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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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세용 목사님

마가복음 6장 30~34절

설교요약 :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2018년 8월 12일 주일예배
마가복음 6 : 30 - 34 ; 출애굽기 31 : 15 - 17


두 젊은 신부님이 푸켓으로 여름휴가를 갔습니다. 이번 휴가는 복장은 물론 성직자행세를 전혀 안하고 보통사람들처럼 편안히 즐기기로 했습니다. 푸켓해변에 나가 수영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 경치를 즐기고 있는데, 늘씬한 아가씨들이 선글라스를 끼고 비키니를 입은 채 지나갔습니다. 장난기가 발동한 신부는 휘파람을 불자 그녀들도 웃고 화답하며, 그중 한 아가씨가 다가와서 인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신부님." 깜짝 놀라서, 다음날은 더 과감한 옷과 선글라스로 가리고 다시 해변에 나가 햇볕을 즐기는데, 어제 그 아가씨들이 어제보다 더 아슬아슬한 비키니를 입고 그들 앞으로 다가와서 말합니다. "안녕하세요, 신부님." 그러자 신부 중 한 명이 참지 못하고 물었습니다. "잠깐만요, 아가씨. 그래요, 우리들은 신부가 맞습니다. 그런데 아가씨는 우리가 신부라는 걸 도대체 어떻게 아셨죠?" 그러자 그 아가씨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신부님, 절 모르시겠어요? 저 마리아 수녀예요!" 신부님도 때론 엄격한 권위나 격식을 내려놓고 편안히 쉬고 싶은 때가 있나 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디든지 훌쩍 떠나 모든 것을 잊고 푹 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지난해부터 사람들의 일과 휴식에 대한 신조어인 '욜로'와 '휘게'와 '워라밸'이라는 말들이 유행하였습니다. '욜로'(Yolo)는 'You Only Live Once'의 앞 글자로 만든 용어로, 미래나 남을 위해 오늘의 내 삶을 희생하지 않고, 현재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시하여 소비하는 태도나 그런 라이프스타일을 말합니다. 또 '휘게'(Hygge)는 스칸디나비아 문화를 대표하는 라이프스타일로 '일상 속에서 빠름과 붐빔, 성공과 성장 대신에, 느리고 소박한 오늘의 편안함과 작은 기쁨을 선택하는 삶의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워라밸'(work-life balance)은 '일과 삶의 조화를 추구하려는 사회현상'을 의미합니다. 이런 '욜로'와 '휘게'와 '워라밸' 현상은 자고 나면 사회의 기준마저 바뀌는 불안정한 우리사회에 대한 대중의 우울한 몸부림이고 저항이지만, 자기중심적인 삶에 대한 성찰이며 삶의 여유를 얻으려는 갈망이기도합니다.


사람이 소를 부리는 데는 적어도 두 마디 말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앞으로 가라는 '이랴'와 멈추라는 '워'입니다. 소도 사람과 함께 일하려면 최소한 이 두 마디는 반드시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소를 부리는데 일을 '하라'는 '이랴'만 아니라 '그만 두라'는 '워'가 반드시 필요했다면, 사람이 하는 다른 모든 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워'가 없이는 '이랴'가 제대로 작용할 수 없습니다. 자동차를 보더라도 아무리 성능이 뛰어난 엔진을 달았다 해도, 달리는 바퀴를 멈추게 하는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경우에는, 그 자동차는 소중한 사람 목숨을 해치는 흉기가 되고 맙니다. 모든 것이 그렇듯 사람도 달릴 줄 알아야하지만, 멈출 줄도 알아야합니다.


성서적인 안식의 의미는 첫째, 어제의 피로를 풀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2:2). 우리는 안식을 통해 그 동안 쌓인 피로를 풀고 스트레스를 해소합니다. 쉼을 통해 육체나 정신적으로 소진된 에너지를 새롭게 보충하고, 몸과 마음에 새로운 활력을 얻습니다. 이를 위해 두뇌세탁, 기분전환, 몸풀기, 맑은 정신 일으키기 등 권태를 이겨낼 방안이 필요합니다. 불만에 찬 사람은 어떤 의자에 앉아도 편치 않습니다. 평안은 엉덩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결정합니다.


우리가 건강한 놀이까지 금기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장차 회복될 천국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성읍 거리에 소년과 소녀들이 가득하여 거기에서 뛰놀리라"(슥8:5). 볼링은 수도사들이 수도하다가 잠시 여유를 갖기 위해 하던 공놀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마틴 루터가 이 볼링 게임의 룰을 체계화했다고 합니다. 성경은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출31:17)고 말씀했는데, 영어성경에는 "On the seventh day He rested, and refreshed"(KJV)로, '제 7일에 하나님께서 쉬시고 새로워지셨다'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도 안식을 통해 새로워지셨다면, 우리야 더할 나위 없이 안식이 필요합니다.


