 13 ; 이사야 30 : 18


미국의 한 고등학생이 배우가 되려고 할리우드에 갔는데, 영화관계자들은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없다고 퇴짜를 놓았습니다. 어느 날 한 영화사에 배우 선발면접을 보는데, 면접관은 오랜 면접으로 지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자료를 봤으니 소개할 필요 없고,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간단히 말해보세요." 그는 씩씩하게 말했습니다. "네, 제 특기는 사람들을 웃기는 것입니다." 면접관은 체념하듯 대충 말했습니다. "그럼 지금 보여주세요. 빠르고 간단할수록 좋습니다." 그러자 그는 곧장 문을 열고 밖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면접을 기다리는 여러분! 이제 그만 집에 가서 식사하세요. 면접관들이 나를 채용하기로 했습니다." 면접관들은 그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고 그를 채용했는데, 그가 바로 코미디황제 '밥 호프'입니다. 면접을 기다리는 사람은 집에 갔지만, 주님을 기다리는 자는 주님을 뵙게 됩니다.


시카고 대학 경제학과 교수인 밀턴 프리드만은 그의 저서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에서 '샤워실의 바보'라는 말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습니다. 샤워실에 한 바보가 들어갔습니다. 처음에 수도꼭지를 틀었더니 샤워기에서 찬 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더운물이 나올 텐데 놀란 바보는 기다리지를 못하고 뜨거운 물이 나오도록 수도꼭지를 왼쪽 끝까지 틀었습니다. 갑자기 너무 뜨거운 물이 나오자 다시 오른쪽 끝까지 수도꼭지를 돌렸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아주 차가운 물이 쏟아져 나오자 바보는 결국 샤워를 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거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어리석은 경제정책을 시행하는 정부를 빗대고 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어찌 경제정책뿐이겠습니까? 누구나 인생에서 어리석으면 상황과 때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여, 물러설 때와 나아갈 때, 취하여야 할 때와 버려야 할 때를 분별하지 못합니다. 묵묵히 기다리는 중에 때를 분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미국에서 열렸던 한 '성공 세미나'에서 강사가 성공한 사람들의 예를 들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발명왕 에디슨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실패를 많이 했습니까? 그러나 그가 포기했습니까?" 수강생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외칩니다.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대서양을 횡단했던 찰스 린드버그도 얼마나 많은 실패를 거듭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포기했을까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강사가 또 이렇게 물었습니다. "멕키스트가 포기했을까요?" 그러자 대부분은 가만히 있었고, 몇 명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사람들은 멕키스트가 누군지 몰라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강사님, 멕키스트가 누구입니까?" 강사가 대답합니다. "멕키스트는 포기한 사람입니다." 알렉상드르 뒤마는 말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지혜는 기다림과 희망, 이 두 가지 말로 요약된다."


기독교신앙은 기다림의 신앙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약속'과 '성취'의 긴장 속에서, 이미 이뤄진 약속을 오늘 누리며, 그리고 앞으로 이루어질 약속을 소망 중에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리라 약속하신 말씀을 믿고, 이천 년 동안 그 견딜 수 없는 박해와 고난을 견디며 지금까지 이겨 나왔습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대림절 첫째 주일인데, 대림절이란 '주님의 강림을 고대한다'는 뜻의 대림(待臨)의 절기를 말합니다. 이 절기를 '강림절', 혹은 '대강절'이라고도 하는데, 성탄 4주 전부터 시작하여, 성탄절을 준비하며,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절기로 지킵니다. 교회력은 이 대림절로부터 한 해의 절기가 시작되기에, 오늘이 한해를 새롭게 시작하는 설날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2천 년 동안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왔으나 지금까지 미뤄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첫째, 우리의 기다림의 시간을 하나님의 시간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8절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3:8). 인간의 하루가 주님께는 천년과 같고, 또 인간의 천년이 하나님께 하루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시90:4)는 시편을 인용한 것으로, 주님의 재림이 연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인간의 시간개념으로 오해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시간을 어떻게 느끼십니까? 어렸을 땐 '왜 이리 시간이 안가나, 빨리 커서 어른이 됐으면'하고 시간이 어서 가길 바라지만 쉰을 넘고, 예순을 넘으면 1년이 하루처럼 빨리 지나갑니다. 단순한 사람은 하루를 그저 24시간으로밖에 생각지 못하지만,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 년이고, 천 년이 하루 같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시간 개념으로 이해하면 오늘의 이 지루한 시간이 크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어느 사기꾼이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인간에게 10억 년이 하나님에겐 1초라면서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래, 10억 년이 내게는 1초에 지나지 않는단다." 사기꾼이 말합니다. "그럼 인간의 10억 원이 하나님에겐 1원이겠네요?"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그럼, 그까짓 10억 원이야 1원에 지나지 않지." 그 말씀을 듣고 사기꾼 옳다 됐다 싶어 말합니다. "하나님, 그럼 제게 1원만 적선해 주세요." 그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냐, 알았다. 그러면 앞으로 1초만 기다려라."


