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의 성숙한 모습

2020-08-23 109회

동문교회
031-701-0691 / 경기도성남시분당구야탑동 523번지
손세용 목사

시편 112장 4~5절

설교요약 :

"신앙인의 성숙한 모습"
2020년 8월 23일 주일예배
고린도전서 9 : 16 - 27 ; 시편 112 : 4 - 5


한 청년이 여자친구와 데이트하면서 "키스해도 되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수줍은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청년은 "당신 벙어리예요?"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여자는 "당신은 몸이 마비됐어요?"라고 되물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여자가 표현하려고 한 것은 "무슨 말이 필요하냐. 이젠 행동으로 사랑하면 되지 않느냐"였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도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행동으로 보여주지 못하면, 우리도 이 청년처럼 '몸이 마비되지 않았느냐'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한 미성숙한 남녀가 준비되지 않은 채 결혼하여 여자아이를 낳았습니다. 이들은 알코올중독에 마약중독자들이었습니다. 부인은 시간이 흐르면서 정신분열 증세마저 보이며 아이를 귀찮아했습니다. 어느 날 부부가 한 바탕 싸운 후 남편이 집을 나가 버리자, 부인이 아직 세 살도 안된 여자아기를 번쩍 들어서 부엌의 닳아 오른 오븐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아이의 비명소리에 이웃집의 신고로 경찰이 도착하여 이 여자아기는 목숨을 구했습니다. 아이는 중화상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받았습니다. 화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치료되어갔지만, 문제는 이 소녀의 정신상태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칼로 찌르는 자해증세를 보이고, 사람을 기피하여 입을 굳게 닫은 채 말을 안 하는 실어 증세에다, 방구석에 처박혀 눈동자는 항상 출혈된 채 허공을 더듬는 심각한 정신불안증세를 노출하였습니다. 이 소녀에게 국가가 배정한 정신과 의사가 치료했으나, 좀처럼 증세는 호전되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배정된 치료기간이 끝났지만 기독교 의사인 그는 이 소녀가 너무 불쌍하여 자원하여 이 소녀를 돕기로 결심합니다. 오래 동안 대화치료, 약물치료, 음악치료, 그림치료 등을 시도했으나 별 효험을 얻지 못하자, 이런 실험치료를 해보았습니다. 이 소녀가 살던 모형 아파트를 만든 다음 아빠, 엄마, 소녀 인형을 만들고, 아빠 엄마 인형이 싸움을 합니다. 아빠 인형이 집을 나간 다음, 엄마인형이 소녀 인형을 들어 오븐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 순간 수년동안 닫혔던 소녀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튀어나옵니다. "난 너를 미워한단 말이야!"(I hate you!). 그런데 그 다음부터 이 소녀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비로소 현실에 직면하면서, 이 의사와 대화를 하고 그때부터 치료가 시작되면서, 더 이상 도피하지 않게 됩니다. 하루는 소녀가 의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선생님이 하나님이에요?" 의사가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보낸 의사지." 소녀가 또 묻습니다. "하나님도 선생님처럼 나를 사랑하시나요?" "그럼 사랑하시고 말고. 그는 우리를 죽도록 사랑하신다. 그는 우리를 위해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고, 그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지. 그 하나님이 또한 나를 네게 보내셨단다." 이 하나님이 보낸 의사의 끈질긴 사랑으로 소녀는 마침내 회복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christian'이라 하고, 그리스도인 아닌 사람을 'Non christian'이라고 하는데, 미국의 기독교 리서치기관 바나그룹에선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 기독교적이지 않고, 관대하지 않으며, 야만적인 사람'을 [Unchristian]이라고 했는데, 우리말로는 [나쁜 그리스도인]으로 이름 붙였습니다. 1541년 제네바 시의회가 칼빈을 다시 초청했을 때, 시의회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진심으로 나를 다시 부르시는 것이라면 여러분 가운데 만연해 있는 범죄와 성적 방탕함을 청산하십시오. 내 생각에 '복음의 가장 큰 적들'은 교황도, 이단도, 유혹하는 자들도, 독재자도 아니고, 바로 '나쁜 그리스도인들' 입니다. 선한 행위가 없는 죽은 믿음이 무슨 쓸데가 있겠습니까?" 이 말은 오늘 우리 시대에도 해당되는 말로 여겨집니다.