안식의 두 번째 의미는 성취 후에 오늘의 여유를 즐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왜 쉬느냐고 물으면 대체로 피곤해서 쉰다고 하지만, 단지 피로를 풀기 위해서만 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피곤이 없으신 분인데도 창조하시고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2:2). 하나님은 일을 다 마치셨기 때문에 쉬신 것이나 더 이상 할 일이 없어 쉬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만물을 돌보셔야할 일들이 많았지만, 창조를 마치시고 '보기에 좋았더라'하시며 솟구치는 성취의 감동을 누리시며, 그 동안 창조하신 일들을 돌아보시며 그것을 자축하고 즐기셨습니다.


서머나교회 감독 폴리캅이 자고새 한 마리와 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지나가던 사람이 "성자라는 분이 어떻게 새와 놀며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하고 묻자 폴리캅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활도 쓰지 않을 때는 줄을 풀어놓아야지, 언제나 줄을 매어 두면 못쓰게 되고 맙니다." 라이켄 박사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 우주와 만물을 기능적 우주로 편리하게만 창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보다 더 심미적 우주로 지으셨다. 사철마다 옷을 갈아입는 이 자연에게 번거롭고 황홀한 변신은 왜 필요했을까? 여름마다 바다에는 해일이 넘치고, 가을에는 낙엽이 져야하고, 겨울에는 백설이 대지를 덮어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왜 이 우주는 신묘한 음악 그리고 절묘한 미학을 지닌 광채로 가득 차 있을까? 그 이유는 단 하나 밖에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즐기기를 원하신다."


안식의 세 번째 의미는 내일을 위한 재충전을 위한 것입니다. 안식이란 단순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그 쉼을 통해서 내일을 구상하고 대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식하신 다음에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창조하신 세상을 다시 돌보시고 역사를 섭리하시며 인간들을 구원하시는 일들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쉼을 통해서 보다 맑은 정신으로 내일에 대한 영감을 얻고 창조적인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은 안식이 주는 큰 축복입니다. 어느 기독교 문화신학자는 안식에 대해 '안식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괄호'라면서 "인류 문화의 발전은 뜨거운 폭염에 태양이 내리쬐는 노동의 현장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비 오는 날의 동굴 속이야말로 문화의 산실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 일하는 시간보다 쉬는 시간에 성장하게 만드셨다고 합니다. 육체적 성장은 밤에 성장 호르몬이 많이 분비된다고 하고, 정신적 성장도 바쁘게 뛰어다닐 때보다 휴식과 독존(solitude)의 시간에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기독교 문화학자 라이켄 교수는 안식일의 축복을 영어 단어 3R로 설명했는데, 안식일은 과거를 돌아보는 'reflection'(돌아봄)이며, 우리의 현재를 충전하는 'refreshment'(새로워짐)이며, 동시에 우리의 미래를 새롭게 창조하는 'recreation'(새 창조)의 선물이라고 하여, 안식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창조로 나아간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도하러 나갔다가 돌아와서 예수님께 그들이 나가서 행한 사역에 대해서 낱낱이 보고 드리는 모습입니다. 아마도 저들은 나가서 열심히 전도했던 것으로 보이고, 또 많은 성과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저들의 보고를 들으시다가, 갑자기 저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31절). 예수님은 제자들의 보고를 중단시키시고, 저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휴식임을 아셨습니다. 저들은 그동안 전도사역으로 인해 몹시 피곤해있었고, 지금 저들이 처한 상황도 몹시 혼잡하고 분주했기에, 그들로부터 전도 결과보고를 들으시고, 이에 대해 '잘했고, 잘못했고'에 대한 평가와, 앞으로 사역에 대한 전략수립보다도 더 우선적으로 저들을 쉬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저들을 쉬게 하신 방법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따로 한적한 곳으로 떠나라'고 하십니다. '따로'라는 말은 복잡한 것으로부터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31절에 보면 저들은 지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고 할 만큼, 사람들에 의해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휴식은 사람들로부터 떠나있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에게 시달리는 것처럼 피곤한 일도 없습니다. 예수님께 지금 찾아온 사람들은 모두 '병 고쳐달라, 귀신 내쫓아달라, 이것저것 어려운 일 도와달라'는 부탁뿐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제자들은 과도한 압박과 스트레스가 되고 있었기에, 예수님은 "저들로부터 따로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미국의 한 심리학자가 흥미 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어떤 조용한 도서관을 찾아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 시간 간격으로 책을 잔뜩 끼고 있다가 사람들이 나타나면 그 책을 고의로 떨어뜨리곤 했습니다. 책을 왕창 떨어뜨리니까 지나가던 사람들의 그것을 보고 50%이상이 책을 떨어뜨린 이 사람을 도와주더랍니다. 그것을 1시간 간격으로 실험하고, 그 다음 날도 똑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도서관에 양해를 구하여 도서관 바깥에서 잔디 깎는 기계를 작동시켜 '부르릉~' 엔진 소리가 시끄럽게 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시간에 1시간 간격으로 책을 떨어뜨려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는가 보았더니, 그 결과는 10%미만이었습니다. 이 시끄러움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여유를 빼앗아 간 것입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신과 아세라신 선지자 850명과 대결하여 놀라운 승리를 거두는데 이세벨로부터 죽이겠다는 위협과, 갑자기 몰려온 승리 후의 피로감과 허탈감으로 인해, 그는 저 남쪽 브엘세바에서 하룻길쯤 되는 광야에 나가 로뎀나무 아래 쓰러져 하나님께 죽기를 구했습니다. 그런 엘리야를 하나님은 푹 쉬게 하시고, 배불리 먹여주시고, 새로운 사명을 주심으로 엘리야의 영적탈진을 회복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열심히 전도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하던 일에서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론 일에서 떠날 줄 알아야 일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함께 있자'고 말씀하십니다. 공동번역에는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좀 쉬자'"고 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쉴 곳은 주님의 품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인에게는 산다는 그 자체가 힘겨운 짐이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인생 자체가 이렇게 무거운 짐이 된 까닭은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에게 주어진 형벌은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3:17)라는 형벌입니다.


