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됨의 부르심

2019-10-27 66회

동문교회
031-701-0691 / 경기도성남시분당구야탑동 523번지
손세용 목사님

에베소서 4장 1~6절

설교요약 :

"하나됨의 부르심"
2019년 10월 27일 주일예배
에베소서 4 : 1 - 6 ; 시편 133 : 1 - 3


어떤 사람이 정신병원 앞을 지나는데, 몰고 가던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나는 바람에 바퀴를 지탱해 주던 볼트가 빠져나가 시궁창에 빠져버렸습니다. 볼트만 있어도 스페어타이어로 갈아 끼우겠는데 볼트가 없으니, 아무 대책이 없어 속수무책으로 서 있는데 정신병원 안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한 환자가 참견합니다. "여보세요, 그렇게 서있지만 말고 남은 세 바퀴에서 볼트를 하나씩 빼내 펑크난 바퀴에 스페어타이어를 끼우고 그 볼트로 조인 뒤, 가까운 카센터에 가서 고쳐달라고 하세요." 그 말을 듣고 보니 매우 현명한 생각이라서 그 환자에게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당신 같은 분이 왜 정신병원에 있는 거죠?"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환자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미쳤기에 여기 있는 거지, 멍청해서 여기 있는 줄 아세요?"


맞습니다. 정신병자라고 꼭 멍청한 것은 아닙니다. 정신병자는 자기 자신에게 미쳐, 다른 사람과 정신적인 교류나 대화가 이뤄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때로는 그의 말이 지극히 합리적이고 타당한 말이지만,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줄 모르고, 오직 자기라는 감옥에 갇혀 자기 생각 외엔 다른 사람의 의견과 주장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것이 정신병자의 병리적인 현상입니다. 정신병원에 가보면, 환자들의 행동이 거칠고 시끄럽기 짝이 없으나, 100여명의 환자들을 감독하는 관리자는 불과 서너 명뿐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몽둥이나 총 같은 무기도 없지만 100여명을 충분히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정신병자는 결코 하나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신병자는 두 사람의 의견도 합치하지 못하기에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윌리엄 맥도널드의 [잊혀진 명령 거룩하라]는 책에 보면, 피터진트라는 사람이 정신병원을 방문했는데, 어떤 환자도 전혀 정신병자 같지 않더랍니다. 그들은 모두 분별력이 있고 그들의 장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의사에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의사가 대답합니다. "그들은 미쳤어요. 그들이 다 분별력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건 사실이지만, 모두 자기 이야기뿐입니다. 사실 그들은 지적으로 자신에게 가장 많이 빠져있는 자들입니다. 아침에도, 점심에도, 저녁에도 오직 자기 자신 뿐으로, 그들은 자신에게 미쳐있습니다." 요즘 세상은 피터진트가 방문한 병원 같습니다. 겉보기엔 정신이 온전한 것 같지만 가까이 보면 모두 자신에 미쳐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려하거나, 그들의 입장을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경제나 외교나 국방보다도 국론분열이 가장 심각한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국민들의 생각과 주장이 완전히 둘로 나눠져 상대를 불신하고 대립하고 증오하며, 서로 어떤 대화도 되지 않습니다. 이렇다간 북한이 쳐들어오지 않아도, 자체 분열로 존망의 위기를 맞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몸 된 교회에도 분열이 있습니다. 교회 분열사를 보면 별 희한한 이유가 많습니다. '형제교회'라는 교단은 성찬식 대신 세족식을 하는데, 어느 교회 세족식에서 목사님이 교인의 왼발을 먼저 씻었습니다. 서로 마주앉으면 목사님에게 오른쪽은 교인의 왼발이기 때문입니다. 세족식이 끝나자 그 교회 선임 집사님이 용기를 내어 목사님께 말했습니다. "목사님, 왜 왼발을 먼저 씻습니까? 오른발을 먼저 씻으면 좋지 않습니까?" 성경에도 없는 걸 가지고 따지자 목사님은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집사님은 '다음 세족식 때는 설마 오른발을 먼저 씻어주겠지'하는 기대감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다음 세족식에도 목사님은 왼발을 먼저 씻자, 화가 난 집사님은 교인들을 선동하여 나가서 새로 교회를 세우고 이름을 '오른발 교회'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내의 분쟁이 오늘 이 시대에만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그토록 사랑이 넘쳤던 예루살렘 교회도 히브리파와 헬라파의 갈등이 있었고, 고린도교회 안에도 '바울 파', '아볼로 파', '게바 파', 그리고 '그리스도 파' 등 네 개나 파벌이 있었습니다(고전1:11-12). 사단은 이처럼 인간의 죄악성을 통하여 처음부터 교회를 다툼과 분열로 시험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21-22)라고 기도하시며, 저들의 분열을 걱정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되어야만 합니까? 먼저는 하나되는 곳에 힘이 있습니다. 무엇이나 하나일 때 강하고, 분열되면 약해집니다. 개인이나 나라의 안정과 번영도 하나돼야 이뤄집니다. 잠언서는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 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7:1)고 말씀합니다. 지난날 헐벗고 굶주릴 때는 배만 부르면 될 줄 알았고, 집 한 채만 있으면 걱정 없을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하나됨이 없이는 행복이다 기쁨이다 하는 이야기가 다 소용 없음을 알게 됩니다.


