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04 87회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의미"
2013년 2월 3일 주일예배
히브리서 11 : 7 - 12 : 창세기 15 : 6
어느 덴마크 수상의 취임식에서, 왕이 수상에게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서약하라고 하자 수상이 "폐하 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 위에 손을 얹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덴마크 왕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하나님도 자넬 안 믿으시네." 하늘도 세상을 믿지 못하게 됐습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던 날 밤,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인 고종황제가 침전 밖을 향해 화급하게 외치길 "밖에 기독교인 누구 없느냐?"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 언더우드와 헐버트가 급히 궁궐로 달려와 고종임금과 함께 밤을 지샜습니다. 제중원 원장 에비슨은 고종의 요청으로 황제의 신변을 지키며 먹는 음식마다 독이 있는지 살폈고,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어스 호튼은 독살을 두려워하는 고종에게 음식을 조리하고, 순번을 나눠 불침번 서며 고종을 호위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 수가 인구의 1%도 안 되었을 때 교회는 그 사명을 다하며 이 땅에 뿌리내렸습니다.
그런데 2016년 말에 발표한 '2015 인구주택총 조사'를 보면 종교가 없는 국민이 56.1%로, 산업화시대 이후 처음으로 50%를 넘어섰습니다. 이처럼 믿음을 저버리게 되니, 이젠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었고, 아무렇지 않게 남을 속이고 거짓말하며 신뢰가 무너졌습니다. 법무부장관을 지낸 김승규 장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법무장관 시절에 조사해보니 위증 무고 사기 3대 거짓말 범죄가 검찰업무의 70%를 차지하더라. 거짓말 때문에 다른 업무를 못하고 있다니, 얼마나 비효율적인 처사인가!" 손봉호 교수는 지적합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가 무신론으로 향하고 있는 상황과 무관치 않다. 세상이 점점 세속화하면서 저마다 '마음속의 경찰'이 사라졌다. 정직과 신용, 믿음, 신뢰 같은 고귀한 가치보다는 돈과 권력, 명예를 좇는 세속적인 가치를 더 따르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거짓말을 부추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1월 19일에 노숙자들을 돌보는 이주연 목사가 [핵 위기 이상의 위기]라는 글을 보내왔습니다. "이 땅에 참으로 핵 위기 이상으로 큰 위기의 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 인류사의 인간의 위기의 근본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무신론이며 또 하나는 유물주의입니다. '하나님이 없다'하는 것과 '인간은 하나의 물질 덩어리로 보는 세계관'입니다. 이 두 가지가 인간의 신앙과 도덕률을 근본적으로 해체시키고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해 왔습니다. 이러한 풍조가 '정치적으로 법적으로 조직적으로 연대하여 행동을 본격화'하는 모양새입니다. 이러한 세력은 '인권과 성 평등'의 이름으로, '신앙의 자유'의 이름으로 '믿음을 말살'하고 사랑이 없는 '쾌락뿐인 인간 세상'을 만들어 놓을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 신성한 가정과 진정한 자유와 신앙을 무너뜨리려는 어두운 세력입니다." 지금 불신세력의 음모가 자못 심각합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 여기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여기 '실상'이란 말은 헬라어로 '휴포스타시스'라고 하는데, 매우 의미 깊고 철학적인 단어로서, 증거물에 대한 확실한 신념을 의미하며, 사람의 생각에 좌우되지 않는 객관적인 실체를 확신하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믿음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진리의 말씀을 견고히 붙잡게 하며,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확신하게 해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체적으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찌 생각하면 믿음으로 산다는 말처럼 막연하고 추상적인 이야기가 없는 것 같지만, 성경은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유명한 '믿음 장'으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믿음에 대해 소개하면서, 먼저 7절에서 노아의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첫째,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창6:13-14). 그래서 노아는 120년 동안 산 위에다 방주를 짓습니다. 말 많은 세상에서 노아와 그 아들들이 산 위에다 방주를 만들었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조롱했겠습니까? 목사가 뚱뚱하면 "무얼 그렇게 많이 먹고 저렇게 돼지처럼 뚱뚱하냐?"고 하고, 목사가 말랐으면, "목사가 얼마나 은혜가 없으면 저렇게 깡말랐느냐?"고 할 만큼 세상은 말이 많은데, 노아는 세 아들과 함께 산 위에 방주를 지어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을 대비하여, 홍수로부터 자기와 자기 가족을 구원하였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제일 큰 과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구원의 문제입니다. 이 땅에서 잠시 사는 동안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가 되어 잘산다, 못산다 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죄사함을 얻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길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우리의 선행이나 어떤 공로나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면죄부가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죄 사함 받고, 화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오랫동안 성가대와 교사로서 봉사하던 여 집사님이 그 교회 목사님께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정말 천당과 지옥이 있습니까? 왜 묻느냐고 묻지 마시고 간단하게 대답해 주세요." 이 집사님은 "모든 것을 다 제쳐놓고 이것만 믿어질 수 있다면 내가 아무리 가난하고 아무리 어려워도 용기를 가지고 소망스럽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다"라고 절실하게 말하더랍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사정이 복잡하고 문제가 많은 것 같습니까? 잠시 잠깐 사는 세상에서 좀 많이 가졌으면 어떻고 적게 가졌으면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9). 그래서 병들었느냐, 건강하냐, 잘 사느냐, 못사느냐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더럽고 추한 세상에서 죽지 않고 오래 사는 영원이라면 바라고 싶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느냐 입니다.
