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교회
031-701-0691 / 경기도성남시분당구야탑동 523번지
손세용 목사님

누가복음 2장 41~51절

설교요약 :

"잃었다가 다시 찾은 예수"
2019년 9월 15일 주일예배
누가복음 2 : 41 - 51 ; 예레미야 29 : 12 - 13


한 남자가 새 차를 구입해서 집에 돌아오는데, 자꾸 뭔가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두 번이나 차를 멈춰서 소지품을 살펴보고, 주머니 속을 뒤져봤지만 결국 아무것도 잃어버린 것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도 찜찜한 느낌은 계속됐습니다. 집에 돌아오자, 딸이 뛰어나오더니 아빠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아빠, 엄마는 어디 있어요?" 여러분, 이번 추석 명절에 무얼 잃어버린 것은 없습니까?


어떤 사람에게 어느 날 어릴 적 죽마고우로 지냈던 친구가 몇 십년 만에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니 머리는 삭발을 하고, 옷은 스님이 입는 장삼을 입고 중이 되어 찾아왔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참으로 오랜만에 만난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밤을 새워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밤 두 시 경에 잠이 들었습니다. 친구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는데, 스님은 새벽이 되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옷을 주워 입고 길을 친구 몰래 길을 떠납니다. 조용히 방을 나서려다가 곤히 잠들어 있는 친구를 보더니 옛날 함께 놀던 때의 장난기가 발동했던지, 가위를 가지고 친구의 머리를 싹둑싹둑 중머리처럼 모두 잘라 놓고는 길을 떠났습니다.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난 친구는 옆에 같이 잠들어 있는 줄 알았던 친구 중이 없어진 것을 보고는 문을 열고 뛰쳐나와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찾았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벌써 떠난 지 오래 되어서 그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자기 머리가 썰렁하다 싶어 머리를 만져 보니 아니, 이게 웬일입니까? 그만 자기 머리가 중머리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이 친구가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찾던 중은 여기 있는데, 그러면 나는 어디 있단 말이냐?" 여러분 자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면 인생 전체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어린 아들에게 동전 두 개를 주며, 하나는 하나님께 바치고 다른 하나는 용돈으로 쓰라고 했습니다. 그 두 개의 동전을 쥐고 가다 개울을 건너며 동전 한 개를 잃어 버렸습니다. 한 개의 동전을 쥐고 '내 것은 있는데 하나님의 동전은 잃어버렸구나!'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동전을 잃어버리게 될 때, 천국도 잃어버리고 자신도 잃어버리게 되고 맙니다. 먼저 주님을 찾을 때, 주님과 더불어 천국을 얻게 되고, 그리고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돈을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요, 명예를 잃는 것은 많이 잃는 것이요, 건강을 잃는 것은 다 잃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를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요, 도덕을 잃는 것은 많이 잃는 것이요, 하나님을 잃은 것, 즉 신앙을 잃은 것은 모두 잃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얻고 잃었습니까?


