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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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세용 목사

로마서 6장 1~13절

설교요약 :

"부활로 그리스도와 함께 된 생명"
2020년 4월 12일 부활주일
로마서 6 : 1 - 13 ; 이사야 25 : 7 - 8


여러 해 전에 미국의 한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어린이들에게 살아있는 인물 중에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말해보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빌 게이츠, 워렌 버핏, 오프라 윈프리, 마더 테레사, 빌리 그래함 등' 여러 인물이 열거되었는데 한 소녀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이 "난 여러분에게 살아있는 인물 중에서 존경하는 이를 말해보라고 했습니다"라고 말했더니, 이 소녀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문제는 그분과 함께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1995년 10월 17일, 매사추세츠 메모리얼 병원에서 카이리(Kyre)와 브리엘(Brielle Jackson)이란 쌍둥이가 1Kg 밖에 안 되는 조산아로 예정일보다 3달이나 빨리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들을 각각의 인큐베이터에서 양육했는데, 그중 카이리는 회복이 되어 잘 자랐지만, 브리엘은 심장에 큰 결함이 있어 점점 상태가 나빠져서 의사는 그 아이가 곧 죽게 될 것을 예상했습니다. 모두 안타깝게 지켜보는데, 19년 경력의 간호사(Gayle Kasparian)는 그 아기가 '뭔가 말을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느끼고는, 유럽에서 전에 실시해오던 미숙아 치료법을 생각하고서 두 아기를 한 인큐베이터에 넣자고 의사에게 제안했습니다. 쌍둥이는 엄마 배속에선 함께 부둥켜안고 있었기에, 이들을 따로 떼어 둘 것이 아니라 같이 두자고 한 것입니다. 이는 병원의 방침에 어긋났기에 의사는 고민하다가 엄마의 동의로 두 아이를 한 인큐베이터 안에 나란히 눕혔습니다. 그러자 건강한 아기가 스스로 팔을 뻗어 아픈 아기를 감싸안는데 이때부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아기의 손길이 닿자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픈 아기의 심장이 안정을 되찾더니, 혈압과 체온이 정상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의사들은 처음엔 기계가 오작동 하는 줄 알았는데 정상이자, 너무 기뻐서 사진에 '생명을 구하는 포옹'(The Rescuing Hug)이란 제목을 붙여 사람들에게 나눠주었고, 지역 신문에도 보도되었습니다. 그 후 두 아기는 완전히 정상으로 잘 자랐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일본작가 우시지마 마사토(牛島正人)씨는 어떤 트레이닝에서,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자기 몸의 피곤하고 아픈 부위를 상대방의 같은 부위를 마사지해주었습니다. 상대방의 아픈 데가 아니라, 자신의 아픈 부위와 같은 상대방의 신체 부위를 마사지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신의 피곤한 부분이 풀리는 것을 경험하였다고 합니다. 사람의 몸도 서로 '공명'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땅에서 우리의 생명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꺼져 가는데,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 우리를 안아주시고 만져주시면, 우리의 아프거나 꺼져 가는 생명도 주님과 함께 온전하고, 건강한 생명, 그리고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로운 삶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 우리가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예수님처럼 죄에 대해서는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새생명 가운데 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주님과의 연합은 우리가 죄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의(義)의 영역에서 살게 되어, "양으로 풍성한 생명을 얻는 것"(요10:10)과 이어집니다. 우리는 주님과 연합으로 죄로 인해 죽음에 처해질 옛사람은 죽고,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를 어떤 변화를 가져다줍니까? 첫째, 우리는 세례 받음으로 우리 옛사람이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4절 말씀은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롬6:4a)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세례란 단순히 의식이나 성례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을 뜻합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속하여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함께 죽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신학자 랄프 윈터는 '세례'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례를 줄 때, 물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침례나, 아니면 물을 머리에 바르는 관수례로 하는데, 이처럼 세례를 물로만 줄 것이 아니라, 죽은 시신을 넣는 관을 가져다 놓고 세례를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물 속에 들어왔다 나오는 것이 아니라, 관속에 사람을 집어넣어 장사지내 버리고, 그리고서 관에서 다시 꺼냄으로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면, 세례 받는 의미가 보다 더 실감나지 않겠느냐 하는 기발한 주장을 하였습니다.


