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15 135회
"고난 중에 주시는 위로"
2020년 3월 15일 주일예배
요한계시록 2 : 8 - 11 ; 시편 101 : 6
사람들의 궁금함에 대한 이런 글이 있습니다. '닭장 속에는 닭이, 토끼장 속에는 토끼가, 그런데 모기장 속에는 왜 사람이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세월이 약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양력은 양약이고 음력은 한약일까?' '장남에게 시집 안 간다는 요즘 여자들은 결혼하면 차남부터 낳을 자신이 있다는 것일까?' '깡패들이 길을 막고 꼽냐고 물을 때 꼽다고 해야될까, 아니꼽다고 해야될까?' '입을 벌렸다 하면 거짓말만 하는 사람은 입으로 숨쉬는 것도 거짓으로 호흡하는 것은 아닐까?' 말이 됩니다.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무엇이 가장 궁금하십니까? 저는 때로 교회나 성도들에게 어려운 일이 닥치면,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에, 왜 믿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어려운 일이 생길까?'하는 의문이 듭니다. 여러 해 전 유태 랍비인 헤롤드 쿠쉬너는 [선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 때]라는 책에서 악의 문제를 추적하다가 그만 이런 잘못된 결론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긴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고통과 악에 대해서 어쩔 수 없어하시는 그분을 너무 원망하지 말고, 그분을 이해하려고 애써야 한다." 그는 고난에 대한 깊은 통찰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비신앙적인 결론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리빙스턴이 아프리카 선교사업에 성공하고, 뭇사람으로부터 존경받고, 명성이 높아졌던 때, 사람들 앞에서 말했습니다. "인생의 항로를 항해하는 우리의 배가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배 밑에 있는 바닥짐 때문입니다." '바닥짐'이란 '밸러스트(ballast)'라고 하여, 배가 전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뱃바닥에 채워 넣은 돌이나, 물 따위를 가리킵니다. 리빙스턴은 바닥짐과 함께 자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에게는 집을 나가버린 방탕한 아들이었는데, 그 아들 때문에 그는 기도해야 했고, 겸손해야 했고, 그래서 지금까지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었다고 눈물 흘리며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편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때로 믿는 자에게도 이런저런 고난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고난을 허락하실까요? 만약 아무런 고난이 없다면, 과연 이 유혹 많은 세상에서 경건하게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고난은 아프고 힘들지만, 고난을 겪으면서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간절히 기도하며, 어려운 중에도 믿음을 지켜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현실 속에 나타나는 고난을 뭐라고 쉽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C.S. 루이스는 그의 [고통의 문제]라는 책에서 "고통의 문제는 결코 설명될 수 없지만, 극복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통의 원인과 이유에 대해 뭐라고 쉽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되던 당시 유럽과 아시아는 로마의 지배 하에 있었습니다. AD 64년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하자, 네로는 화재의 원인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려 성도들을 원형극장에서 처참하게 죽였습니다. 로마황제 도미티안은 자신을 '신'으로 숭배하라고 명령하고, 자기 이외의 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가차없이 처벌했습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당시 성도들은 혹독한 시련과 고난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이 때 요한은 교회의 존립마저 위태로운 외부의 가혹한 박해로 인해 성도들이 낙담과 좌절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도록 권면하기 위해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잘 견디고 승리하는 것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증거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의지가 강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 중에 '성도의 견인(堅忍)'이 있는데, '한번 구원받은 사람들은 일시적인 타락은 있을 수 있어도 결코 주님에게서 영원히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교리입니다. 초대 성도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를 지키신다는 이 믿음으로 어떤 고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앙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서머나 교회가 그 말할 수 없는 박해를 이겨낸 신앙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본문을 통해 서머나 교회의 승리의 비밀 세 가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주님은 우리의 고통을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9절에 보면,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고 하여 '아노니'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그러면 주님은 무엇을 아신다는 것입니까? 첫째로, 환난을 아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의 환난은 예수 믿기 때문에 받는 시련입니다. 그들이 신앙 때문에 지불하고 있었던 값비싼 대가, 그 고통을 주님이 아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인하여 고통과 어려움을 겪어보셨습니까? 사람이 어려움을 겪을 때, 더더욱 견디기 힘든 것은 '나의 이 고통을 아무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인하여 고독감에 사로잡힐 때입니다. 그러나 누군가 나의 이 어렵고 답답한 사정을 알아주는 분이 있다고 생각되어지면, 극심한 고통과 어려움까지도 견뎌낼 수 있습니다.