유대인들은 남자아이가 여섯 살이 되면 쉐마를 읽고 쓰며 암송하는 율법의 훈련을 시작하고, 열 살이 되면 율법이 해석서인 미쉬나를 배우며, 12살이 되면 '율법의 아들'이라고 하여 본격적으로 율법을 배우며 종교행사에 참여할 권리와 의무가 부여됩니다. 그리고 열 여덟 살이 되면 미쉬나에 대한 토론의 수집인 게마라를 공부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열두 살이 되셨을 때, 요셉과 마리아는 이제 '율법의 아들'이 된 예수님을 데리고 유월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당시 유월절이 되면 이스라엘 전역과 해외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인 디아스포라까지 절기를 지켰기에 예루살렘에 100만 명 이상 운집했다고 합니다. 유월절 행사는 한 주일 동안 계속되는데, 이 절기를 마치면 여장을 갖추어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대개 길을 떠날 때는 여자 걸음이 남자보다 느리기에 여자들이 먼저 출발하고 남자들은 늦게 떠나 저녁때쯤 만나서 함께 야영을 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여행 습관이었기에, 마리아는 '예수가 요셉과 함께 오겠거니' 생각하고 먼저 떠났고, 요셉은 예수님이 마리아와 함께 먼저 떠났다고 여겨 챙기지 않고 늦게 떠난 듯 합니다. 저녁때가 되어 요셉과 마리아가 야영하기로 예정된 곳에서 만났는데, 예수님이 보이질 않습니다. 사람들 틈에 섞여 있나 보려고 아무리 찾아도 없자, 두 사람은 왔던 길을 되돌아오며 이곳저곳을 찾아 헤맵니다. 이렇게 사흘을 헤맨 끝에 예루살렘에 당도하여 성전에 가보니, 예수님이 율법학자들과 율법을 토론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면 요셉과 마리아는 왜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까? 첫째는 분주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43절에 보면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로 시작됩니다. 한 주일 동안 예루살렘에 서 절기를 지키고 나니 '어서 집에 돌아가야지'하는 생각이 앞서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일행 중에 있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오직 '빨리 집에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서둘다 보니 그만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생활의 특징 중의 하나도 바쁘게 사는 모습입니다. 가정생활 속에도 여유롭게 가족 간에 둘러앉아 오순도순 이야기할 시간은 없고, 온 가족이 함께 얼굴 마주칠 시간조차도 갖기 어렵습니다. 요즘 직장과 바깥일에만 분주히 돌아다니는 가장들에게 '바쁜 아빠, 나쁜 아빠'라고 말한답니다.


월간지 [좋은생각] 2010년 11월 호에 실린 '승부의 기준'이란 글입니다. - 한 서양 남자가 남태평양의 한 아름다운 섬으로 여행을 가서 원주민에게 안내를 부탁했습니다. 서양인은 원주민과 다니며 서양문화가 얼마나 편리하고 앞선 것인지 구구절절 설명했습니다. 어느 날 해변을 걷던 서양인은 원주민에게 시합을 제안했습니다. "여기서부터 저쪽 나무까지 달리기 시합을 해 봐요. 일주일 뒤에 말이지요. 그 동안 각자의 방식으로 연습하고요." 시합 날, 출발 신호가 울리자 서양인은 재빨리 앞으로 뛰어 나갔습니다. 그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이를 악물고 땀을 뻘뻘 흘리며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뒤를 돌아본 그의 얼굴에 득의 만만한 미소가 흘렀습니다. 원주민은 이제 겨우 중간 지점을 통과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원주민은 파도가 둥실둥실 떠내려가듯, 사뿐사뿐 춤추듯, 크고 느린 보폭으로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달렸습니다. 이윽고 결승선을 통과한 원주민은 껑충껑충 뛰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걸 본 서양인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내가 이겼는데, 왜 그렇게 좋아하는 겁니까?" 그러자 원주민이 순박한 표정으로 되물었습니다. "내가 이긴 것 아닙니까? 당신보다 훨씬 아름답게 달렸잖아요." 우리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늘 앞서가는 것, 빠른 것만이 승부의 기준은 아닙니다. - 우리는 길을 가면서, 챙겨야할 것을 챙기고, 건강하고 아름답게 달려서, 마지막 꼴인 점에 이르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달려가는 지도 생각지 않은 채, '빨리'만이 미덕인 냥 바쁘게만 살아갑니다. 이렇게 분주한 모습은 비단 가정과 직장에서만이 아니라, 성도들이 교회에 나오는 모습도 그렇습니다. 예배 시작된 지 한참만에 헐레벌떡 들어왔다가, 예배가 채 끝나기도 전에 황급히 예배당을 빠져나갑니다. 성도간에 교제하거나, 남녀 선교회 같은 모임에 참석하여 봉사할 시간도 없이 조급히 예배당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면 '집에 빨리 가기 위해 교회에 나온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급변하는 현대생활에서 태평세월처럼 한가하게만 움직일 수만은 없지만, 우리가 무얼 위해 살아가는지도 모른 채, 무조건 급하게만 움직이는 것이 좋지 않습니다.