다음은 하나되지 못하면 생존도 불가능합니다. 하나된다는 것은 잘살고 못살고의 문제가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노사문제만 해도 서로 상대의 입장을 생각하고 양보하며 타협을 이루면 서로가 살고, 서로 자기 주장만 내세우면 모두가 망하게 됩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0년 10월 27일 평양탈환 환영 시민대회에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을 했는데, 이 말은 이솝우화에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넘어진다'(United we stand, divided we fall)는 데서 유래됐는데, 벤저민 프랭클린도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문에 서명하면서 '뭉치지 않으면 죽는다'(Join, or Die)라고 말함으로 근대에 되살아났고, 이순신 장군도 '단생산사'(團生散死), 즉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을 1593년에 쓴 난중일기에 기록하였습니다.


톨스토이의 담장을 사이에 둔 두 집의 [재난의 원인]이란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이쪽 집 닭이 담을 넘어 저쪽 집에 가서 알을 낳고 꼬꼬댁 하고 나오자, 이쪽 집 아이가 "우리 집 닭이 너희 집에 계란을 낳았으니 가져 오라"고 하니, 그 집 아이가 들어가 보더니 없다고 합니다. 아이들끼리 '알이 있다, 없다'하고 싸우다, 엄마들이 싸우고, 아버지들까지 싸우다 너무 화가 나서 저쪽 집에 불을 질러버립니다. 바람이 휙 불어 이쪽 집도, 저쪽 집도 모두 타버렸습니다. 그 날 밤 잿더미에 앉아서 별을 보며 후회합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나?' 계란 하나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상대방에 대한 불신과, 미움, 그리고 복수심이 이런 재난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됨에 대한 성경적인 원칙과 함께, 하나됨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는 말씀은 이미 하나인 사실을 알고, 이것을 지켜나갈 것을 가르치십니다.


