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05 129회
"메시아를 영접하는 믿음"
2020년 4월 5일 종려주일
마가복음 11 : 1 ∼ 10 ; 스가랴 9 : 9
미국에서 가장 겸손한 목사로 뽑힌 어느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교인들은 그에게 이렇게 적힌 메달을 주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겸손한 목사님께.' 그런데 교인들은 그 메달을 바로 다음 주일에 빼앗아버렸습니다. 이유는 그 목사가 그 메달을 목에 걸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저도 주면 늘 걸고 다닐 것 같은지 아예 주지도 않습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임금은 말할 것 없고 재상의 행차에도 그 가마 가는 앞의 행인들을 비키게 하는 전도(前導)꾼들이 있어 길을 열었습니다. 이를 '벽제( 除)'라 하여, '앞을 쓸어 없앤다'는 뜻인데, 임금이나 재상의 행차 길을 내기 위해 하인들이 거리의 사람들을 물러가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관행으로 인해 낮은 벼슬아치까지도 벽제꾼을 앞세우는 바람에 한양 육조거리와 종로거리는 벽제로 붐벼, 이를 피해 가는 피마(避馬)길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종로 양편에 '피마 길'이라는 골목길이 있는데, 큰길로 가면 대감들의 벽제에 쫓기고, 말 타고 가는 양반들에게 엎드려 읍(揖)을 하느라 볼일 못 보기에, 이를 피해 골목길로 다녔던 것입니다.
또 임금님의 참배행차나 사냥 나들이로 한강을 건너할 때는 배다리를 놓는 대역사가 벌어졌는데, 20일 전부터 한강에 떠 있는 민간선 8백여 척을 강제로 징발하여, 노량진에 두 줄로 쌍둥이 배다리를 놓았습니다. 효성이 지극한 정조는 수원의 사도세자 능에 1년에 두 번씩 배릉(拜陵)행차를 했는데, '주교사'(舟橋司)라는 관리까지 두어 이 배다리 놓는 일을 전담시켰다고 합니다. 지금 용산과 노량진을 잇는 제1한강교 자리에 길이 3백 80미터, 폭 8미터의 배다리를 놓았는데, 4차선 도로 폭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배다리 놓고 뜯고 하는 데 적어도 한 달이 걸렸고, 그동안 한강의 운수는 전면 중단되었기에 민원이 생기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배다리에 대한 원성 때문이었는지, 세종은 '배다리는 어지럽다'는 핑계로 한강 건너기를 짐짓 피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임금이나 지체 높은 대감의 행차에는 많은 사람이 동원되어 길을 내었는데, 이런 임금님의 행차뿐만 아니라 어른들 나들이 할 때도 '연동'(煙童)이라 불리는 어린 종이나, 종이 없으면 어린 자제에게 담뱃대와 쌈지를 들려 수행시켜 어른의 나들이를 시중들며 수행하게 했던 풍습이 조선시대에 있었다고 합니다.
근대화하면서 벽제 행차라 할 수 있는 교통통제는 대통령 행차에만 하고 있는데, 전직 대통령에게도 전관예우로 시행되고 있습니다. 강남경찰서 한 교통경찰은 "강남에 유명호텔들이 몰려있어 전직 대통령들이 개인적인 식사약속으로 자주 찾는다"며, "전직 대통령들을 위한 교통통제가 한 달에 평균 10차례 정도 있다"고 보도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전직 대통령을 예우를 하느라, 이들이 살고 있는 주거지 주변은 거의 매일 이들의 외출로 인한 교통통제를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기 전 일요일인 오늘 무리들이 종려나무가지 흔들며 환호하는 가운데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세 번 오셨는데(요2:13, 5:1, 요12:12-13), 이번이 마지막 입성으로, 전에는 조용히 걸어오셨지만 이번엔 나귀를 타고 무리들의 찬송 받으시며 오십니다. 예수님은 배는 타셨지만, 말이나 가마를 타신 적이 없으신 데, 이번에는 왕으로서 나귀를 타시고 당당히 오십니다. 다른 땐 걸으셨던 예수님이 나귀 타고 오시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첫째, 예언의 성취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9:9). 이 말씀은 주전 약 5백년 전 스가랴 선지자의 메시야의 도래에 대한 예언입니다. 스가랴는 구약 예언자시대의 거의 마지막 시대 사람으로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메시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한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의 메시야 대망사상으로 볼 때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은 곧,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셨음을 의미합니다.
