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07 53회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
2019년 7월 7일 맥추감사절
창세기 4 : 1 - 8 ; 히브리서 11 : 4
어떤 구두쇠 총각이 결혼하려고 주례전문가에게 주례를 부탁하면서 "사례비는 어느 정도 드리면 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주례자가 "당신의 신부가 예쁜 만큼 주면 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 구두쇠 총각은 자기 신부는 예뻤지만, 돈이 아까워 만 원짜리 한 장을 봉투에 넣어 "여기 있습니다"라고 주례자에게 주자 그 주례자가 9,900원을 내주면서 말합니다. "여기 잔돈 가져가게." 그 신랑이 자기 신부를 단돈 만 원 취급하는 것을 보면, 그런 신랑에게선 한 푼도 받고 싶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을까요?
1845년 영국 해군제독이던 존 프랭클린(John Franklin)은 대서양에서 북극해를 거쳐 태평양에 이르는 항로를 발견하려고 134명이 떠납니다. 당시 파나마운하가 생기지 전이라서 동양으로부터 보물과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선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오거나 남아메리카를 지나서 항해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동양으로 가는 지름길을 발견하면 그는 영웅이 되겠기에 이 문제는 탐험가들의 큰 관심사였습니다. 프랭클린은 엄청난 노력과 도전으로 새로운 북극항로를 찾아 나섰는데, 그와 일행은 모두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40여 명의 탐험대가 실종된 프랭클린 일행을 찾아 나섰는데, 이들을 통해 프랭클린 일행은 영양실조와 추위에 얼어죽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들은 사치스러운 것들을 실으려고 충분한 양식과, 배의 보일러를 가동할 수 있는 석탄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석탄을 실을 방이 없어서 아니라 그들은 그곳에 다른 호화로운 것들을 실었습니다. 그 배엔 50건반이 넘는 오르간도 실려있었고, 책도 1200백 권 이상 실려있었으며, 화려한 본 차이나 도자기와, 값비싼 크리스털 그릇, 은으로 된 주방기구들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항해가 생각보다 길어져 식량과 석탄이 떨어지자 그들은 돌아오는 길에 북극에서 모두 얼어죽었는데, 프랭클린은 배의 갑판에서 얼어죽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불필요하고 사치스러운 것들을 위해 정작 생명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들을 소홀히 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는 희생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가장 소중한 가치를 잃게 되고 말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싸고 좋은 것이 없습니다. 싸고 좋은 것을 강요하는 것은 결국 그 누군가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또 싼 것만을 찾는 것은 세상의 발전을 왜곡시키는 행위입니다. 싼 것에 품위가 담길 수는 없습니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했을 때 품위도 함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의 삶도 꾸준한 노력 앞에 벼락치기가 앞설 수 없듯, 매일 매일 정직한 결정을 내리고, 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꾸준히 노력하면, 언젠가 성공은 백마를 탄 왕자처럼 나타날 것입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동침하여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아벨은 양치는 목축을 생업으로 삼았습니다. 둘 다 자기들의 소산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농사지어 수확한 곡식으로 농사를 드렸고, 아벨은 자기가 키운 양을 제물 삼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셨는데,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면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까요? 여기에 대해서 문화적으로, 혹은 신학적으로 접근하여 몇 가지 주장이 있고, 그리고 오해가 있습니다.
첫째는, 문화인류학적인 해석으로, 성서의 토양인 이스라엘 민족은 목축업을 하는 민족이기에, 하나님이 곡식을 거부하고 양을 제물로 받았다는 주장입니다. 전에 이어령씨는 '유대인은 목축업을 하는 민족이기에 그들의 소산인 양으로 드린 제물을 하나님이 받으셨다고 믿었고, 이 성경이 만일 한국에서 기록되었다면 아마도 가인이 드린 곡식을 하나님께서 받으셨다고 기록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언뜻 그럴듯하지만, 성서적 근거가 없는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양이나, 소 같은 제물만 아니라, 곡식과, 기름, 과실, 포도주, 꿀, 등 다양한 제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신학적인 입장으로, 가인의 제사는 희생의 피가 없기에 받지 않았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피의 희생 제사는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 비로소 구체화되었고, 그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라고 구체적으로 명령하신 적이 없습니다. 본문의 상황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에서 쫓겨나 처음으로 자식 낳고 농사짓고 가축을 키우며 살기 시작한 때로서, 아직 제물에 대한 구체적인 교훈이 없던 때인데, 제사에 대해 아무런 교훈이 없이 어느 제물은 받고 어느 제물은 받지 않는다면 이는 불공평한 일입니다. 이뿐 아니라 가인은 농부이기에 농사지어 그 농산물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이 당연한데, 자기가 가지고 있지도 않은 가축으로 제사를 드려야한다면 가인은 이것을 어떻게 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결코 처음부터 아벨은 사랑하시고 가인은 미워하셔서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거절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밥이나 빵보다는 불고기를 좋아하신다는 생각은 성서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왜 가인의 제사는 거절하시고,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을까요?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아벨은 먼저 첫 것을 하나님께 드렸으나 가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본문 4절에 보면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창4:4)라고 했는데 가인이 드린 제물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다"(3절)고만 했지, 첫 곡식을 드렸다는 말이 없습니다. '양의 첫 새끼'를 드린 것은 모든 좋은 일에 하나님을 먼저 찾는 자세를 말합니다. 농사를 지어 첫 열매가 맺히면, 그 첫 열매를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자세입니다.