먼저, 우리는 본래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습니다.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5-6). 우리의 근원이 하나입니다. 지금 겉으로는 약간의 현상적인 차이가 있으나, 이것에 집착하지말고 본래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은 본래도 하나요 마지막 운명도 하나입니다. 1절에 '부르심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하셨는데, 부름 받기 전엔 우리 모두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무자격했는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부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구제 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지만, 오직 주님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에, 우리는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중국 삼국시대 조조의 아들 조식은 당대 뛰어난 시인으로, 조조는 그를 아껴 그가 후계자가 되길 바랐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결국 맏아들 조비가 왕이 되었습니다. 왕이 된 조비는 자신의 왕권을 빼앗을 뻔했고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조식을 미워하여, 그를 죽일 빌미를 찾기 위해 고심하다가, 조식을 불렀습니다.“네가 시를 잘 짓는다 하니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시 한 수를 짓도록 해라. 만일 그렇지 못하면 지금까지 너의 명성이 거짓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므로 여덟 걸음 째에 너를 참수하겠다.”조비의 말을 듣던 조식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더니 일곱 걸음 째에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얼음처럼 냉정하던 조비는 이 시를 듣자마자 마음이 풀려 아우를 부둥켜안고 울고 말았습니다. 이 시가 그 유명한 [칠보시]입니다.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고 있네 / 콩이 솥 안에서 울며 말하는 구나 / 본래 한 뿌리로 태어났건만, / 어찌 이다지도 들볶는 건가" 여러분,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나와 위치와 생각과 소속이 다르다고 형제를 괴롭히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장차 운명도 하나입니다.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4절). 우리는 한 소망으로 장차 천국에 갈 것이기에, 우리의 마지막 운명은 모두가 같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지만, 이 자리에서만 잠깐 보고 말 사람들이 아니라, 장차 천국에서도 하나님의 잔치에서 함께 하나님을 뵈올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하늘나라에 가서 기업을 함께 누릴 자이기에 오늘 서로가 하나되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한 길, 한 운명이기에 우리의 고백도 하나입니다.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5절). 우리는 근본적으로 뿌리와 기초가 하나요, 또 장차 운명도 하나이니 이것을 알고 하나됨을 굳게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어느 교회 집사님이 유방암으로 임종을 맞게 되어, 임종예배 시간에 목사님께 마지막 부탁이 있다면서 손을 잡았습니다. 가뭄 때 논에 물대면서 교회 모 집사님과 본의 아니게 험하게 싸웠는데, 화해 못한 일이 맘에 걸려 떠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목사님께서 자기 대신 가서 자기가 모 집사님을 용서한다고 전해주고 그 집사님도 자기를 용서해주라고 부탁해달라고 합니다. 목사님이 그러마 약속하고 기도하니 평안히 운명했습니다. 후일 목사님이 그 집사님을 만나 그 이야기를 전하고 화해시켰습니다. 천국에 가는 모두가 초행길이라 누구나 두렵고 떨릴 수밖에 없으나, 믿음으로 용서받고 용서하며 살아온 사람에겐 영원한 소망의 길입니다. 죽음의 길이 가장 힘든 사람은 화목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용서하고, 용서받고 가야할 길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우리는 힘써 지켜야 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 성도의 하나됨이란 어떤 타협이나 정복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이해관계에 의해 무엇을 주고받거나, 적당한 선에서 계약을 맺어 서로의 입장을 조정함으로 하나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됨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여 하나됨을 지켜나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데도 성령의 역사가 있었지만, 이 자녀로서 살아가는 데도 성령의 다스림과 인도하심을 받아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화평케 해야 합니다. 마귀를 희랍어로 '디아볼로스'라고 하는데, '디아'(dia)는 '사이에'라는 뜻이고, '볼로스'(발로우)는 '갈라놓는다' 는 뜻입니다. 서로 이간하고 분열하고 갈라서게 하는 것은 사단의 역사요, 마귀의 자식이 하는 일입니다. 성령은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이게 합니다. 이것은 지식이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감화로써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같은 성령으로 거듭났지만, 우리가 받은 성령의 은사는 각기 다르기에 그 다양성을 알고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성 프랜시스가 제자들과 함께 금식하고 있었는데, 한 제자가 시장을 지나가다 너무 너무 배가 고파 몰래 죽을 먹다가 걸렸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이 비난하며 이럴 수 있느냐고 흥분하자, 프랜시스는 얼른 죽 한 그릇을 들고 마셨습니다. "야, 이렇게 죽이 맛이 있다니..." 다른 제자들이 눈을 동그래졌습니다. 금식하면서 금식을 깨뜨린 사람을 정죄하고 내쫓으려는 마음을 갖느니, 차라리 모두가 다 금식을 깨뜨리고 서로 판단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될 수 있는 덕목은 무엇입니까?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가운데 서로 용납하고"(엡4:2). 먼저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겸손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피조물임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에덴동산에서 처음 인간을 유혹하길 "너희는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창3:5)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려다 타락한 마귀(사14:13-14)는 하나님이 하실 일을 인간이 하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의 일로 인간에게 금하셨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12:19). 자신도 하늘의 용서가 필요한 피조물임을 알고, 겸손히 주님께 맡겨야 하나됩니다.


