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16 62회
"어려운 일 만날 때"
2019년 6월 16일 주일예배
창세기 12 : 10 - 20 ; 마태복음 4 : 4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이 정계은퇴 후 80세가 넘어 파티에 참석했는데, 한 부인이 반가움을 표시하면서 그에게 이런 짓궂은 질문을 했습니다. "어머, 총리님, 남대문이 열렸네요. 어떻게 해결하실거죠?" 그러자 처칠은 이런 조크로 위기를 모면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폭소를 자아냈다고 합니다. "굳이 해결하지 않아도 별 문제가 없을 겁니다. 이미 죽은 새는 새장 문이 열렸다고 밖으로 나올 수가 없으니까요." 처칠에게는 이처럼 위기관리 능력이 탁월했습니다.
'위기(危機)'라는 말은 '위험'과 '기회'가 공존하는 때라고 합니다. 위기는 위험한 일만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개구리가 버터를 만든다"라는 서양속담은, 개구리 두 마리가 우유통에 빠졌는데 한 마리는 포기해서 죽고 다른 개구리는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다리를 저어 우유가 버터로 굳어져 살아났다는 우화에서 나온 경구입니다. 문제는 처해진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위기가 기회가 되기도 하고, 위험한 일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재미있는 그림이 있습니다. 호숫가에서 황새 한 마리가 개구리를 잡아 입에 덥석 물고 막 삼키려는 순간, 개구리가 앞발을 뻗어 황새의 목을 조르자 목이 졸린 황새는 목이 막혀 숨쉴 수도 없고 개구리를 삼킬 수도 없는 재미있는 그림입니다. 어느 재미교포가 사업을 시작했다가 재산보다 많은 빚을 지고 좌절해 있었는데, 이 그림을 보고 용기를 얻어, 다시 재기하게 됐다는 사연을 가지고 있는 그림입니다.
인삼을 북경에 가서 팔아 조선시대 거상(巨商)이 된 '임상옥'을 경계한 중국 상인들이 담합하여 그의 인삼을 불매하기로 동맹을 결성했습니다. 임상옥은 아무리 궁리해도 뚜렷한 묘수가 떠오르지 않자 추사 김정희를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어르신,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이 지금 백척간두에 올라서 있습니다. 사면초가에 처해 꼼짝없이 죽게 생긴 이 사람이 어떻게 하면 백척간두에서 무사히 내려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추사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습니다. "백척간두에서 내려올 수 없습니다." "내려올 수 없다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임상옥의 물음에 추사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百尺竿頭 進一步 十方世界現全身](100척의 장대 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라. 그리하면 새로운 세계가 그 모습을 보일 것이다.) 이 글에 깨달음을 얻는 임상옥은 조선에서 가져온 인삼을 불에 태웠습니다. 임상옥이 인삼을 태우는 모습에 깜짝 놀란 중국 상인들은 사정하며 제발 불을 꺼달라고 빌었습니다.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임상옥은 인삼을 열 배의 값에 팔 수 있었고, 그 후 조선을 대표하는 거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위기가 찾아올지라도 바르게 대처만 한다면, 그 위기는 호기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믿음의 조상 아브람이 경제적인 위기를 겪었던 문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10절을 보겠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창12:10). 당시 아브람이 살던 가나안 땅에 극심한 기근이 찾아왔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은 기후적으로 건기와 우기가 뚜렷이 구분되는데, 대개 양력 10, 11월에 집중적인 비가 내리고, 이때 비가 적게 오면 그 다음 해에는 기근이 들게 됩니다. 그런데 가나안땅에 이주한 아브람은 때마침 닥친 기근으로 커다란 시련을 맞게 됩니다. 이런 위기가 닥치자 아브람은 나일강의 풍부한 수원(水原)으로 웬만한 가뭄에도 거의 기근을 모르는 애굽으로 피난을 떠납니다. 어찌 보면 기근이 심한 가나안 땅을 떠나서 물이 풍부한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지혜로운 행동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이 시점에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몇 가지 점에서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여기서 아브람이 잘못 선택한 근거는 무엇일까요? 첫째, 이런 위기를 만났을 때, 그는 기도하지 않고 결정하였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창12:10). 아브람은 자기가 살던 팔레스타인에 기근이 닥치자 즉시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여기서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간 사실 그 자체를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요셉도 애굽으로 피난 갔고, 요셉과 마리아도 헤롯의 살해 위협을 피해 애굽으로 피난 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도 그렇게 인도하셨다고 볼 수도 있지만, 오늘 말씀에 보면 아브람은 이 문제를 가지고 전혀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어떤 어려움을 만나면 하나님의 뜻을 묻고, 응답을 받으려 하기보다는, 그냥 쉽게 그 어려움에서 도피하려는 유혹에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자기 생각으로 결정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브람도 '하나님이 정말 나를 이 땅에 살기를 원하신다면 왜 이런 어려움이 찾아오나? 