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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

동문교회 손세용 목사님 | 2019-04-14 즐겨찾기에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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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
2019년 4월 14일 고난주일
마가복음 15 : 21 - 37 ; 이사야 53 : 4 - 6

어느 부부가 결혼기념일에 발신자 없는 등기우편을 받고 봉투를 뜯어보니 그들이 정말 보고 싶어하던 연극표 두 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부부는 어느 친구가 결혼기념일을 축하해주려고 연극표를 사서 보냈다고 생각하고 오랜만에 연극도 보고, 외식도 하고 집에 늦게 도착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도둑이 들어 집안이 엉망진창으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습니다. 정신 없이 가재도구를 확인하는 중에 안방에서 조그마한 쪽지 하나가 발견됐습니다. "연극 잘 보셨나요? 세상에 공짜는 없답니다."


미국 워싱턴 DC에는 한국전쟁 기념공원에는 몇 십 개의 실제 크기의 군인 동상들이 세워져 있고, 그 언덕 위로 올라가면 "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 치러진 희생자의 숫자가 나옵니다. 부상자 미군 103,284명, 유엔군 1,064,453명, 포로 미국 7,140명, 유엔군 92,970명, 실종 미군 8,177명 유엔군 470,267명, 전사 미군 54,246명, 유엔군 628,833명이 새겨진 돌비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만한 자유를 누리고 있는데는 이런 엄청난 희생과 대가가 치러지고서야 우리가 자유를 누리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대예배 설교 때, 주일학교 설교를 할 때처럼 어떤 물건을 회중에게 보여주는 '실물 설교(object talk)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 가치로 약 1백 달러 정도인 2파운드 주고 산 빈 새장을 들고 강단에 올라섰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거리에서 보니 한 난폭한 소년이 참새 한 마리가 들어 있는 새장을 들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가끔 새장을 흔들며 참새를 괴롭히자, 이를 불쌍히 여긴 스펄전 목사님이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그 새를 어떻게 할 셈이냐?" 그러자 "조금만 더 가지고 놀다가 죽여버릴 거예요"라고 대답합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그렇다면 그 새장을 내게 팔지 않겠니?"라고 제안했습니다. 소년은 스펄전 목사님을 훑어보더니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습니다. "2파운드만 준다면 팔죠." 스펄전 목사님은 그 자리에서 2파운드를 주고 새장을 사서 문을 열어 새를 하늘로 날려보냈습니다. 이튿날은 부활주일이었습니다. 메트로폴리탄 성전에서 스펄전 목사님은 이런 새장 설교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죄라는 악마에게 물었다. '너는 인간들을 어떻게 할 셈이냐?' 그러자 악마가 말했다. '질투하고 미워하고 싸우는 걸 가르쳐 잠시 가지고 놀다가 죽여버리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사고 싶은데 값을 얼마나 주면 되겠느냐?' 악마는 웃어버렸다. '이것들을 사서 뭐하게요. 그들은 당신을 배반하고 침 뱉고 십자가에 매달 것입니다. 그래도 사겠다면 당신의 눈물과 피를 내놓으십시오.'" 스펄전은 이 새장 설교를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내주는 엄청난 값을 지불하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요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지신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첫째, 십자가는 고통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14:34-36)라고 기도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께도 이 십자가가 얼마나 큰 괴로움으로 와 닿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십자가형은 로마에서 시행되던 가장 잔인한 형벌로서 시세로(Cicero)는 '인간이 내릴 수 있는 가장 잔인하고 무시무시한 형벌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도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21:23)는 말씀에 의해 가장 치욕스런 죽음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둘째, 십자가는 최고의 사랑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여러분은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 얼마만한 사랑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랑은 그에 대한 희생과 비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과 희생 만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Jesus, How much do you love me?]라는 제목의 짧은 영문 시가 있습니다. "I asked to Jesus, / 'How much do you love me?' / 'This much.' He answered. / Then he stretched out his arm, and died." "나는 예수님께 물었네. /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나요?' / 그는 대답하셨네. '이만~큼!' / 그는 두 팔을 활짝 벌리시고, / 그리고 돌아가셨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만~큼 사랑한다"하시며, 십자가상에서 두 팔을 벌려 못 박히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셋째,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의 상징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우리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와 사망을 멸하고 우리를 구원해주신 능력이 되었습니다. 