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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통한 성도의 교제

동문교회 손세용 목사님 | 2019-05-19 즐겨찾기에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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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통한 성도의 교제"
2019년 5월 19일 주일예배
빌립보서 1 : 1 - 11 ; 시편 133 : 1


설교시간마다 조는 집사님을 놀려주려고 목사님이 "지옥에 가고 싶은 사람 일어서세요"라고 갑자기 소리치자, 그 집사님이 벌떡 일어섭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아니, 정말 지옥 가고 싶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집사님이 대답합니다. "아니요, 목사님 혼자 서 계신 게 딱해 보여서요." '고독은 낙원에서조차 견딜 수 없다'고 했는데, 목사님 혼자 서있는 게 안 돼서 일어섰다니 그 대답이 가상합니다.


'죄수의 딜레마'란 말이 있습니다. 공범혐의로 잡혀온 두 사람을 서로 다른 취조실에서, 먼저 자백하면 형벌을 경감해주되, 자백하지 않은 사람은 더 큰 벌을 받는다고 경고했을 때, 이들이 어떤 선택할지 알아보는 사고게임입니다. 둘 다 자백하지 않으면 혐의입증이 안 돼 둘 다 석방되는데, 상대방이 자백하면 자신만 손해본다는 의심으로 결국 둘 다 자백하여 모두 중벌을 받게된다는 게 이 게임의 결론입니다. 당장 나만의 이익을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자신의 의도대로 자신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망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죄수의 딜레마'의 결론입니다.


1914년 남극대륙횡단을 목표로 출발한 인듀어런스호 탐험대원 27명은 목적지를 150㎞ 앞두고 빙벽에 갇혀 배가 난파되고 죽음의 위기에 직면합니다. 이때 새클턴 대장은 남극횡단의 원래목표를 포기하고 무사귀환을 새 목표로 설정합니다. 그리고 펭귄을 잡아먹고, 추위에 발이 썩어가도 계속 전진하여 천신만고 끝에 무인도에 도달합니다. 새클턴은 거기서 5명과 함께 목숨걸고 구조 요청하러 떠납니다. 그들은 6m의 구명보트로 그 거칠고 험한 드레이크 해협을 지나, 도끼와 로프만으로 해발 3000m의 얼음산을 넘어 출발했던 기지에 도달하여 634일만에, 한 명의 희생도 없이 전 대원을 구조합니다. 새클턴은 그 구조 순간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길고 험했던 마지막 얼음산을 넘을 때, 우리는 분명 3명인데 난 4명처럼 느껴졌는데, 동료들도 그렇게 느꼈다고 한다. 힘들고 어려웠던 여행 내내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셨다."


비슷한 시기, 스테팬슨의 캐나다 탐험대 칼럭호도 북극을 탐험하러갔다가 빙벽에 갇혀 대원 모두 생존의 위기에 직면합니다. 이들은 무사귀환이란 목표보다는 당장의 생존이란 목표에 사로잡혀 서로에 대한 격려 대신 거짓말, 속임수, 약육강식의 이기심만 드러내다 결국 모두 죽고 맙니다. 인듀어런스호의 목표는 무사귀환이었고, 칼럭호의 목표는 당장의 목숨부지였습니다. 무사귀환은 모두 살 수 있는 win-win게임 성격의 중장기적 목표지만, 당장의 목숨부지는 강한 자만 살아남는 zero-sum게임 성격의 단기목표입니다. 무사귀환의 목표는 도중의 어떤 난관도 헤쳐나갈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주지만, 당장 나만 목숨 부지하려는 목표는 난관에 부닥치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남을 희생해 자신만 살아남으려다 모두가 망하게 되고 맙니다.