하나님의 뜻은 저 애굽 땅일지도 몰라'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형통하기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14:22)고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살 때 천국에 가기까지 많은 환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어떤 훈장님은 한자의 '바를 정'(正) 자를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 "바를 정(正)'자는 '하나 일(一)' 자 밑에 '멈출 지(止)' 자가 합친 것이다. 그러므로 길을 가다가 가끔 한 번씩 가던 길을 멈추면서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옳은지 그 길을 돌아보고 확인해야만 바르게 갈 수 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을 멈추고 돌아보지 않으면 자칫 잘못된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한 번씩 멈추고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바른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기르는 새 가운데 '비서 새'(secretary bird')라는 새는 평소에는 아주 잘 날아다닌답니다. 그런데 위험을 감지하여, 무언가가 자기를 공격한다는 위험을 느끼게 되면 날지 못하고 땅을 긴다고 합니다. 정말 날아야 할 시간에는 날지 못하는 새처럼, 정작 기도가 필요할 때 기도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아브라함에게 어떤 때보다 기도가 필요한 때인데, 기도하는 모습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시카고의 토마스 학개는 어려운 회사들을 찾아다니면서 전문적인 충고를 하여 회사를 살려내는 컨설팅 전문가인데, 하루는 IGA 즉 식료품 자영업자연합회 회장인 딕 해리슨으로부터 도움을 요청 받았습니다. 재정문제로 파산에 직면하자 비상이사회를 소집하고는 전문가 토마스 학개를 부른 것입니다. 토마스 학개는 절망해 있는 회사 중역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파산한 것이 아닙니다. 돈이 잠시 없는 것뿐입니다.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을 때마다 언제나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가끔은 머리를 숙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실제로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겠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지금이 그런 때라고 생각합니다. 함께 무릎 꿇고 기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한순간 충격으로 중역실이 조용해지더니 다음 순간 한 사람씩 의자를 뒤로 밀어놓고는 모두들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학개도 무릎 꿇고서 "한 쪽 무릎만 꿇으면 하나님은 그를 반쪽 사람으로 여기시고, 양쪽 다 꿇으면 그를 온전한 사람으로 여기십니다"라고 말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들이 현재 직면한 위기 너머에 있는 비전을 보게 하옵소서. 이들이 자신들과 자신의 책임에 대해 생각하는 것보다 주님께서 더 많이 신경 쓰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도와주시고 응답해주옵소서." 그 기도가 끝난 후, 그들은 각자가 조금씩 희생하면서 앞으로 해야할 일을 의논하며 노력한지 얼마 되지 않아, 곧 그 위기를 극복하였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해답이기에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아뢰며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육신의 양식은 구하면서도 더 귀한 하나님의 말씀은 찾지 않았습니다. 본문 앞에 있는 4절 말씀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 오 세였더라"(창12:4). 아브람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올 때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다'고 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인도하심을 따라 가나안 땅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의 계획과 방법으로 가나안 땅에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그 말씀을 좇아 왔다면, 이제도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구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다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창12:7).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천신만고 끝에 가나안까지 왔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그러면 어떻게 해서든지 아브라함은 그 땅에 머물렀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기근이 닥치자 쉽게 포기하고 애굽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성경에서 애굽은 세속을 상징하는 나라로서, 하나님이 아닌 인간적 도움과 수단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사31:1-2). 아브람은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경솔하게 결정했던 것입니다.