성경은 첫 열매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해마다 우리 토지 소산의 맏물과 각종 과목의 첫 열매를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로 하였고"(느10:35). 하나님은 애굽의 장자들을 치시며 "네 아들 중 처음 난 모든 자는 대속할지니라"(출13:13)며,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는 하나님의 것으로 대속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첫 열매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우리 삶에서 제일 우선 순위에 둔다는 의미입니다. 한 주간을 시작하며 맨 첫날인 주일에 하나님께 먼저 예배하며, 하루의 시작인 새벽에 하나님께 먼저 기도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어떤 이는 '돈이 부족하여 십일조를 드릴 수 없다'하니, '다른 데 다 쓰고 나서 십일조를 드리려니 돈이 부족하지 먼저 십일조부터 드리면 생활비는 부족할 수 있어도 십일조가 부족할 순 없다'고 말합니다.
어느 장로님 아들이 정부 모 부처 국장 진급소식을 받자, 도움을 준 상사에게 인사 가려고 집을 나서려는데, 아버지가 "얘야, 나와 먼저 갈 데가 있다"며, 아들 차에 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아버지, 제가 지금 바쁘니 윗분께 먼저 인사하고 와서 아버지가 가시려는 곳에 가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아니다, 그보다 더 먼저 갈 데가 있다"며 교회로 데려가 제단 앞에 무릎 꿇리고는 "너의 너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며,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더랍니다.
둘째, 아벨은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렸으나 가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창4:4)고 했는데 이 '첫 새끼'란 가장 귀하고 좋은 것을 뜻합니다. 자식도 첫아이가 가장 기쁘고 귀하게 느껴지기에, 열이 조금만 오르거나 몸을 뒤척여도, 자다가 일어나서 돌봅니다. 그런데 둘째, 셋째는 울어도 많이 울면 목소리가 좋아진다며, 첫째만큼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닌데도 정성이 덜 가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곡식도 첫 열매가 가장 탐스럽고, 꽃도 처음 꽃망울이 터졌을 때가 신비감을 더해 줍니다. 이렇듯 아벨은 하나님께 가장 좋고 귀한 것으로 구별하여 제사 드렸는데, 가인은 자기 농산물에서 첫 열매를 구별하여 드린 것이 아니라 아무 것이나 정성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그냥 드렸던 것입니다.
또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라고 했는데, 한글 KJV 성경에 보면 "아벨도 자기 양떼 가운데서 첫배 새끼들과, 그 살진 것을 가져왔더니"라고 번역하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함께 또 다른 양들 가운데 가장 살찌고 기름진 것을 골라 하나님께 바쳤다'고 해석합니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하나님께 드렸을 뿐만 아니라, 다른 양떼 중에서 가장 기름지고 살찐 양을 잡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기름'하면, 오늘날처럼 영양 과다인 시대에는 느끼하고 해로운 것으로 생각하지만, 옛날 이스라엘에선 기름은 가장 귀한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여겼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데도 아무 돈이고 손에 잡히는 대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깨끗한 새 돈을 골라드리듯, 하나님께 최상의 것을 드리는 자세입니다.
