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교회
031-701-0691 / 경기도성남시분당구야탑동 523번지
손세용 목사

베드로전서 1장 1~7절

설교요약 :

"우리에게 산 소망이 있으니"
2020년 12월 13일 주일예배
베드로전서 1 : 1 - 7 : 예레미야 29 : 11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꿈을 묻자, 한 학생이 거침없이 대답합니다. "재벌 2세가 꿈입니다. 그런데 아빠가 노력을 안 해요." 선생님이 기가 막혀 그 학생 아빠에게 그 말을 들려줬더니, 학생 아빠도 말합니다. "나도 재벌아빠가 꿈인데, 아이가 노력을 안 하네요." 합당한 노력만 있다면 그런 꿈도 잘못될 건 없습니다. 차동엽 신부는 [희망의 귀환]이란 책에서 '역사이래 꿈 시장에 불경기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형편이 어려울 때일수록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이 더욱 필요합니다.


지난 12월 9일자 우리 교단신문 [기독공보]에 '올해 가장 많이 검색한 성구'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는 스마트기기 성경 어플리케이션 '유버전'(You Version)에서, 2020년에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검색한 성경구절로 이사야서 41장 10절을 꼽았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로 시작하는 이 말씀은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등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에게 힘과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운 때를 보내며, 하나님의 도움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인생살이가 고추보다 맵다'는 말처럼, 어렵고 힘들 때면 곧잘 '매운 맛을 봤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매울 신(辛)'자에 '한 일(一)'을 더하면, 바로 행복을 뜻하는 '다행 행(幸)'이 됩니다. 좌절의 순간에도 무언가 하나를 더하기만 하면 행복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고질병'에 점을 하나 찍으면 '고칠 병'이 되고, '빚'이라는 글자에 점을 하나 찍으면 '빛'이 됩니다. 불가능이란 단어 'Impossible'에 점을 하나 찍으면, 가능하다는 'I'm possible'이 됩니다. '꿈은 어디에도 없다'는 'Dream is nowhere'가 띄어쓰기 하나로 'Dream is now here'로 '꿈은 바로 여기에 있다'로 바뀝니다. 어느 암환자는 의사가 '이제 당신의 살 날이 3개월 밖에 안 남았다'라는 말을 듣고 절망했는데, 목사님이 지나가면서 '샬롬!'하고 인사하는 말을 '살 놈'으로 듣고, '그래 나는 죽을 놈이 아니고 살 놈이다'라고 믿고, 희망을 갖게되어 살아났다고 합니다.


양을 쳐서 생계를 유지하던 어떤 사람의 양떼가 목장 샘물을 마시고는 모두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생계수단인 양들이 죽자 남자는 크게 낙심했습니다. '이제 우리 가족은 다 굶어 죽게 되었구나.' 그는 새로 양을 살 돈도 없어, 살 길이 막막한데 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양들이 죽은 원인은 알아야겠다!' 그는 샘물을 떠다 연구소에 의뢰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샘물에서 나온 검은 액체는 원유였습니다. 살 길이 없다고 한탄했던 그는 거기서 발견한 원유로 새로운 희망을 찾게 되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이 닥칠 때, 그저 낙담만 하고 있진 않습니까? 어떤 상황에도 절망하지 않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면 일어설 수 있습니다.


A.D 64년 7월 어느 날, 로마의 중심가에 큰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알려진 대로 이 화재는 폭군 네로가 저지른 방화였습니다. 그는 불타는 로마 시가지를 바라보며 광적으로 춤추며 시를 지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성난 로마 군중들의 항의가 빛발치자 그는 이 화재가 크리스천들이 불지른 것이라며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줄줄이 잡혀가 참수를 당하기도 했고, 더러는 원형경기장에서 맹수들에 의해 그들의 몸뚱이가 갈가리 찢겨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 대대적인 박해로 인하여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로마를 떠나, 소아시아로 피신하여, 암혈 속에 들어가 메시야의 도래를 기다리며 고난을 이겨내었던 것입니다.