여러분은 '노숙자'(homeless)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경제적 이유로 가정이 해체되어 길거리에서 사는 사람은 참 딱하지만, 가정이 있는데도 길거리에서 사는 사람은 이해 안됩니다. 이들 중 사회복지시설에 수용된 사람이 약 13,000명이고, 수용되지 않은 사람까지 합하면 2-3만 명으로 보는데, 서울역 주변에만 4천명 가량이랍니다. 그런데 신자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떠나 출석하지 않는 '영적인 홈리스'인 '가나안 교인'은 그 백 배인 2백만입니다. 이들은 교회에 출석하진 않지만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데, 이 '신자'라는 의식조차 얼마나 유지될까요?


요즘 성공학과 관련된 '공존지수', NQ(Network Quotient)가 있는데, '함께 사는 사람들과 관계를 얼마나 잘 운영하느냐'하는 관계의 능력을 재는 지수입니다. 공존지수가 높을수록 사회에서 다른 사람과 잘 소통하고, 소통으로 얻은 것을 자원 삼아 성공하기가 쉽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도 얼마나 교회생활에 잘 적응하며 소통하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생활의 성패를 좌우하는 요소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교회생활 없이는 절대 성취할 수 없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신앙의 성장과 성숙이 불가능합니다. 성숙이란 언제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성도의 교제 속에서 자라게 되고, 서로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만 성숙합니다. 옛날 어른들이 자녀의 배우자로, 외아들이나 외동딸을 기피했는데, 홀로 자라면, 형제간의 교제를 통한 균형적인 인격형성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형제간에 싸움도 하고, 서로 밀고당기면서, 고집이 꺾이고, 양보하면서 인격의 성숙이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우리를 성도의 교제를 통해, 신앙의 성숙을 원하시는데, 교회생활을 하지 않으면, 부담 없을지 모르지만, 결코 신앙의 성장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둘째, 마귀의 공격에 대해 승리할 수 없습니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5:8)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공격해 올 때, 나 혼자 힘으로는 싸워 승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사자가 얼룩말을 사냥하는 것을 보면, 사냥할 표적을 한 마리 지목하고는 끝까지 공격하여 먹이로 삼는데, 그 사냥감으로 지목하는 얼룩말은 어린 새끼나 병든 얼룩말이 아니라, 무리에서 이탈하여 혼자 어슬렁거리는 놈입니다. 마귀도 성도를 삼키려할 때 교회에서 나와 혼자 다니는 사람을 공격 목표로 삼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혼자서는 하나님의 일을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없습니다. 선교학자 헐버트 케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혼자서 선교하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이다." 선교에 관한 한, 영웅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선교는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하는 사역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홀로 성취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의 사역은 한 마디로 협동사역이었습니다. 하나의 팀(team)을 이루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최초의 이야기,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의 드라마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 5절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빌1:5)고 했는데, 개역성경에는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하여 '교제'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교제'라는 말은 헬라어의 '코이노니아'(koinonia)라는 말로, 영어로는 '펠로쉽'(fellowship)입니다. 이 말이 성경에선 '친교', '협력', '나눔'의 의미로 쓰이는데, 단순히 다른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뜻보다, 어떤 일에 참여한다는 데 강조점을 두어, '함께 나눈다'는 뜻과 함께, '나누어준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영적 결속은 자선을 베풀고, 물건을 공유함으로 결속이 이뤄졌는데, 이 결속이 초대교회를 단결시키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교제의 세 가지 대상과 목적이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는 은혜와 평강을 위한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2절 말씀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빌1:2). 여기서 '은혜'란 인간의 행위에 관계없이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을 말하고, '평강'은 그 은혜의 결과로, 하나님과 관계에서 화목을 누리고 사람들 사이에 화해를 이룸을 뜻합니다. 그래서 '은혜'는 신약에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최고의 선물로 나오고, '평강'은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로 나타나 있어, 인간이 누릴 최고의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15:6). 우리가 주님과 교제가 끊어질 때, 포도나무에서 잘려진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죽습니다. 주님과 교제는 우리의 생명을 위한 절대적이고, 필수적인 문제입니다. 전기 콘센트에서 플러그를 뽑으면 단전되어 모든 전기 기구는 죽은 듯 동작이 멈추듯,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질 때, 인간에게는 영적인 죽음이 찾아오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의 방편에 대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4:5)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매순간 주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위대한 일을 해도 주님과 교제가 끊어지면 모든 것이 다 헛됩니다. 매일 기도로 주님을 만나십니까? 날마다 주님의 위로와 평강으로 눈을 뜨고,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따라 매순간 살아가며, 잠자리에 들며 주님 품에서 쉬십니까? 이처럼 날마다 주님과 교제하며 살 때, 죽음조차 두려움 없이 평안히 맞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다]를 쓴 브레넌 매닝은 한때 카톨릭사제였으나, 만성알코올중독자로서, 반평생 넘어지기를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랑아 복음집회'에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입고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 백발노인이 된 브레넌은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며, '내가 얼마나 나쁜지가 아니라 그 분이 얼마나 선하신 지'를 증언하며, 일생 헌신한 사람들 대오에 끼여들어 '아버지 집으로 가는 길'에 합류하게된 그 뻔뻔한 행각이 전적으로 아버지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둘째는 성도간의 교제입니다. 3-5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딤전1:3-5)며,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이는 저희가 처음부터 바울의 복음 사역에 참여하며 성도의 교제를 나눈 것을 인하여 감사하며 기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교제는 최소한 두 가지 전제조건을 요구하는데, 그 하나는 서로 같은 수준의 사람이냐 하는 것과, 다음으로 서로 주고받을 것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서로 격이 맞지 않아도 교제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서로 주고받는 것이 없어도 원활한 교제가 불가능해 집니다. 유유상종이나, 동병상련이란 말이 있듯이 서로 비슷한 수준과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교제하되, 서로 주고받을 것이 있어야만 됩니다.
그러나 성도의 교제는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이, 오직 하나님의 자녀로서 한 형제가 된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바울은 젊은 부자인 빌레몬에게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라"(몬1:16-17)고 편지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을 '나이가 많은 나 바울'(9절)이라며, 젊은 빌레몬을 동무로 대하고, 빌레몬의 노예였던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들일 것을 당부합니다. '주인'과 '노예'는 서로 대등하게 교제할 수 없으나, 이제 주안에서 '종'이 아닌 '형제'로 받아들일 것을 당부합니다.