둘째, 왕의 대관식을 의미합니다. 7절에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막11:7)라고 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이 타실 나귀에 자기들의 겉옷을 펼쳐드립니다. 이렇게 자기 옷을 펴는 것은 왕에 대한 극진한 예우로 왕께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열왕기하 9장에는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가져다가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이르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왕하9:13)고 하여,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예후를 왕으로 세울 때 곁에 있던 장군들이 그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모습입니다.
스가랴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유대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은 언뜻 보기엔 초라하고 대단치 않은 모습 같아도, 이것은 메시야로서 승리의 입성이고, 유대 왕으로서 대관식과도 같은 뜻 깊고, 영광스런 행렬입니다. 주님이 지금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지만,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 승리의 개선행진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모욕과 수치를 당하셨지만,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는 이처럼 영광과 찬양과 존귀도 받으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겸손을 나타냅니다. 주님이 나귀 타신 이유를 스가랴는 이렇게 말합니다.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9:9b). 주님은 세상의 어느 군왕과 비교할 수 없는 만왕의 왕이심에도 나귀 중에서 새끼를 타셨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행렬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화려한 기수단을 앞세운 것도 아니고, 군악대가 팡파르를 연주나, 기병대가 앞뒤를 호위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새끼 나귀를 타시고 겸손하신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아프리카에서 인술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던 슈바이처가 자기 재산을 모두 병원운영에 쏟아 부었으나, 그것으론 몰려드는 환자들을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각지로 다니며 모금운동을 벌이던 중 자기 고향 알자스에 들렀습니다. 그 소식에 친지와 동료와 각계 인사들이 '20세기 성자'를 영접하려고 기차역에 나와, 기차가 도착하자 1등 칸 앞으로 우르르 몰려갔으나 슈바이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허둥대다가, 맨 뒷 칸 3등 열차에서 내려 초라한 모습으로 플랫폼으로 걸어나가는 슈바이처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아니, 박사님! 어째서 3등 칸을 타고 오셨습니까?"하고 원망스럽게 묻자, 슈바이처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4등 칸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3등 칸을 탔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겸손히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지만, 그래도 그 입성은 당당한 왕의 입성이요, 메시야의 입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나뭇가지를 길에 펴고, '호산나' 찬송 부르며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만약 주님이 이런 일이 없이 그냥 십자가로 직행하셨다면, 사람들은 주님이 아무 힘이 없어, 무력하게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으로 오해했을 테고, 주님의 마음은 더욱 참담하셨을 텐데, 그 고난의 길에 헌신한 이들이 있어 주님께 위로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작은 친절운동을 일으킨 이야기들을 모은 [눈물이 나올 만큼 좋은 이야기]라는 책에 실린 글입니다. 중소기업 사장으로 있던 분이 사업에 실패하여 집 가까이선 할 수 없어 타향에 가서 57세 나이에 막노동을 하게됩니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값싼 음식을 먹으려고 골목의 작은 식당으로 들어갔는데, 막상 들어서 보니 예상과 달리 값비싼 식당이라 다시 나가려니 자존심이 허락지 않습니다. 신사들이 넥타이를 메고 앉았는데 자기는 초라한 차림에 창피하여 구석에 앉아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쁜 회사 여직원이 다가오더니 물을 따라주면서 "물 마시세요"하며 방긋이 웃습니다. 이 사람은 물 한 컵 떠다준 그 고마움에 북받쳐 울컥 눈물이 솟았습니다. 