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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신앙의 삶 - 주일 1부 예배

동문교회 손세용 목사님 | 2019-04-21 즐겨찾기에 추가

조회수 : 7 | 추천수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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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신앙의 삶"
2019년 4월 21일 부활주일
요한복음 11 : 17 - 27 ; 다니엘서 12 : 2


한 이발사가 예수 믿고 나서 자기도 전도해야겠는데 어떻게 전도해야할지 몰라 고심하다가, 죽음 이후에 천국을 준비하도록 권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발하러 찾아온 손님의 머리를 깎은 다음 면도칼로 손님의 목에 있는 수염을 깎으면서 조용히 물었습니다. "저, 선생님은 지금 죽을 준비가 되었습니까?" 그러자 그 손님이 이발사가 면도칼을 자기 목에 대고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말에 기겁을 하며 "사람 살려!"하고 비명 지르더랍니다. 참 전도하기도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예수 믿으라'고 하면 "먹고살기 어려운데 예수가 밥 먹여주느냐?"하고, "예수 믿으면 부활하여 천국에 간다"고 하면 "별 뜬구름 잡는 소리한다"며, 현실성 없는 허황한 이야기로 치부합니다. 그런데 신앙은 과연 현실성 없는 이야기일까요?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의 [기독교의 발흥]이란 책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기독교가 거대한 로마제국의 헬라철학을 뒤집고 승리할 수 있었던 중요 원인 중 하나는 두 번에 걸친 흑사병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 책에서 흑사병으로 망해가던 당시 로마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설명합니다. 극심한 국가적 재앙 앞에서 사람들은 구원을 찾았는데, 로마 이교도들은 그 사제들에게 '이 재앙이 왜 왔는지' 묻자, 사제들은 '모른다'며 도시를 떠나버립니다. 그리고 철학자들은 '생존은 그냥 우연'이라며 개인의 삶을 의미 없게 평가합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죽음의 흑사병이 제국을 덮고 있을 때, 소피스트들은 '나이가 들어가는 세계에서 미덕의 실종' 따위의 애매한 말만 지껄이고 있었다"며, 극단적인 상황에서 모든 것이 사기였음이 밝혀집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었던 기독교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잃어버린 가족과 친구들을 천국에서 볼 수 있다는 소망으로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자신의 몸을 던져 간호하기 시작했고, 그런 곳에서는 로마인들의 생존율이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다들 육체적인 쾌락만 추구하면서 결혼도 안하고 동성애에 빠져, 국가 전체의 출산율은 급격히 떨어졌는데,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을 따라 가정에 철저하게 헌신했습니다. 로마는 남녀차별도 심각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같은 사상가들조차 여자가 태어나면 죽이거나 낙태해도 상관없다고 말하며, 남자는 아무 여자나 즐기고 버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시의 철학이었습니다. 반면 기독교인들은 철저하게 그런 생각을 거부했습니다. 아이가 생기면 다 낳아서 키웠으며, 남편은 아내에게 철저히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의 공동체에는 성비균형이 유지되었고 여성에 대한 존중심이 깊이 뿌리내렸습니다. 또한 기독교인 여성과 결혼한 로마인들은 그들도 예수님께 돌아오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부활이라는 다른 창문이 있었기에 기독교인들은 모든 슬픔을 이기고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남동쪽으로 약 3km 정도 떨어진 베다니에 살고 있던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가정 이야기입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오빠 나사로가 가장이 되어, 두 누이와 함께 외롭게 살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저들 남매를 각별히 사랑하셔서, 예루살렘에 가실 땐 저들 집에 들려 쉬어 가시며, 저희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집의 기둥 같은 나사로가 중한 병에 걸리자, 예수님께 급히 사람을 보내어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3절)며, 예수님이 즉시 오셔서 나사로를 고쳐주시길 부탁드렸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예수님은 이런 전갈을 받고도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4절)며 곧장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 나사로가 덜컥 죽자 두 자매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과 슬픔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위급할 땐 오시라고 해도 오시지 않던 예수님이 오빠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나 장례가 끝난 다음에 저들 자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마르다가 급히 달려나가 주님께 원망을 쏟아놓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11:21). 그 원망의 이유는 다음의 세 가지로 여겨집니다. 첫째는, 오시라고 청할 땐, 왜 안 오시고 이렇게 늦게 왔느냐는 타이밍에 대한 불만입니다. 둘째는, 분명히 죽을병이 아니라고 말씀하셔서 안심했는데, 지금 죽고 말았다며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원망입니다. 셋째, 살릴 수 있는 분이 왜 살리지 않고 죽게 내버려두었느냐는 예수님의 무관심에 대한 섭섭한 불평입니다.