한국교회에서는 보통 주일 오전 11시 예배를 '대예배'라고 합니다. 과거 농경사회에서 오전 11시는 농사짓는 사람에게 가장 귀중하고 바쁜 시간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가장 귀한 시간에 예배를 드린다는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새벽 시간이나 주일 예배에 나오는 신앙이 매우 소중합니다. 젊은이들에게는 토요일 오후 시간이야말로 금쪽 같은 시간입니다. 이런 날 데이트도 안하고 교회로 달려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데 시간을 바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것입니다. 자신에게 가장 고귀한 것을 드리겠다는 그 자세를 하나님도 어여삐 보실 것입니다.
셋째, 아벨은 제물 외에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으나 가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4절 하반 절에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창4:4b)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뿐만 아니라 아벨 자신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5절은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다"(창4:5)하여,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만이 아니라, 가인 그 자신까지 받지 않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하나님의 우리의 헌금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까지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헌금도, 단지 어떤 일정액의 돈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돈을 벌기 위해 흘린 땀과, 정성, 수고와 거기에 담긴 우리의 삶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가인과 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고 하여, 가인은 이미 선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요한일서는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요일3:12)고 하여, 그는 이미 악한 자였습니다. '사과가 맺혀서 사과나무가 아니라, 사과나무이기에 사과가 맺혔다'는 말처럼 '가인은 아벨을 죽였기 때문에 살인자가 아니라, 악한 자라서 자기 동생 아벨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실제 생활에서는 갖은 악을 행하면서, 하나님께 경건한 척 예배드리는 모습에 대해 이사야는 이렇게 책망합니다.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사1:14-15). 한 주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믿음으로 살아온 삶을 가지고 나와 '하나님, 이 삶을 주께 드립니다'라고 드리는 것이 참된 예배인데, 가인에게는 이런 삶이 없이 건성으로 예배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나가 범죄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죄악된 생활을 하면서 헛된 제물을 가지고 나와 예배드리는 것을 책망하신 데 이어 18절은 이렇게 죄인들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1:18). 우리가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죄를 범했을지라도, 하나님께 나와 참회하며 예배드리면 하나님은 그의 죄를 사하시며 예배를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그러면 가인과 아벨의 예배의 근본적인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히11:4)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이어지는 6절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고 하여, 하나는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에게 상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가인에게는 이런 믿음이 없었기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도 지금 이곳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하나님의 임재 의식이 없어서, 하나님께 아무런 정성이 없는 형식적인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지 않았기에 경건한 삶이 없었던 것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라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예배 가운데 함께 계심을 믿는다면 우리의 예배가 얼마나 신령한 예배가 되겠습니까?
양어장이나 유원지에 있는 물고기들은 사람들이 먹이를 던지면 떼를 지어 몰려오지만,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깊은 계곡의 물고기들은 물 위에 먹을 것을 던져주면 오히려 도망가버립니다. 이곳의 물고기들은 그런 식으로 먹이를 받아먹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그리스도인 중에는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지 못하는 예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쉴새없이 하나님의 속삭임을 들으며, 그 분의 마음을 예민하게 느끼며, 그 분의 도우심을 삶 속에서 경험하며 사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 앞에 최상의 것을 드리지 못합니까? 하나님의 임재와 상급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나의 계산과 나의 노력과 행위로 산다고 생각하면, 내 삶은 내가 책임져야 하고 나의 모든 좋은 것은 내가 차지할 수밖에 없어,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손해요 낭비라고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참으로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결코 아깝게 여기지 않습니다.
왜 악을 행하며 살아갑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지으면서도 두려움이 없고, 악을 행하면서도 담대하며, 죄를 무서워 할 줄 모릅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사울에게 몇 번 씩 복수할 기회가 있었어도 차마 손을 대지 못했으나, 사울은 다윗이 놉 땅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도움 받은 것을 도엑이 고자질하였고, 이로 인해 사울이 제사장 85인을 학살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사울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 긍휼하심을 얻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당하게 됩니다.
가인이 예배에 실패한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가 예배에 실패함으로 나타난 결과는 첫째, 최초의 살인자가 되어 땅까지 저주받아 밭을 갈아도 그 효력을 얻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4:11-12). 농부가 땅에서 그 효력을 얻지 못하면 무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땅에서 소득을 얻지 못하게되자, 일정한 직업을 얻지 못하고 방랑자로 걸인처럼 떠돌이생활을 하였습니다.