수난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께 드린 친절과 헌신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첫째, 주님께 나귀를 제공한 물질의 헌신입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 베다니에서 제자 둘을 건너편 마을로 보내시며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막11:2-3)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 말씀대로 건너편 마을에 가서 나귀 새끼가 문 앞에 매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풀어 오려하니, 어떤 사람이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고 묻자 제자들은 "주님께서 쓰시겠답니다"라고 대답하니, 이 사람이 쾌히 "아, 그렇다면 가져다 쓰셔야지요"하여, 이 나귀를 끌어다 주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 나귀 주인은 한번도 타보지 않은 나귀를 주님께 선뜻 내드린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동차를 새로 구입하여, 아직 비닐도 뜯지 않은 새 차가 집에 도착했는데 교회에서 급한 일로 그 차를 좀 쓰겠다고 사람을 보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나귀 주인은 예수님이 쓰시겠다는 말에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이 나귀 주인이 예수님 말씀대로 나귀를 보내준 이유를 성서학자들은 이 사람이 전부터 예수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예수님의 명성과 그 권위를 알고 나귀를 보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만약, 나귀 주인이 "별꼴 다 보겠네. 아직 내가 한번도 타보지 않은 나귀를 누가 마음대로 쓰겠다는 거야? 일 없소!"하고 거절했더라면,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의 입장은 어떻게 되고,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는 예언의 말씀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 생애 마지막에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는 그 길에서, 한 이름 없는 사람의 헌신으로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품위와 격식을 갖추고 예루살렘에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실 수 있었습니다.
만약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내가 쓰겠다"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물론 주님이 우리 앞에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신다면 아마도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럼요. 쓰셔야지요"라고 응답하겠지만, 문제는 주님이 직접 찾아가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보내 말씀하신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렇다면 분위기는 조금 달라집니다. 직접 말씀을 하시면 예수님의 낯을 봐서 차마 거절할 수 없다해도 다른 사람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런 요구를 받게되면, 사람들은 이런저런 핑계로 거절하기가 쉽습니다. 이 주인은 제자들을 통해 부탁을 받고도 허락을 했습니다.
문제는 이것을 누가 요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본래 내 것이 아니고, 남의 것을 빌려쓰고 있었는데, 주인이 "그것을 내놓으라, 이제 내가 써야겠다"고 할 때, 뭐라 대답하겠습니까? 그 때도 "아니, 내가 더 써야하니 내어줄 수 없소"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는 도적입니다. 주인이 자기 것 요구하는데, 멀쩡히 자기 손에 가지고 있으면서 내놓지 않는다면, 그는 강도입니다. 세상에는 빌린 물건도 돌려주지 않고 내가 오래 가지고 있으면 내 것으로 착각하는 수가 많듯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에도 내 것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은 나귀 임자에게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유일하게 스스로 자신을 주(主)라고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주'라고 하신 뜻은, 자신이 세상 만물의 주인이시며, 자신이 온 인류의 구속주이자 왕이심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보면 열 한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했는데, 가룟 유다만 예수님을 한번도 "주님"이라고 부른 적이 없이 그저 '랍비'(마26:49, 막14:45)라고 부른 것을 볼 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른 것이 아니라, 세상 스승으로 여긴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께 속했음을 알고, 모든 소유권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윗은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대상29:11)라고 고백했습니다. 때로 주님이 우리에게 우리의 재능이나, 물질, 우리의 힘과 건강과 시간을 요구하신다면,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나귀 임자처럼 "예, 여기 있습니다 마음대로 쓰십시오"하며 주님께 내어 드리겠습니까, 아니면 이런저런 이유로 거절하겠습니까?
