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20 71회
"보혜사 성령님의 은혜"
2018년 5월 20일 성령강림절
요한복음 14 : 16 - 26 ; 이사야 44 : 1 - 4
어떤 아내가 남편의 애정을 확인하기 위해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부모님과, 나와 아이들이 물에 빠졌다면 당신은 누구부터 구할 거예요?" 남편은 대뜸 '부모님'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내는 속으로는 몹시 화가 났지만 꾹 참고 다음 차례는 누구냐고 묻자, 남편은 '아이들'이라고 대답합니다. 아내는 그 말에 큰 충격을 받고 모든 의욕을 상실하고 급기야 우울증에 걸려 병원 정신과를 찾았습니다. 의사는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는 부인의 말을 듣고 한마디합니다. "부인, 너무 상심하지 말고 수영을 배워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상담한 의사마저 상처에 초를 붓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참으로 좋은 상담자를 만나보셨습니까? 우리에게 가장 좋은 상담자는 우리의 사정을 속속들이 아시는 성령님입니다. 외국의 잡지에 실린 실화입니다. 전쟁에 나갔던 약혼자를 잃은 여인이 전사통지서를 쥐고 비 오는 날 저녁 동네 강에 있는 큰 다리를 실의 속에 거닐었습니다. 이 여인은 약혼자를 잃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투신자살을 결심하고 막 다리에서 뛰어내리려는 순간 한 중년 남자가 나타나 팔을 급히 잡더니 "여기는 추우니 내가 다리를 지키는 사무실에 함께 가서 얘기하자"고 하여, 난로가 있는 그의 사무실로 가서 자초지종 이야기하며 통곡하는데 그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두 손을 잡고 "하나님, 이 여인에게 실의를 딛고 일어설 평화와 소망과 용기를 주옵소서"하고 기도합니다. 그 순간 이 여인은 말할 수 없는 평화와 삶의 소망과 의욕을 느꼈습니다. 이 사람이 인자하게 웃으며 "하나님께서는 자매님을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을 깨닫고 새 출발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 여인은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하니 그 다리지기가 너무 고마워 인사하러 다시 그곳에 갔더니 사무실도 그 사람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비로소 그 다리지기가 하나님께서 보낸 천사였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 드리고 새 출발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도 있습니다. 1914년 남극대륙 횡단에 나선 인듀어런스호의 탐험대원 27명은 목적지를 150㎞ 앞두고 빙벽에 갇혀 배가 난파되고 죽음 일보직전에 처하게 됩니다. 그들은 펭귄을 잡아 허기를 달래고, 참혹한 추위에 발이 썩어들어 가는데, 탐험대장 새클턴은 구조를 요청하러 5명의 대원과 6m에 불과한 구명보트로 1280㎞ 떨어진 사우스 조지아 섬의 포경기지를 향해 떠납니다. 도끼 한 자루와 로프만으로 해발 3천m에 달하는 전인미답의 얼음산을 넘어 조난 634일만에,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전 대원을 구조하는데 성공했을 때, 그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길고도 험했던 여정의 마지막 단계인 얼음산을 넘을 때, 우리 일행은 분명 세 명인데 난 네 명처럼 느껴졌다. 이상하게 생각돼 동료들에게 물어보니 그들도 그렇게 느꼈다는 것이다. 그 힘들고 어려웠던 여행 내내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셨음을 난 믿는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께서 제자들 곁을 떠나신다는 말씀에 슬픔과 근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성만찬과 세족식을 하시고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요13:33)고 하시며, 저들 곁을 떠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요13:36a)하고 묻자, 예수님은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요13:36b)고 대답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13:37)고 장담합니다. 그 때 주님은 말씀합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요13:38).
예수님의 이 말씀에 제자들은 큰 슬픔과 근심에 사로잡힙니다. 그 동안 모시고 따랐던 예수님께서 저희들 곁을 떠나신다는 사실이 슬픔이었고, 이제는 예수님도 없이 자기들만 남게되는 것이 근심과 두려움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고 하시며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3)며 저희에게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래도 제자들은 당장 주님이 저들 곁을 떠나신다는 사실에 모두 불안해합니다.
