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운동의 은총

2019-02-24 74회

동문교회
031-701-0691 / 경기도성남시분당구야탑동 523번지
손세용 목사님

마태복음 5장 10~12절

설교요약 :

"삼일운동의 은총"
2019년 2월 24일 주일예배
마태복음 5 : 10 - 12 ; 이사야 10 : 20 - 21


역사 수업시간에 꾸벅꾸벅 조는 맹구에게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맹구야, 이토 히로부미를 누가 죽였지?" 맹구는 깜짝 놀라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절대로 제가 죽이지 않았어요!" 선생님은 어이없어 어머니를 모셔오게 하여 맹구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선생님, 우리 맹구는 남을 죽일 만큼 그렇게 나쁜 애가 아니에요"라고 하니, 선생님은 기가 막혀 어머니를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맹구 어머니가 집에 와서 남편에게 이 사실을 말하자, 뭔가 한참을 생각하던 아버지가 맹구에게 물었습니다. "맹구야, 솔직히 말해봐라. 정말 네가 죽인 거 아니지?" 그런데 이토 히로부미를 실제로 죽인 안중근 열사는 우리나라 민족영웅이 되었습니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가 말했습니다. "나라가 기울어가니까 그토록 인물이 많던 조선에 어리바리한 사내들만 발에 차였노라. 그런데 맥빠진 조선 궁성 안에서 유일하게 사내 노릇하던 명성황후를 제거한 건 신의 한 수였노라." 그 때 혜성같이 나타난 진짜 사나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토를 척살한 조선 청년 안중근이었습니다.


당시 삼일운동의 주축이었던 기독교인들은 일본인에 대한 미움까지도 자제하며, 삼일운동 직후 성도들에게 [독립단 통고문]이란 이런 행동강령이 배포되었습니다. "우리 존경하고 고귀한 독립단 여러분이여, 어떤 일이든지 일본인을 모욕하지 말고, 돌을 던지지 말며, 주먹으로 때리지 말라. 이는 야만인이 하는 바니, 독립의 주의를 손상할 뿐이니 행여 각각 주의할 지며, 신자는 매일 세 차례 기도하되 일요일은 금식하며, 매일 성경을 읽되 월요일은 이사야 10장, 화요일은 예레미야 12장, 수요일은 신명기 28장, 목요일은 야고보서 5장, 금요일은 이사야 59장, 토요일은 로마서 8장을 돌아가며 다 읽을 것이라." 그런데 일본은 이런 교회에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1919년 7월 12일자 신한민보 기사입니다. "4월 15일 오후에 일병들이 제암리에 불을 놓기 시작했는데 이 동리의 가호 수는 40여 호요 교회가 하나더라. 이날 일본 헌병대장은 병사를 영솔하고 이 동리에 들어와 무삼 강설할 것이 있다 하고 교인 23명을 예배당으로 청한 즉 그 교인들이 모여 예배당에 들어가매 헌병대장이 병사에게 명령하여 일변 총질하며 일변 불을 놓는데 그 중에 청년 한 사람이 도망하여 이 참혹한 역사를 전하더라." 이러고도 일본은 시인하지도 사과하지도 않습니다.


1970년 12월 7일 비가 내리는데, 폴란드 바르샤바의 제2차 대전 당시 희생된 유대인 추모비 앞에서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진심어린 참회를 하자, 세계 언론은 이렇게 평했습니다.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었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 누구나 잘못할 수는 있지만, 가장 큰 잘못은 반성하지 않고 용서를 빌지 않는 것인데, 일본은 아직도 반성도 사과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 주 금요일은 삼일절 백주년 기념일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삼일운동은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신 놀라운 은총이요, 이 민족을 위한 축복의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별히 기독교의 선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삼일운동이야말로 서양 오랑캐의 종교로 일컬어지던 기독교가 우리의 민족의 종교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되어, 이 땅 복음화에 새로운 전기가 되었습니다. 선교학적으로는 다른 민족에게 선교할 때 제일 어려운 점이, 민족적 편견과 문화적 장벽을 뛰어넘는 문화교월(Cross Culture)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현지인들은 '이것은 다른 나라의 종교로서 우리의 것이 아니다'며 배타적으로 대하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입니다.