미국 수영선수권대회에서 한 젊은이가 금메달을 차지하고 기뻐서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어머니, 저 톰이에요. 금메달을 땄어요. 이것 보세요." "참 잘했구나, 그런데 엄마는 그것보다 네가 꼭 예수님을 믿기를 원한단다." "아휴, 다른 어머니들은 상을 못 타서 걱정인데, 어머닌 왜 꼭 그러세요?" "얘야, 수영으로 1등 하는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은 네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야. 엄마는 이것을 위해 늘 기도하고 있단다." 서운한 마음에 젊은이는 밖으로 뛰쳐나와, 거리를 배회하다보니 연습하던 수영장에 와 있었습니다. 평소처럼 다이빙연습을 하려고 다이빙대의 높은 곳에 올라가서 두 손을 벌리는데, 막 뛰어내리려는 순간, 자기가 두 팔을 벌린 모습이 풀장에 십자가 형상의 그림자로 비쳤습니다. "제기랄, 저놈의 십자가, 이번엔 아예 물 속에까지 나타나는군." 그는 기분이 상해 다이빙을 포기하고 내려와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는 무심코 수영장 안을 들여다봤더니 수영장 안에는 물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차 싶어 시계를 보니 물을 뺄 시간이 지나 있었습니다. 젊은이는 그 자리에서 무릎꿇고 울며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어머니의 기도로 날 살려 주시니 감사합니다. 어머니의 기도와 그 십자가가 아니면 전 벌써 죽었을 겁니다..." 물에 비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의 육신의 생명과 영혼의 생명까지 살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십자가는 신학적인 이론이나 상징이 아니라, 실제적인 사건입니다. 나의 죄와 고통과 죽음이 실제적인 현실인 것처럼, 나를 구원하시기 위한 주님의 십자가도 가설이나 픽션이 아닌 구체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이단인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의 탄생이나 십자가 사건이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실제로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인 것이라는 가현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십자가의 실제성을 표현하여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19:34)고 생생하게 밝혔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은 육체적인 고통과 함께, 정신적인 수치, 그리고 하나님께 버림받는 영적인 고통이 포함된 전인적인 고통이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육체적인 고통입니다. 본문 25절은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고 간단히 기록했는데, 33절과 37절에는 "제 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막15:33,37)고 하여 주님이 여섯 시간이나 십자가상에 매달려 계셨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캔자스대학 해부학 교수 매츠키(Howard Matzke) 박사는 십자가형을 의학적으로 분석했습니다. "십자가형은 온몸의 체중이 두 손에 박힌 못에 매달리기에 피부와 살이 찢겨 많은 피가 흐르고 통증이 심하다. 또한 가슴에서 팔에 이르는 근육이 극도로 팽창하여 호흡장애를 가져온다. 숨을 내쉴 수 없어 근육에 산소공급이 중단된다. 그래서 심한 경련을 일으킨다. 이런 증세를 조금이라도 참으려고 죄수는 몸을 위로 치켜올리려 하는데 이때마다 체중은 발등에 꽂힌 못에 의지하므로 그 고통은 가중된다." 십자가는 금세공사가 아름답게 장식한 목걸이나 왕관에 새긴 장식물이 아니라 극심한 고통 그 자체입니다. 바로 이런 극심한 고통을 주님이 당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런 고통을 당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야의 수난의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4-6). 죄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시 이런 형벌을 당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며, 우리 육체의 고난까지도 대신하시기 위해 채찍에 맞으셨음을 이사야 선지자는 증거하였습니다.


다음, 예수님이 당하신 육체적 고통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은 모욕과 수치의 정신적인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와 지나가는 무리들, 그리고 대제사장과 서기관, 더 나아가서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로부터도 모욕과 조롱을 받으십니다. 먼저 빌라도가 예수님을 모욕합니다. 27절에 보면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고 했습니다. 외경인 도마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의 좌우에 달린 강도 가운데 하나는 '게스타이'였고, 다른 하나는 '데스마이'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저들 중앙에 세워 못박은 것은 예수님을 저들의 주범으로 몰기 위함으로, 이것은 이사야서 53장 12절에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는 말씀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간혹 억울하게 도둑으로 몰려 그 분함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들이 있는데,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강도 취급하면서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인격살인이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지나가던 사람들이 조롱합니다. 본문 29절과 30절에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며, 길 가던 구경꾼들까지 예수님을 모욕합니다. 여기 '머리를 흔들다'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극한 상황에서 '놀람'과 '경멸'을 나타내는 제스처로, 시편에 나타난 메시야의 고난에 대한 예언의 성취입니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시22:7-8).