이런 제자들을 보시며 예수님은 저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라"(요14:16). 주님이 저들 곁을 떠나신다는 사실로 인해 슬퍼하며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하십니다. 보혜사가 오시는 것이 어떻게 위로가 됩니까? 성삼위 하나님의 인간과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이시고(God for us), 성자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God with us)이시며,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God in us)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려 하시지만, 인간 그 누구도 하나님께 미치지 못하자, 하나님은 친히 인간과 함께 계시기 위해 사람 몸으로 성육신하셔서 임마누엘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지만, 몸으로 오셨기에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아 어느 때나 제자들과 함께 하지 못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제자들을 배 태워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게 하시고, 주님은 혼자 산에 올라 기도하실 때, 갈릴리 호수를 건너던 제자들은 풍랑을 만나 큰 곤경에 빠집니다. 또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신비한 모습으로 변화하시던 때, 그곳에 함께 있지 않던 다른 제자들은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해 쩔쩔매며 곤욕을 치렀습니다. 이처럼 몸으로 오신 주님은 제자들과 항상 같이 계실 수 없으셨기에, 이제도 저들 곁을 떠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셔서 영원히 저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ητοσ)라고 하는데, 이 말은 '곁에'를 뜻하는 'παρα'라는 단어와 '부름 받은'이라는 뜻의 'κλητοσ'라는 단어의 합성어로서 '곁에서 돕기 위해 부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파라클레토스]를 번역하기를 '상담자'(counselor)(NIV, RSV), 혹은 '위로자'(comforter)라고 하며(KJB), 그밖에 모펫(Moffett)역 등에서는 '돕는 자'(helper)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본문에서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을 보혜사라고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2장 1절에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하여 예수님을 '파라클레토스'라고 기록하였는데, 우리 성경에서는 '대언자'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면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어주십니까? 첫째, 우리에게 오셔서 모든 것을 가르쳐주시는 상담자가 되십니다. 26절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은 모든 것을 가르쳐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안한 것은 앞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일을 모른다는 사실이 불안과 두려움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성령은 신비한 하나님의 세계를 알게 해주시기에, 평안합니다. 사실, 우리가 모르기에 불안하지 알고 나면 평안한 것입니다. 아버지와, 신비로운 하나님의 세계를 성령이 우리에게 가르쳐 알게 하여 평안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하는 우리는 성경에서 모든 시대를 통해 철저히 하나님을 신뢰했던 사람들을 주님이 인도하셨음을 주시하면서 새로이 자신감을 얻게 됩니다. 아브람이 친족과 고향을 떠나 어떤 안내자도 없이 알지 못하는 미지의 가나안땅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성령께서 그 앞길을 안내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미로의 모래사막, 시나이반도를 횡단한 것을 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약속된 땅으로 들어갈 때 항상 승리로 이끌어주셨던 하나님을 바라보았기에 강하고 호전적인 국가들을 싸워 이길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이 마지막 때까지 교회를 지키고 가르칠 교리를 세우는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며 전진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이 사도들에게 그들이 행하고 말해야할 복음의 진리들을 계시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문제가 중요한 것은 우리 삶의 능력과 평안의 대부분이 '우리의 환경과 처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 있으며, 더 나아가 그 뜻을 알아 가는 과정 자체에 있기 때문입니다.
