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30 66회
"은혜를 은혜 되게 하는 믿음"
2019년 6월 30일 주일예배
사무엘하 7 : 1 - 9 ; 사도행전 7 : 46 - 47
초등학교 다니는 큰아들이 엄마에게 묻습니다. "엄마 '미인박명' 뜻이 뭐예요?" 엄마가 "예쁜 사람은 수명이 짧다는 말이야!"라고 말하자, 아들이 "휴 다행이네!"라고 말합니다. "뭐가 다행이니?"하고 묻자, 아들이 "우리 엄마는 오래 살 테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미인대회 하는 TV를 보던 작은 아들이 '미인대회가 뭐냐'고 묻자,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뽑는 대회라고 알려주니, 아들이 진지하게 묻습니다. "그럼 엄마는 왜 저기 안 나갔어?" 어떤 아들이 더 맘에 드십니까?
조선 시대 노비의 신분을 벗어나 벼슬길까지 오른 인물하면 대부분 장영실만 생각하는데, 노비출신으로 8도 관찰사를 전부 역임하고, 형조판서까지 오른 인물이 또 있습니다. 바로 '반석평'(1472~1540)이라는 조선 중종 때의 문신입니다. 그가 학문을 쌓기 시작한 이유는 자신은 비록 미천한 노비일지라도 스스로 사람임을 잊지 않고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반석평은 비록 노비 출신이었지만 주인집에서 반석평의 노비문서를 불태워 면천해주고 자신이 아는 반씨 집안에 수양아들로 보내주었습니다. 일종의 신분세탁을 통해 과거시험을 치를 자격을 얻은 반석평은 당당히 과거에 급제하여 출세를 거듭해 정2품 형조판서까지 오르게됩니다.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에 따르면 반석평은 거리에서 옛 주인의 아들 이오성이 거지꼴로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자 타고있던 가마에서 뛰어내려와 절을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의 신분세탁 사실이 들킬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는데, 반석평은 오히려 왕에게 자신의 본래 신분을 아뢰고 받은 벼슬자리를 내놓기를 청하였습니다. 하지만 왕은 받은 은혜를 잊지 않는 반석평을 오히려 기특히 여기고 몰락한 이오성에게도 벼슬을 내려 복권해주었습니다. 중종실록에는 반석평이 비록 노비출신이었지만 문벌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으로 등용된 바람직한 사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답다는 것은 노비 신분이지만 열심히 노력하여 높은 벼슬에 오른 사실보다도,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할 줄 아는 자세입니다. 반석평은 자신의 피나는 노력으로 쌓아올린 모든 것이 무너질지 모르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노비에서 풀어준 은혜를 잊지 않고 가마에서 뛰어내려 옛 주인에게 절할 줄 알았던 참으로 인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렇게 개를 좋아하기에 물었답니다. "개를 왜 그렇게 좋아합니까?" 그랬더니 대답이 충격적입니다. "개는 배신할 줄 모릅니다. 인간들은 친구는 고사하고 자식조차도 다 키워놓으면 은혜를 저버리는 일이 많은데, 개는 은혜를 배신할 줄 모릅니다." 흔히 배은망덕한 사람을 가리켜 '개만도 못하다'고 욕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것은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성도답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에 보답할 줄 아는 것입니다.
복의 개념을 구약에선 '샬롬' 즉 '평강'으로 이해하여, 히브리 사람들은 평강을 가장 큰복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이 복을 '카리스' 즉 '은혜'라는 말로 이해합니다. '은혜'란 무자격한 자에게 부풀어지는 호의를 말합니다. 신약성경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1:1)는 말로 시작하여 다윗은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받은 사람으로, 그의 계보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시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며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행13:22)는 말씀을 하심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그 놀라운 은총을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떤 신앙인격이었기에 이토록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입고 복된 자로 살 수 있었을까요? 첫째,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는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은혜는 은혜를 은혜로 아는 자에게만 은혜가 은혜될 수 있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삼하7:1). 다윗은 지금 이스라엘 주변의 모든 적들을 정복하고 그 자신은 궁중 안에서 평안히 삶을 누릴 수 있는 인생의 전성시대를 맞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당시 세계 최강의 나라를 이루었고, 다윗의 주변에는 그를 돕는 많은 인물들이 몰려들어, 이제는 자신이 직접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도 왕궁 안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는 안정된 토대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처럼 모든 원수를 파하고, 자신의 인기가 점점 높아 갈 때, 루이 14세처럼 '짐이 곧 국가다'라고 말할 수 있는 유혹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었지만, 이것이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았습니다.