이때 흩어진 성도에게 지도자로 추앙 받던 예수님의 수제자가 베드로인데, 그 베드로 사도가 흩어진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가 바로 본문 말씀인 베드로서신입니다. 본문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이 도시들 중에 터키에 있는 갑바도기아에 가보면 그때 성도들이 피하여 숨어있던 수많은 동굴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곳은 도시 전체가 거대한 바위굴로 되어있는데, 당시 크리스천들은 네로 황제의 추적을 피해 그곳에 숨어 공동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3절 말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1:3). 여기서 베드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흩어졌던 당시의 성도들에게 그들이 아직도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당시의 크리스천들에게 권면했던 것처럼,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고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아직 소망을 품고 살아야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부활로 새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1:3b). 우리가 일요일을 주일로 지켜 이 날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본래 유대인의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였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토요일에 회당에 가서 예배드립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전통을 철저히 지키는 민족은 아마도 유대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철저한 유대인의 전통을 깨뜨리고 토요일이 아닌 안식 후 첫 날인 주일에 일단의 유대인들이 모여 예배드리게 된 것은, 이날에 부활하신 주님 때문입니다. 사실 십자가 사건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풍비박산이 되어 공동체는 완전히 와해되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로 믿었던 예수가 십자가에 죽자, 모든 것을 체념하고, 악몽 같았던 예수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잊어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고, 그들은 흩어져버려 더 이상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이 체념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모이더니, 목숨걸고 복음을 증거하는 새로운 공동체로 태어났습니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져왔을까요? 이 변화의 이유는 오직 하나,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예수님의 두 제자가 고향 엠마오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슬픈 기색으로 고향을 향해 걸어가던 두 제자가 돌연 발걸음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복음을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는 제자로 새롭게 거듭납니다. 그 이유는 부활하신 주님이 엠마오를 향해 걷던 그들에게 찾아오신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성경말씀을 풀어주시자, 이 제자들은 갑자기 마음이 뜨거워지며, 자기들과 함께 대화하고, 함께 식사하시던 그분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인 것을 깨닫게되자, 이들의 모든 것이 변화하였습니다.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위해 생명을 바쳤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공동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시작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1:3).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가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이 거듭남은 일종의 우리의 부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사신 주님이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셨는데, 이것이 우리 부활신앙의 근거입니다. 그리고 거듭난 사람들 안에 주님이 성령으로 임재하심으로, 우리 안에 '산 소망'(Living hope)을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고, 새로운 인생관과,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고, 믿음으로 새롭게 소망이 넘치는 인생을 살게 해주십니다.


영국의 목공소에서 일하던 가난한 청년이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했더니, 갑자기 그에게 삶의 의욕과 소망이 넘쳐났습니다. 한 10년 열심히 일하고 난 후, 그는 원하던 가구제조업을 경영하는 사장이 되어, 이제 돈도 명예도 갖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자기 공장 뒤편에 있는 언덕에 올라 산책하다가 널찍한 바위를 발견하고 걸터앉아 아름다운 마을의 정경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그는 가슴에 밀려오는 행복을 느끼며, 자신이 이런 작은 행복을 누리고 있음은 자기가 걸터앉은 바위가 자신을 편안히 받쳐주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에게 자신의 인생을 떠 받쳐주는 바위와 같은 행복의 근거는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부활하신 주님이 살아 계셔서 자신을 인도하시는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그는 종이를 꺼내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가 바로 찬송가 488장(Edward Mote의 시)입니다.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그 위에 내가 서리라." 우리는 과거에 우리를 건져주신 하나님, 현재 우리를 지켜주시는 하나님, 미래, 우리를 책임져주실 하나님을 소망할 때 평안과 위로와 희망을 누리게됩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모시고 그분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삶이 정황이 아무리 어둡다하더라도 아직 절망은 이릅니다.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이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왜 무기력합니까? 성경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39:7)라고 노래합니다.


둘째, 영원한 천국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4). 이 시대 많은 기업이 무너지고 있는데, 이 '기업'이란 말은 1세기 성도들에게도 익숙한 단어였습니다. 그들도 자신의 기업이 무너지고 빼앗기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들의 기업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성도들은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히10:34). 그들은 기업이 무너지고 빼앗겼는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다른 것은, 그들은 기업을 빼앗길 때도 기쁘게 당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그들이 지상의 기업을 잃어버리면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에게 더 낫고 영구하여 빼앗기지 않는 기업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지상의 권한과 시련을 이겨낸 그들의 저력이요, 믿음의 근거였습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도 같은 말씀을 하는데, '결코 썩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늘나라의 영원한 기업' 때문이었습니다.