우리나라 어느 목사님이 미국의 한 신학교를 방문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신학교가 재정이 어려워 좋은 교수를 영입하고 싶어도 재정확보를 못하고 있던 터에 한국에서 온 이 목사님에게 이런 사정을 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신학교에 한국 학생만 해도 천명이 넘는데 한국교회가 석좌교수를 모실 수 있는 재정을 좀 지원해주십시오." 석좌교수란 기금을 준비해 놓고 그 기금에서 나오는 돈으로 교수를 쓰는 제도인데, 미국에서 석좌교수 한 분을 쓰려면 적어도 백만 불, 우리 돈으로 12억 원이 든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사정을 듣고 보니 거절할 수 없는 일이라서 그만 "어디 한번 해봅시다"하고 약속하고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의 교회도 수백 억 되는 프로젝트를 시작한 터라 교회에다 그 돈에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약속한 일을 나 몰라라할 수도 없어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며 기도만 하다가, 하루는 이상하게 중소기업 하는 사장 집사님이 자꾸 생각나더랍니다. 그 목사님은 점심을 같이 하자고 그 집사님을 불러내어 "집사님, 요즘 사업이 어떠세요?"하고 묻자, 집사님이 "요즘 형편이 안 좋아서 회사도 규모를 많이 줄였습니다. 그래도 규모를 줄이자 지난해는 하나님이 어렵지 않을 만큼 은혜 주셔서 조금 벌었습니다"며 그 액수까지 말하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내게 지금 이런 사정이 있습니다. 앞으로 지도자가 될 사람들을 키우는데 꼭 필요한 돈이니 날 좀 도와주십시오." 집사님이 그 말을 듣더니 "주님이 쓰시겠다면 드려야지요"하면서 대뜸 9억을 내놓더랍니다. 9억이라면 정말 큰돈인데도 '주님이 쓰시겠다면, 하나님나라를 위해 써야한다"는 확신이 서자, 그 큰돈을 선뜻 내놓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헌신입니다.
둘째, 자기 옷과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예수님께 펴드린 몸의 헌신입니다.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막11:7-8). 자기들의 겉옷을 예수님께 펴드린 곳은 두 군데에 나타나는데, 먼저는 끌고 온 나귀 위에 안장으로 펴드린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이 있었고, 또 입성하시는 길바닥에 종려나무 가지와 함께 깔아드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기 옷을 벗어 깔아 드리는 행위는 왕에 대한 극진한 예우로 간주되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요12:13)라 하여, 종려나무가지를 베어다 길에 깔 때, 사람 중 일부는 이 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했습니다. 종려나무가지를 꺾어 흔드는 행위는 메시야를 환영하는 것으로 최고의 존경과 환영의 표시였고, 이름 몸으로 헌신하여 표현했습니다.
김응국 목사의 책 [십자가]에 나오는 간증입니다. 얼마 전 아내가 왼쪽 가슴에서 뭐가 만져진다기에 병원에 갔다. 조직검사 결과 9mm 암세포가 발견됐다는 진단에 아내도 울고 나도 울었다. 시집와서 고생만 한 아내에게 찾아온 어려움이 내 죄 때문인 것 같아 눈물로 용서를 구했다. 한편으론 하나님께 서운했다. "왜 제가 아니고 아내입니까? 제 죄에 대한 벌은 제가 받아야 마땅한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합니까?" 수술을 위해 병원에 가며 아내가 말했다. "당신은 지식과 말씀으로 하나님을 섬기지만 나는 몸밖에 드릴 것이 없는데..." 과거에 가정교회로 모일 때부터 지금까지 교회식사를 위해 반찬을 마련하고 김치는 담그는 등 아내가 맡아서 하는 일이 많다. 그런 아내는 이제 수술을 앞둔 상황에서 "나의 이 몸으로 주심을 섬기기 원합니다. 이 몸으로 주님을 섬기는 일에 지장이 없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했다. 우리 부부는 찬송가 143장 '웬 말인가 날 위하여'를 불렀다. 둘이 눈물을 흘리며 불렀지만 그것은 기쁨의 찬송이었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신앙이란 이렇게 고난의 깊은 골짜기에서 찬송하게 하는 것이다. 기도할 수 없을 때 기도가 터져 나오고, 찬송할 수 없을 때 찬송이 터져 나오게 하는 것이다. 지금 현실은 우리의 기대나 생각과 다를지라도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길 것을 하나님이 약속해 주셨기 때문이다. - 그런데 얼마나 많은 신앙인들이 자신의 안일과 열락을 위해 자신의 몸으로 주님을 섬기는 일에 몸을 사리고 있습니까?