이시온 선교사의 [천개의 심장]이란 글입니다. - 나는 순교가 멀리 있다고 생각했다. 대한민국에서 자라난 사람 치고 순교를 가까이서 경험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데 말로만 듣던 순교가 이곳에서는 흔한 일처럼 보인다. 복음 하나만을 위해 젊음을 바친 사람들은 이 땅에서 자신의 마지막을 생각한다. 기독교 역사는 순교의 역사다. 순교가 오기 전에는 핍박이 온다... 나와 아주 가까웠던 메리(가명)도 그렇게 순교했다. 아프간에서는 외국인 납치와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자살 폭탄, 그리고 주요 정부 관계자 피살 등 테러가 일상처럼 일어난다. 허름한 가방 하나와 누구도 입지 않을 만한 옷가지 몇 벌, 주름진 이마가 그녀의 삶을 말해주듯 그녀는 세상의 편하고 좋은 것을 마다하고 이 땅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아이들을 위해 살아왔다. 결혼도 하지 않고 오십 세를 넘긴 아름다운 자매는 늘 자기 것보다는 아이들의 것을 먼저 생각했다. 오직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던 나의 사랑하는 동역자는 잘 있으라는 인사도 남기지 못하고 하나님 품으로 갔다. 소원대로 메리는 이 땅에 뼈를 묻었다. 전쟁터에서 동료를 먼저 보내고도 언제 끝이 날지, 얼마나 더 오래 지속될지,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야 할지 모르는 이 보이지 않는 전쟁을 누군가는 계속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치열한 전쟁은 점점 힘을 잃게 한다. 이른 새벽부터 저녁에 침상에 들기까지 한시도 쉬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군사들은 하나둘씩 떠나가고 적의 숫자는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러니 내 목숨을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전쟁에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 메리는 이 땅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의 아름다운 군사로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하다가 순교했다. 주님이 그녀를 이 전쟁에서 쉬게 하셨다. 그녀의 아름다운 삶은 이 땅의 역사에 쓰여질 것이다. -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오직 예수 믿고 전한다는 이유만으로 숱한 고난과 박해를 겪으면서도 오직 주님이 아신다는 그 믿음으로 모든 고난을 이겨내며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둘째, 궁핍을 아신다고 했습니다. 당시 사회에선 예수 믿게 되면 돈 벌 수 있는 길이 막혀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지금도 회교권이나 이집트에서조차 예수 믿으면 취직하기가 어렵습니다. 예수 믿으면 장사도 포기해야 하고, 집도 팔아야 하고 사업도 그만 둬야한다고 할 때, 여러분 같으면 그런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신앙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이런 질문은 스스로에게 던져보면,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당했던 고난의 의미를 우리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한말 어느 신자의 글입니다. "부유했던 신자들이 가난하게 되었고, 가난한 신자들은 걸식을 하고 의지할 곳 없이 떠돌아다니게 되어 목숨을 이어가기에도 천하에 없는 고생을 하게 되었나이다. 그러하오나 그들이 원망하거나 불평함을 듣지 못하였나이다. 그들은 천주를 봉행하기 위하여 떠돌아다니고, 괴로움 당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나이다. 이것이 저희들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저희들을 붙들어주시는 주님의 특별한 가호가 아니겠나이까?" 우리나라 선교초기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의 궁핍을 아신다고 하시며, 이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계2:9a). 물질적으로는 가난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부자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에 있어서 부요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광이 부요하고, 그 주님과 누릴 수 있었던 교제의 찬란한 기쁨에서 부요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비록 먹을 것이 부족하고, 입을 옷이 다 낡아버렸고, 살아갈 집이 없어 토굴 속에서 지낼지라도, 주님의 은총으로 인하여 세상 그 누구보다도 마음의 풍요를 누렸던 것입니다.