뉴질랜드의 피지족의 마을 한가운데 죄수들을 죽이는 둥그런 바위가 있습니다. 그들은 죄수를 그 바위에 묶어놓고 여러 사람이 돌로 머리를 짓이겨 죽이는데 그 바위에 피가 줄줄 흐른 것을 닦지 않고 그대로 두어 사람들에게 범죄치 않도록 죄를 경계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갔던 선교사는 이 사실을 알고, 일부러 그 '죽이는 바위'(killing stone)라는 그 바위 앞에서 세례를 주면서 "당신은 예수님과 함께 지금 옛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정과 욕심을 다 죽이는 시간입니다"하고 말했다고 습니다. 이렇게 세례를 받으면 다신 산다는 것을 몸으로 실감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육신이 죽고, 부활하여 새롭게 다시 살아나셨듯이,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음으로 옛사람이 죽고, 이제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지난날의 죄와 상관없이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갈 근거가 마련됐습니다. 바울은 이런 원리에 따라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죽은 자는 분노하지도, 욕심내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죄에 속한 우리의 옛사람이 죽은 것을 선포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얼마나 철저하게 죽었느냐?]는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가 끝난 뒤, 한 청년이 "죽는다는 그 말이 무슨 뜻입니까?"라고 묻습니다. 목사님은 그에게 이렇게 이릅니다. "공동묘지에 가서 죽은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공로가 많은 사람들이라고 칭찬해보게나. 그리고 다음에는 나쁜 놈들이라고 욕을 해보게나." 그 말대로 해본 청년이 목사님께 찾아와서는 "아무 대답도 없던데요"라고 다소 퉁명스럽게 말합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빙긋 웃으며 "그것이 바로 죽었다는 뜻일세"라고 대답했습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죽었느냐'로, 예수를 잘 믿느냐 못 믿느냐를 평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신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둘째, 오늘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5절에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으로 인하여 하루하루 새 생명가운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매일매일 삶 속에서 욕심, 정욕, 허탄한 생각, 더러운 것들이 있지만, 십자가를 바라볼 때 십자가로부터 신비로운 능력이 임하여 내 모든 더러운 것이 깨끗이 죽어지는 것을 체험하게됩니다. 내 힘으로 옛 생활을 끊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이 죄에 대한 욕심을 죽입니다.


찬송가 149장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라는 가사처럼 형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과 은혜가 내 죄를 죽이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는데, 내가 어찌 죄를 또 짓겠고, 어찌 욕심을 품고, 누구를 미워하고, 혈기를 부리겠느냐?" "나는 죽을 것이다"가 아니라, "나는 이미 벌써 죽었다, 나의 옛사람은 이미 죽었다"고 인정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새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런던의 화랑에 가면 '체크메이트'(checkmate, 외통수)란 제목의 그림이 있습니다. 악마 메피스토와 체스게임 하던 파우스트가 더는 빠져나갈 수 없는 외통수에 걸린 그림으로, 마귀의 계략에 빠져 도망갈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인간의 모습을 생생히 그린 그림입니다. 어느 날 관광객들과 함께 화랑에 들어온 체스 세계챔피언이었던 러시아인 한 명이 그 그림을 뚫어지게 쳐다보다 갑자기 소리쳤습니다. "파우스트가 한 수 더 둘 수 있어!" 그는 남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수가 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을 때, 그는 자신이 승리했다고 기뻐 날뛰었으나, 하나님께는 한 수가 더 있었습니다. 바로 부활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사탄의 세력을 박살내셨습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갈 때,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이 우리를 승리하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할 때, 우리의 대장 되시는 주님이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셨기에, 우리도 결국은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장차 영원히 살 수 있는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8절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라고 했습니다. 주님과 연합하여 새 생명을 얻은 성도는 예수님이 재림 시에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옷 입고 영원히 살 것입니다. 죄로 영원히 죽게 된 사람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옛사람을 못박아 버림으로, 주님이 부활하셔서 영원히 사시는 것처럼, 주님과 연합한 사람들도 이제는 주님의 생명 힘입어, 영원히 주님과 더불어 살게 될 것입니다.


