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24 96회
“홀로 있어 외롭고 고독할 때”
2021년 1월 24일 주일예배
요한복음 16 : 25 - 32 : 시편 68 : 5 - 6
이 시대 우리가 절실히 겪고 있는 이런 고독은 예수님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당국의 박해가 조여오자, 군중들이 물러가면서 제자들도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예수님도 한편 인간이셨기에, 절실한 고독을 느끼셨습니다. 아내도, 자식도, 친구도 없었던 예수님은 이런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을 어떻게 극복하셨을까요? 오늘 말씀에서 그 교훈을 찾아봅니다.
첫째, 예수님은 가까운 이들과 진솔하게 대화하셨습니다. 주님은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3)라고 말씀하시자, 도마가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요14:4)라고 반문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어 어디로 가시는지 물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요16:25)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요16:28)라며, 천국에 대하여 비유가 아닌,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말합니다.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요16:29-30).
예수님은 지금 사람들이 떠나버리고 홀로 된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아무 것도 가리지 않고,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제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간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진실한 것처럼 편안한 것이 없습니다. 마음 괴롭고 외로울 때, 가까운 사람에게 진실하게 생각을 그대로 드러낼 때, 서로 진실한 소통으로 피차 위로와 격려를 나눌 수 있게 됩니다.
둘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임재를 아심으로 고독을 이기셨습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16:32). 주님은 당신이 곧 십자가를 지게 되면,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질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홀로 남게 되는 이런 절대 고독의 자리에, 도리어 하나님이 가까이 찾아오심을 아셨습니다. ‘금이 가 있는 그곳으로 빛은 들어온다’는 말처럼, 빛은 삶에 금이 간 그곳, 상처 나고 아파한 그곳을 통해 들어옵니다. 우리의 인간관계가 깨어지고, 삶의 자리가 무너지고, 기대하고 바라던 모든 것이 산산이 무너져 틈이 갈라진 그곳에, 하나님은 조용히 다가오십니다. 억지로 외로움을 떨쳐내려 말고, 옷 입고 밥 먹고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마주하면, 외로움은 하나님을 보도록 눈뜨게 해줍니다.
셋째, 예수님은 당신이 해야할 일을 그래도 행하심으로 고독을 극복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이란 표현은 본문에서 평안을 주시기 위함임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이 외로운 고독과, 십자가의 그 극심한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제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이 땅의 구원을 위하여 묵묵히 고난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는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막15:34)하시며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당하셨으나, 끝내 부활을 통해, ‘모든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빌2:10-11)되는 영광을 입으셨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문제에만 집착하며 그 문제에서 헤어나오기가 어렵습니다. 이럴 때 자신의 문제보다도 더 큰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위해 헌신할 때, 나를 괴롭히던 그 문제는 어느 덧 해결되고, 도리어 나 자신의 발전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홀로 있는 고독을 통해 십자가로 나아가셨고, 온 인류를 구원하는 구세주가 되였습니다.
대천덕 신부는 우리가 교제를 소홀하게 된 것은 유교적 영향으로 한자로 교회의 ‘교’자를 가르칠 ‘敎’자로 쓴 때문으로, 교회의 ‘교’자는 사귈 ‘交’자로 써야한다며 우리가 교회(交會)에 모이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 교제임을 주장했습니다. 시편에 “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시느니라”(시68:6)고 말씀하셨는데, 하나님과 교제뿐 아니라 성도와의 교제에도 더욱 힘써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