[여자의 일생]을 쓴 프랑스 작가 모파상은 본래 신학교에 들어갔다가 퇴학당하자 신앙과 결별했습니다. 문학에 정진하여 10년 만에 유명작가가 되어 큰돈을 벌었습니다. 그는 지중해에 요트를 가지고 있었고 노르망디에 대저택을, 파리에는 호화 아파트를 갖고 쉴새없이 애인을 바꾸었습니다. 비평가들은 그를 칭찬했고 군중들은 그를 흠모했고 은행에는 돈이 항상 넉넉했지만, 그는 안질과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1892년 인생의 의미를 잃고 칼로 자기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했는데, 간신히 목숨을 구했지만 정신이 파탄 나, 정신병동에서 알 수 없는 소리로 절규하다 4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무덤에는 그가 자주 외친 독백 '나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고 쓰여있습니다. 그는 부자의 꿈을 이루었으나 가장 처절하게 가난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서머나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들은 가난한 것 같으나 실상은 부요한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송명희 시인의 [나]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녀는 뇌성마비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으나, 주님을 만난 후 주님이 주신 그 많은 은혜를 경험하고 이 시를 썼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나 남이 못 본 것 보았고/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공평하신 하나님이/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공평하신 하나님이/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주님 은혜를 받고 보니 누구보다 부요함을 깨달았습니다.
셋째, 유대인들이 가하는 박해를 아신다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돈으로 관리를 매수하여 자신을 지키며, 그리스도인들을 고발하고 핍박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선민이라고 자처했으나 주님은 그들이 실상 유대인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계2:9). '그들이 말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나의 백성이 아니라 사단의 도구이다. 그들에 의해 너희가 받고 있는 고통과 눈물과 중상모략을 내가 알고 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고통받는 것도 서럽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당하게 되면, 더욱 마음이 아프고 서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시길, '이단과 거짓 선지자에게 당한 그 모략과 중상과 고통을 내가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사정을 아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계2:8). 주님이 처음과 나중이 되신다는 사실에, '이 고통이 언제 끝나나'하고 힘들어하던 성도들은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과부 사정 홀아비가 안다'고 했는데, 주님은 고난의 처음과 끝을 아시고, 죽음도 이기셔서, 저들의 사정을 다 아십니다. 우리를 위해 고난 당하신 주님은 우리의 고난을 다 아십니다.
크리스천 시인 애니 존슨 플린트(Annie Johnson Flint)의 [그러나 하나님은](But God)이라는 시입니다. "나는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아신다네/내가 모르는 미지의 날들이/그에게는 분명하고 확실함을 알기에/나 두려움에서 벗어나 복된 안식을 누린다네//모든 수수께끼 같은 당혹한 '왜'의 물음이/회의와 공포가 되어 커져갈 때/난 이 생각으로 해답을 찾는다네/난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아신다고//난 할 수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할 수 있으시다네/내가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짐도/그의 손길은 능히 들어올리심을 알기에/내 염려했던 일들은 오히려 유쾌한 일들일 수 있다네//비록 독수리의 날개가 피곤해지고/내가 한 때 달렸던 길을 이제 걸어야 할지라도/난 내게 주어질 능력을 알고 있다네/난 할 수 없어도 그러나 하나님은 할 수 있으심을 알고 있다고//나는 볼 수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보신다네/내게는 어둡고 감추어진 길이어도/그분에겐 여전히 밝은 길이기에/내 가는 길에 넉넉한 빛을 볼 수 있다네//내 긴장되고 충혈된 눈이/안식 가운데 눈감을 수 있고/평화로움 속에 잠들 수 있는 이유는/나는 보지 못하나, 그러나 하나님은 보시는 때문이라네."