아브람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보다 육신의 양식을 더 생각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지 않고 육신의 양식이 있는 애굽으로 달려가 버린 것입니다. 우리에게 보다 중요한 것이 말씀입니까, 육신의 양식입니까? 예수님은 광야에서 시험받으며 40일을 금식하실 때, 마귀가 찾아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4:3)는 유혹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4:4)고 대답하십니다. 40일을 굶으셨으니 어쩌면 들판에 있는 돌멩이가 떡 덩어리로 보였을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사흘 굶어 담 넘지 않을 사람 없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40일을 굶으시고도, 육신의 떡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더 중요시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빵이라는 경제가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회 윌로우 크릭 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가 자신이 목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계기를 말했습니다. 20세 때 인생의 목적과 장래 진로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며 남미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리우데자네이루의 한 호텔에서 아름다운 해변을 보며 혼자 저녁을 먹는데, 옆자리에 너무나 행복해 보이는 한 노부부가 대화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여보, 정말 멋있지? 당신 그 동안 고생 많았어, 그러나 고생한 가치가 있잖아? 여기는 우리가 평생 꿈꾸던 곳이야!" 빌 하이벨스는 이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남미를 여행하며 고급식당에서 저녁 한 끼 먹는 것을 위해 일생동안 안 먹고 안 쓰고 고생했다는 말인가? 이것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 날 밤 숙소에서 무릎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적어도 이보다는 더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게 해주십시오. 이것보다는 더 영광스런 인생을 살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그가 목사가 된 계기였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축복은 단순히 잘 먹고 잘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잘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고 하지만, 성경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라고 말씀합니다.
셋째, 아브람은 기근이라는 위기를 만나자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소홀했습니다. 7절과 8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창12:7-8). 아브람은 가나안땅에 들어오자, 그는 옮겨갈 때마다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기근이라는 경제적 위기를 만나자, 제단 쌓는 일이 멈추고는 현실적인 계산 속에서 애굽으로 그냥 내려가 버렸고, 애굽에 가서도 제단을 쌓은 흔적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하마터면 아내를 빼앗길 뻔한 위험을 자초했던 것입니다.
아브람이 언제 다시 제단을 쌓게 되었습니까? 창세기 13장에 아브라함이 애굽을 떠나 다시 가나안땅에 돌아와 전에 살던 벧엘에서 그는 비로소 다시 예배드립니다.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13:3-4). 전에 제단을 쌓았던 가나안 땅 벧엘에 와서야 거기서 비로소 아브람은 다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던 것입니다. 애굽 땅에 있을 때 그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단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예배가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하고, 말씀이 필요할 때, 그는 하나님을 망각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세계적인 정신 위생학자인 데이빗 핑크는 "인간이 건강하고, 행복하고 안전하게 살아가려면 네 가지가 꼭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첫째는 일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할 일이 있어야 합니다. 억지로 무의미하게 하는 일은 사람을 지치게 하고 스트레스를 주지만, 목적을 알고 기쁜 마음으로 일하면, 그 일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필수적인 요소가 됩니다. 그리고 둘째는 노는 것입니다. 사람은 결코 일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쉬어야 하기에, 휴식을 위해 반드시 건전한 놀이가 있어야한다고 합니다. 셋째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있어, 사랑하고 희생하고 봉사하는 그 수고를 통해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넷째가 예배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위해 신령한 예배를 드릴 때, 인간은 진정한 평안과, 건강과, 행복과, 의미를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정신위생학의 결론입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줄줄이 다른 단추도 잘못 끼여지듯, 아브람이 경솔하게 애굽으로 내려간 일로 인해 그는 거듭 문제에 빠지게 됩니다. 첫째,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창12:11-12). 그는 자기 목숨을 위해 자기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속이는 거짓말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둘째, 아내를 빼앗깁니다.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창12:14-15).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심히 아름다운 것을 보고, 바로는 그녀를 왕궁으로 데려가 버립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으로 인해 자기 목숨은 건졌지만, 아내를 빼앗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바로의 왕궁에 재앙을 내리심으로 아내를 찾긴 했습니다.