나폴레옹이 부관에게 어느 날 옷을 입혀달라고 부관에게 부탁하자, 서둘러 옷을 입혀주는 부관에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옷을 좀 천천히 입히게. 지금 나는 바쁘단 말일세." 여러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지금 바쁘시답니다. 그러나 옷은 천천히 입히랍니다. 그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바쁜 때일수록 침착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루 24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간 속에 살아가기에, 어차피 모든 일을 다 할 순 없습니다. 그렇다면,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내 인생 전체를 바라보면서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되, 지금 이 일을 안 하면 영원히 후회하게 될 그 일을 침착하게 해야 합니다. 중요한 일을 우선하고, 덜 중요한 일은 포기할 것입니다.


둘째,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잃은 또 다른 이유는 예수님을 앞세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3절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고 했습니다. 이제 먼길을 떠나야 한다면 당연히 예수님을 앞세워야 할텐데,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앞장세우지 않고 자기들이 앞장서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들의 뒤따라야 한다고 여긴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일을 하면서 예수님을 앞세우십니까, 아니면 뒤따르게 하십니까? 간혹 어떤 일에 실패한 분들을 보면, 그 일을 하기에 앞서 예수님께 기도하고 예수님의 뜻을 따라 그 뒤를 따라가기보다는, 예수님은 뒤로 제쳐 둔 채, 자기가 결정하고, 자기가 앞장서 나가다가 실패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민수기 14장에 보면,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와서 악평하던 자들이 하나님의 진노로 죽게 됩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하나님이 아직 명하지도 않으셨는데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려 하자, 모세가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의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민14:42)라고 만류합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언약궤가 진중에 그대로 있는데도 가나안땅을 향해 무모하게 올라가다가 그만 아말렉인과 산지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이 공격하자 저들은 황급히 호르마까지 도망합니다(민14:45). 하나님 없이 저희들끼리만 나아갔다가 보기 좋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태양을 따라 가면 밝은 빛이 비취지만, 태양을 뒤로하면 언제나 어둔 그림자가 드리웁니다. 요셉과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뒤에 두고, 자신이 앞장서지 말아야합니다.


셋째, 예수님이 함께 있는 것으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44절에 보면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갔다"고 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자기들이 길을 떠났으니 예수님도 당연히 그 길에 함께 계신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내가 있는 곳에 예수님은 마땅히 있어야한다는 생각에 그냥 길을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저들은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잃어버리고도 잃어버린 줄 모르고 착각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다행이 그 착각이 하루였기 때문에 사흘 정도의 고생을 한 후 다시 예수님을 찾을 수 있었지만, 그 착각이 좀 더 길어졌다면, 더 많은 고생을 했거나 예수님을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착각이 없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잃어버리고도 하나님은 늘 함께 계신 줄 착각합니다. 제 생각과 마음대로 결정하고서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를 따라오시며 자기 뒤치다꺼리를 해주시는 분으로 착각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악한 길을 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는 내 생각이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55:7-8). 우리가 과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길을 걷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알렉산더 솔제니친이 1978년 7월 8일에 하버드 대학의 졸업식에서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하버드대학의 표어는 '진실'입니다. 여러분 중에 대부분은 이미 찾았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도 삶의 과정을 통해 찾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진실의 실천에 대해 전심으로 기울이지 않는다면, 진실은 우리를 피해갑니다. 진실이 우리를 피하는 동안 우리는 여전히 진실을 알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수많은 잘못된 이해를 만들어냅니다. 또한 착각된 진실은 기쁨이 되지 못하고, 거의 변함 없이 쓴맛이 됩니다." 우리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의 결단과 실천이 있어야 하지, 그저 성경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머무르고 있다면, 그리스도는 우리를 비켜 가실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잃어버린 요셉과 마리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먼저, 그들은 하룻길을 급하게 달려온 일이 모두 헛수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눅2:44-45). 우리 인생의 목표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잃어버리면 우리의 모든 수고와 공로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다 헛수고가 됩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잃어버림으로 하루종일 애써 달려간 걸음이 헛수고가 됐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인간의 모든 도모는 모두가 허사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시127:1-2). 하나님을 떠나서 하는 일은 모두 허사입니다.