월터리드 미국 육군병원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마지막 임종 순간을 맞이하기 얼마 전에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병원을 방문하였습니다. 30분의 면회시간을 얻어 들어간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시간이 다되어 나갈 때가 되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그가 조금 더 있기를 원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아니,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라고 묻자,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야 할지 제게는 확신이 없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저의 마지막 부탁입니다." 그러자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주머니에서 성경을 꺼내 어떻게 죄 사함을 받고,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구원은 무슨 업적이 있다거나 선행을 많이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노력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주셨습니다. 내 지난날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인도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영접기도를 마쳤을 때 아이젠하워가 마지막 유언을 남겼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나는 이제 준비되었습니다."
둘째,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렇게 증거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11:8-10). 여기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믿음으로 순종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그 말씀을 좇아 하루 하루를 살아갔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잘못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신앙을 단지 어떤 지식으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많이 깨닫고 많이 기억하면 이것이 마치 믿음인 줄로 알고, 성경의 진리에 감격하면 이게 무슨 믿음인 줄 아는데, 그것이 믿음이 아니라, 한낱 종교적인 지식과 감정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믿고 깨달은 대로 그대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한 길 가는 순례자]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이 어느 날 헌혈을 하기 위해 적십자사의 헌혈차에 누웠는데, 간호사가 헌혈 적격 여부의 마지막 지문에 "당신은 위험한 일에 종사하고 계십니까?"라고 묻자,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한눈에 봐도 목사인 것을 알 수 있는 성직자용 칼라가 달린 옷을 본 간호사는 웃으며 '아니오' 표시를 하고는 "목사님, 그런 종류의 위험한 일 말고요!"라고 했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말합니다. "나의 삶에서 위태로운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일이다. 매일 같이 나의 믿음은 사선에 있다. 나는 결코 하나님을 본 적이 없다. 거의 무엇이든 저울질하고 규명하고 측량하고, 심리분석과 과학적 통제 아래에 두는 세상에서, 눈을 마주친 적도, 목소리를 들어본 적도, 그 심중을 파헤친 적도 없는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기를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태할 때나 태평할 때나 삶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바로 하나님이었다. 그 하나님은 우리편에 계시며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다."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우리를 성령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루 하루를 하나님의 이끄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의 생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귀로 들려오기도 하지만, 대개는 성경을 통해서, 혹은 설교를 통해서, 그리고 기도하면서 성령의 감동으로 듣게 됩니다. 어느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하는데, 한 성도가 목사님께 말하더랍니다. "목사님 저에게도 하나님이 한번만 나타나서 나에게 말씀하시면 제가 예수를 잘 믿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형제님, 이미 하나님께서 형제님에게 이미 말씀하셨는데도 듣지 못했는지도 모르지요." "글쎄요 저는 말씀을 음성을 들은 일이 없는데요." 그래서 "형제님, 우리가 지금 성경 공부를 지금 하고 있는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십니까?" "믿고자 합니다." "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한다면, 그 동안 성경공부를 하면서 '이 성경 말씀이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신다'는 마음으로 성경을 대했다면 형제님도 하나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그래요?"
