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17 71회
"남을 비판하지 말라!"
2019년 2월 17일 주일예배
마태복음 7 : 1 - 12 ; 잠언 12 : 18 - 19
영국 최초의 여성의원인 애스터 여사는 말이 거칠고 험하기로 유명했습니다. 한 번은 그녀가 처칠 수상에게 이런 악담을 쏘아붙였습니다. "처칠씨, 내가 만일 당신의 아내였다면 당신 커피에 독을 탔을 거예요!" 그러자 처칠이 이렇게 되받았습니다. "애스터 여사, 내가 만일 당신의 남편이었다면, 그 커피를 즉시 마셔버렸을 거요!" 당신 같은 여자와 사느니 죽는 게 낫다며, 악담을 독설로 되돌려줬습니다.
헬라 신화에 '프로크루스테스(Procroustes)의 침대' 이야기가 있습니다. '프로크루스테스'라는 장대하고 날쌔고 교활한 강도가 아테네로 가는 길목에 철제 침대를 가져다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아 침대에 뉘어봐서 몸이 침대보다 크면 잘라내고 침대보다 적으면 잡아당겨 늘여서 죽입니다. 자기 철 침대의 잣대로 사람을 재단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사람들이 자신의 잣대로 남을 재기 일쑤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잣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흔히 '객관적으로'라고 말하지만 그것도 자기 주장일 뿐입니다. 객관이라는 말까지 주관적일 만큼, 인간은 자기 중심입니다.
스코틀랜드의 한 대학에서 어떤 교수가 강의시간에 질문을 하고는 거수로 의견 표시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 곳에선 거수는 보통 오른 손을 드는 것이 상식인데, 한 학생이 반대로 왼손을 들었습니다. 교수는 이것이 자기에게 대한 야유라고 여기고 그 학생에게 오른 손을 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왼손을 들고 있기에 화가 나서 그 학생에게 다가가 그를 쏘아보며 야단치려고 하는데, 그의 오른손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학생은 비통한 얼굴로 "전쟁 중에 오른 손을 잃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교수는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며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 일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 없인 올바른 비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석가 벵겔은 "명확한 지식과 사랑이 없이는 비판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25년 동안 MBC 기자와 뉴스 앵커를 하다 사직하고, 목사가 된 조정민 목사는 KBS '무한도전'의 '나쁜 기억 지우개 특집' 멘토로 출연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비리 대상자를 집중 취재해서, 비리를 폭로함으로써 죄를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게 사회정의라고 생각했다. 비리를 저지른 사람을 뉴스로 부각시키고, 매장 당하기를 원하거나, 법적 제재를 받도록 기꺼이 고발도 했다. 한계에 부닥친 것은 그 사람이 비리를 잠시 멈췄을 뿐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기자들이 비판하고 비리를 폭로한다고 해서 결코 세상의 본질이 바뀌지 않는 다는 결론을 얻었다. 사회변혁을 위해서는 권력으로 가는 '대증적' 변화와, 힘 자체를 품어 안아 무력화하는 '본질적'인 변화가 있는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본질적 변화를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그는 비판과 정죄로는 안됨을 알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회를 장악했던 바리새인들의 종교는 율법주의 종교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배제되고, 오직 '하라! 하지 말라!'는 율법만 강조되면서 사회는 서로 정죄하는 비판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어, 하는 사람은 하지 않는 사람을, 하지 않는 사람은 하는 사람을 비판하는 사회분열의 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잠시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잠12:18-19)라고 말씀했는데, 서로에 대한 비판만 무성하던 때, 예수님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7:1)며 비판에 대하여 엄히 경계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비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뜻을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잘못된 것도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그냥 호도해선 안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비판'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비판'이란 '분별'과 같은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모든 진실에 대해 눈감아버리라'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본문에 이어진 말씀을 보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 주님은 세상 사람들은 넓고 편한 길을 선택하지만, 우리는 '좁은 문'과,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을 분별하여 그 길을 취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주님은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을 비교하고 나서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다"(마7:26)며 바른 분별력을 가질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비판을 뜻하는 헬라어 '크리노'(krino)는, '저주'나 '심판'(judgement)의 뜻으로, '재판관이 재판정에서 어떤 사람에 대해 결정적인 최후의 형벌을 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약점은 숨긴 채, 하나님처럼 자기는 절대로 옳고, 사람들은 틀리다며 정죄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와 약점을 비판함으로, 도덕적 우월적 위치에 서려했으나, '위선'이라는 또 하나의 죄를 더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비판을 하지 말아야 합니까? 첫째, 비판은 비판의 악순환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7:1-2). 비판받는 사람은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을 비판할 기회를 찾기에 비판은 비판을 낳는 비판의 악순환을 주님은 아시고 "비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영국의 극작가 벤 존슨이 어느 집에 초대를 받았는데,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자, "이 음식은 영락없이 '돼지 먹이'로군!"라고 비판하자, 그 집 주인이 "정말 그렇군요. 그러니 한 접시 더 드려야겠군요"하여, 그를 돼지로 몰아붙였다고 합니다.