로렌스 크레인의 [러브 유어셀프]에 어느 백만장자의 슬픈 고백이 나옵니다. "제 삶에는 오직 돈뿐이었습니다. 오직 돈을 버는 데에만 몰두했습니다. 심지어 제가 번 돈을 쓰거나 즐기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혼란스러웠습니다. 저는 백만장자였고, 흔히 성공이라고 말하는 모든 것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비참했습니다." 오직 버는 데만 몰두하고 쓸 줄을 모르거나, 여기에 이타적인 꿈과 인성마저 잃어버리면 비참해져버리고 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먼저 챙길 줄 알아야합니다.


다음으로,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를 잃음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수치와 조롱을 당했을 것입니다. 44절에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았다"고 했는데 그때 사람들이 뭐라고 했겠습니까? 아마도 '제 자식도 챙기지 못하는 칠칠치 못한 사람들'이라고 손가락질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잃어버리면, 세상 사람들은 겉으로는 '잘 했다!'고 할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신앙생활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시원치 않은 사람"이라고 욕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다 실패한 사람은 하나님께도,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모두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하는 가장 큰 실패자가 되고 맙니다.


이뿐만 아니라, 예수를 잃어버리면 큰 대가를 지불하게 됩니다.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눅2:46). 저들은 일주일간 비워둔 집이 걱정되어 몇 시간 빨리 가려고 예수님도 생각지 않고 정신 없이 달려갔다가, 예수님을 잃고서 사흘이나 예수님을 찾아 헤맸습니다. 단지 하루의 수고만 헛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후로 사흘 길을 허비하고서야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예수님을 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린 인생은 최후심판 때 가장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응어리를 풀라]라는 책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어떤 엄마에게 미국으로 유학 간 딸이 전화했습니다. "엄마, 여기는 한국식당도 없어요. 나 멸치가 너무 먹고 싶은데 멸치 좀 보내주세요." 엄마는 "알았다"하고 시장에서 좋은 멸치를 사서 멸치 대가리와 똥을 발라내고 딸에게 보내주었습니다. 그런데 멸치를 받은 딸이 전화했습니다. "엄마, 어쩌자고 멸치 대가리와 똥만 보냈어요?" 그 분은 깜빡하고 기껏 발라놓은 멸치 몸통은 쓰레기통에 버리고 미국에 있는 딸에게는 멸치 대가리와 똥만 보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부스러기만 챙기면서 핵심은 잃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요셉과 마리아는 어떻게 예수님을 다시 찾았습니까? 46절에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성전에 돌아와 예수님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눅2:48)고 묻자,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2:49)라고 대답하십니다. 주님은 어디나 계시지만, 가장 확실한 곳은 아버지의 집, 곧 성전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왜 나오십니까? 사람 만나러 오십니까? 아닙니다. 주님 만나러 옵니다. 사람의 말이나, 교양강좌 듣기 위함이 아니라 주님 말씀 들으러 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면서 때로 죄로 더럽혀지고, 상처난 심령이라도, 주님께 나와 죄사함 받습니다. 주리고 가난한 심령도, 아버지 집에서는 '살찐 송아지 잡아서 잔치 열어' 따뜻이 맞이해 주십니다.


물론 우리가 어느 때나 성전에만 머물 순 없지만, 그래도 우리 심령은 늘 성전을 지향해야 합니다. 오늘 날 많은 성도들이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은 성전을 멀리하기 때문입니다. 주일성수만 잘해도 어느 정도 영성을 유지할 수 있으나 한 주일만 빠지면 자칫 13일을 하나님 없이 살아가기 쉽습니다. 13일이 어찌 짧은 기간입니까?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여 7년을 수일처럼 여겼는데, 그것은 라헬과 함께 지냈기에 그랬지, 만약 둘이 떨어져있었다면, 수일도 7년처럼 느껴 못 견뎠을 것입니다.