설교자로서 때로 큰 감사와 보람을 느낄 때가 있고, 어느 때는 몹시 실망스럽고 낙심이 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을 때, 성도들이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그대로 실천하는 모습을 보면 그토록 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타게 전해도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마11:17)는 말씀처럼,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듯, 아무 반응이 없을 때는 그토록 안타까울 수가 없습니다.
알바니아에서 사역하던 어느 한국 선교사의 간증입니다. 1997년 알바니아는 무정부 상태에 빠지면서, 사회가 혼란하고 치안이 극도로 위험하게 되어 사람들은 집밖으로 출입을 할 수 없었습니다. 알바니아에 들어오는 모든 비행기와 선박이 중단되고 사람들은 완전히 고립되었고 앞으로의 상황판단이 불가능하였습니다. 알바니아 선교사 연합회 회장이었던 미국 선교사가 무선으로 미국 정부에 외국인의 탈출을 조치해달라고 부탁하였으나 결과는 예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을 일고 묵상하였는데, 출애굽기 19장 4절이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여..." 이 말씀 가운데 '독수리'라는 단어가 눈에 크게 들어왔습니다. '독수리가 와서 구원한다'고 했으나 지금 독수리가 와서 날개로 업어 구원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때 미국 선교사회 회장은 동요하지 말고 기도하면서 집안에 머물러 기다리자고 했는데, 3일 후에 무전으로, 한국 선교사는 모두 미국 대사관으로 오라는 연락을 해왔습니다. 미국 대사관에 도착하여 여권 심사를 받은 뒤에 버스 안에서 하루를 기다렸습니다. 다음날 새벽 5시 미군이 깨우는데, 굉음과 함께 헬리콥터 한 대가 대사관 잔디밭에 앉았습니다. 헬멧과 조끼를 착용하고 헬리콥터로 달려가는데, 헬리콥터에 타는 순간 선교사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헬리콥터의 날개에는 독수리 마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프로펠러 달린 독수리를 보내셔서 선교사의 가족을 업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는 자들에게 친히 말씀하시고, 그 말씀하신 대로 친히 인도하십니다.
셋째,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사라의 믿음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히11:11-12). 사라는 이미 여자로서는 죽은 자와 방불한 나이인 90세가 되어, 이미 폐경이 된지 오래였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내년에 아들을 주마"할 때에 용기를 얻습니다. 이때 아마 두 사람은 나이가 89세와 99세가 되어 방을 따로 쓴지 오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 저 할망구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엄청난 말씀을 믿고 두 사람은 다시 합방을 하여 이삭을 낳게 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이것은 자기 약점과 인간적인 모든 한계를 믿음으로 극복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여 100세에 아들을 얻게 된 위대한 믿음입니다.
한국 CCC총재였던 김준곤 목사님의 [영점 체험(零點體驗)]이란 글입니다. "죽었다 살아난 체험 다음으로 사형수 체험, 혹은 무일푼의 거지생활 체험 같은 것은 인생수도(人生修道)에 큰 도움이 된다. 나는 거지 순례 전도를 떠난 학생들의 사도행전 같은 보고를 자주 듣는다. 두메산골 가난한 집 아이가 죽어가고 있었다. 의사도, 약도, 돈도 없었다. 학생이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했다. '주여, 돈도, 약도, 의사도 없사오니 주님이 직접 고쳐 주십시오.' 그랬더니 주님이 고쳐 주셨다. 시간도, 의지도 온통 주님께 맡기고, 성령의 인도에 전폭을 의지하며 한 끼 밥을 먹여준 분에게 예수를 전하면 벌거벗은 진실과 진실이 만나졌다고들 했다." 인간적인 가능성과 계산을 내려놓고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믿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 먼저, 기도로 구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믿음을 더해달라고 구했습니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눅17:5). 유서 깊은 무디 교회 목사인 어윈 루쩌의 [7가지 대표적인 기적](Seven Convincing Miracles)에 보면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날 교회 옆에 위치한 술집 주인이 이웃교회 교인들이 자기 술집이 천둥 벼락을 맞아 없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몇 주 후 진짜 그 술집이 천둥 벼락을 맞아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술집 주인은 변호사를 고용하여 교회를 고소하고 손해 배상을 청구했습니다. 그러자 교회측을 대표하는 지도자가 나와서 교회의 입장을 대변하여 변론합니다. '아무리 교인들이 그런 기도를 했기로서니 술집이 그 결과로 천둥 벼락을 맞았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며 반론을 펼치자 고심하던 재판관은 최후 판결을 다음과 같이 내렸다고 합니다. "술집주인은 기도를 믿었고, 교회는 기도를 믿지 않았음."