라브리 공동체를 설립한 프란시스 쉐퍼는 십 대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하나님은 그가 신학교에 가서 사역자의 길을 가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프란시스의 아버지는 심히 반대하였습니다. 갈등하던 프랜시스는 결심하고 가방을 꾸려 집을 나오는데, 아버지가 현관에서 프란시스를 한참동안 쳐다보다가 말했습니다. "나는 목사 아들을 원치 않아. 네가 그 길을 택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때 프란시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버지, 지하실에서 몇 분간 기도할 시간을 주세요." 그는 지하실로 내려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불확실함과 두려움, 그리고 아버지를 향한 슬픔으로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는 몇 분내에 진로를 선택해야 했는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따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짧은 몇 분 동안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필사적이고 단순한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길을 가르쳐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발 저의 길을 알려주세요." 그리고 나서 그는 동전을 꺼내 "앞면이 나오면 아버지가 목사의 길을 반대하셔도 가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동전을 던졌습니다. 결과는 앞면이었고 그는 다시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한 번만 더 확신을 주세요 이번에는 뒷면이 나오면 아버지의 반대에도 목사의 길을 가겠습니다.' 그리고 그가 동전을 던졌을 때 뒷면이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다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실수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다시 동전을 던지면 앞면이 나오게 해 주세요." 그는 기도하고 마지막으로 동전을 던지자 앞면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그는 아버지께 가서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가야 합니다." 그의 말을 들은 아버지는 한동안 그를 차갑게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가며 문을 쾅 닫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내가 반 학기 등록금은 보내주마." 그리고 수년 뒤 프란시스의 아버지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프란시스는 그 순간이 아버지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고 썼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동전 던지기로 알아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간절히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보혜사는 위로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슬픔과 근심에 잠겨있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세상이 알 수 없는 평안과 위로를 주십니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두려움과 슬픔으로 숨어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제자들은 그 슬픔과 불안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용기와 힘을 얻어 밖으로 뛰쳐나가 담대히 복음을 전합니다. 이젠 더 이상 스승을 잃은 패배자들이나, 부모를 잃고 외로움과 서러움에 사로잡힌 고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저들 안에는 세상에서 주지 못하는 놀라운 평안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한 소년이 탄 경비행기가 정글에서 추락하여 수색대가 며칠이나 숲 속을 뒤졌으나 소년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전단을 만들어 정글에 뿌리려고 하는데 전단에 써넣을 마땅한 글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때 인생경륜이 풍부한 한 노인이 충고해주었습니다. "지금 당신의 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고독일 것입니다. 아들에게 부모의 사랑을 확인시켜주시오. 그것이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아버지는 전단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적었습니다. "내 아들아, 우리는 너를 정말 사랑한단다." 소년은 정글에서 아버지가 뿌린 전단을 보았습니다. 그는 굶주림과 추위, 고독과 절망에 거의 삶을 포기하고 있었는데, 전단에 적힌 아버지의 글을 보는 순간, 삶의 용기가 솟구쳤습니다. 결국 소년은 며칠 후 수색대에 의해 구출됐습니다. 성령님은 근심하며 불안해하는 우리를 당신의 크신 사랑으로 위로해주십니다.
셋째, 보혜사는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가 약할 때,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에게 힘과 능력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는 무얼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할지도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성령님께 나를 위해 기도해주시길 구하면,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아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월남전이 한창이던 때, 미국 어느 교회에 아들을 전쟁에 보낸 한 어머니가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아들이 혹시 다치지 않을까 저녁마다 걱정으로 잠을 못 이루는데 어떻게 기도해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자매님, 성령님은 우리의 빌 바를 아시므로 자매님의 기도를 성령님께 맡기고 성령께서 대신 기도해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그 후로 이 자매님은 성령께서 아들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루는 아들이 베트콩과 치열한 전투 중에 날아오는 포탄을 피해 3미터 앞으로 뛰어가려는데 누군가 강한 힘으로 어깨를 누르며 "그 자리 엎드려"하고 명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아들은 급히 그 자리에 엎드리는 순간 '꽝!' 소리와 함께 자기가 가려던 바로 그 곳에 포탄이 떨어졌습니다. 그 청년은 주위를 살폈지만 엎드리라고 소리친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려운 문제 앞에 뭐라 기도해야할지 모를 때 성령님께 부탁하면 성령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릴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보혜사 성령의 은총을 입을 수 있습니까? 첫째, 회개할 때 성령이 임하십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2:38). 칼 힐티는 "진솔한 회개야말로 가장 성령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 성령충만을 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회개하지 않는 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왜 성령충만하지 못하고, 능력이 없습니까? 우리에게 회개치 않은 범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불순종했던 것을 회개하고, 죄악을 청산하고 주님께로 돌아설 때, 우리에게 기름 붓듯 성령충만이 임할 것입니다.