동남아시아는 기독교가 우리보다 몇 백년 전에 전파되었으나 그곳에는 교회가 성장하지를 않은 이유는 기독교는 서양 침략자의 종교라고 해서 배타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제국주의의 앞잡이(agent)라는 누명을 면한 곳은 오직 우리나라뿐입니다. 세계 수많은 피선교지가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이 전해졌는데, 대개가 그곳에 무력으로 침략해 들어가면서 복음이 함께 전해졌기에 그런 피선교지에서는 기독교는 한결같이 침략자의 종교로 매도되었고, 선교사들까지도 제국주의의 앞잡이이라는 누명을 썼는데, 우리나라는 일본이 아닌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복음을 받았기에, 별 저항 없이 기독교가 전해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뿌리를 내리게 된 계기는 바로 삼일운동 이후부터였습니다. 당시 모든 기독교회가 삼일 독립만세 운동에 앞장서게 되자, 당시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던 우리 민족의 의식 속에는 '기독교는 우리 민족을 위하는 종교다,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를 살려낼 종교다'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뿌리내렸습니다. 선교사들이 와서 학교를 세워 백성들을 계몽하였고, 병원을 세워 상처난 이 민족의 영혼과 육신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우리나라 근대사를 볼 때, 기독교는 우리의 문화를 살렸고, 정치적으로 민중과 함께 고난을 받았기에, 나라를 빼앗기고 가장 어둡고 암담하던 시기에 기독교는 고난 속에 있던 백성들의 희망이었으며, 구세주였기에 한국 교회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팔복 가운데 마지막 여덟 번째 복인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의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박해'의 사전적 의미는 '바싹 죄어서 괴롭게 하다'는 뜻인데, 주로 종교적인 이유나 자기 신념을 지키기 위해 당하는 고통을 말합니다. 특히 본문에서는 11절에서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마5:11)라고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뜻을 따르기 위해 당하는 고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의(義)'란 어떤 추상적인 가치나 세상적인 의가 아니라, 모든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시고, 이를 심판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세상에 환난이나 핍박을 당하도록 허용하실까요? 그 이유는 첫째,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하듯 참된 성도와 거짓 성도를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3:12). 농사를 지어 곡식을 타작하려면, 참깨는 막대기로 '탁탁' 때리면 깨알이 솔솔 쏟아집니다. 그런가 하면 콩은 마당에 깔아놓고 도리깨로 냅다 후려치면 껍질이 벗겨지고 콩알만 자루에 담습습니다. 이처럼 막대기나 몽둥이 혹은 도리깨로 때리고, 키나 풍구로 불어내는 것은 쭉정이는 제거해 내고 알곡만 거두기 위한 것입니다.


한국교회 역사가인 백낙준 박사의 책에 보면, 한국교회는 1907년에 큰 부흥의 불길이 타올라 평양을 중심으로 원산 등지에 많은 교회가 일어나고 부흥하게 됩니다. 이때 춘원 이광수나 늘봄 주요한 같은 분들도 교회에 나왔는데, 이런 분들은 예수를 믿으려고 교회에 나온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개화된 서양 문화가 좋아서 나온 개화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삼일 독립만세 사건 후 무시무시한 핍박이 교회에 밀려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잡혀가서 감옥에 갇히고, 고문당하니까, 이광수, 주요한 같은 소위 개화교인은 모두 다 물러가고, 순수한 기독교인만 남게 되었다고 백낙준 박사는 전하고 있습니다. 이를 보면 교회에 나온다고 모두 크리스천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환난은 참 성도와 거짓 성도를 갈라냅니다.