그리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도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막15:31-32). 예수님을 죽이기로 계획했고(14:1-2), 불법으로 체포했고(14:48-49), 거짓 증거로 치고(14:55, 59), 백성을 선동하여 사형선고를 내리도록 유도했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끝까지 예수님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자기들 계획이 성공적으로 완료되어 가는 상황에서 승리감에 도취되어, 마음껏 예수님을 조롱하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믿겠노라"고 조롱하는데, 예수님은 이런 갖은 조소를 다 들으시고, 변명 한마디 없이 누명을 쓰고, 약한 자가 되어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그런가 하면 심지어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까지도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32절b).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까지도 예수님을 욕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빌라도와 대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길가는 자들과, 십자가에 달린 자들로부터 철저히 조롱당하십니다.


죄 없으신 주님이 이런 온갖 수치를 당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경의 예언대로, 당신의 백성의 수치를 대신하여 그 수치를 면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사25:8).


주님은 군병들과 제사장, 서기관과 강도로부터 모욕과 조롱받으시며 "십자가에서 뛰어내리라"고 요구받으셨지만, 끝까지 그 모욕을 다 당하시고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며 저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만약 주님이 "아버지여, 저놈들에게 벼락을 내려주십시오"하셨다면, 주님의 체면은 살고 저들은 천벌 받았겠지만, 우리의 구원은 물 건너갔을 것이나 그 모든 수모를 다 당하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께 버림받으신 영적인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과 교제하시며 한시도 그 교제가 끊어진 적이 없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세례 받으실 때나 변화산에서도 하나님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7; 17:5)며 인정받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인간이 받아야 할 저주로 인해 아버지께 버림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라고 절규하신 것입니다.


레위기 16장에 아사셀 염소에 대한 규례가 나옵니다. 일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제비 뽑힌 염소를 이스라엘의 죄를 위해 속죄 제물로 드리고, 대제사장이 다른 한 염소의 머리에 손을 얹고 "오 주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 집이 잘못을 범하고, 배반함으로 당신 전에 죄를 지었나이다. 오 주여! 간절히 비옵나니 이제 주께서 당신의 종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에 기록된 바, '속죄의 날에 너희가 내 앞에 지은 모든 죄를 깨끗이 사하리라'하신 그 말씀대로 이제 주의 백성이 당신께 지은 모든 허물과 죄악을 이 시간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하여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그 염소에게 전가한 후, 진영에서 광야로 축출하는 의식이 나옵니다. 간혹 어린아이가 잘못해서 집밖으로 쫓겨나면 문을 두드리며 "아빠, 내가 잘못했어요!"하며 서럽게 우는 모습을 봅니다. 사랑하는 이로부터 버림받는 아픔이 얼마나 크고 서럽습니까? 주님은 우리 대신 저주받아 하나님께 버림받아, 아사셀 염소처럼 광야로 내쫓음 당하셨습니다.


27절에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고 하여, 골고다에 세 개의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중앙엔 주님의 십자가, 그리고 좌편엔 강도, 우편엔 구원받은 강도의 십자가입니다. 어거스틴은 이 십자가에 대해 말합니다. "이 십자가는 결국 최후의 심판을 예견한 것으로, 인류는 예외 없이 그리스도 앞에서 좌편이든 우편이든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왼편의 십자가는 죄로 인한 심판의 십자가입니다. 우편 강도는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눅23:41). 이 십자가는 자기 죄로 인해 당연히 받게 되는 형벌의 십자가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이 심판의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형벌은 '죄의 값은 사망'(롬6:23)이란 말씀대로 영원히 죽게되는 지옥에 처해질 형벌의 십자가입니다.