둘째, 죄인도 회개하고 돌아오길 바라시는 하나님의 인내를 통해 지연의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그 사랑 속에 인내가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받길 기다리십니다. 여러분 중엔 주님의 약속의 성취가 늦어지는 것에 불평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 중에 5년 전에 예수를 믿기 시작한 분이 있다면, 만약 6년 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셨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지금까지 재림이 늦어진 것이 이 사람에겐 천만다행일 것입니다. 주님은 단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시며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셋째, 그러나 이 종말은 지연되고 있을 뿐이지, 반드시 다가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3:10). 더디 오는 것과, 오지 않는다는 말은 다릅니다. 마태복음 25장 열 처녀의 비유에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잤다"고 했는데, 다음 절에는,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마25:6)고 하여 드디어 신랑이 도착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밤새 파수하는 보초에게 새벽은 오지 않을 것처럼 지루하게만 느껴지지만, 그 시간이 길게 느껴진다고 해서 새벽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오기 마련입니다.


필리핀이 잠시 일본군에 점령되어 있던 2차대전 당시, 더글라서 맥아더 장군이 필리핀을 떠나면서 남겼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I shall return!). 2년 후 필리핀의 레이트 만 해안에 상륙하면서 맥아더 장군은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약속한 대로 나는 다시 왔다!"(As I promised you, I came!). 성실한 한 인간이 자기 명예를 걸고 그가 다시 온다는 약속을 지켰다면, 우리의 구세주요, 역사의 주인이신 그분이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을 어찌 안 지키시겠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3:11). 초기 기독교회는 많은 박해와 궁핍과 고난 속에서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저들이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굳게 지키고, 오히려 세상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주께서 다시 오신다!"는 이 믿음이 저들로 하여금, 그 말할 수 없는 박해 속에서도 믿음과 용기를 잃지 않게 했고, 그 참혹한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인내하여 마침내 그토록 박해하던 로마 제국을 신앙으로 정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이 우주적인 종말 앞에서 본문 11절은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라고 엄숙하게 묻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림절을 맞는 의미입니다. 첫째,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그 날을 준비하라'고 말씀합니다. 본문 11절에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을 말씀합니다. 여기서 '거룩'은 악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께 헌신된 것을 뜻하며, '경건'을 나타내는 '유세베이아'라는 말은 하나님을 닮아가며 섬기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야고보서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1:27)고 했습니다. 소극적으론 버려야할 것이 있다는 뜻이고, 적극적으론 추구해야할 것이 있음을 뜻합니다. 여러분, 버려야 할 것이 있는 줄 알면서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끊어야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끊지 못하며, 고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아직도 고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이제는 버리고, 끊고, 고쳐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을 본격적으로 착수하여, 마지막을 위해 무엇인가 작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의 행동이 반드시 실천되어야 합니다.


미국의 신앙영화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할아버지 세대의 신앙생활과 아버지 세대의 신앙생활, 그리고 아들 세대의 신앙생활을 비교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할아버지 세대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교회였습니다. 그 다음이 가정이고, 그 다음으로 자기 만족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세대에는 조금 달라졌습니다. 가정이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이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아들 세대에 이르자 완전히 변했습니다. 젊은이들은 자기만족을 위해 즐기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 다음이 가정이며, 교회는 가장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현대인들은 점점 더 교회를 등한시하면서 가정도 무너지고, 자신도 날로 타락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심각한 시대를 바라보며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종말의 때가 가까이 다가왔음을 알고, 이 시대에 동화되지 않도록 자신을 경건히 지켜가야 하겠습니다.