폴 트루니에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 둘 있다. 하나는 결혼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가 짧은 기간에 온 세계로 뻗어나가게 된 데는 공로자가 둘이 있는데, 하나가 노예요, 하나가 여성입니다. 당시 로마 인구의 3분의 1이 노예로서 노예는 팔고 사고 죽이고 맘대로 할 수 있는 가축에 불과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노예들을 '너와 나는 같다'며 차별하지 않고 형제로 받아들였습니다. 또 하나는 여성으로 당시 여성은 인구조사에도 헤아리지도 않을 만큼 형편없던 시대에 기독교는 남녀는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다면서, 교회에서 차별 없이 받아들인 것이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하게 된 요인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첫째, 서로에 대한 관심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히10:24). 우리는 서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각기 자기 삶에만 정신을 쏟고 이웃에 대해 아무 관심 없이 살아가는 것은 성도의 삶이 아닙니다. 내 앞길만 바라보고 걸어가던 우리의 눈길을 돌려 내 주위에 있는 형제의 아픔이나 기쁨을 헤아리며 저들에게 작은 친절을 보이도록 힘써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무슬림이 무섭게 몰려오고 있어 그 수가 100만을 헤아린다고 합니다. 미국도 아프리카계 미국인 15인 중에 한 명 꼴로 무슬림으로 자처할 만큼 이슬람이 크게 늘어나 이슬람은 두 번째 거대 종교로 유대교를 대체하고 있습니다. 찰스 콜슨은 그의 책 [가벼운 세상 속에서의 진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남성의 지도력, 강한 가족 유대, 마약과 알코올의 거부 등과 더불어, 이슬람은 젊은 흑인남자들에게 이전에는 결코 경험해 보지 못한 어떤 사회적인 역할과 자존감을 부여한 것이 사람들이 이슬람에 끌리고 있는 이유이다." 이슬람교도들 간의 강한 결속력에 대한 매력이 남자들로 이슬람으로 몰려가게 한다면, 기독교는 공동체정신의 해이로 인한 느슨한 결속력이 사람들을 교회로부터 멀리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둘째, 자주 만나야 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 서양 속담에 '눈밖에 나면 마음 밖에 난다'(Out of sight, Out of mind)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도 만나지 않으면 소원해지고, 아무리 멀게 느껴지던 사람도 자주 만나면 가까워집니다. 한 남자가 같은 마을 아가씨를 짝사랑하여 2년 간 연애편지를 매일 한 통씩 700통을 보내자, 드디어 이 아가씨가 결혼을 했는데 누구하고 했느냐 하면 매일 연애편지를 배달한 우편배달부와 결혼했답니다. 사랑은 자주 만나야 깊어집니다. 예배 끝나면 곧바로 가지말고 남녀선교회에도 참석하며 교제를 나눠야 합니다.