셋째, 이방인인 바로 왕으로부터 책망 듣습니다.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창12:18). 이방인의 잘못을 책망하고 바로잡아야 할 아브람이 이방인으로부터 책망을 듣는 수모를 당하는 부끄럽고 창피한 일을 겪게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러한 아브람 가족을 보호해주십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아름다워 바로 왕이 '데려 오라'해서 왕궁에 갔습니다. 그런데 사래를 왕궁에 데려가자, 재앙이 일어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창12:17). 바로는 아브람의 아내를 데려온 때문임을 깨닫고 그녀를 손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호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잘못한 아브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보호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개역성경에 보면, 12장 17절에 '사래의 연고로'라고 했습니다. 아브람은 형편없이 잘못했지만, 하나님은 사래를 보시고 그녀를 안쓰럽게 여겨 아브람 가정을 위험에서 건져주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 중에도 기도하는 아내의 덕을 보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자들은 자기가 잘해서 집안이 무사한 것 같지만 사실 많은 경우 남자들이 잘못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지켜주고 축복해주시는 이유는, 아내의 기도 덕분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아브람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아브람과 사래를 불쌍히 여겨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로 절망과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나는 너와 같이 약한 자를 택하여 내 목적을 이루게 한다. 약함은 너를 내 능력으로 이끌기 위해 내가 미리 계획한 것이란다. 그러니 네 한계를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 일을 잘해 낼 수 있을까 네 능력을 가늠하지 마라. 너는 단지 나와 친밀하게 교제하며 나의 무한한 자원을 믿고 내게 의지하기만 하면 된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공포에 사로잡힐 이유가 없다. 어떤 순간에도 내가 늘 너와 함께 있음을 기억하렴. 나는 무심한 하나님이 아니다. 네 삶에 어려운 일이 생기도록 허락했을 때는 네가 그 일을 감당하도록 내가 충분히 준비시킨단다. 내 임재 속에서 편히 쉬며 내 능력을 신뢰해라." 주님의 능력이나 사랑 없음이 아니라 우리의 위기를 성장과 성숙의 기회로 삼으시려는 깊은 섭리를 믿어야 하겠습니다.
이시온 선교사의 책 [천개의 심장]에 실린 간증입니다. - 하루는 학교까지 갈 차비가 없어 오전 내내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주실 거란 믿음으로 기다렸지만 10원짜리 동전 하나 들어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나는 함께 지내는 동료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학교까지 갈 수 있는 돈을 빌렸다. 일단 학교에는 갔으나 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모임을 하는 동안 내 머리는 오직 집에 갈 차비가 없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학생들과의 모임이 끝나고 나니 학생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하자 집에 갈 차비가 없는 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12시 전에는 사당역에 도착해야 막차를 탈 수 있을 텐데….' 학생 리더는 나를 배웅하겠다며 따라나섰다. '학생에게 부탁해야 하나? 오늘 동료 간사에게도 어렵게 얘기했는데….' 정말 학생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렵게 '사실 집에 갈 차비가 없다'고 얘기하자 학생은 당황하더니 가방을 뒤져 가지고 있던 동전을 모두 내 손에 쥐여주었다. 얼른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버스에 뛰어올랐다. 학생이 준 동전을 확인해보니, 딱 사당역까지만 갈 수 있는 돈이었다. 사당역에 도착하니 자정이 다 되었다. '안양까지 가는 버스를 타야 하는데… 이제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돈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혹시 동전이라도 떨어져 있는지 사당역을 두세 바퀴 돌며 눈에 불을 켜고 찾아봤지만 10원짜리 동전 하나 찾지 못했다. 결국 나는 그 밤에 걸어서 사당 고개를 넘어 안양으로 정처 없이 길을 걸었다. '그분이 나를 구원하신 분인 것은 믿지만, 정말 나의 쓸 것도 공급하시는 분인가?' 걷고 또 걸어 인덕원 부근까지 왔다. 얼마나 걸었는지 눈물과 땀이 함께 흐르고 있을 그때, 새벽녘 내가 걷고 있는 그 길로 주님이 찾아오셨다. '시온아, 나를 신뢰하니?' 주님의 음성임을 깨닫고 걸음을 멈췄다. '앞으로 오늘 같은 일의 몇 십 배, 몇 백 배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텐데, 그래도 나를 신뢰할 수 있겠니? 내가 네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나 하나만 바라보고 살 수 있겠니?' 내게 무엇을 해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것도 해주지 않으셔도 그분만 위해 살 수 있는지를 물으셨다. 이런 것이 주님의 제자가 사는 삶인데, 그런 암흑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겠는지 물으셨다. 그렇게 예수님은 내게 다가오셨다. 나는 "예, 제가 그렇게 살겠습니다"라는 고백대신 인덕원 어느 골목에서 길바닥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 이 선교사는 그 뒤 케냐, 영국, 아프간에서 사역하였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이런저런 어려운 일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주변 현실과 자기 한계만 생각하여 요동하거나 쉽게 절망에 빠져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하며 잠잠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립시다. 그럴 때 자비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와 말씀하시며, 그 역경을 통해 주님의 전능하심과 자비하심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시37:5-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