그러면서도 마르다는 막연한 기대로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요11:22)라고 아룁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23절)고 말씀하시니,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24절)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마르다의 믿음의 한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여기 계셨다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공간에 대한 믿음의 한계입니다. 바꿔 말해 예수님이 여기 안 계셔서 오빠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제 때에 오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시간에 대한 믿음의 한계입니다. 주님이 늦게 오셔서 오빠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활 때는 살아날 줄을 안다'(24절)며, 지금 오늘이라는 현세적 믿음이 아니라, 저 세상에서나 이뤄지리라는 내세적인 믿음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서도, 오늘 현재가 아니라 먼 훗날 이뤄진다는, 믿음의 현재성을 갖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어느 마을에 비가 오지 않자 주민들과 사제는 기도하러 산을 오르면서, 우비를 입은 소년을 보고 나무랍니다. "너 정신 없구나. 더위먹으면 어쩌려고 그래?" "그럼, 기도하고 오다 비 맞아 감기 들면 어떡해요?" 그러자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한 아이의 믿음이 기적을 이뤘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부활의 진리를 깨우쳐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 주님은 세 가지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첫째, 내가 곧 그 부활이며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내가 부활과 생명을 준다'고 하지 않고 '나는 부활이며 생명이다'며, 주님이 친히 생명의 주요, 부활의 원천이심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부활이심을 뜻합니다. 여러 가지 부활 가운데 어느 한 부활이 아닌, 유일한 '그 부활'(the resurrection)입니다. 톨스토이도 부활을 말했고, 회생이나 환생의 의미로 부활을 쓰지만, 이것은 주님의 부활이 아닙니다.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영원히 산다는 '영혼불멸'과 다릅니다. 철학자들이 '진리와 사랑은 영원하고,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말과도 차원이 다릅니다. 정의가 영원하기에 부활해야 하고, 사랑이 영원하기 때문에 부활이 있어야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기에 정의가 승리하고, 사랑의 영원함이 나타납니다. 만일 주님이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정의는 땅에 묻히고, 사랑은 시들고, 진리는 왜곡되고 말 것입니다. 성경의 부활은 예수님처럼 몸도 영혼도 다시 사는 부활입니다.


만약 사람이 죽을 때 모습대로 살아나는 것을 부활이라고 한다면, 그 부활은 반갑지 않습니다. 여자는 여자로, 늙은이는 늙은 대로, 병신은 병신대로 부활한다면, 차라리 꽃다운 젊은 나이에 죽었다가 다시 젊게 살아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부활은 죽은 사람이 그 모습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환생이나 회생이나 철학적인 개념의 부활이 아닙니다. 이 부활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설명되는 사건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부활만이 참된 부활로서, 그 외의 모든 것은 부활의 그림자일 뿐 진정한 부활이 아닙니다. 주님이 '내가 그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뜻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둘째,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몸이 죽은 후의 부활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를 믿는 성도는 이 땅에서 그 육신이 죽더라도 마지막에는 다시 부활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그 육신은 언젠가 죽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납니다. 그러기에 죽음은 죽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며, 성도의 이별은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 다시 천국에서 만난다는 소망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졌기에 성도는 죽음 앞에서도 찬송할 수 있고, 슬픔 가운데서도 위로를 얻게 됩니다.


아들이 대기업 입사를 앞두고 스위스 여행을 갔다가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아버지 김학영 씨의 [아름다운 동행]이란 글입니다. - 저녁 7시가 돼서야 아내가 도착했다. 교회 일로 동행했던 교인들 몇 분과 함께였다. "여보!" 나는 아내의 차가운 손을 맞잡았다. 핏기 없이 창백해진 집사람의 얼굴을 보니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하지만 뜻밖에도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집사람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 무척이나 담대한 모습에 오히려 내가 할 말을 잃어버렸다. 급히 달려온 친지들과 교회 분들 앞에서 아내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우리 찬이는 죽지 않았어요. 하나님나라에 유학 갔을 뿐이에요."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매달려 있었지만, 아내는 이렇게 고백했다. 신앙의 힘이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찬이가 늘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 생각났다. "Don't worry,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잖아요!" 찬이의 말투가 어느새 집사람의 입에서 똑같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집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감사할 수 없었다. 스물 여섯 해를 끼고 돌며, 남편보다도 사랑한다는 말을 더 많이 해주던 아들이 죽었는데, 아내는 평안했다. 아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리 집은 곡소리만 가득했을 것이다. 아내의 저 평안이 나는 차라리 부러웠다. 찬이의 소식을 듣고 나는 평안할 수 없는데, 집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견딜 수 있단 말인가! 저것이 바로 신앙의 힘이구나. 나는 믿음의 힘을 그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죽음 앞에서 초연할 수 있는 영생을 보는 힘, 엉터리 신자인 나는 감히 느낄 수 없는 그런 힘...