다윗은 처음부터 왕이 될 만한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양치는 목동의 집안에서 팔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여러 형들에게 구박받고 따돌림당하며, 선지자 사무엘이 찾아왔을 때, 다른 형들은 모두 집에서 사무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식사하고 있을 때, 다윗은 그 자리에 끼지도 못하고 들에서 양이나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랬던 이 다윗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기골이 장대하고 얼굴이 준수했던 왕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왕에 오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왕위에 오른 후에도 하나님은 계속 다윗을 축복하셔서 이스라엘의 영토를 확장시켜 주셨고, 그 세력을 떨쳐 당시 이스라엘을 세계 최대 왕국으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그는 이처럼 성공한 시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생각합니다. 사무엘하 5장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두로 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절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매 그들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으니,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알았더라"(삼하5:11-12).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높여 이스라엘 왕을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이 나라를 이렇게 위대한 나라로 삼아주신 것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은혜가 은혜될 수 있으려면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엄청난 은혜가 주어져도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소용없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은혜로 깨닫게 하는 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탈무드]는 "교만한 자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기란 당나귀한테 음악을 가르치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교만한 자는 몇 십 년 교회 다녀도 은혜를 못 받고, 그 많은 날들을 기도해도 은혜 받지 못합니다. 어느 집 막내가 7살인데 밥을 잘 먹지 않고 군것질을 자주하자, 아빠가 옆집 가게에 돈을 맡기면서 우리 애가 먹고싶어하면 하면 주라고 부탁했습니다. 어느 날 꼬마가 바나나를 한 송이 들고 오면서 말합니다. "아빠, 가게 아저씨가 내가 착하고 예쁘다고 이것을 그냥 주셨어요."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다윗은 이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자 합니다. 본문 2절입니다.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삼하7:2). 자기는 백향목왕궁에 살고있는데, 하나님의 전은 아직 천막으로 되어 있는 것이 너무 황송하여, 하나님의 전을 지어 봉헌하고자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행7:46).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자, 어떻게든 이 은혜를 보답하고자 했습니다.
다윗은 '내가 이렇게 영화를 누리고 있는 것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덕분인데, 지금 하나님의 전은 휘장 가운데 있으니, 과연 나 혼자 이렇게 호의호식하고 있는 것이 올바른 일인가?"하며 자책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귀한 은혜를 깨닫고 보니, 무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싶은 열망이 생겨,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전을 지어드리고자 하는 생각으로 그 일을 위해 자기의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 한 노파가 비서에게 대통령을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당시 링컨은 정적들의 비난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특별한 용건이 없어 보여 비서진은 설득하여 돌려보내려는데 마침 링컨이 비서실에 들렀습니다. 노파는 대통령에게 "잠간이면 됩니다. 잠시만 만나주십시오"하자, 링컨이 집무실에 들어오게 한 후 물었습니다. "부인,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런데 노파는 뜻밖에 이런 말을 합니다. "아무 것도 저를 도와주실 것이 없습니다. 제가 부족하지만 대통령님께 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국정에 늘 분주하신데 조금이나마 수고에 보답하려고 백성들의 감사한 마음을 담아드리려고 각하가 좋아하시는 과자를 만들어 가져왔습니다. 우리는 각하를 사랑하고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링컨은 이 짧은 순간 모든 스트레스가 달아나고 행복한 마음을 가졌다고 회상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늘 달라고만 조르다, 어느 때 아무 조건 없이 받은 은혜에 대해서 온전히 하나님께 감사만 드린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우리가 은혜를 모르고 살 땐 모든 것이 마땅치 않고 세상은 삭막하기만 하지만, 내가 받은 그 많은 사랑을 깨닫고 보면 아직도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고, 이 땅은 살만한 곳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많은 이들의 사랑과 도움을 받고 살아왔습니다. 오늘 아침 내가 먹은 한 끼의 밥도 땀흘려 농사지은 농부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가만히 앉아 밥지어먹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발전을 위해 수고하는 이들이 있어 우리는 그 전기를 통해 이렇게 불 밝히고, 또 에어컨을 켜고 편안하게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또 국군장병들의 수고가 있기에 우리는 적의 침략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안연하게 생활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받은 은혜는 많고 큰데, 이것을 깨닫느냐, 깨닫지 못하느냐에 따라 그 마음가짐은 제각각입니다.