사람은 누구나 나름의 기질과 약점이 있는데, 예수 믿고 성격까지 고친 사람은 바울뿐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담즙질 성격으로, 강한 의지와, 냉철한 결단력과, 한번 목표를 정하면 끝까지 투지를 불태우는 적극적인 성품이지만, 사람보다 일을 중요시하여 일을 위해 사람을 희생시키고, 자기 확신이 지나쳐 교만과 독선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의 감화와 고난을 통해 연단되어, 성숙한 신앙인이 됩니다. 오늘 말씀은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첫째, 성숙한 신앙인은 하나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과 투철한 소명감을 갖습니다.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9:16)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소명에 붙들려 복음의 일꾼이 되었지만, 때로는 이 일이 싫어서 복음을 '부득불' 전했다고 고백합니다. 사실 어떤 믿음 좋은 사람도 항상 뜨겁고 항상 열심이 넘치는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영적으로 침체될 때도 있고, 때로는 모든 일을 그만두고 싶은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전파가 기분에 따라 좌우될 일이 아니기에, 그는 '부득불' 이 일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인 중에 괴수인 자신이 죄 사함 받아 사도까지 되었는데, 만약 그 일을 자기 기분이나 형편 때문에 소홀히 한다면 은혜에 대한 배신이라는 신앙양심과 철저한 책임감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까지도 기분과 형편에 좌우될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이러면 하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하지 않겠다'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마치 내가 주인인 것처럼, 내 형편에 따라 할 수도 있고, 또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은 내가 할 일이 하기 싫고 그만두고 싶어도, 내가 해야 한다면, 내가 맡은 일은 끝까지 감당합니다. 미숙한 사람은 하고 싶은 일만 하려하지만, 성숙한 사람은 해야할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고, 내키지 않더라도, 맡은 일을 묵묵히 감당해 나가다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도, 능력도 주시고, 은혜도 주셔서, 우리의 충성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인디언 선교에 전 생애를 바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는 조나단 에드워드, 요한 웨슬레, 윌리엄 케리, 짐 엘리엇 등의 생애를 변화시켰습니다. 그가 질병으로 시달리며 죽음 직전에 썼던 일기를 보면 촌음을 아끼며 하나님의 일에 철저하게 자신을 헌신한 시간에 대한 그의 투철한 의식을 보여줍니다. "10월 11일, 저녁에는 지독한 열과 괴로움을 주는 오한에 시달렸다. 매우 친절한 간호를 받았다. 너무나 무가치한 나에게 이렇게 큰사랑과 관심을 가져다주다니 부끄럽기만 하다. 살고 죽는 문제를 하나님께 맡겨 버린 지금은 내 마음이 평안하다. 이것은 생사를 초월한 놀라운 만족감이다. 이제는 완전히 탈진한 형편이어서 더 이상 사역을 수행하기란 불가능한 것 같다. 다만 한 가지 내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고통은 내가 지금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 않은가 라는 사실이다. 아! 시간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힘이 닿는 데까지 내가 맡은 일을 다하지 못하고 시간을 낭비한다면 이 얼마나 주 앞에 죄송스러운 일인가? 아!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신 그 뜻을 저버리면 안될 텐데.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그분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모습으로 서야 할 터인데."


여러분은 맡겨진 직분과 사명이 싫어, 아무 책임도 부담도 없는 곳에 숨어버리려 하진 않습니까? 도피나 변명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내가 책임지겠습니다'라고 고백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김하인 작가는 [국화꽃 향기]에서 말합니다. "나무는 한 번 자리를 정하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아. 차라리 말라죽을지라도 말이야. 나도 그런 나무가 되고 싶어. 이 사랑이 돌이킬 수 없는 것일지라도..." 꾸준히 꽃피고 열매맺으면서도, 언제나 제 자리를 지키는 나무 같은 사람이 그립습니다.