[끈]이이라는 책은 2005년 1월 산악인 박정헌 씨와 후배 최강식 씨가 해발 6,440미터 히말라야 촐라체 북벽 등반에 성공하고 하산하던 중 조난을 당하고 구조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등반기입니다. 박정헌 씨와 최강식 씨는 로프로 서로를 묶고 내려오고 있었는데, 후배 최강식 씨가 눈으로 덮여 있던 빙벽 사이로 추락하면서 비명을 지르는 순간 앞장서고 있던 박정헌 씨는 반사적으로 얼음을 찍어 간신히 멈추었는데, 아무리 끌어올리려 해도 최강식 씨가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두 발이 다 부러져 혼자서는 벽을 기어오를 수 없어 끌려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위에 있던 박정헌 씨 역시 갈비뼈가 부러졌는데, 히말라야의 외딴 곳에서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직 둘 사이를 연결한 끈을 놓지 않은 채 삶과 죽음 사이에서 3시간 동안 사투를 벌였습니다. 이때 박정헌 씨는 '연결된 끈을 끊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럴 수 없었습니다. 3시간의 사투 끝에 최강식 씨가 간신히 절벽을 기어올라왔는데, 두 다리가 부러진 사람과 산을 내려가는 것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시력이 0.3밖에 안 되는 박정헌 씨는 안경을 잃어버려 온 세상은 허옇게 보였고, 두 발목이 부러진 최강식 씨 역시 가까스로 기어야 했기에, 두 사람이 그렇게 산을 내려오는데 무려 5일이 걸렸습니다. 간신히 구조되어 극적으로 생환했으나, 심한 동상으로 박정헌 씨는 여덟 손가락과 두 개의 발가락을 잘라냈고, 최강식 씨는 아홉 손가락과 발가락 대부분을 잘라냈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그들은 결국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예수님과 우리 사이를 묶고 있는 끈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난 절대로 너를 포기할 수 없어! 내가 십자가 위에서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손발에 못이 박히고, 옆구리를 창으로 찔려 물과 피를 다 쏟으면서도, 난 너를 포기할 수 없었어." 사람들은 때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부담스러워, 믿음의 끈을 끊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합니다. 끊어버리려는 끈이 실제로는 나의 영원한 생명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 묶여 있는 끈이 끊어지면, 우리는 저 깊은 지옥의 심연으로 떨어지고 말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새로운 삶을 위해서 우리가 갖아야 할 신앙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안다'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롬6:3),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6:6),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롬6:9). 우리 옛사람은 죽고 주님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변화된 인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됨을 알아야 하고,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는 현실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현실이 우리 모든 생활에 그대로 영향을 미칩니다. 믿음에는 옳고 그름의 분별이나 어떤 깨달음도 없이 막연하게 무작정 믿는 맹신이 있는가 하면, 이성을 잃고 덮어놓고 믿는 광신도 있고, 혼미하게 무엇인가 찾아 헤매는 미신도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사실과 진실에 근거합니다. 이것을 내가 알면서부터 그 속에서 자기 존재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은 예수님이지만,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죽지는 않았어도 죽은 것으로 간주됩니다. 나는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기만 했는데, 하나님은 나도 죽은 것으로 간주해주십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누구든지 죄 문제를 해결하려면 반드시 죽어야 해결되는데, 하나님은 예수님이 죽으신 것을 믿기만 하면, 나도 죄에 대해 죽은 것으로 간주해주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을 믿는 것처럼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으면 죽음에서 부활한 것으로 간주되어, 예수님을 믿는 순간 그분과 함께 부활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부대에 걸핏하면 한밤중에 병사들을 집합시켜 줄빠따를 때리는 내무반장 하사가 있어 모두 치를 떨며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그 하사가 제대하자, 모두들 '이제는 살았다'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는데, 제대한지 사흘만에 술에 취하여 한밤중에 찾아와 "집합!"하고 소리칩니다. 모두 겁에 질려 두려워 떠는데, 그때 고참 병사가 벌떡 일어나서 "야, 김 하사 넌 끝났어!"하고 소리치고는, 병사들을 향해 "야, 걱정말고 모두 잠자!"하자, 김 하사는 머쓱해져서 나가버렸습니다. 우리에게도 죄의 시대, 사단의 지배를 받던 옛 생활은 청산되고 참된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둘째, 자신을 변화된 새로운 존재로 여겨야 합니다. 11절에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6:11)고 했는데, '여길지어다!'라는 말은 명령형입니다. 이 말은 회계사들의 전문용어로 '계좌에 입금되었으니 현금과 마찬가지로 여기라'는 말입니다. 이제 내가 새사람이 된 사실을 거듭 자기 자신에게 의식화시켜야 합니다. 바울은 10절에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지고 단번에 죽으셨다 다시 살으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삶을 누리기 위해 다시 사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11절에서 우리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기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실제로 죽지 않았는데, 그렇게 여기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사실대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 지을 일이 생겨, 막 성질이 나려고 할 때, '나는 죽었는데...'라고 끊임없이 자신을 죽은 자리에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주님과의 관계에서만 산 자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생각만의 인식이 아니라, 입으로 시인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평양의 깡패였다가 예수 믿고 새 사람 된 김익두는 예수님을 영접하자 맨 처음 '김익두 사망'이란 부고를 사람들에게 보냈다고 합니다. 그 부고를 받고 평양 사람들이 모두 반가워했는데, 거리에서 김익두를 만나자 "아니, 죽었다던 김익두가 살아 있잖아"하고 놀라니, "옛날 깡패 김익두는 죽었고, 이제 예수 믿는 새사람 김익두로 태어났소"하고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이 정말 김익두가 새사람 되었는가 그의 뺨을 때리고, 주먹질해도 김익두는 그 매를 다 맞으며 옛사람의 혈기를 죽였다고 합니다.