미국 휴스턴 어느 한 교회의 주일예배에 온화하고 밝은 모습의 한 할아버지가 참석하여, 목사님의 간단한 소개를 받고 조용히 앞으로 나와 간증을 시작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 아들과 아들의 가장 친한 친구를 데리고 바다에 나갔습니다. 보트를 타고 한참 나갔는데 갑자기 파도에 휩쓸려서 배가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간신히 손을 내밀어 구명대를 잡았지만 구명대는 하나뿐이었습니다. 그 구명대를 아들에게 줄 것인가, 아들 친구에게 줄 것인가 망설이던 그의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아들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으니 혹시 지금 죽는다고 해도 천국에 갈 것이다. 하지만 아들의 친구는 예수님을 안 믿으니 이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 그에게는 시간이 필요해.' 아버지는 눈물을 머금고 아들에게 "아들아, 진심으로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한 뒤, 아들은 파도에 휩쓸려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때 살아난 아들의 친구가 바로 그 교회의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보다 더 큰사랑이 어디 있으랴만, 이 아버지는 자식은 믿음을 가졌기에 지금 죽더라도 천국에 간다는 믿음으로, 그 아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믿지 않는 아들 친구의 영혼을 구하려했던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다면 죽음 앞에서도 평안합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1:5).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구원이 완전히 성취되기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성도의 견인'이라고 말합니다. 이 약속은 우리에게 '영원한 안전'(eternal security)이 됩니다. 우리가 소망을 갖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에게 주어진 궁극적인 소망은 천국이지만, 주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어떤 일을 당하든지 그대로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 흔들리지 않고 지켜지도록 우리의 믿음과 구원을 당신의 능력으로 보호해주십니다.


'하나님의 보호'는 첫째, 우리의 구원이 실패하지 않도록 우리를 책임져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생은 누구도 빼앗지 못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한10:28).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은 결코 실패하지 않고 끝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10:29).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믿었다면,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더취 쉬츠의 소망]이란 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쉐리'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여행 중에 한 도시를 방문했습니다. 그녀는 우연히 하늘을 보다가 아름다운 석양에 감탄했습니다. 그런 장관을 혼자만 본다는 것이 아까워 가까운 가게에 들어가 여자 점원에게 말했습니다. "좀 나와 보세요." 점원은 당황했으나 따라 나왔습니다. 쉐리가 말했습니다. "저 석양 좀 보세요.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이 하늘을 만드셨어요. 이 세상은 모든 게 좋아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죠." 점원은 물끄러미 석양을 바라보다가 곧 가게로 들어갔습니다. 그 후 4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쉐리는 남편과 이혼을 했습니다. 그녀는 아무런 소망이 없이 살아가면서, 그녀에게 삶은 감옥이었고 무덤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쉐리는 무심코 한 잡지를 펼쳐 읽었습니다. 거기에는 어느 여인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습니다. 그 여인도 결혼에 실패해 절망 중에 있었습니다. 여인은 낯선 도시로 이사하여 가게 점원으로 일하면서, 죽지 못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여자가 가게에 들어와 밖으로 나오라고 하더니 석양을 보라고 했습니다. 여자가 한 말을 통해 그녀는 잊고 있던 하나님을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녀의 고통의 삶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쉐리는 깜짝 놀랐습니다. 바로 자신의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쉐리는 다시 하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쉐리도 고통에서 건져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성도는 하나님께서 끝까지 책임져주시고, 그의 믿음을 잃지 않습니다.


둘째는, 우리가 어떤 시험이나 위기에서도 능히 견디도록 주님의 능력으로 지켜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10:29). 하나님은 어떤 위기나 시험에서도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모든 위험 가운데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해주십니다.