셋째,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현세적인 부활로, 예수 믿는 성도는 이미 이 땅에서 영생을 누리고 있으며, 그래서 육체적인 죽음을 맞을지라도 소멸되지 않고 영원한 삶을 살기에 죽음이 없습니다. '영생'이란 단지 오래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입니다. 주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17:3)이라 하셨는데, '아는 것'이란 지적인 인식이 아닌 체험을 의미하여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 영생인 것입니다. 성도는 현세로부터 내세까지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살아갑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평양감옥의 갇혀 있던 감방에 모스크바대학을 나온 철저한 공산주의자로서, 해방 후에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낸 주영하와 같이 있었다고 합니다. 둘 다 같은 주(朱)씨였기 때문인지 서로 터놓고 많은 얘기를 나눴습니다. 어느 날, 주영하가 목사님에게 말합니다. "내가 공산주의자가 되기 전에 형님을 만났더라면 예수쟁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에 주기철 목사님도 "내가 예수 믿기 전에 당신을 만났더라면 나도 공산주의자가 되었을 것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주영하가 중요한 말을 합니다. "나는 공산주의자로서 이 땅에 평등과 자유를 이루고, 모든 사람이 잘사는 사회를 만들고자 이렇게 투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놀란 것이 있습니다. 나는 죽음으로써 모든 게 끝납니다. 그런데 예수쟁이들은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께 간다며 아주 희색이 만면하여 죽더군요. 그 모습을 이해할 수는 없으나, 다만 부러울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지금 내 곁에 계신 주님이, 육신이 죽어 내세에 갈 때에도 그곳에 함께 하시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부활 신앙은 어떻게 나타나야 합니까? 첫째, 오늘도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부활의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합니다. 처음엔 그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줄 모르고 실의와 낙심과 슬픔 속에 걸어가다, 나중에 주님이 떡을 떼어주시며 말씀을 풀어주실 때, 마음이 뜨거워지며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깨닫고, 희망찬 발걸음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기쁘게 달려가는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도 오늘 우리의 삶 속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함께 하심을 깨닫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의 교회 세례자 간증모음집 [살아갈 날들을 위한 은총]에 실린 간증입니다. 제가 살아온 삶은 평탄하여 아이들은 외국에 나가 열심히 공부하고, 남편도 성실히 일하고 있었고, 저 또한 최선을 다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 영과 육이 죽어 가는 것도 모르고 썩어질 몸을 위해 끝없이 투자하며 물질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3개월 전 건강검진을 받았을 때도 발견되지 않았는데, 유방암 3기 판정을 받고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더구나 저는 그 해 자궁수술까지 받았는데 너무 억울하고 여성으로서 수치심도 느꼈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평소 상갓집에도 잘 가지 않았는데 제가 암이라니! 항암치료로 긴 머리카락이 뭉텅뭉텅 빠져나갈 땐 정말 슬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다니는 교회 소식지를 주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그 교회가 어디 있는 줄도 몰랐지만 절박한 심정으로 찾아갔습니다. 난생 처음 교회에서 어설프게 따라 부르던 찬송이 왜 그리 제 마음을 적시는지, 하염없이 눈물 흘렀습니다. 그 후 저는 제 영혼구원을 위해 애쓰시던 분들의 권면으로 수술 받기 전 병실에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했습니다. 그 날 영접기도를 따라 하며, 하나님이 정말로 저를 사랑하시고 애타게 부르신 것을 알고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여덟 번의 길고 험난했던 항암치료와 스물 여덟 번의 방사선치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지만, 어떤 고통도 예수님과 저를 갈라놓을 수 없다는 믿음이 죽음과 같은 고통에서 저를 자유롭게 했습니다. 이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교회 홈페이지에서 말씀과 찬양을 들으며 고통의 시간을 은혜 충만의 시간으로 바꾸었습니다. 저와 남편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믿음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남편은 울면서 "당신이 죽을까 봐 너무 힘들었다"고 고백했고, 믿음으로 함께 극복해 나가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제가 신앙생활하면서 얻은 가장 큰 변화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예전엔 3개월마다 하는 검진이 너무 무서웠으나 이젠 "내일 재발해서 죽으면 어떻습니까? 갈 곳이 생겼는데"라고 말합니다. 저는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마음이 설렙니다. 예배는 저를 살리는 힘입니다. 이렇게 제 마음의 방향이 주님께 고정되었을 때 천국을 소망하게 되었고, 다시 힘내어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 식구들의 헌신적인 중보기도로 용기를 얻게 된 무렵, 종양 크기가 줄어들었고 악성이 아니라는 기쁜 결과를 들었습니다. 죽음의 그늘에서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았고, 새 마음과 새 영과 새 몸을 얻었습니다. 이제 남은 삶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순종하며 아름다운 주의 자녀로 열매 맺어 하나님께 영광 올리고 싶습니다.