다음은 '온유함'입니다. '온유'란 '이해심 깊음'이나 '정중함'으로도 번역되는 주님의 성품이며(고후10:1), 성령의 열매입니다(갈5:22-23). 어느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는'중용'과, 자기 생각과 본능을 자제하는 덕으로(약3:3-8), '굉장한 힘이 어떤 일정한 방향으로 조절되는 상태'입니다. 마치 사나운 짐승이 길들여지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께 복종하는 온유한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드러낼 때, 하나됨을 이룰 수 있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을 묶어주는 연합은 조직체의 힘에 대한 건방진 신뢰에서 오는 연합이 아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사랑과 함께 겸손에 의해 하나된 공동체다. 각자 자신의 가난함과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을 정직하게 시인하는 데서 오는 겸손, 자기 한계를 알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 자신이 그리스도께 용서받았음을 알기에 남을 심판하지 못하고 다만 용서할 수밖에 없는 온유한 마음으로 하나된 교회가 우정과 자비로써 서로의 짐을 나누어 갖는 연합이다."


그리고 오래 참음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얼마나 오래 참으셨는가를 잘 말해줍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주님은 우리에게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와 하나되기를 원하셨음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1:16).


이스라엘의 전설입니다. 햇빛이 뜨겁던 어느 날 아브라함은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다가 몹시 지친 한 나그네를 보고 권했습니다. "집에 가서 씻고, 먹을 것을 드릴 테니 쉬어 가십시오." 아브라함은 음식을 차려놓고 손님에게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음식을 드십시다"며 같이 감사기도 할 것을 권했지만, 그 나그네는 "나는 페르시아 사람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소!"라며 기도를 거절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신앙을 가지도록 계속 기도를 요청했으나 거절하자 화를 내며 그 나그네를 쫓아내 버렸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물으십니다. "아브라함아! 지금 무얼 하고 있느냐?"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글세, 저놈이 주님께 감사할 줄 몰라 제가 쫓아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조용히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아! 나는 그를 위해 50년을 참았단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되어 네게 인도했는데, 너는 그만 10분을 참지 못해 일을 망쳐버렸구나!" 우리는 자기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쉽게 형제를 판단하고, 정죄하며, 원수로 삼아 등을 돌리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만약 주님이 내게 그렇게 참지 못하고 즉시 심판하셨다면, 하나님의 자비를 입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나를 참아주신 것처럼 나도 형제에게 오래 참고, 기다려야할 것입니다.


끝으로 서로 용납함입니다. 상대방을 자기에게 맞춰 바꾸려는 의도 없이, 상대방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들은 때로 내가 가진 것과, 남이 갖지 못한 것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알고 동시에 다른 사람이 가진 것도 발견하고 소중히 여기며, 서로 좋은 점을 받아들이면, 보다 온전한 하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아시고 주님은 우리를 하나로 맺어주셨습니다.