셋째, 우리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13절 말씀입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3). '알라', '여기라'는 말은 지적인 인식과 관련되었다면, '드리라'는 말은 의지적인 결단을 촉구하는 말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에, 이 새 생명을 하나님께 드려, 의롭게 살아야만 합니다. 죄를 이기는 중요한 열쇠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생명을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중국교회의 지도자 워치만 니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형제가 기차여행을 하는데, 긴 여행이라서 무료를 달래기 위해 옆에 앉은 이들이 카드놀이를 제안하더랍니다. 네 명이 하는 게임이어서 그리스도인에게 같이 카드를 하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가 정중히 사양하자, "카드놀이를 할 줄 모르느냐?"고 묻더랍니다. 그가 "할 줄은 안다"고 말했더니, 한 사람이 "그럼 그 손 가지고 있다 무얼 하려고요?"라고 반문하자, 이 형제가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손이 제 손이 아니라서요. 달리 할 일이 있어서요." "아니,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묻는 그에게 자기가 최근에 예수 믿게 된 신앙간증을 하고 이제는 그의 몸이 주의 몸이 되고, 그의 손이 주의 손이 되었는데 아무래도 주의 손으로 카드놀이 하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실 것 같아 사양한다는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성 프랜시스가 홀로 산에서 말씀을 읽으며 주님의 사랑을 묵상하는데, 갑자기 영광스런 주님의 형상이 지평선을 뒤덮으며 그의 온몸에 십자가의 강렬한 아픔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내가 주님의 흔적을 갖기를 원합니다'라는 그의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그의 손바닥에는 못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졌다고 합니다.


베트남 전쟁은 1964년에 시작되어 무려 10년만인 1975년에 현대사에 어두운 그림자를 남기고 끝났습니다. 이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69년 미국인들은 다른 어떤 해보다도 추운 겨울을 지내고있었고, 신학계는 이런 시대를 반영하듯 소위 '하나님의 죽음의 신학'이 가르쳐지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 어느 날 미국 인디아나주에 살던 빌과 글로리아 두 고등학교선생님은 결혼하고 아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둘 다 크리스천으로서 음악을 사랑하던 이들은 교회음악 사역에 헌신하려고 학교를 사임하고 사역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회적분위기가 너무 어두웠던 탓인지 작곡도 뜻대로 되지 않았고, 건강도 좋지 않아 사역의 길은 열리지 않은 채 1970년 봄을 맞았습니다. 어느 날 이들 부부가 빌의 아버지를 모시고 사무실 앞에 주차하다가 주차장의 깨진 아스팔트를 헤치고 고개를 내밀고 있는 파란풀잎을 보고 아버지가 "저 풀잎들을 보라"고 말합니다. 아들과 며느리는 "봄이 오는군요"라고 대답합니다. 얼마 후에 이 가정에 아들이 태어납니다. 이 어두운 시대를 자기 가족이 어떻게 헤쳐가며 살 것인가 기도하던 글로리아의 마음에 한순간 두려움이 사라지고 주님의 임재의 기쁨이 그녀 마음을 채웠습니다. 그녀는 펜을 들어 노래를 쓰기 시작합니다.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빌과 글로리아 게이터(Gaither)의 [그가 살아 계시기에](Because He Lives)라는 유명한 찬양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사람이 잘 사는 것이 아니면 사는 것이 아니다.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면 잘 사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습니다. 리빙스턴도 "영원한 나라와 연결되지 않은 모든 일은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영원한 내일이 없는 인생은 결코 잘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내일에 대한 해답이 없이는 언제나 허무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부활하셨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시며,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니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사25:7-8). 만약 부활이 없다면 삶은 잔혹한 형벌이요, 죽음의 감옥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휴머니스트일지언정 메시야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믿는 것은 오직 주님의 부활에 의해서만 정당화되어집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의 약속을 성경책에만 쓰신 것이 아니라 봄날의 잎사귀들에도 쓰셨습니다. 우리는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박아버리고,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하여 거듭난 새사람으로 죄와 유혹을 이기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아갈 때,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해주실 것입니다.

로마서 6장 1~13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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