약 70년 전 텍사스에서 석유사업으로 억만장자가 된 존 뉴턴, 루이 웨더포드, 사무엘 프레스톤 세 친구가 전세비행기를 타고 뉴욕에 놀러갑니다. 그들은 엠배서더 호텔 69층 전체를 예약하고, 뉴욕 관광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술 마시고 취한 채로 호텔에 돌아와 보니 엘리베이터가 고장났습니다. 프론트 직원은 하룻밤만 2층에 지내달라고 사정했으나 이 세 친구는 술 취한 객기로 69층까지 걸어 올라가는데, 처음 몇 층은 괜찮았으나 마지막 몇 층은 거의 기어올라가면서 2시간 반 만에 겨우 69층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올라와 보니 프론트에서 열쇠를 받아오지 않았습니다. 다시 1층까지 걸어 내려갈 것을 생각하니 그만 정신이 아찔했습니다. 마침 청소하는 흑인 아주머니가 손에 마스터키를 들고 웃으며 말합니다. "이곳까지 올라오느라 고생하셨지만 방 열쇠가 없으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만약 이 마스터키가 없으면 큰일 날 뻔했는데, 진짜 마스터키는 예수님이지요." 이 말에 존 뉴턴은 어린 시절 교회생활이 생각나 두 친구에게 "예수님은 정말 우리의 마스터키이다"며 전도합니다. 그들은 그 날 밤 눈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로운 인생을 출발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평생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기도의 후원자, 재정적 후원자가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란 어떤 도덕률이나 계율을 배우고 그것을 지켜나가는 생활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선사업이나 봉사활동을 하는 것들도 우리 신앙생활의 한 부분이 될 수는 있어도, 신앙의 본질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와 인격적이고 개별적인 교제가 없다면 종교인은 될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날마다 그분과 참된 교제 속에 살아가야만 합니다.


필립 얀시의 책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나오는 글입니다. - 얼마 전 열 다섯 살 난 딸과 전쟁중인 목사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는 딸이 피임약을 사용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부모가 갖가지 벌을 시도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딸은 거짓말과 속임수를 일삼으며 역습할 방도를 찾곤 했다. "이게 다 엄한 것밖에 모르는 엄마 아빠 잘못이에요!" 친구가 말했다. "거실 두터운 유리창 앞에 서서 어둠 속을 내다보며 그 애가 들어오기만 기다리고 있던 일이 생각나네. 속에서 분이 치밀어 올랐지. 나도 탕자의 아버지처럼 되고 싶었지만, 우리를 기롱하고 상처마저 입힌 딸아이한테 역정이 나더군. 물론 제일 큰 상처를 받은 건 자기 자신이었겠지. 하나님의 진노가 표현된 선지서 말씀이 비로소 이해가 되더군. 그분께 상처주기에 능한 백성 앞에서 그분은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으셨던 걸세. 진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네. 이튿날 새벽 딸애가 집에 오자 그야말로 천하에 아무 것도 바랄 게 없었다네. 다만 그 애를 두 팔로 감싸안고, 사랑해주고, 네가 잘되길 바란다고 말해주고 싶었을 뿐, 나는 사랑에 애타는 무력한 아버지였다네." 지금은 하나님을 생각하면 사랑에 애타는 아버지 모습이 떠오른다. 한때 생각했던 엄격한 군주와 거리가 멀다. 나는 내 친구가 고통스럽게 어둠 속을 응시하며 유리창 앞에 서 있는 모습을 생각해본다. 예수님은 '기다리시는 아버지' 비유에서 자식의 방종으로 상처를 입으면서도 오직 용서와 새 출발을 원하며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기뻐하신다. 헨리 나우웬도 말했듯,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세상의 문제들이 해결됐기 때문도 아니고, 인간의 아픔과 고난이 다 끝났기 때문도 아니고, 수많은 영혼이 이미 회심하여 당신의 선하심을 찬양하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녀 하나를 찾으신 것으로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잃은 자가 다시 돌아옴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명절로 흐트러진 마음 가다듬고, 다시 주님과 함께 하는 경건한 생활로 돌아옵시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2-13).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며, 주님의 임재가 가장 분명하게 약속된 성전을 가까이 하며 살아갑시다. 여기에 우리의 생명이 있고, 주님의 은혜가 있고, 내일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 41~51절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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