셋째, 서로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13:16). 우리는 내가 가진 것을 나눠야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아픔은 함께 나눠야합니다. '참된 사랑은 나의 부를 그와 나누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가난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지닌 것들을 과시하듯 형제에게 던져주는 것보다도, 형제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눌 때, 여기서 참된 교제가 이뤄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 어머니에게 딸 셋이 있었는데, 그 어머니는 고아원에서 한 어린 소녀를 더 입양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를 동생으로 알고 사랑해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아이가 낯선 곳에 오자 계속 웁니다. 언니들이 아이를 위해 인형도 갖다주고, 먹을 것도 주고, 좋은 옷도 입히고, 온갖 방법을 다 썼지만 이 아이는 계속 울기만 합니다. 며칠이나 계속 울기만 하자, 제일 큰언니가 너무 답답해서 "너 왜 우니?"하면서 같이 붙들고 울었습니다. 한참 울다가 둘이 쓰러져 잠들었는데 그 후로는 아이가 안 울더랍니다. 그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인형이나 빵이 아니라 함께 울어줄 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함께 우는 데서 바로 참된 교제가 이뤄집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사역자와의 교제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빌1:7). 당시 바울은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있었고, 법정의 많은 사람 앞에서 복음을 변증하였습니다. 이처럼 복음을 위한 고난 중에 사역하던 바울에게 빌립보교회는 어려운 중에도 헌금과 교제를 통하여 바울의 사역에 동참하였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복음을 위해 헌신하며,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은혜'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사역자와의 교제는 어떻게 이뤄집니까? 첫째, 사역자를 위한 중보기도입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에게 당부합니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엡6:19). 복음 전하는 일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간곡히 당부합니다. 기도야말로 복음 사역에 가장 큰 힘이 됩니다.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되 특히 말씀의 종을 위해 기도해야합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그의 그 위대한 사역의 비밀을 질문 받자, "저에게 그런 비밀은 없습니다. 있다면 일만 오천 명의 성도들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저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이라고나 할까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교회의 승리는 사람의 능력이나 지혜가 아니라 뒤에서 기도해 주는 성도들의 중보기도로 인한 것입니다.