로이스 블랜챠드 이데스라는 사람은 이러한 글을 썼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집에 오신다면, 당신은 과연 어떻게 하시렵니까? 문 앞에 서서 두 팔을 활짝 벌려 천국에서 오신 손님을 맞이하겠습니까? 아니면 주님께서 집안으로 들어오시기 전에 옷부터 갈아입으려고 할 것입니까? 부끄러운 잡지책들은 숨겨두고, 그 대신 성경책을 놓아두시렵니까? 시끄러운 유행가 책들은 감춰두고, 그 대신 찬송가를 놓아두시렵니까? 당신은 주님께서 즉시 집안으로 들어가시도록, 그분을 밀며 재촉할 수 있겠습니까? 과연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루 이틀을 지내실 수 있을는지 궁금하군요. 당신이 매일 하던 일들을 주님 앞에서도 그대로 계속 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매일 사용하던 말들을 주님 앞에서도 그대로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주님께서 당신 집에 영원히 거하시기를 정말로 원하십니까?" 이 말을 오늘 우리 각자에게 적용해 봅시다. 주님이 오늘 우리 집에 오신다면 과연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둘째, 주님 오실 날을 간절히 사모하고 기다려야합니다. 본문 12절에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라고 했는데, 새번역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 날을 소망하며 간절하게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립니다. 온 세상이 아무리 곤두박질쳐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릴 뿐입니다.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정답게 놀다가 어느덧 저녁때가 되었습니다. 메뚜기는 하루살이에게 "하루살이야,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또 놀자"고 말하자, 하루살이는 의아하여 말합니다. "야! 메뚜기야, 내일이라는 것이 뭐니?" 그러자 메뚜기는 열심히 내일을 설명합니다. "내일이란 캄캄한 밤이 지나면 동녘에서부터 밝은 태양이 떠오르는데 그 때가 바로 내일이야." 그러나 아무리 말해도, 하루 이상을 살아보지 못한 하루살이는 메뚜기가 거짓말한다고 여기고 "거짓말하는 너하고 다시는 안 논다"며 가버렸습니다. 메뚜기는 "하룻밤만 자고 나면 내일이 오는데"하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얼마 후 메뚜기는 개구리와 친구가 되어 며칠 신나게 놀았습니다. 어느 날 개구리가 "메뚜기야, 이제 날씨가 추워지니 그만 놀고 내년에 만나자." 이번엔 메뚜기가 놀랐습니다. "개구리야, 내년이 뭐니?" 메뚜기는 1년 생이라 한번도 다음해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개구리는 열심히 내년을 설명합니다. "내년이란 가을이 되어 나뭇잎이 떨어지면 겨울이 되어 눈이 내려 온 땅에 덮이고, 모든 시냇물이 얼어붙고 나면, 다시 봄이 오고, 그러면 죽은 것 같던 나무들이 새롭게 잎이 나고 꽃이 필 때를 내년이라고 해"하며 열심히 설명했으나 메뚜기는 개구리가 아무리 말해도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메뚜기는 '어떻게 잎이 떨어져 죽은 나무들이 다시 살아나느냐?'며 개구리가 속인다고 여기고 "너하고 안 놀아!"하고 떠났습니다. 개구리는 안타까워하며 "머잖아 내년은 다시 오는데, 왜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까?"라고 중얼거립니다. 하루살이가 내일이 없다고 내일이 없는 것입니까? 메뚜기가 내년이 없다고 해서 내년이란 오지 않는 걸까요? 분명 내일은 있고, 내년은 찾아오듯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호라티우스 보나르는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저녁에 커튼을 닫으면서 "주님, 오늘밤에 오시렵니까?" 또 아침에 커튼을 열면서 "혹시 오늘인가요, 주님?"하면서 늘 그 날을 대비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처럼 주님의 재림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까? 어느 무명 작가는 [기다림]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 마음 속에 빈자리/내가 가진 것으로는 채울 수 없네//숨 쉴 때마다 내 속에 솟는 그리움/이 목숨으로는 달랠 길 없네//아무도 들어오지 못할 이 자리인데/님이 오시기를 날마다 기다리네//주님, 이 거룩한 계절에/이 빈 마음에 꼭 들어오소서."


셋째, 주님의 재림을 앞당기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본문 12절에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라'고 했는데, 공동번역에서는 '그 날이 속히 오도록 힘써야할 것입니다'고 번역했고, 새번역에는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주님 오시는 날을 앞당길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종말을 말씀하시면서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고 예언하셨습니다.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야 우주적인 종말, 즉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1974년 로잔대회에서 랄프 윈터 박사에 의해 미전도종족 선교가 주창되었습니다. 미전도종족의 정의는 '자신의 종족 집단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토착 공동체가 없는 종족 집단'으로, 전문가들은 자신의 종족 집단 중 기독교인이 2% 이상이 되면, 자신의 종족 집단을 복음화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미전도 종족은 6,400여 종족으로 주로 힌두, 무슬림, 시크교 등 타종교가 강한 지역과, 티베트처럼 지리적으로 험해 선교사가 적응하기 힘든 지역, 이란, 북한 등과 같이 정치적으로 어려운 지역입니다. 그 중 3,300종족이 단 한 번도 복음을 접해본 적이 없으며, 이들 중 10만 명 이상의 종족이 639종족으로 보고 있습니다. 21세기 들어서 지구촌은 TV와 방송과 인터넷을 통해 한 울타리처럼 가까워졌는데,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지역에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번 겨울에도 우리 교회에선 티베트인을 위해 29회 째 단기선교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는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이 되어, 직접 가든지 아니면 기도와 재정으로 보내는 선교사가 되어,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여 우리 주님의 오실 날을 앞당겨야 합니다.