미국이 영국과 독립전쟁을 치른 후, 1987년 미연방헌법을 만들기 위해 13개 주 대표들이 모였는데, 헌법초안을 만드는 과정부터 의견이 맞지 않아 많은 진통이 있었습니다. 격렬한 논쟁과 비판 등이 끊임없이 계속되며, 서로 불신으로 얼굴조차 마주보려 하지 않는 분위기에 81세 고령의 벤저민 프랭클린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한달 동안 계속 논의했지만 진전이 없는 걸 보니 인간의 지혜가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가가 증명되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주십사고 기도하는 것이 어떨까요? 우리는 처음 영국과 싸우면서 위험에 처할 때마다 이 방에서 매일 기도했고, 그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습니까? 나는 오래 살면 살수록 내가 더욱 확신하는 진리는, 하나님이 모든 일을 지배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한 나라가 세워지는데 그의 도움이 없이 되겠습니까? 제가 믿기엔 하나님의 도움이 없다면 우리의 정치적 노력이 바벨탑을 세우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말에 대표자들은 토론을 멈추고 각각 집에 돌아가 기도하고서 8월 6일에 모였을 때, 드디어 미합중국 헌법을 마무리지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됨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거듭 사업에 실패하자, 가정은 가난에 빠져들었습니다. 남편은 다시 일어나 사과장사를 하며, 서울에서 사과를 싣고 춘천에 갖다 넘기면 다소의 이윤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춘천으로 떠난 남편이 이틀 지나 사흘이 돼도 돌아오지를 않았습니다. 당일에 돌아오긴 어렵지만, 이틀째는 틀림없이 돌아왔는데, 아내는 기다리다 못해 닷새 되는 날 남편을 찾아 춘천으로 떠났습니다. "춘천을 손바닥만하게 알고 춘천에만 닿으면 만나려니 했는데, 정말 막막하더군요. 하는 수 없이 여관이란 여관은 모조리 다 뒤졌지만, 그이는 없었어요. 하룻밤을 여관에서 뜬눈으로 지새우고 이튿날 아침, 문득 남편 친구가 도청에 있다는 생각나서, 그분을 찾아가는 길에 혹시나 하고 정거장에 들러 봤더니..." 매표구에 늘어선 줄 속에 남편이 서 있었습니다. 아내는 너무 반갑고 원망스러워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트럭에다 사과를 싣고 춘천으로 가는 길에 사람을 몇 태웠는데, 그들이 사과 가마니를 깔고 앉는 바람에 사과가 상해서 제 값을 받을 수 없었답니다. 남편은 도저히 손해봐서는 안 될 처지였기에 친구 집에 기숙하면서, 시장에 자리를 잡고 사과 소매를 시작하여 어젯밤 늦게 겨우 다 팔 수 있었답니다. 전보도 제구실하지 못하던 8.15 직후였습니다. 함께 춘천을 떠나 서울로 향하는 차 속에서 남편은 아내의 손을 꼭 쥐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세 시간 넘게 걸리던 경춘선에서, 남편은 한 번도 그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한 손을 남편에게 맡긴 채 너무도 행복해서 그저 황홀에 잠길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6.25 때 죽었습니다. 여인은 어린 자녀들을 이끌고 모진 세파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제 아이들도 다 커서 대학엘 다니고 있으니, 그이에게 조금은 면목이 선 것도 같아요. 제가 지금까지 살아 올 수 있었던 것은, 춘천서 서울까지 제 손을 놓지 않았던 그이의 손길, 그것 때문일지도 모르지요." 여인은 조용히 웃으며 이렇게 말을 맺었습니다. '행복은 반드시 부와 일치하진 않는 다'는 말처럼, 어떤 어려움도 하나만 되면 견딜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허물 많고 부족하지만, 주님은 이런 우리를 탓하지 않으시고 받아주셨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15:7)고 하십니다. 서로 사랑 안에서 용납합시다. 서로를 용납한다는 것은 좋은 것, 나쁜 것, 있는 그대로 그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한스 큉은 "카톨릭교회는 복음을 변질시켜 죄를 범했고, 개신교회는 교파를 분열시켜 죄를 범했다"고 했습니다. 종교개혁주일 맞아, 분열의 죄를 회개해야겠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니 곧 영생이로다"(시133:1-3). 사람들은 복 받겠다고 이곳저곳 헤매지만, 형제가 하나된 곳에 축복이 임합니다.

에베소서 4장 1~6절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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