둘째, 성도들의 신앙을 견고하게 성숙시키기 위해 핍박을 허용하십니다. 2천년 교회역사 중, 찬란한 믿음의 성장이 있던 때는 편안할 때가 아니라, 무서운 박해와 환난의 때였습니다. [기독교 확장사]를 쓴 라토렛 박사는 "기독교가 로마를 정복한 주후 313년까지 열 번에 걸친 무시무시한 교회에 대한 핍박이 있었는데, 바로 이 핍박이 결국은 기독교가 로마를 이길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한다"(단12:10)라고 말씀했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의 연단을 위하여, 우리에게 고난을 허용하기도 하십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여 피하는 사람은 인생의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없습니다. 환난과 핍박은 우리의 영혼을 순결하게 하며, 우리 믿음을 강건케 합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라고 고백했습니다. 견디기 힘든 박해가 우리 안에 더러운 찌꺼기를 씻어내고, 연단된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님을 닮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에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벧전4:1). 바다는 태풍이 불어야 깨끗해지고 하늘은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쳐야 깨끗해지듯이 사람들은 박해와 고난을 통하여 영혼의 깨끗함과 순결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셋째, 핍박을 통하여 우리를 복된 자로 삼기 위하심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5:10). 성경은 그리스도와 그 나라를 위해 수고하고 고난을 당하며, 박해를 받는 사람에게 축복과 보상이 약속되어 있지, 아무 희생 없이 안일과 쾌락만 추구하는 사람에게 축복이 약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에 참예한 자가 주님과 함께 영광에도 참예합니다.


독일이 통일되기 전, 동독의 드레스덴 주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공산주의의 박해를 받던 때는 교회가 넘치도록 교인이 모였다고 합니다. 젊은이고 늙은이고 할 것 없이 하루에 네 번을 나오는가 하면, 강단 위까지 올라앉아 예배를 드릴 정도였고,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도 교회를 선망의 대상으로 우러르며 후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자유화가 되니 젊은 사람들은 교회에 나오지 않고 교회가 텅 비고, 돈 몇 푼 생긴 것으로 방탕하고 모두들 댄스홀로 가버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느 쪽이 행복한지, 누가 복을 받는지 두고보아야 합니다. 저 미래에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의 이름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에게 베푸시는 보상은 무엇입니까? 첫째, 천국의 주인 되시는 주님이 함께 해 주십니다. 우리는 '천국'이라면, 미래적인 의미로만 이해하기 쉬운데, 천국은 장차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 나라를 위해 고난까지도 감수하며 충성할 때, 주님은 우리 고난의 현장에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우상에게 절하기를 거부하고 풀무 불 속에 던져졌을 때, 그곳엔 분명 세 사람이 던져졌지만 느부갓네살 왕이 그 불 속을 바라보니, 그곳엔 네 사람이 보였습니다. 그러면 그 네 번째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저들이 목숨 바쳐 충성을 드렸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당신을 위해 고난 당하는 성도들의 고난의 자리에 찾아오셔서 함께 하십니다.


결혼한 지 8년 된 어느 집사님은 자녀가 없었습니다. 신실한 두 내외는 자녀를 얻기 위해 8년 동안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다 8년 만에 기적처럼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아기를 받아든 두 내외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중증 뇌성마비였습니다. 두 집사님은 하나님께 원망하며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하나님! 왜 하필이면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몇 날 며칠을 그렇게 집사님 내외는 아픈 아이를 끌어안고 울부짖습니다. 그 아이는 그 가정에 굵은 가시였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원망하다 지쳐 쓰러진 여 집사님에게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딸아, 내가 그 아이를 품고 팔도강산을 8년이나 헤매 다녔단다. 누구에게 이 아이를 맡길까? 누가 이 가시를 감당할 수 있을까? 찾아다니다 너희를 선택했단다. 너희라면 충분히 이 가시를 감당할 수 있겠기에 이제 너희에게 맡기노라."