12절에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라고 경고합니다. 미국 기술평가원(OTA)에 따르면 전면적인 핵전쟁이 일어날 경우 미국 인구의 88퍼센트, 러시아 인구의 50퍼센트가 사멸하고, 살아남는다 해도 죽은 자를 부러워할 만큼 비참한 세상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과학자들은 핵폭탄이 폭발하면 지구표면의 85퍼센트를 차지하는 바닷물의 수소 원자들이 연쇄반응을 일으켜, 지구가 종이처럼 타버릴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리라"는 말씀대로 하늘이 큰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버리는 천체의 대 이변으로, 우주의 질서가 완전히 풀어진다는 뜻입니다. '풀어진다'는 말은 소금이 물에 녹듯이, 모든 체제와 힘의 질서가 해체되는 것입니다. 지구나, 달과 태양 등 모든 우주의 질서가 해체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밝아 오리라는 것입니다.


지구의 운명이 심상치 않습니다. 일본 대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방사능 누출의 재앙은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지구온난화의 가속도가 걷잡을 수 없어, 이상기후에 홍수, 사막화, 지진 등이 빈발하며, 인류의 멸망을 경고하듯 각종 재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2010년 1월 14일, 11시 5분이었던 '지구 종말 시계'(Doomsday Clock)가 2018년 1월 25일, 자정 2분 전인 11시 55분으로 조정되었습니다. 미국의 '핵과학자회'(BAS)는 1월 25일 기자회견을 열어 '운명의 날 시계'를 '23시 58분 00초'로 조정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는 1953년 미국과 소련이 수소폭탄을 실험했을 때와 같은 시각입니다. 인류종말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이 시계는 인류멸망의 시점을 자정으로 보고, 전 세계의 정치, 경제 등의 상황을 평가하고,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조정해 왔는데, 이제 2분밖에 남지 않은 위중한 시기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비천한 몸으로 오신 주님은, 이제는 영광의 왕으로 오십니다. 말구유에 오신 주님은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고난받으러 오셨던 주님은 이제는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심판하실 주님으로 오십니다. 십자가를 지셨던 주님은 이제는 승리의 면류관을 쓰고 오십니다. 오늘 이 시간이 영원과 이어진다면, 우리의 인생은 잘 살아온 것입니까, 아니면 무엇인가 크게 잘못 살아온 것입니까?


언젠가 KBS 2TV의 '불후의 명곡'을 보니 신용제 군이 옛날 가수 정훈희 씨의 대표곡 '꽃밭에서'를 피아노 치며 부르는데, 참 그렇게도 맛깔스럽게 잘 불렀습니다. 그 가사는 지금부터 6백년 전, 세종 임금 때 이조참판을 지낸 최한경이 마음속의 여인을 생각하고 지은 '화원(花園)'이란 한시인데, 이종택 씨가 이 시를 한글로 번역하고, 여기에 이봉조 씨가 곡을 붙였습니다. 그 가사는 이렇습니다.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고운 빛은 어디에서 났을까? 아름다운 꽃이여! 이렇게 좋은 날에, 이렇게 좋은 날에 그 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가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날에 그 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구절의, '그 님'이란 단어가 '주님'으로 대입되면서, '이렇게 좋은 날에 주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에 제 가슴이 뭉클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좋은 주일날, 이렇게 성도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이 순간에, 우리 주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순간 우리는 얼마나 벅찬 감격과 기쁨으로, 영광스럽게 주님을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오시는 그 순간에,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염려와 근심, 갈등과 대립, 질병과 고통, 이 모든 것이 말끔히 청산될 것입니다. 정말, 지금 이 순간에 우리 주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속히 주님이 오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다시 오마 약속하신 그 약속을 믿고 이제 우리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고훈 목사님의 [기다림]이란 시입니다. "나는 당신 앞에/사막으로 서 있습니다./이른 비로 못 오시면/늦은 비로 오십시오.//따로 샘을 파지 않겠습니다./새로 둑을 쌓지도 않겠습니다./광대한 당신을 감당하기엔/나는 너무 작아/지나가는 세월인양/낱알로 벌거벗고/그냥 서 있겠습니다.//아침이슬 맞을 때마다/나의 기다림이 헛되지 않으리라 믿기에/뜨는 해 쳐다보며/지는 해 바라보며/그 날로 오시는 발자욱 소리를 듣겠습니다.//오늘도 나는 당신 앞에/사막으로 서 있습니다./이른 비로 못 오시면/늦은 비로 오십시오." 우리보다 주님은 더 간절히 오실 날을 기다리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사30:18). 우리는 다시 오시는 주님을 바른 자세로 영접하여 경배와 찬양을 드림으로, 메시야의 그 크신 영광에 함께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