둘째,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제자들은 모두 두려워 달아나 버렸고,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고도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의 물고기 잡는 일로 가버렸습니다. 그런데 성령강림을 통해 부활신앙으로 무장하자, 원수들의 위협에도 베드로는 담대히 복음을 전했고,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1)며,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도리어 특권으로 여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4:32) 할 만큼, 서로 뜨거운 사랑으로 결속되었던 것입니다.


유명한 종교 개혁자인 마틴 루터가 개혁의 도상에서 여러 가지 그 장애에 부딪혀 아주 좌절해 버린 때가 있었습니다. 침식을 전폐하고 병상에 누워있던 어느 날 그의 아내가 상복을 입고 루터가 누워있는 방에 들어왔습니다. 루터가 그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라서 "여보, 누가 죽었오?"하고 물었더니, 그의 아내가 대답하기를 "예, 하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아니, 당신 미쳤오? 하나님이 돌아가시다니, 그 무슨 망발이오?" 이때 루터의 아내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살아 계시다면, 당신이 그렇게 좌절하고 절망하고 있을 리가 있겠어요?" 이 말이 루터를 깨우쳤습니다. "그렇지 하나님은 살아 계시지." 그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라는 585장 찬송을 지어 부르며, 종교개혁의 과업을 다시 추진해 나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셋째,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고 사흘째 되던 날 여인들이 무덤에 찾아갔을 때 천사가 말합니다.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마28:7). 그래서 이 여인들이 최초의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유명한 설교자 존 하퍼 목사가 시카고 무디 교회에서 설교하기 위해 그 유명한 타이타닉 호를 탔다가 바다에 빠졌습니다. 구명대도 없이 바다에 떠다니다가 널빤지 조각을 의지하고 있는 청년에게 외쳤습니다. "젊은이, 구원받았는가?" 청년은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몇 분 후 다시 두 사람이 가까워지자 하퍼 목사는 다시 소리쳐 물었습니다. "자네 하나님과 화해했나?" 그 때 큰 파도가 하퍼 목사를 삼켰습니다. 2주일 후 어느 저녁에 뉴욕에서 열린 기독청년집회에서 한 젊은이가 간증을 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존 하퍼 목사님의 마지막 전도를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부활과 천국이 실재함을 믿는다면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베트남전쟁은 1964년에 시작되어 만 10년만인 1975년에 끝난, 현대사의 어두운 그림자를 남긴 전쟁 중 하나였습니다. 이 전쟁이 한창이었던 1969년 미국인들은 다른 어떤 해보다도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었고, 신학계에는 이런 시대를 반영하듯 소위 '하나님의 죽음의 신학'이 가르쳐지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 미국 인디애나주에 살던 빌과 글로리아 두 고등학교 선생님은 결혼하여 아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크리스천으로서 음악을 사랑하여 교회 음악 사역에 헌신하고자 학교를 사임하고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너무 어두웠던 탓인지, 작곡도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사역의 길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그들은 건강도 좋지 않은 상태로 1970년 봄을 맞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부부가 빌의 아버지를 모시고 사무실 앞에 도착하여 주차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차장 한구석에 깨진 아스팔트를 헤치고 고개를 내밀고 나온 파란 풀잎들을 보고 아버지가 "저 풀잎들 좀 봐!"라고 소리쳤습니다. 아들과 며느리는 "봄이 오는군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이들에게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이런 어두운 시대를 자기 가족이 어떻게 헤쳐가며 살 것인가를 기도하던 글로리아는 마음속에 한순간 두려움이 사라지고 주님이 임재하시는 기쁨이 마음을 채우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녀는 펜을 들어 노래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 사랑의 주 내 갈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빌과 글로리아 게이터(William and Gloria Gaither)의 [살아 계신 주]라는 유명한 찬양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주님은 정녕 다시 사셨습니다. 빌과 글로리아에게 함께 하셨던 살아 계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찾아오셔서 함께 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주님이 제자들을 선택하신 순간부터 제자들과 '함께 하심'은 그분의 약속이었습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막3:14). 그리고 또한 주님의 지상 생애에서 마지막에 주신 약속도 바로 이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오늘의 구약의 말씀입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라"(단12:2).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세상 끝 날에는 모두 부활하게 될텐데, 저들 중에 영생을 얻을 자가 있겠고, 또 영원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영광을 약속하셨습니다. 어느 시인은 말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의 약속을 책들 속에서만 쓰신 것이 아니라 봄날의 잎사귀들마다 에도 쓰셨다." 만물이 새롭게 살아나는 이 부활의 계절에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신 주님의 은총으로 삶이 새롭게 피어나시길 기원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