둘째, 사람은 비판한다고 쉽게 변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7:6). 개나 돼지에게 진주를 준다고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듯, 당시 바리새인들도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예수님을 죽이려고 대적했습니다. 톨스토이는 "모든 사람은 인간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자기 자신이 변화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오산중학교 교장이었던 조만식 장로님의 산정현 교회에 제자인 주기철 전도사님이 시무하였습니다. 어느 주일 조 장로님이 손님과 이야기하다 예배시간에 늦어 설교하는 도중에 들어오자 전도사님이 장로님에게 "그대로 서서 계십시오"라고 말하니, 장로님은 그대로 서서 예배를 드리고, 잘못을 고백하고 교회를 잘 받드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골교회 전도사님이 예배시간에 늦게 나온 장로님에게 "장로님, 그 자리에 서있으십시오"했다가, 그 날로 쫓겨나고 말았다고 합니다. 조만식 장로님 정도의 인격이나 믿음이 돼야, 이런 책망도 받아들이지 웬만한 사람은 물고 뜯습니다.
셋째, 남을 비판하면 자신의 기도가 막히게 됩니다. 7절에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라고 하셨는데, 비판하게 되면 인간관계의 단절을 가져오고, 인간관계의 단절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을 가져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인간관계의 단절은 하나님과 관계의 단절을 초래하여 기도를 방해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며 기도를 교훈하시기 전에 먼저 '비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에 대한 비판이 기도에 장애가 됩니다. 베드로는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7)며, 부부의 화목이 기도로 이어짐을 말했습니다.
미국에 이민간 어떤 사람은 22년 동안 교회를 108번이나 옮겼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1년에 다섯 번 꼴이고, 두 달에 한 번 교회를 바꾼 셈입니다. 문제는 교회를 대하는 그의 태도였습니다. 그는 새 교회에 가는 순간부터 단점을 찾기 시작하고 목사의 허물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선지자처럼 떠벌리고 다닙니다. 주보, 성가대, 주방, 교인들의 태도 등 하나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습니다. 108교회의 단점을 낱낱이 노트에 적어 보물처럼 간직했습니다. 그가 죽자 그 어느 교회도 그의 장례를 집례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108번째 교회에서 치러주었습니다. 목사님은 장례식 날 "이 사람의 방랑이 108번째로 끝나서 천만 다행입니다"라며 한숨지었습니다. 내 삶이 건강하고 영혼이 잘 되려면 좋은 것을 보고, 좋은 점을 말해야 합니다.
넷째, 비판은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자신도 심판 받게 합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마7:1-2a). 여기 '비판을 받을 것이요'라는 말씀은 미래형태로 '앞으로 비판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마지막 심판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어느 날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될 때, 하나님께 관용을 베풀어달라고 호소해야 할텐데, 이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세상에서 사는 동안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베풀었느냐?" 그 날을 미리 예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다른 이를 비판하는 일을 피할 수 있습니까? 첫째, 자신의 허물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3). 자기 눈에 들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상대방의 눈의 티는 결코 문제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약점을 아는 사람은 결코 쉽게 남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남을 비판하려는 그 유혹이 내 속에서 불쑥 일어날 때마다, 나 자신은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헬라인들의 설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은 두 개의 자루를 가지고 다니는데, 하나의 자루는 앞에 달고서 남의 허물을 집어넣고, 뒤에 맨 자루는 자기 허물을 집어넣고 다닌다고 합니다. 뒤에 있는 자루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듯 자기 허물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앞의 자루는 남의 허물로 가득 차 있는데, 뒤에 달고 있는 자루는 자기 허물이 보이지 않아서 늘 텅 비어있다고 합니다.