셋째, 예수님께 호산나의 찬양과 기도를 드린 심령의 헌신입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막11:9-10). '호산나'란 말은 "여호와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시118:25)에서 유래되어,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Save us now!)라는 뜻입니다. 무리들이 주님께 "호산나!"를 외친 것은 "당신은 구주시고, 우리는 당신의 백성이니, 지금 우리를 구원해주십시오!"하는 고백입니다.
누가복음 말씀입니다.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눅19:38). 그러자 어떤 바리새인들이 하의하기를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39절)하자,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40절)며, 주님은 저들이 메시야를 찬송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고 말씀합니다.
어느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 집사님 한 분이 교회 사무장 취임을 앞두고 있었는데 그만 위암에 걸렸다. 입원 전에 심방하려는데, 수술을 앞둔 환자에게 보통 잘 전하지 않는 말씀을 그 날 하나님이 내게 주셨다. 주님이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제자들에게 나귀를 풀어오라고 하시니 제자들이 망설이자, 주님은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마21:3)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주님 말씀대로 하여 나귀를 풀어왔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가 쓰실 때는 묶인 것을 풀어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그 집사님 댁에 방문하여 그 말씀을 전하며 권면했다. "오직 주를 위해 집사님 인생을 쓰겠다고 서원하세요." 그 집사님은 눈물 콧물 다 쏟으며 기도했다. 그 후 위를 거의 다 절제하는 중한 수술을 받았으나 회복되어 현재 20년 넘도록 재발 없이 건강하게 주님께 헌신하고 있다. 이 일을 통해 나는 중요한 진리를 깨달았다. 그것은 '주님을 위해 쓰면 풀린다'는 사실이다.
페르시아의 사이러스(Cyrus)왕이 이웃나라를 쳐들어가 그곳의 왕자와 그 부인과 아이들을 포로로 잡아다 재판하고 사형을 집행하기 전에 묻습니다. "왕자여, 만일 내가 당신을 놔주면 어떻게 하겠소?" "내 모든 재산의 절반을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아이들을 놔준다면?"하고 다시 묻자 "전 재산을 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또 다시 묻습니다. "당신 부인을 놔주면 어떻게 하겠소?" 왕자는 "그러면 내 생명을 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사이러스왕은 그 말에 큰 감동을 받습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며 왕자는 물론 자녀와 부인까지 모두 풀어줍니다. 무사히 돌아온 왕자와 왕비는 기뻐하며 그동안 겪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왕자가 말합니다. "사이러스왕, 참 대범하고 늠름하고 잘생겼더군." 그러나 아내는 "저는 못 봤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럼 당신은 그 때 무엇을 보았소?" 왕비가 대답합니다. "저는 저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하는 당신 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었습니다."
스펄전은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내 몸의 살 중 단 한 점이라도 주를 위하여 찢어지기를 싫어하는 살이 있다면 그것을 도려내어 주소서. 내 혈관으로 흐르는 피 중 단 한 방울이라도 주를 위하여 흘려 지기를 거절하는 피가 있다면 그것을 쏟아 버려 주소서, 나는 주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왕으로 오시는 그 길에 무엇을 펴고 있습니까? 나의 겉옷입니까, 명예입니까, 혹은 나의 재물입니까? 우리는 우리 모든 것을 다 바쳐 겸손하게 입성하시는 주님께 펴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호산나 찬송을 불러 만왕의 왕께 참된 영광과 존귀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 영의 눈을 열려 그 사랑을 깨닫고 주님이 참으로 우리 왕 되심을 믿는다면, 주님께 나의 물질과, 나의 몸과 시간, 아니 나의 영혼과 생명까지 바쳐 왕 되신 주님께 헌신을 다할 것입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