둘째, 주님은 성도가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마5:11-12a).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이유는 우리에게 승리가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확신에 찬 승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5-37). 그리스도를 위해 살다보면, 이런저런 고난과 핍박이 찾아오지만, 고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도 함께 오셔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우리를 도와주셔서 승리케 하십니다.


우리는 유관순 여사를 단지 애국지사로만 알뿐, 그녀의 희생이 철저히 신앙 때문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유관순은 이화학당에서 공부할 때, 정동제일교회 손정도 목사님의 설교 중 "십자가 신앙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십자가 신앙으로 민족을 섬겨야 한다"는 말씀에 크게 감동 받고, 주님의 십자가 희생을 기억하며 기꺼이 자기 생명을 민족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유관순이 독립운동을 위해 독립선언서를 숨겨서 고향 아우내로 1919년 3월 13일 내려왔을 때, 사람들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자, 추운 날씨에 어린 조카 유제하를 데리고 천안 매봉산에 올라, 3일간 나라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때의 기도를 조카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사흘 동안 기도만 했다. 사흘째 되던 날 뭔가 계시를 받은 듯, 미친 듯이 기도를 마친 그의 얼굴은 온통 환하게 빛이 났고 말에 힘이 있었고 담대한 모습이었다." 산에서 내려온 유관순의 말에 고향 사람들은 이상하리 만치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음력 3월 1일, 그 유명한 아우내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납니다. 기도의 힘, 성령의 힘이었습니다. 체포된 유관순은 감옥생활 중에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조국과, 자신의 믿음을 위해, 그리고 함께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변절하지 않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1920년 10월, 18세의 나이로 생을 마친 그녀는 단순한 애국열사가 아닌 순교자였습니다.


셋째, 주님을 위해 핍박을 받은 사람은 영원한 천국이 주어집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5:10).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2a)고 하여, 주님을 위해 핍박받은 사람에겐 '하늘에서' 상이 클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위해 핍박을 받은 사람들은 하늘에서 열리는 그 시상식장에 참석하도록 불가불 천국에 가게될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어떤 어머니와 그녀의 어린 아들이 기독교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로마의 원형극장에 던져졌습니다. 사자 굴의 문이 열리자 굶주린 사자들이 으르렁거리면서 달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아들은 무섭게 달려드는 사자를 보고서 어머니의 품에 꼭 안기면서 울부짖었습니다. "엄마! 무서워요!" 어머니는 아들의 몸을 꼭 안아 주면서 조용히 위로해 주었습니다. "얘야! 눈을 꼭 감고 조금만 참아라. 그러면 곧 눈앞이 환하게 밝아 올 것이란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핍박을 받아 감옥에 끌려가면서도, 또 매를 맞으면서도, 심지어는 사자굴 속으로 던져지면서도 기뻐하고 또 기뻐했습니다. 이는 저들의 마음속에 천국에 대한 소망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아름다운 천국을 기대하면서도, 막상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아닐까 지레 겁을 먹고 두려워하는데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우리는 몇 가지 고난에 대한 원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은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옛날 성도들은 믿음이 좋아서 감옥에도 갇히고, 돌에 맞아죽으면서도 찬송할 수 있었지, 나는 조그만 고통도 이기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어려운 고난을 이겨낼까?'하고 걱정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사정과 약함을 아시고 감당할 만큼만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초등학생에게 중학교나 고등학교, 혹은 대학교에서 요구하는 시험 문제가 주지는 않습니다.


둘째, 감당치 못할 때는 피할 길을 주십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보면, 수습수녀 마리아가 원장수녀에게 자기의 어려운 문제를 의논하자, 원장수녀는 "하나님은 문을 다 닫지 않으시지. 대문을 닫으실 땐 도망가도록 창문을 열어놓으시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선 참으로 감사하게도 동풍을 불 때, 서풍까지 불게 하지 않으신다"는 말도 있습니다. 동풍만 불면 한쪽만 추워지고 한 쪽은 좀 낫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맞바람을 불게 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피할 수 있는 길을 주십니다.