다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으며 지켜 준행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트루먼 대통령이 은퇴 후 자신의 기념도서관을 방문하자 초등학생들이 대통령을 보려고 몰려와 한 학생이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공부를 잘하셨지요? 반장을 하셨나요?" 트루먼이 대답합니다. "난 공부를 참 못했지. 눈이 나빠서 안경을 벗으면 거의 시각장애인이었어. 특별한 재주도 없었고 겁도 많은 편이었지." 아이들이 고개를 갸웃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대통령이 됐나요?" 트루먼은 상냥하게 대답합니다. "나는 믿음이 있었단다. 내게 힘이 없을 때 힘주시는 하나님과 성경을 믿었어. 하나님은 항상 내 등뒤에서 나를 응원하고 계셨단다. 그것이 가장 큰 힘이었지." 우리 곁엔 무엇이 있습니까? 힘겨운 삶의 무게입니까, 가족 부양의 중압감입니까?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모시면 어떤 시련에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곁에서 응원하시는, 보이지 않는 손길을 믿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짐을 하나님께 맡기고 참된 평안을 누리십시오.
어느 MBC방송 앵커가 새벽에 골프연습장에 갔다가 그날따라 골프장 문이 잠겨있는 바람에 아내가 다니는 인근 교회새벽기도회에 들어갑니다. 교회에서 새벽부터 열정적으로 찬양하며 방언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본 그는 사이비집단으로 알고 일주일간 취재하여 뉴스에 터트릴 생각으로 새벽기도에 잠입 취재하다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자 그의 삶은 180도 바뀌었습니다. 쾌락을 안겨 주던 술, 도박, 골프는 차원이 낮은 기쁨이 됐고,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기까진 그가 술에 취해 돌아오면 부인이 양말을 벗기며 '이 발이 교회 가는 발이 되게 해달라'며 온갖 어려움을 참고 기도한 것이 결국 열매를 거둔 것입니다. 그는 원래 불자로서 고등학교 시절 '출가'를 결심한 적도 있었습니다. 1978년 MBC에 입사하여 25년간 기자로 일했고, 1990년대 중반엔 뉴스앵커로 활약하며, 언론을 발판 삼아 정계에 진출하여 권력으로 세상을 변혁하려는 야심이 있었습니다. iMBC 사장에까지 오른 그는 가족의 반대에도 '사직서'를 제출해 정치인의 꿈을 접고, 미국에 있는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무한도전] '나쁜 기억 지우개 특집' 멘토로 출연했을 때 "기자 시절 남을 끌어내리는 일을 했고, 지금은 사람 끌어올리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기자로서 비리 저지른 사람을 사회에 고발하고, 법의 심판을 받게 하면 사회정의가 실현될 것으로 믿었는데, 그러나 그때뿐이었습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부패와 타락으로 얼룩진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단 한 가지 방법은 바로 '예수'라고 했습니다. 그는 지금 20만 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조정민 목사로서, 청담동에 있는 '베이직교회'를 담임하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신영복 선생님은 떨리는 나침반을 이렇게 보았습니다. "북극을 가리키는 나침반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바늘 끝을 떨고 있습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습니다. 만일 바늘 끝이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미 나침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굳건한 믿음이란 굳고 고정되어버린 신조가 아니라, 나침반이 지구의 근원에 호응하여 반응하고 있듯이 근원자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민감하게 하나님의 요청에 따라 지속적으로 영혼의 감응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사무엘 E. 키서의 시구입니다. "신앙은 단지 밤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만이 아니라 과감한 노력이요, 장렬한 모험이요, 어떤 상황에서도 봉사할 수 있는 능력이다."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의 보상은 우리가 믿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붙들면 '울음으로 시작된 인생을 미소로 끝나게' 해주십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면, 의롭다 함을 얻고, 날마다 믿음으로 승리하게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