셋째,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그 뜻에 순종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하나님의 전을 지어드리고자 할 때, 이 일을 먼저 하나님의 종 나단에게 보고합니다. 이런 일이라면 그냥 왕이 임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할텐데, 그러나 다윗은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후에 이 일을 추진하려고 합니다. 나단이 처음엔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 하니라"(삼하7:3)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날밤에 하나님께로부터 성전을 짓는 일은 다윗에게 허락되지 않았다는 말씀을 받습니다. 이때도 다른 왕 같으면 "내가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짓겠다는 데, 왜 안 된다는 말이냐? 왕이 하려는 일을 감히 선지자가 막는단 말이냐?"하며 그냥 밀어붙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나단을 통해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성전을 지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재앙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거절하실 때 겸손히 하나님의 거절을 수용할 줄 아는 인격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성전을 지을 수 없다고 하실 때, 그 즉시 그가 성전을 지을 수 없는 이유를 밝히신 것은 아니라, 나중에야 "하나님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전쟁을 많이 한 사람이라 피를 많이 흘렸으니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대상28:3)며, 다윗이 전쟁을 통해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성전을 지을 수 없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다윗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실 때도 하나님께 순종하고 감사 드렸습니다. 이런 다윗을 하나님은 마음에 들어 그를 통해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하시며 그를 쓰셔서 위대한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는 언제나 나단이나, 갓과 같은 영적 지도자들과 깊은 교분을 맺고, 그들에게서 지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점이 다윗과 솔로몬의 차이입니다. 솔로몬에 대한 기록을 보면, 놀랍게도 선지자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자기 머리 좋은 것만 믿고, 제 생각대로 행했기에 그가 젊은 날, 방탕과 향락에 빠졌어도, 아무도 그를 책망하거나 바른길로 인도해주는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생을 허송한 뒤에 뒤에야 후회하며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나니"라며 자기 인생의 허무함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당신의 친구를 내게 보여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줄 수 있다." 주변에 만날 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신앙적인 아름다운 간증을 하는 사람들과의 영적인 교제가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러나 말만 꺼내면 교회에 대해 비판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조롱하고, 신령한 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영적으로 재앙입니다.
건강 제약품 멘소래담(Mentholatum)으로 백만장자가 된 앨버트 알렉산더 하이드는 경제공황 때 10만 달러의 빚을 졌다가 빚잔치를 한 후 새롭게 결심하고 시작한 것이 십일조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제정신이냐며 비난하자 "내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빚부터 갚아야한다는 것이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멋지게 재기했고 10의 2, 3, 4, 아니 나중에는 10의 9까지도 드리는 전설적인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 늘 유혹 받는 것은 '다음'에 대한 걱정입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가 아닙니다. 지금 현실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우며 여기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순종입니다. 오늘의 난관 앞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결단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당연한 도리부터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원리는 이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이것을 깨달은 성도의 믿음과 감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하며 감사할 때, 하나님은 이런 믿음에 대하여 축복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다윗도 목동이었던 그를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사랑해주시자, 이에 대해 다윗이 감사 드리자, 하나님은 다윗에게 놀라운 축복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원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갚아주신 축복은 무엇입니까? 첫째, 다윗의 이름을 존귀하게 해주셨습니다. 본문 9절입니다.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삼하7:9). 성경에는 다윗이란 이름만도 903개 절에 1,091번나 나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아브람이란 이름과 합쳐 288번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울의 이름이 192번, 베드로 168번 나오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얼마나 존귀하게 해주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왕이요, 민족 지도자로 자리 매김 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나라는 국기에 여섯 모가 난 별을 그려놓고 '다윗의 별'이라 칭하며 그를 기리고 있습니다.
위대한 사람에게 위대한 이름이 있고, 수치스런 사람에겐 부끄러운 이름이 있습니다. 그 누구에게나 그 이름만 대면, 비난이나 경멸, 천대를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를 존중히 여기고, 신뢰하며, 그 이름에 존경과 찬사를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예수님까지도 그를 존중히 여기셔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이름으로 기억될 수 있으리라 여겨지십니까? 아름답고 존귀한 이름입니까, 아니면 부끄럽고 수치스런 이름입니까?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그 이름을 남긴다고 했는데, 우리는 존귀한 이름을 얻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자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친히 다윗의 삶을 책임져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삼하7:11). 하나님은 다윗을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하게 될 것과, 그의 집을 세워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전쟁터에 나가 싸웠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싸워주셔서 그의 대적을 물리쳐 안전하게 하시며, 다윗이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겠다고 하자, 하나님께서 그의 가문을 세워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일을 해주십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어느 성공적인 무역업자에게 대사직을 맡아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는 이 커다란 명예를 베푼 여왕에게 감사했지만, 자기가 외국에 나가면 자기 사업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게 되어 재정적으로 큰 손실을 볼까봐, 이 직무를 면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여왕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대는 외국에 나가 나의 일을 맡아서 돌보면 그대의 일은 내가 돌보리다." 그래서 그 사업가는 대사직을 수락하고 외국에 나가 몇 년 동안 나라 일을 돌보았습니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여왕은 약속한 대로 그의 사업을 아주 잘 돌봐주어서 자기가 사업을 맡았을 때보다도 훨씬 회사가 성장해 있었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은 내게 관계된 모든 일들을 맡아주시고, 또 책임져 주십니다.