어떤 성도가 루머티즘으로 고생하면서, 신사참배 문제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신사참배를 반대한다고 입으로 말하면 저는 감옥에 갑니다. 감옥에서 이 추운 겨울을 어떻게 나겠습니까?" 그렇게 기도하다 결국 신사참배 반대를 격렬히 하다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감옥에 들어간 즉시 그 루머티즘을 하나님께서 말끔히 거둬 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앞 뒤 협공으로 우리를 진퇴유곡에 빠뜨리지 않으시고, 반드시 피할 길을 내셔서 능히 그 고난을 이기도록 도우시고 지켜주십니다.


셋째, 하나님을 사랑하여 고난을 받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당하는 핍박이나 환난은 결국에는 선으로 바꾸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또 이 말씀을 거꾸로 생각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 고난과 핍박이 없는 자들에겐 모든 좋아 보이는 것들도 결국 무익한 것이 되고 만다는 의미가 됩니다.


호주 시드니에 사는 교민이 고국을 다녀가는 길에 개나리를 꺾어다 자기 집 마당에 심었습니다. 이듬해 봄이 되자, 맑은 공기와 좋은 햇볕 덕에 가지와 잎은 한국에서보다 무성했지만 꽃이 피지 않았습니다. 첫해라 그런가보다 여겼는데 2년째도, 3년째에도 꽃은 피지 않았습니다. 그가 알아봤더니, 한국처럼 혹한의 겨울이 없는 호주에서는 개나리꽃이 아예 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온을 거쳐야만 꽃이 피는 것은 전문용어로 '춘화현상'이라 하는데 튤립, 히아신스, 백합, 라일락, 철쭉, 진달래 등이 모두 이에 속한다고 합니다. 인생도 춘화현상과 같습니다. 눈부신 인생의 꽃은 인생의 혹한을 거친 뒤에야 꽃망울이 맺히는 법입니다. 그런가 하면 봄에 뿌리는 봄보리보다 가을에 파종하여 겨울을 나는 가을보리 수확이 훨씬 많습니다. 인생의 열매는 마치 가을보리처럼 인생겨울을 거치며 그 열매가 풍성하고 견실해집니다. 현실이 어렵고 상황이 암담해 보일지라도, 좌절하지 마십시오. 인생의 꽃과 열매가 맺히는 인생의 봄은 추운 겨울을 지나야 맞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얼어붙은 현실을 녹이는 따뜻한 믿음과, 주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입니다.


여러분, 아무런 박해가 없이 편안히 믿기만을 바라지 마십시오. 때로 박해는 필요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울프강 심슨은 "박해가 없는 것은 '교회는 박해를 받을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며, 그것의 가치와 존재방식은 하나님 없는 사회와 섞여버리는 것이고, 소금이 그 맛을 잃은 것처럼 사회의 발아래 무시되고 짓밟히는 것이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교회가 경계해야 할 것은 박해 없는 맛 잃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처럼 우리도 박해를 믿음으로 이겨내야 하겠습니다.


오래 전 중국 지하교회 한 성도가 신앙의 자유를 찾아 튜브에 몸을 싣고 홍콩으로 망명했습니다. 자유진영의 여러 교회들을 돌아보다가 어느 날, 다시 목숨을 걸고 중국으로 되돌아가는 충격적인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성도는 돌아가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자유세계는 의식주와 생활의 염려는 없으나 이런 상태의 신앙생활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또 내가 내세의 영광을 위해서는 다시 기근의 땅 중국으로 가야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어렵고 고통스럽지만 지하교회 시절의 그 뜨거웠던 믿음과 목숨을 건 철저한 신앙생활이 그립습니다." 순결한 믿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어려운 현실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사10:20-21). 주님은 핍박을 받는 자들에게 은혜와 상급을 약속하십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0,12).

마태복음 5장 10~12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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