둘째, 죄의 형벌과 사람들의 복수에 대한 두려움으로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 지내야 했습니다. 13절에 보면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창4:13)라고 탄식합니다.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 스스로 치를 수밖에 없는 죄의 대가,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증오와 복수심으로 인해 마음에 평화를 잃어버린 채, 평생을 굴레와 같은 죄의식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 앞에 쫓겨나 주의 낯을 뵙지 못하게 됐습니다. 14절에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창4:14)라고 말씀합니다. 다시는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기회도 허락되지 않은 채, 하나님과 상관없는 버림받은 자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가장 무서운 심판입니다.
넷째, 그의 자손까지 저주받아 죄악된 후손들이 그 뒤를 잇게 됩니다. 그의 아들 에녹은 최초의 죄악된 도시문명의 창시자가 됐고(17절), 그의 5대손 라멕은 아내를 둘씩 두는 최초의 축첩자로 파괴된 가정의 효시가 되었고(19절), 8대손 두발가인은 살상무기를 만들어, 대량살상을 초래하는 자가 되어 가인보다도 더한 70배의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가인은 이 땅의 모든 죄인들의 조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온전한 예배를 드린 아벨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비록 그가 가인에 의해 죽임 당했지만, 예수님이 그를 '의인 아벨'이라고 인정해 주셨고(마23:35), 히브리서 11장에서 최초의 믿음의 사람으로 언급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예물에 대하여 증거해주셨고, 그는 죽었으나 오히려 살아서 믿음으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아벨은 가인과 똑같이 아담으로부터 죄성을 안고 태어났지만, 참된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거룩한 성품을 배워 죄의 유혹을 뿌리쳤고, 또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려, 물질에 대한 탐욕을 극복하여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어머니의 유언을 지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의 삶을 산 록펠러의 이야기입니다. '첫째, 너는 예배 30분전에 도착하여 언제나 맨 앞자리에 앉아서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드려라'는 유언을 했습니다. 록펠러는 그 유언을 지켰습니다. 그가 다니는 교회는 대략 800명이 출석했는데, 록펠러를 구경하려고 찾아오는 사람이 800명, 그래서 1600명 정도가 항상 예배드렸다고 합니다. '둘째, 교회에 순종하고 목사님의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하라'고 유언했습니다. 그래서 록펠러는 목사님이 강단에서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기로 작정하고, 목사님이 계획하는 일을 물질로 후원하는데 앞장서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주의 종을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헌신하는 마음이 생활의 열정과 통찰력으로 바뀌어서 다른 사람보다 사업에 크게 왕성하게 되었습니다. '셋째, 십일조를 제일 많이 내라'고 유언했습니다. 록펠러는 12개의 종합대학과 4,928개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86세가 되던 해 시카고대학과 교회를 하나님께 바칠 때 시카고트리뷴지 경제부기자가 물었습니다. "록펠러씨, 당신이 세계제일의 부자가 된 비결이 무엇입니까?" "저는 부모로부터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어떤 유산입니까?" "저는 어머니로부터 십일조에 대해 철저히 교육받았습니다. 어머니는 가난한 농부였기에 물질적으론 유산을 거의 물려받은 게 없으나 돈 대신 십일조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받았고 지금까지 한번도 십일조를 놓친 적이 없습니다. 저는 회사에 십일조 부서를 두어 40명이 십일조를 계산하여 철저하게 헌금했습니다." 기자가 말합니다. "이해되지 않습니다. 사업을 위해선 번 돈을 쓰지 않고 아껴서 재투자해야 하는데, 십일조하고 돈을 쓰면 언제 돈을 모읍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경제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십일조를 내는 것은 장래를 보는 것이요, 미래의 안목으로 하나님의 농장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받은 구원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요, 앞으로 받을 축복에 대한 약속입니다. 록펠러는 정성을 다하는 예배자로 살았더니, 세계 최고의 재벌이 되었습니다.
놈 루이스는 예의범절에 대한 권위자였던 에밀리 포스트에게 누군가의 질문을 그의 책에서 썼습니다. "만약 당신이 백악관에 초대를 받았는데 선약이 있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녀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백악관으로부터의 초대는 다른 어떤 선약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부름이죠." 예배에로 초대받는 것은 결코 백악관보다 순위가 밀리는 일이 아닙니다. 만 왕의 왕의 초대는 그 어떤 일보다 위대합니다.
예배는 신앙행위의 절정입니다. 성경공부도 사회봉사도 귀하지만, 어떤 것도 예배를 대신할 것은 없습니다. 예배는 모든 행위의 최우선입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예배하면, 하나님은 나의 예배와 함께 내 존재를 받아주셔서, 나의 삶을 축복해주십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