둘째, 지금 겪고 있는 고난은 머잖아 끝난다고 하십니다. 10절입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주님은 성도들이 장차 겪을 환란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 언급된 '십일'은 상징적인 표현으로, '10'이라는 숫자는 항상 '만수(滿數)'입니다. 물건을 셀 때도 열까지 세면 끝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하나님이 예정하신 고난을 그들이 다 받는다는 뜻과, 그 고난은 열까지 밖에는 안 간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너희가 상당한 기간 고통을 받겠지만, 결국 그 고통은 끝난다. 그것은 무한한 고통이 아니다. 그것은 끝나야 할 고통이다'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난은 괴롭고 힘들지만 영원히 지속되진 않습니다. 성경은 이 '잠깐'이란 말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1:6).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5:10). 우리의 고난은 터널이지 결코 굴이 아닙니다.
영국해협을 헤엄쳐서 왕복한 플로렌스 채드윅이 1952년 7월 4일, LA에서 가까운 카타리나 섬에서 캘리포니아 해변까지 수영하겠다고 도전했습니다. 그녀는 16시간 동안 수영했는데 갑자기 짙은 안개가 몰려오자 사력을 다하다가 안타깝게 기권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배로 해변에 도달해보니 안개로 안보이던 도착지점이 불과 500미터도 안 되는 거리였습니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실패한 이유는 추위 때문이거나 피곤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안개로 인해 목표를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목표점만 볼 수 있었다면 저는 어떻게든 도착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고난도 끝나는 때가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다면 능히 견뎌낼 것입니다.
셋째, 고난 중에도 끝까지 충성할 때 두 가지 상급을 약속하십니다. 첫째, 소극적으로 지옥형벌을 받지 않습니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계2:11). 우리가 육신이 죽는 첫 번째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8). 둘째 사망은 지옥형벌을 뜻합니다. 세상에선 악행하는 자들이 승리자처럼 보여도, 그들이 지옥에 처해집니다. 고난 중에도 믿음 지켜나갈 때, 이런 결코 사람은 지옥형벌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오랫동안 성가대와 교사로서 봉사하던 집사님이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목사님, 간단하게 대답해주세요. 정말 천당과 지옥이 있습니까?" 그러더니 '모든 것을 다 제쳐놓고 이것만 믿어질 수 있다면 내가 아무리 가난하고 어려워도 분명하게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겠다'고 하더랍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병들었느냐, 건강하냐, 잘 사느냐, 못사느냐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영원히 사느냐, 영원히 죽느냐'하는 부활신앙의 문제입니다.
둘째, 적극적으로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상급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2:10b). 여기 '관'(冠)은 두 가지인데, 먼저 '디아데마'라는 '왕관'과, '스테파노스'라는, '승리의 월계관'이 있습니다. 서머나 교인들은 인생의 싸움에서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에게 주님이 씌워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그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또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죽음에 이르기까지'라는 뜻으로, 마지막 죽음에 이를 때에도, 믿음과 충성으로 최후의 승리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에 '큰 환난이 있으리라'(마24:21)고 예고하시며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24:13)고 말씀합니다.
워렌 워어스비 목사님의 여비서 남편이 사고로 시력을 잃고 사경을 헤매자, 그 모습이 너무 딱하여 목사님이 여비서를 위로합니다. "나는 당신과 당신 가정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자 이 비서가 "뭐라고 기도하십니까?"하고 묻습니다. 목사님이 "주님이 은총을 주셔서 이 고난을 면케 해달라고 기도하지요."하자, 비서는 "그렇게 기도하지 마세요. 목사님"하며 이런 말을 합니다. "저는 이 시련을 통하여 주님이 내게 주시는 모든 은혜를 다 받으려고 합니다. 끝까지 참고 견뎌서 받아내야 되겠어요. 그러니 제가 그 축복을 받아 냄으로써 오늘 당하는 이 고난이 헛된 고난으로 끝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주세요." 비서가 목사한테 설교를 한 셈이 되었습니다.
