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06 119회
“함께 하는 공동체”
2022년 11월 6일 주일예배
사도행전 13 : 49 - 14 : 7 ; 전도서 4 : 9 - 12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되게 하시고 교제하게 하시는 세 가지 목적이 나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일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행14:1-3). 여기서 ‘두 사도’란 바울과 바나바를 말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3장 7절까지는 바나바의 이름이 먼저 언급되다가, 13장 43절 이후부턴 ‘바울과 바나바’로 이름의 순서가 바뀐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의 그 잠재력을 알고 안디옥교회로 초청하여 함께 일하다가, 같이 선교여행을 떠났는데, 바울을 지도자로 내세우고 자신은 뒤에서 협력하는 자로 물러났던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면, 초대교회는 ‘누가 리더십을 갖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느냐?’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을 두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실 때, 서로 돕고 협력하면서 일하도록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보내셨습니다. 교회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선교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선, 서로 협력하며 함께 동역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원수의 공격을 이겨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행14:2, 5).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박해하는 상황에서 저들이 이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두 사도가 오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 많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 곳에서 오랫동안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저들은 오래 함께 하면서 서로를 붙들어주고, 서로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기에, 그 어려운 고난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들은 고난이 더욱 가중되자, 이제 새로운 결단을 내립니다.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행14:5-7). 그들은 그 도시에 머물 수 있는 한계가 지났다고 판단이 되자, 더 이상 이곳에 머무는 것은 불필요한 충돌만 야기할 뿐이라 여겨, 이곳을 떠납니다.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행14:7)고 한 것을 보면, 그들이 이고니온을 떠난 것은 단순히 고난을 피해서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복음 전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전도하다 고난 당하면 ‘내가 이런 고생을 하고, 이렇게 욕을 먹으면서까지 이 일을 해야하는가?’하며 사역을 포기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이유는 그 고난의 때 그의 곁에 위로와 격려가 되는 지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누군가 그 고난을 함께 나누며 힘과 위로가 되면 그 고난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생활의 최대 비극은 믿음 안에서 진정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모습을 찾기 힘든 점입니다. 주위에 열심히 봉사하다 지치고 탈진하여 하던 모든 일들을 포기하고 물러난 지체들에게 뒤로 물러난 이유를 물으면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내가 그토록 힘들고 어려울 때,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누군가 곁에서 조금만 위로가 되었어도 그 어려움을 능히 이겨냈을 것입니다. 고난이 문제가 아니라, 함께 하는 자가 없어 사람들은 쉽게 포기합니다.
셋째, 더 충만한 은혜를 누리는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행13:50-52).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 전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저들을 따르니, 유대인들은 이를 보고 시기하여 그 성내의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며, 저들을 그곳에서 쫓아냅니다. 그런데 저들은 그곳에서 핍박을 받아 쫓겨나면서도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은혜를 헬라어로 ‘카리스’라 하고, 은사는 ‘카리스마’라 하는데, 기쁨은 ‘카라’라고 합니다. 그래서 ‘은혜’와 ‘은사’와 ‘기쁨’은 모두 같은 어근에서 나온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기뻐하고, 그렇게 기뻐하는 그 자체가 은혜 받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그들이 고난을 받으면서도 전도한 결과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아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서만 그들이 기뻐했다기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그 영광스러운 사역을 함께 하며, 함께 고난을 이겨냈기에 여기서 오는 보람과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를 맛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하나됨을 더욱 소중히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리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더욱 효과적으로 이루고, 고난과 박해를 이겨내며,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더욱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니 곧 영생이로다”(시133:1,3).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