가운데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이것은 우릴 대신하여 죽으신 대속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습니다. 스펄전은 세상을 떠나며 자신의 신학을 네 단어로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Jesus died for me.) 이것이 나의 신학의 전부이다." 이 한마디하고 눈감았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십자가라는 사실입니다.


우편엔 구원받은 강도의 십자가입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자의 십자가로서 우리가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할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죄 없으신 주님은 우릴 대신하여 십자가 지셨는데, 우리는 어찌 그 십자가를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성 버나드는 가슴을 치며 탄식합니다. "나의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려 계시는데, 나는 어찌하여 여전히 쾌락만을 즐기고 있는가?"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그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고 믿고 따르는 자 입니다. 주님이 나 대신 당하신 그 고난을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받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우리 자랑이며, 영광과 능력으로 평생 우리가 부르다 죽을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하였고, 우리를 고치고, 복되게 하십니다.


독일에 한 젊은 귀족이 있었는데 그는 경건하고 훌륭한 삶을 살았지만 그에게는 무언가 늘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가 유럽을 여행하다가 뒤셀도르프의 어느 화랑에서 주님이 고난 당하시는 그림 [에케 호모]를 주시했습니다. 그 그림 밑에 '내가 너를 위해 이 모든 것을 행했는데,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느냐?'는 글이 마치 주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깊은 충격을 받고, 귀족의 신분과, 모든 재산과 지위와 명예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주님께 자신을 드려, 가난한 이들 속에 뛰어들어 경건주의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가 바로 진젠돌프 백작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참으로 놀랍고, 거룩하여, 우리의 영혼과 생명과 사랑을 요구합니다.


둘째, 우리도 자신의 죄와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성도는 육체적 욕망과 함께 정욕과 탐심을 못박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그 마음에 인간적인 정열이 있습니다. 이 정열이 죽지 않아서 늘 흔들립니다. 이 '탐심'이란 물질에 대한 욕심, 일에 대한 욕심, 지위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등인데, 이런 정열과 욕심이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걸림이 된다면 이것까지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셋째,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과 책임을 위해 고난과 희생을 담당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주님의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이 산 제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십자가에서 피 흘리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위해 각자의 책임과 헌신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 본분을 다해야합니다.


고훈 목사의 시 [십자가]입니다. "우리 모두의 무게로/짓눌리는 아픔/문닫고 돌아섰던 하늘의 박절함이여/당신은/그렇게 이 길을 걸었습니다.//그런데 어느 날/우리는 당신을 여인들의 목 언저리에/마스코트로 매달아 조롱했습니다.//흐를수록 더러워지는/어제보다 못한 세상/거기서 내려오라 소리친 야유보다/거기 그대로 있으라는 무관심이/더욱 큰 상처가 되어/오늘도/가슴에서 피를 토하십니까"


스탠리 토플(Stanly. Toppl. 도성래)은 미국 에모리대학교 의과대학 졸업반 때 신문에서 당시 여수 애양병원 원장 켈리 운거의 후임을 구한다는 기사를 읽고 기도하면서 한국의 나병환자를 위해 일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그 뜻을 가족과 약혼자에게 말하자 모두 반대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포기하지 않고 졸업하고 한국에 와서 1959년부터 1981년까지 애양병원 10대 원장으로 부임합니다. 물론 약혼자와도 헤어졌습니다. 토플이 진 십자가는 안정된 삶과 결별하고 가족을 떠나 한국에 와서 나병 환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7).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려고 결단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가 져야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러한 삶에 기쁨이 있고 하늘이 열립니다.


어느 초등학교 2학년 여학생의 글입니다. "예수님!/저희에게 은혜로/사랑하는 마음을 주셔서 감사해요/하지만/우리를 위해/저를 위해/십자가에 못 박히신 거/죄송해요/정말,/죄송해요//예수님!/다음엔, 제가/제가/대신 죽을 게요." 성 프란시스의 기도입니다. "주 예수님! 제가 죽기 전에 두 가지 은총을 내려 주시옵소서. 첫째는 저로 하여금 영혼과 육체의 괴로움을 겪어 당신의 십자가의 고난을 맛보게 허락하시고, 둘째는 당신이 죄인들을 위하여 참으신 것처럼 그 타는 듯한 사랑을 간직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도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