셋째, 자손의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12절 말씀입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삼하7:12). 다윗은 밧세바와의 무서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엄한 징계를 받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다윗과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역사상 가장 지혜로웠다는 솔로몬이 태어나기도 했습니다. 다윗이 그토록 건축하여 봉헌하고자 했던 성전을 바로 이 아들이 맡아서 아버지의 소원을 이뤄드렸고, 이스라엘을 더욱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부모의 소원을 이루는 자식을 둔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큰 축복임을 연세 드신 분들은 누구나 인정하실 것입니다. 훌륭한 자식을 둔 것처럼 큰복이 없습니다. 다윗은 이런 자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동아대 의대 김덕규 교수는 '환자, 의사를 깨우치다'라는 제목의 글을 썼습니다. 칠순 정도 되시는 할머니가 외래 진찰실에 들어서자마자 '선생님 절 받으세요'하며 진찰실 바닥에서 큰절을 하기에 김 교수도 벌떡 일어나 황급히 맞절을 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신장에 종양이 발견되어 김 교수에게 찾아오자 김 교수는 수술이 필요하다며 신장종양을 잘 다룰 비뇨기과교수를 소개해 수술 받게 했습니다. 퇴원 후 첫 병원 내원 시 이렇게 김 교수를 일부러 찾아와 '좋은 의사 선생님을 소개시켜 주어 신장암 수술을 잘 받고 낫게 해주어서 정말 고맙다'고 인사한 것입니다. 의사라면 누구나 다하는 일인데도 김순남 할머니는 자신보다 한 참 나이 적은 교수에게 큰절을 한 것에 충격을 받고, 자신은 과연 하나님께 이런 진정어린 감사를 표현한 적이 있었는가 반성하며 말합니다. "나는 그녀가 받은 신장암 수술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큰 생명이식 수술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원한 생명을, 그것도 순전히 값없이 오직 은혜로 받았는데, 나는 과연 그녀가 했던 것처럼 자신이 드릴 수 있는 최선의 감사를 하나님께 올려 드렸는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었다. 지체 없이 의자에서 내려와 연구실 바닥에 엎드렸다. '하나님, 정말 죄송합니다. 늦었지만 이 절 받으십시오. 제게 영원한 생명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심장이나 간이식 받은 사람은 자기에게 장기기증해준 사람을 생명의 은인으로 알고 감사하는데, 우리에게 당신 전부를 주신 주님께 우리가 얼마나 감사하고 있을까요?
장영희의 에세이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에는 '미리 갚아요(Pay Forward)'란 실화 영화를 소개합니다. 캐서린 하이드는 몰고 가던 트럭에 갑자기 불이 났는데 어디선가 건장한 남자 두 명이 도와주려고 달려오자 당황한 그녀는 그들이 자신을 해치려는 줄 알고 오지 말라고 소리칩니다. 하지만 두 남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불을 꺼주고 떠나버립니다. 결국 그녀는 감사하다는 말조차 하지 못한 것에 죄의식을 느끼고 그 미안함을 벗어나기 위해, 이제부턴 은혜를 아예 '미리 갚자'고 생각하며, 앞으로 살아가며 입을 은혜에 대한 감사와 보답을 미리 하면서 실천한 이야기를 [미리 갚아요]라는 소설로 집필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소설을 읽은 소년이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좋게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오라는 학교과제로 [미리 갚아요] 캠페인을 시작합니다. 즉 자신이 빚질 사람 세 사람에게 미리 은혜를 갚고자 친절과 호의를 베풀고, 그 세 사람은 각기 또 다른 세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세 사람이 되고, 세 사람이 아홉 사람이 되고, 아홉 사람이 스물 일곱 명이 되게 해서 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캠페인을 벌인 것입니다. 은혜와 친절도 지나고 나면 잊어버리기에, 미리 갚아버리면 더욱 은혜가 넘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이 믿음이라면,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축복입니다. 받은 바 은혜에 보답함으로 더 풍성한 은혜 속에 살아가시길 기원합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