"겸손이란 무엇입니까?"하고 묻는 수도사에게 한 원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간주하며, 다른 모든 사람 밑에 자신을 두는 것이다." 그가 다시 물었습니다. "스스로를 모든 사람 밑에 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원로는 "그것은 다른 사람의 죄에 관심을 갖지 않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항상 자신의 죄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겸손은 자신은 울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존재임 깨닫고, 끊임없이 자신을 책망하고 자신을 개선해 나가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글이 있습니다. - 내가 천국 문에 들어섰을 때 놀란 이유는 천국의 화려함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 있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나의 삶 중에 나를 힘들게 하고, 괴롭혔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 도둑들, 거짓말쟁이들, 죄인들 등등... 거기에는 중학교 2학년 때 내 점심값을 두 번이나 훔친 아이도 있었고, 그 아이 옆에는 한 번도 좋은 일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오랜 이웃도 있었다. 나는 화가 나서 예수님의 옆구리를 슬쩍 치며 물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어떻게 저런 사람들이 여기 있나요? 이건 실수하신 겁니다. 그런데 왜 저 사람들은 말 한마디 없이 찌푸린 얼굴을 하고 있나요?"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쉿! 저 사람들은 모두 충격을 받았다. 어느 누구도 이곳에서 너를 보리라 생각하지 않았거든." 자신을 먼저 살펴야합니다.
둘째,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대속의 종교인데, 대속(代贖)이라는 말을 '대신(代身)'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을 대신하셨습니다. 그는 내가 받아야 할 형벌, 내가 받아야 할 처벌, 내가 받아야 할 정죄의 자리를 대신 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피를 흘리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주님은 사람들을 바라볼 때마다 불쌍히 여기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을 이해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비판하기 전에 그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을 생각해 보신 일이 있습니까?
[나와 남의 차이]라는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내가 침묵하면 생각이 깊은 것이고, 남이 침묵하면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이다. 내가 늦으면 피치 못할 사정 때문이고, 남이 늦으면 정신 자세가 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화를 내면 소신이 뚜렷한 것이고, 남이 화를 내면 인간 됨의 그릇이 모자란 것이다. 내가 통화중이면 업무상 긴급한 것이고, 남이 통화중이면 사적인 일일 것이다. 내가 생각해낸 것은 창조적이며 혁신적인 것이고, 남이 생각해 낸 것은 웬 뜬구름 잡는 소리. 내가 회의중이면 남은 잠깐 기다려야 하고, 남이 회의 중이어도 나는 즉시 만나야 한다. 내가 아프면 일로 인한 피로 때문이니까 쉬어야 하고, 남이 아프면 기본 체력이 의심스러운 것이다. 내가 약속을 어기면 어찌하다 보면 사람이 그럴 수 있는 것이고, 남의 약속을 어기면 사람이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입장에서 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입장이 되기 전에는 그를 판단하지 말아야하는데, 대부분의 경우는 그저 내 눈에 보이는 대로 상대방을 보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해하게 되고, 상처를 주고받기도 합니다. 어린 아들과 함께 길을 걷던 아버지가 생각 없이 걷다가 아들이 뒤에서 뛰다시피 따라오는 것을 보고는, 걸음을 멈추고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애야, 내가 너무 빨리 걷니?" 숨가쁘게 쉬던 아들이 아버지를 빤히 쳐다보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요, 빨리 걷는 것은 오히려 저인 걸요." 아버지는 아버지 입장에서 자신이 빨리 걷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빨리 걸었던 것은 어린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 비해 보폭이 컸을 뿐, 정말로 빨리 걸어야 했던 것은 어린 아들 쪽이었던 것입니다.
나그네가 강가를 지나가다 보니 한 소년이 강물에서 물장구를 치고 있는데 강가에는 '수영금지'라는 푯말이 세워져있었습니다. 나그네가 소년을 야단쳤습니다. "야, 이 녀석아. 이 수영금지란 푯말이 보이지 않니? 그런데 이곳에서 수영하면 어떻게 해? 어서 나와라." 그때 소년이 다급한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나는 지금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단 말이에요. 야단만 치지 말고 제발 나를 건져주세요." 나그네 눈에는 소년이 수영금지 구역에서 수영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소년은 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소년에게 필요한 것은 야단이 아니라 어서 그를 구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자기 입장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야합니다.
셋째, 내가 주는 대로 되돌아옴을 알고 비판대신 축복해야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주님은 비판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충고로 끝내지 않으시고, 적극적으로 그 사람을 대접하라고 하십니다. 이 황금률과 비슷한 교훈은 많습니다. 그 당시 유태교 학자인 힐렐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네가 싫은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 필로(Philo)라는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게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행치 말라." 동양의 성현도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이 말하는 소극적인 교훈을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가 남을 적극적으로 대접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마10:12-13). 어느 집에 평안하기를 빌었을 때,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그 평안의 그 집에 임하지만, 만약 합당치 않으면, 너희가 빈 평안이 네게로 돌아오리라 하셨는데, 반대로 내가 누구를 비판하거나 저주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다른 이를 축복하는 것이 이익이겠습니까, 비판하는 것이 이익이겠습니까? 실리적으로도 비판보다는 칭찬이 내게 이익입니다.