둘째, 복음의 사역에 함께 협력하는 것입니다. 5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빌1:5). 바울이 그토록 놀라운 사역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복음 사역을 위해 적극 지원하고 헌신적으로 협력했던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향해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2:17)라며,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피를 쏟아 제물로 드릴지라도 오히려 기뻐하겠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워싱턴DC에 있는 '구세주교회'(Savior Church)는 미국을 움직이는 신앙과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이 교회의 사역은 100여 명의 자원 봉사자들이 빈민 청소년들을 돌보고, 매년 1000여 명의 실업자를 훈련 취업시킵니다. 34개의 병실을 지닌 노숙인 전문병원을 운영하며, 가난한 노인들을 돌봅니다. 매년 500명이 넘는 알코올과 마약 중독자를 치유하고, 어린이와 가정을 돌보는 사역, 성인교육 사역, 영성 사역 등 45가지나 되는 사역을 감당하는데, 놀라운 것은 교인은 150명 정도이며, 연간 예산은 200억 원대이고, 워싱턴 DC의 한 블록이 모두 이 교회의 사회봉사관입니다. 재벌의 후원이나 사회복지학 학자들이나 대단한 행정가나 뛰어난 상담 전문가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본주의와 물질주의, 개인주의와 자본주의가 넘쳐나는 미국 한복판에서 아름다운 복음과 사랑의 꽃을 피우고 있는 이 교회의 탁월한 힘은 '예수 중심주의'입니다. 이 교회를 개척한 고든 코스비 목사님은 말합니다. "구세주교회 공동체는 철저하게 예수님 중심입니다. 그것은 단순하고, 가장 문자적인 방식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한 소명을 더욱 진지하게 취하는 것입니다." 그 작은 공동체가 세계를 그 놀라운 이유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온 성도가 하나되었기 때문입니다.


동구 공산정권 치하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중형을 선고받고 이십 여 년 간 옥살이를 하신 리처드 범브란트 목사님이 석방되어 나왔을 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그렇게 긴 세월 동안 고달프고 외로운 옥살이를 견딜 수 있었습니까?" 이 질문에 목사님은 그 긴 세월을 반추하는 듯, 나지막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고통스러운 때마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힘을 얻었고, 한없이 외로울 때 지하 교회에서 나누던 성도의 교제를 생각하며 위로를 얻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에는 하나님을 체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독특한 즐거움과 환희와 기쁨이 있습니다. 거기에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가 있고,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이 있습니다.


랍비 쉬몬 벤 요하이가 이런 비유를 말했습니다. 한 배에 타고 있던 어떤 사람이 드릴로 자기 밑에 구멍을 뚫기 시작하자, 동승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뭐 하는 거요?" "당신이 알 바 아닙니다. 나는 내 자리 밑에서 구멍을 뚫는 것이니까요". 그러자 사람들이 외칩니다. "배에 물이 들어와 우리 모두 가라앉게 된다니까요". 배에 물이 들어오면 혼자 죽는 것이 아니라 배를 탄 모든 사람들이 가라앉게 됩니다. 때로 지상의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는 이유 중 하나는 믿는 사람들이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나라엔 관심 없고, 자기 편할 데로만 행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 이익에 더 큰 관심을 둘 때, 교회의 영광은 가려집니다.


[나 하나쯤]란 어느 무명작가의 시입니다. "나 하나 꽃이 되어/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네가 꽃 피고 나도 꽃 피면/결국 풀밭이 온통/꽃밭이 되지 않겠느냐!//나 하나 물들어/산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내가 물들고 네가 물들면/결국 온 산이 활활/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나 하나 바뀌어/세상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내가 바뀌고 너도 바뀌면/결국 온 세상이 짱하게/달라지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쯤'하면 분산되고, '나부터'일 때 모여듭니다. 개인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 '나 하나쯤'은 암적 사고입니다. 그 인심 좋던 고향도 '나 하나'쯤으로 마을이 허물어졌습니다. 이제 '나 하나쯤'을 배격하고 '나부터'나서야 하겠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말합니다. "공동체와 깊은 연합을 맺지 못하면 영적인 성숙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순종도,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도 없다." 비록 적은 수였지만 초대교회가 당시 세계에 충격과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그 비밀을 짐작할 수 있는 글이 어느 카타콤에서 발견됐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함으로 천국을 경험합니다." 햇빛조차 볼 수 없는 지하의 어두운 동굴에서도 그들은 서로 사랑함으로서 천국을 경험하며, 그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133:1). 서로 다투고 싸우고 갈라서고, 흩어지는 세상에서, 성도가 사랑으로 연합하여 교제하는 모습이, 하나님은 그토록 아름답고 좋을 수 없다고 하시며, 이런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축복하신다고 성경은 약속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