빌 프레이가 쓴 [소망의 춤](The Dance of Hope)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1951년, 빌은 콜로라도 대학에서 일하는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존(John)이라는 학생을 알게 됐습니다. 마침 적적한 기회가 생겨서 어쩌다 시력을 잃게 되었는지 묻자, 존은 십대 시절에 겪은 사고를 들려주었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참담한 사고는 유망한 젊은이의 시력뿐만 아니라 소망까지 빼앗아갔습니다. "너무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어떻게 하나님은 제가 그런 일을 겪도록 보고만 계시는지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있는 대로 신경질을 냈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앞이 캄캄하더라고요.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어요. 그래서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밥상이 들락거릴 대 빼고는 절대 열어주지 않았어요." 빌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 동안 존은 한 번도 고통이나 분노의 냄새를 풍긴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존이 지금의 평정을 찾게된 것은 아버지 덕분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연민에 빠져 세월을 허송하는 아들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삶을 개척해나갈 준비를 시키려고, 아들에게 집에 달린 모든 유리창에 덧문을 달아놓으라는 과제를 주었습니다. 마침 매서운 바람이 부는 겨울이 닥쳐오고 있었습니다. "내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다 해놔야 한다. 알았지?" 아버지는 문을 쾅 닫고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존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투덜거리기도 하고, 혼자 욕설을 퍼붓기도 했지만,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아버지의 명령인걸, 창고로 가서 더듬더듬 짚어가며 덧문이니 사다리, 연장 등을 챙겼습니다. 마음에는 아직도 억울한 생각이 가득했습니다. '그래, 차라리 사다리에서 떨어져서 목이라도 부러지면 좋겠어. 그렇게 되면 아버지도 마음이 아프겠지?' 하지만 존은 사다리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느라 시간은 많이 걸렸지만, 어쨌든 일도 무사히 끝냈습니다. 그 날의 숙제 덕분에 아버지의 소원도 이뤄졌습니다. 아들이 아직도 자신에게 일할 능력이 남아 있고, 지금이라도 다시 삶을 일궈 갈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몇 년 뒤, 존은 그 날 일과 관련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얘기를 하면서 존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습니다. "덧문을 달기 위해 버둥거리는 동안 아버지는 잠시도 제 곁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한참 뒤에야 그 날 일을 말씀해주셨지요." 아버지의 뜻은 자식을 사다리에서 떨어뜨리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늘 아버지도 자녀가 실족하는 것을 보고싶어하는 분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주님은 항상 곁에 계시며 능력으로 보호해 주십니다.


어떤 과학자가 같은 독 안에 실험쥐를 한 마리씩 넣고 생존시간을 체크했습니다. 캄캄한 독에 물을 2/3정도 채우고, 그 안에 쥐 한 마리를 넣고 뚜껑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항아리는 2/3정도 물을 채웠지만, 뚜껑을 반쯤 열어 그 독에 있는 쥐는 하늘을 볼 수 있고 음식냄새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뚜껑이 열린 독에 있던 쥐는 생존시간이 36시간이었는데, 뚜껑이 덮인 어두운 독에 있던 쥐는 생존시간이 겨우 3분이더랍니다. 이 실험에서 차이는 희망입니다. 한쪽은 희망이 없었고, 다른 쪽은 희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늘이 보이고 음식냄새가 난다는 것은 살아날 희망을 갖게 했지만, 반면 뚜껑이 닫힌 캄캄한 독에 있던 쥐는 절망에 빠져 살아날 확률이 거의 0%였던 것입니다. 뚜껑이 열린 독 안에 있었던 쥐는 그 실낱같은 희망으로 절망한 쥐에 비해 720배의 시간을 더 살았음을 보여줍니다. 인간도 희망을 붙든다면 '720배 가능성'으로, 절망하여 1시간 후에 죽을 사람도, 희망으로 30일을 더 살 수 있다는 결론이 갖게 하는데, 우리는 이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나치독일에서 살아남은 어떤 이가 말했습니다. "기차가 터널 속으로 들어가 어두워졌다고 기차표를 찢던가,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이 있더냐? 기차가 터널 속으로 지나가게 되어 캄캄해졌더라도 우리는 운전사의 기술만을 믿고 한 순간을 지나가며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참으로 지혜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루씨 렝켈은 "그림자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림자는 가까운 곳에 빛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고, 어느 시인은 "구름 뒤에는 별빛이 숨어있고 소나기를 뚫고서 햇살이 비춰오니 모든 것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위하여 소망을 남겨주셨다"고 말합니다.


실직한 두 사람이 공원을 쓸고 있었습니다. 일을 다 마치자 한 사람은 땅에 침을 뱉으며 한탄의 긴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하늘을 보고 웃으며 깊은 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땀이 식자 조용히 벤치에서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래도 오늘 하루 일용할 양식이 있고, 공원이라도 쓸며 보람을 누릴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언제가 기회는 또 다시 올 것이라 여기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한 해가 지난 가을, 늘 즐겁게 공원을 쓸던 사람은 공원 관리인으로 특별 채용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공원을 찾던 주민들이 나서서 그분을 추천하였기 때문입니다. 공원 관리인이 된 그 사람은 추운 어느 날, 공원에서 술이 취한 채 얼어죽기 직전의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살펴보니 그 사람은 땅에 침을 뱉으며 한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공원 관리인은 급히 구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옮기고 돌봐주어, 그 사람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같은 실직자였지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하늘은 소망을 품은 자를 도우십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29:11).

베드로전서 1장 1~7절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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