오래 전 런던에 아주 유명한 세 목사님이 같은 시기에 함께 일하고 있었습니다. 한 분은 그리스도교회 목사님인 마이어(F.B Meyer)라는 분이고, 또 한 분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목회했다는 침례교회 스펄전(Spurgeon) 목사님이며, 다른 분은 웨스트민스터 교회의 캠벨 몰간(Campbell Morgan) 목사님입니다. 그런데 성공회 몰간 목사님이 잠시 미국에서 사역하다 영국으로 돌아와서 웨스트민스터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을 때, 마이어 목사님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몰간 목사님이 미국에 있을 때는 기도하기 좋았는데 같은 도시에서 일하게 되니깐 시기가 생경 그를 위해 기도가 나오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마이어 목사님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 마음에서 이 시기와 질투를 없애주시옵소서." 그런데 기도해도 그 시기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마이어 목사님에게 이런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네 기도를 바꿔라. 질투를 없애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그들을 축복하는 기도를 하라"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스펄전 목사님과 캠벨 몰간 목사님과 그 교회들을 축복해주시옵소서." 그리고 나니깐 마음속에 평안과 기쁨과 자유가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교회의 공개 기도석상에서 마이어 목사님이 이런 유명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몰간 목사님의 교회를 축복해주셔서, 사람들이 메워지게 해주시고, 들어갈 자리가 없거든 우리 교회로 보내 주시옵소서." 이 세 분은 아름답게 주님을 위해 사역했으며, 이 세 교회는 함께 성장했습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미국은 부정적인 감정으로 낙담한 사람들에 의한 생산성하락으로 매년 2,500-3,000억 달러의 경제적 손실을 입는다고 합니다. 비판에 의한 좌절을 이겨내야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미국 역사상 취임 당시 가장 신랄한 비판을 받은 대통령은 링컨이라고 합니다. 정치 잡지 [하퍼스 위클리]는 그를 '더러운 거짓말쟁이, 독재자, 도둑, 허풍쟁이, 바보, 약탈자, 괴물, 무식쟁이, 늙은 건달, 위선자, 날치기, 폭군'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링컨은 그 같은 비판을 무시하고, 자신이 가야할 길을 소신을 굽히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삶으로 가르치는 것만 남는다]는 책의 저자인 김요셉 목사님은 어머니가 미국인이어서 자랄 때, 자신의 피부색과 높은 코 때문에 놀림과 왕따를 당하며 고통 속에 자랐습니다.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여름, 어머니의 고향 미시간의 기독교학교에 입학했을 때입니다. "처음 보는 미국인 학교 정문이 점점 가까워지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4학년 교실에 배정되었다. 첫 시간은 스펠링 수업 시간이었다. 걱정이 태산이었다. '난 들을 줄만 알지 스펠링은 모르는데, 어떡하지!'" 선생님의 질문에 내가 아는 단어는 하나도 없었다. 점점 내 차례가 다가오자 나는 그만 숨어 버리고 싶었다. '어떻게 하지? 하필이면 스펠링수업이 첫 시간일 게 뭐람! 앞으로 창피해서 학교를 어떻게 다니지?' 고개가 점점 수그러졌다. '어쩌면 전학 왔다고 선생님이 봐주시지 않을까?' '김요셉! 앞으로 나와 봐!' 내 기대는 무참히 깨졌다. 봐주기는커녕 칠판 앞으로 불러내시다니! 주먹을 움켜쥐고 눈을 내리깐 채 칠판 앞에 섰다. 선생님은 단어카드를 들고 내 옆으로 다가오셨다. 바지에 오줌을 싸기 직전이었다. "너희들, 이야기했지? 한국에서 온다는 선교사님 자녀 말이야. 얘가 바로 그 요셉이야. 요셉이는 한국에서 태어나 우리와 다른 말을 배우며 자라서 한국어를 아주 잘한단다. 요셉아, 선생님 이름을 한국말로 써줄래?" "네?" 난 내 귀를 의심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한국어로 쓰라고? 영어가 아니고? 그것도 달랑 이름 하나를?' "선생님 이름은 샤프야!" 나는 칠판에 선생님의 이름을 한글로 또박또박 적었다. '샤프' 까짓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탄성과 환호가 터져 나왔다. "내 이름도 한국말로 써 줘! 내 이름은 탐이야!" "나는 메리야!"… 이름을 적을 때마다 아이들은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근심과 두려움이 순식간에 기쁨과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그 날 수업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못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아닌, 할 줄 아는 것에 대한 선생님의 격려가 한 소년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누구에게서든 비판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대신 칭찬과 인정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이 먼저 남을 비판하기보다, 그를 칭찬하고 격려함으로 그것이 내게 돌아오게 해야하겠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