둘째, 성숙한 사람은 이웃에 대하여 온유한 마음으로 용납하고 받아드립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19-21절). 바울은 모든 사람을 얻으려고, 그 사람에게 맞추어 처신했습니다.


신약성경은, 구원의 진리를 가르치는 케뤼그마와, 성도의 삶의 자세와 윤리를 가르치는 디다케로 나뉘는데, 바울은 케뤼그마에 대해선 어떤 타협도 배격하고, 이에 대해선 자기 생명을 내걸 만큼 철저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8)라며 단호했습니다. 그러나 윤리나 의식에 대해선 매우 융통성이 있었습니다. 시장에서 파는 제사음식에 대해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전10:25)고 했고,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전10:28)며 어떤 고정된 도그마에 메이지 않았습니다. 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다"(엡5:18)고 했지만, 디모데에겐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 5:23)고 했고, 결혼 문제도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고전7:8-9)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때로 자기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여 배척하는 일이 있는데, 참된 믿음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기보다 사람들을 용납하고 수용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롬14:15)며, "만일 음식이 내 형제로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8:13)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있는 대로 받아들이며 그의 유익을 구하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10:24),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15:1).


성 프랜시스가 제자들과 함께 금식을 하며, 시장을 지나가는데 제자 중 하나가 너무 배가 고파서 몰래 죽을 먹다가 걸렸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이 비난하며 '이럴 수 있느냐'고 흥분하자, 프랜시스는 얼른 죽 한 그릇을 마시며 "야, 이렇게 죽이 맛이 있다니..."합니다. 제자들은 눈을 동그래졌습니다. 프랜시스는 금식을 깨뜨린 사람을 정죄하느니, 차라리 금식을 깨뜨리고 서로 판단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만약 이때 프랜시스가 죽을 먹은 제자를 나무랐다면, 그는 왕따를 당하고 말았겠지만, 프랜시스는 곤경에 처한 제자를 위해 스스로 규율을 깨뜨린 것입니다.


셋째, 성숙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선 철저하게 제어하고 다스립니다.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한다"(고전9:27)고 말합니다. 여기 '쳐서 복종케 한다'는 말은 '노예를 길들인다'는 뜻입니다. 자유롭게 살던 사람을 노예로 길들이려면, 때리기도 하고 굶기기도 해서 마침내 '주인님!'하고 고분고분 순종하게 되는 것처럼, 바울은 자신을 주님의 노예로 길들였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택함 받아 구원받았지만, 옛사람이 살아서 이전의 혈기와 기질이 살아서 주님께 순종치 않으려는 자신을 보면서 이를 다스리기 위해 마치 노예를 길들이듯 자신을 고난과 아픔을 통해 길들였던 것입니다.


자기 제어에 실패하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될 수 있습니다. 모세는 40년 간 이스라엘백성을 이끌며 숱한 고생을 했지만, 신광야에서 원망하는 백성들 앞에서 혈기로 지팡이를 두 번 휘두른 일로, 끝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회개할 기회가 주어져 다행이었지, 계집종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여 모두 허사 될 뻔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마지막에 잘못되어 욕된 결과를 남기는지 모릅니다.