이런 글이 있습니다. - 남편이 운영하는 회사가 결국 부도처리되었다. 오늘 집으로 집달관이 찾아와 드라마에서만 보던 압류 딱지를 여기저기 붙이고 갔다. 아이들은 창피에서 학교도 못 다니겠다며, 방안에 틀어박혀 있다. 결혼해서 짧지도 길지도 않은 세월을 사는 동안 힘든 일 참 많았지만, 지금만큼 힘든 적은 크게 없었던 것 같다. 오늘따라 친정엄마 생각만 난다. 그래서 무작정 친정으로 찾아갔다. "엄마, 나 너무 힘들어." 등이라도 토닥이며 위로해줄 줄 알았던 엄마는 부엌에서 냄비 세 개에 물을 채우고 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첫 번째 냄비에는 당근을 넣고, 두 번째 냄비에는 달걀을 넣고, 세 번째 냄비에는 커피를 넣으시는 것이었다. 팔팔 끓어오르기 시작한 세 개의 냄비. 그렇게 아무 말 없이 한참이 지나서야 불을 끄고 엄마는 내게 말하였다. "이 냄비 속 세 가지는 모두 역경에 처하게 되었다. 끓는 물이 바로 엄청난 역경이었는데 세 가지는 각자 어떻게 대처했을 것 같니?" 가만히 있는 나에게 엄마는 다시 말했다. "당근은 단단해. 또, 강하고 단호했지. 그런데 끓는 물과 만난 다음 당근은 한없이 부드러워지고 약해졌어. 반면에 달걀은 너무나 연약했단다. 그나마 껍데기가 있었지만, 보호막이 돼주진 못했다. 그래서 달걀은 끓는 물을 견디며 스스로가 단단해지기로 결정했어. 그런데 커피는 다른 것하고 다르게 독특했어. 커피는 끓는 물과 만나자 그 물을 모두 변화시켜 버린 거야." 나는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 딸, 힘드니? 너는 지금 당근일까, 달걀일까, 커피일까?" - '하나님은 종종 우리가 처한 환경을 바꾸는 대신 그 환경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꾸셔서 우리로 이기게 하신다'고 합니다. 어떤 고난 중에 있더라도 믿음으로 이겨내야 하겠습니다.
불행히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있던 그 지역은 지금 회교지역으로, 에베소, 버가모, 두아디라, 빌라델비아 교회는 모두 사라졌는데, 이 서머나 교회는 남아있습니다. 이 교회에는 감독이었던 폴리캅이 순교 당하는 성화가 있습니다. 칼을 든 사나이가 불길에 싸인 폴리캅을 향해 달려드는데, 그는 평화스런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의 오른편엔 손이 묶인 또 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이 그림을 그린 화가 레이몽 페레로서, 자신도 폴리캅처럼 순교자가 되기를 열망하여 이렇게 그렸습니다.
앨라배마 주 게스덴 제일 감리교회 쉘튼 목사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서 이렇게 썼습니다. "왜 이런 고통을 참아야 하는지 나는 모르네/나는 나의 주님이 모든 것을 잘 하신다는 것을 알뿐이네/그래서 나의 전부이신 주님을 믿는다네/무슨 시련이 닥쳐도 주님께서 나를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일세./모든 일들이 당신을 적대시하는 것 같을 때 하나님이 당신의/편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시101:6). 최종승리를 믿을 수만 있다면 어떤 고난도 이겨낼 것입니다.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3:11).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