1900년대 초, 영국 웨일즈 지방에서 있었던 위대한 성령의 역사도 작은 교회에 있었던 한 부인이 진지한 회개를 통해 시작되었습니다. 부인은 예배시간에 주기도문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대목에서 펑펑 울고 말았습니다. 자신을 모함하고 아프게 했던 형제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부질없이 봉사를 한다고 웃고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을 수도 없어 심장에 화살 맞은 한 마리 노루처럼 뛰어나갔습니다. 용서가 안 되는 그 형제를 찾아가 형제의 잘못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그를 미워했던 자신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지 못했던 내 죄를 회개합니다." 그때 그 형제 또한 진지한 회개를 하게 됩니다. 거기서 시작된 이 작은 교회의 회개운동이 웨일즈라는 도시에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한 시대를 불태웠던 그 유명한 웨일즈 부흥을 일으킨 성령의 역사의 시작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행10:44)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말씀을 증거할 때,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충만을 받으려면 말씀을 열심히 들어야 합니다. 주일 대예배, 오후 찬양예배, 수요예배, 새벽기도회, 금요 심야기도회 등,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에 빠지지 말고 나와서 말씀을 듣는 중에 우리는 성령충만을 받게 됩니다.
셋째, 기도할 때 성령충만을 받습니다.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 기도에 힘쓸 때 성령이 임했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1: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오순절에 저들이 모여 기도하는 중에 저들가운데 불같은 성령이 임했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만, 모여 기도하는 일은 우리의 일입니다.
새마을운동의 정신적 토대를 마련한 류태영 박사가 어느 겨울 내의도 못 입고 새벽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매서운 추위에 아무리 몸을 구부려 열을 모아 보려해도 도무지 추위가 가시지 않는데 어느 순간 온몸이 따뜻해졌습니다. '이게 뭐지? 누가 나한테 담요를 덮어 준건가?' 그는 궁금했지만 기도하다가 다른 데 눈 돌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기도에 집중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눈을 떴는데 그의 몸에 담요가 보이지 않아 이리저리 손을 뻗어보았지만 담요는커녕 아무 것도 잡히질 않았습니다. '아, 이게 성령체험인가? 성령님이 나를 꼭 안아 주신 거였나?' 성령님은 추위 속에서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던 그를 따스하게 감싸주셨던 것입니다.
곽주환 목사가 쓴 [당신의 배터리·와이파이는 안녕하십니까?]라는 글입니다. -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스마트폰은 삶의 방식을 많이 바꿔 놓았습니다. 컴퓨터를 처음 사용할 때보다 더 큰 변화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처음 컴퓨터를 사용할 때는 책상에 앉아서 사용해야 하는 제한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스마트폰은 항상 휴대하면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을 사용할 때 가장 신경 쓰는 것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배터리가 얼마나 남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배터리가 점점 줄면 우리 마음에 불안함이 밀려오는 듯합니다. 또 하나는 와이파이 연결 문제입니다. 어디에서 와이파이가 잘 터지는가 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배터리는 얼마나 남아있는지 체크해야 합니다. 배터리가 줄어드는 건 불안해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와이파이는 연결입니다. 예수님과의 친밀한 연결이 얼마나 잘 되고 있는지 순간순간 체크해 보면 어떨까요. 스마트폰의 방전이나 와이파이 연결이 안 되는 것보다 영적인 방전, 그리고 예수님과의 단절이 더 심각하다는 점을 직시해야겠습니다. - 지금 우리 영혼의 배터리와 와이파이는 어떻습니까?
D.L 무디는 말합니다. "마음속에 성령님을 모시지 않고 성도의 삶을 살아가려는 것은 귀 없이 들으려거나 허파 없이 숨을 쉬려고 하는 것 같다." 보혜사 성령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세상을 이겨나갈 수 없습니다. 빌리 그레이엄은 "내게 성령이 떠나가면 나는 고기 한 덩어리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보혜사 성령의 함께 하심으로, 우리는 세상을 이기며, 새싹처럼 솟아나는 활기찬 새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리더스다이제스트에 실린 17년 동안 마약중독자였던 어느 여의사의 간증입니다. 처음 그녀는 그저 단순한 호기심에서 마약을 시작했으나 결국엔 발을 뺄 수 없을 정도로 중독되어 폐인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의지로 마약을 극복해보려고 수없이 노력했지만 매번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어느 비 오는 날 그녀는 자포자기에 빠져 강둑으로 걸어가다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저 혼자서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어요."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무릎꿇고 있다가 그녀가 몸을 일으켰을 때, 온 세상의 무거운 짐이 그녀의 어깨에서 내려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후론 마약에 대한 욕망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녀는 "나는 나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함으로써 회복으로의 첫걸음을 내딛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마약중독에서 완전히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사44:3-4).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그들이 시냇가의 버들같이 푸르게 새 희망이 움트리라고 약속해주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