지난 해 가까운 친구 선교사가 보낸 [나는 누구인가?]라는 선교편지입니다. - 모 신학대학교의 연구방법론 집중강의가 오늘이 종강이라 민박도 퇴실한다. 신학교에서 숙소비용을 지불하겠지만 그래도 확인해야할 것 같아 민박 주인에게 전화하니 목소리가 잘 안 들린다고 해서 약간 크게 신학교에서 비용 지불한다는 말만하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 남자가 "새벽에 전화를 하려면 조용히 해야지 왜 이리 시끄럽게 떠드느냐"라고 거칠게 말했다. 연장자에게 반말을 하다니 불쾌했지만 "죄송합니다" 정중하게 사과했으나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꽝 문을 닫고 "쌍ㄴ" 욕을 시작하더니 다시 아래층에 내려가 큰 소리로 "씨ㅍ" 등 계속했다. "제가 옆에 분을 생각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했지만 "쪼+ㅈ 이 나이 먹어도 철도 들지 않은 게" 끝나지가 않았다. 전화 때문에 깨워 미안하지만 이 일을 제외하곤 일주일 동안 그가 더 많은 소음을 냈다. 그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방바닥에 숙였다. "용서해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이런 자세로 한동안 있었다. 그가 "왜 이래요. 됐어요. 그만 가세요" 말투도 누그러지고 존댓말을 했다. 나는 "감사합니다" 말하고 돌아왔다. 무릎 꿇고 고개 숙여 잘못을 빌어보기는 평생 처음이다. 목사는 무슨 말과 행동을 해도 참아야 하는 직업적 약자이니 마음놓고 지껄이며 스트레스를 풀어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가? 연하 사람에게 이토록 굴욕적인 행동을 하고도 어떻게 조금도 비굴한 마음이 들지 않고 어떻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온전히 평안한 마음으로 마지막 날 강의를 마칠 수 있었을까? 나는 누구인가? 주님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음을 기억하고 조금이라도 그 은혜에 보답하며 사는 사람이 아닐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있을까요? 첫째, 영적 훈련이 우리 믿음을 성숙케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4:5). 말씀을 읽고 공부하는 훈련, 기도의 훈련, 봉사의 훈련과, 그리고 순종과 침묵의 훈련, 묵상훈련 등을 통해 영적 성숙을 이루게 됩니다. 이것은 말씀과 성령의 감화에 대한 순종 없이 기계적인 종교생활로는 안됩니다. 생각 없이 그저 종교의식에만 참석해서는 믿음이 성숙하지 못하기에, 구체적인 말씀과 기도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그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미국의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먹는 것을 탐하는 습성으로 점점 몸무게가 늘어갔습니다. 부인이 아무리 바가지긁고, 호소하고, 경고해도 듣지 않자, 한번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립니까?" 이 말에 도전을 받은 대통령은 남은 임기 동안 좋은 대통령으로 일하기 위해 먼저 자신의 몸무게를 1년 내에 20파운드 줄이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소식(小食)하고, 운동하면서 몸무게를 줄이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결국 그는 1년 동안 23파운드를 줄였습니다. 그의 회고록에 보면, 몸무게를 줄이고서 정신이 맑아졌고 업무능력도 향상됐으며, 모든 면에서 나아졌다고 했습니다.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나니 훈련이 가능했고, 그런 과정을 통해 결국 목표를 달성한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겪는 시련과 고난이 믿음을 성숙케 합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1:7). 용광로의 뜨거운 불이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금과 순은을 얻게 하는 것처럼, 고난이 우리의 영혼을 순결케 하고, 믿음을 성숙케 합니다. 미우라 아야코는 "병들지 않으면 드리지 못할 기도문이 있다. 병들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기적, 들을 수 없는 말이 있다. 병들지 않으면 우러러 볼 수 없는 얼굴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성도들은 그가 겪는 고난을 통해서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고, 남의 아픔과 고통도 헤아릴 줄 아는 이웃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이해를 갖게 하며, 자신의 영혼을 맑고 깨끗하게 만들어 줍니다.


한 성도가 목사님에게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인내가 없어 쉽게 분노하곤 하는데, 제가 인내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그러자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지요. 주님, 이 형제에게 먼저 환난을 보내주십시오." "목사님, 환난이 아니라 인내입니다. 인내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예, 압니다. 그런데 성경은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는다고 말한답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 많은 경우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인격을 닮아가도록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하시고 그런 중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도, 힘든 상황도 용납하면서, 겸손하고 온유하며 오래 참으시는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믿음의 성숙을 이룰 수 있습니다.


셋째, 성숙한 신앙인들과 교제를 통해 믿음의 성숙을 이룰 수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딤후2:22)라고 권면했습니다. 서양 속담에 "네 친구를 내게 보이라. 그러면 네가 어떤 사람인지 말할 수 있으리라"는 말처럼 사람은 누구나 사귀는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내가 누구를 사귀느냐에 따라 내 영혼이 성숙해 질 수도 있고, 내 믿음이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키 큰 나무숲에 서니, 내 키도 성큼 커 있었다'는 말처럼, 경건하고, 성숙한 사람들과 함께 교제할 때, 나 자신도 함께 경건해지고 함께 성숙한 믿음으로 자라게 됩니다. 반대로 불신앙적인 사람들과 교제하면 나도 신앙을 잃거나 믿음이 침체되기 쉽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공동체와 깊은 연합을 맺지 못한다면 영적인 성숙함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순종도,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소녀가 아름다운 새소리를 내는 카나리아를 한 마리 얻어왔습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자 카나리아에게 따뜻한 봄볕을 쬐어주고 즐겁게 해주려고 여러 새들이 날아오는 정원에다 새 초롱을 걸어 놓고, 다른 새들과 함께 지내게 했습니다. 가을이 되어 날씨가 차가워지자 카나리아를 집안으로 들여놓고, 소녀는 깜짝 놀랐습니다. 카나리아가 전처럼 아름답게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짹, 짹, 짹"하며 참새 소리를 냈기 때문이었습니다. 참새들과만 지냈던 카나리아는 자기 소리를 잊어버리고 참새의 노래를 배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참새와 같은 세상 사람들과만 교제하며 산다면, 언제인가 그 성도의 마음도 참새의 마음이 되고, 그 입에서는 참새의 말이 나오고, 그 인품에선 경건한 은혜가 자취를 감추게 되고 말 것입니다.


정학진 목사의 [축복과 사명의 차이]라는 글입니다. - "모야모야병을 앓고 있는 15세 소년의 투병기를 지켜보다가 울었다. 문득 건강한 것은 축복이 아니라 거룩한 부담이다. 사명임을 깨닫는다. 곰팡이 냄새나는 지하교회 서너 명 교인이 전부인 셋방 교회에서 월세 내는 날을 두려워하는 미자립 교회가 존재하는 한 더 이상 예쁜 건물은 축복이 아니다. 부담이다. 사명이다. 뼈까지 달라붙은 쇠꼬챙이 같이 마른 몸을 하고 목마른 눈초리로 쳐다보는 아프리카 검은 대륙의 저 어린것들이 있는 한 하루 세 끼 따박따박 먹는 것은 더 이상 복이 아니다. 부끄러움이다. 잘 먹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할 일이 아니다. 잘 먹게 되어 죄송하다고, 우리만 잘 먹는 게 못내 죄송하다고 내가 가진걸 나눌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평생 한번도 설교요청을 받아보지 못하고 부흥회 한번 해보지 못한 동역자가 있는 한 더 이상 부흥회를 인도한다는 것은 자랑이 아니다, 두려움이다. 빚을 지고 살아왔다. 이 빚을 갚기 위해 뼈를 깎아 보석을 만들고 훈련과 성실로 내 영혼을 맑게 헹궈야 한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가슴아파 울고 있는 교우가 있는 한 더 이상 내 자식이 건강하게 자라는 게 복이 아니다. 남들보다 앞서고, 칭찬거리가 많은 게 자랑이 아니다. 입 다물고 겸손히 그 분의 은혜를 기억해야 할 일이다."


신자 중에는 예수 믿고 복 받으려고만 하는 사람과, 예수님을 본받으려는 사람이 있는데, 전자는 믿음의 성장이 거의 없으나, 후자는 지속적으로 성장합니다. A.W 토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순종하는 것은 영적인 성숙에 이르는 가장 짧은 길이다"고 했는데,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지켜 순종함으로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시로다. 은혜를 베풀며 꾸어주는 자는 잘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시112:4-5). 성숙한 믿음으로 덕을 세워갑시다.

시편 112장 4~5절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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