인간이 지고 있는 모든 수고와 짐은 본질적으로 죄로 인한 결과이기에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사53:4). 그분은 인간이 지고 있는 수고와 무거운 짐을 해결하기 위해 오셔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무거운 짐에 시달리는 자들을 안식에로 초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기에, 성 어거스틴은 "내가 주님께 돌아오기까지는 내게 참된 안식이 없었더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톨스토이는 종교를 짐으로 생각하여 믿음을 버렸다가 긴 방황 끝에 예수님께 돌아와 [신앙론]이란 글을 썼습니다. "나의 지나간 55년을 살아오는 동안 내 인생의 최초의 15년 간의 소년기를 제외하고는 나는 안식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 왔다. 내가 18세 되던 나이, 내 친구는 내게 찾아와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고 나를 설득했다. 나는 그 말이 진리하고 생각하여 어렸을 때 가족의 종교인 기독교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나는 종교를 포기하는 것이 자유를 얻는 길이라고 생각했고, 심지어 종교는 속박이라고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내 나이 55세, 이제 나는 내가 버린 어머니의 품과 같은 신앙의 품으로 돌아온다. 나는 종교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 왔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나는 참된 안식을 발견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인생의 참된 안식이 있습니다.


셋째, '잠깐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잠깐의 휴식을 통해 얻어진 에너지를 가지고 해야할 일을 하시려고 '잠깐 쉬어라, 그리고 또 일하자'고 하십니다. 참된 안식은 분량에 있지 않고, 질에 달렸습니다. 칼 힐티는 "지나치게 많은 휴식은 지나치게 적은 휴식과 같이 피로하게 한다"고 했고, 스코트 경은 "너무 많이 쉬는 것은 녹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반드시 긴 시간만이 우리에게 안식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잠깐의 휴식, 잠깐의 토막 잠, 잠깐의 산책도 우리에게 큰 활력을 제공합니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말합니다. "생각도 없이, 할 일도 없이, 전념할 일도 없이, 그야말로 하는 일없이 완전한 휴식 속에 있는 것처럼 참을 수 없는 고통은 없다." 휴식은 일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입니다. 아무 하는 일없이 계속적인 휴식만 갖게되면, 허무, 불안, 회의, 무력, 공허에 빠지게 됩니다. 주어진 일을 힘쓴 후에 잠깐의 휴식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시카고대학의 칙센트 미하이 교수는 '사람이 가장 불행할 때는, 만날 사람이 없을 때와, 할 일이 없을 때'라고 말했습니다.


자연질서는 우리가 어떻게 휴식을 취해야 할 지에 관해 잘 가르쳐줍니다. 하루해가 뜨면서 우리의 몸에는 코티솔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됩니다. 이 코티솔은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호르몬입니다. 코티솔이 많이 분비되면 신체는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가 됩니다. 배고픔, 외상, 출혈, 다툼, 뛰기와 같은 스트레스 상태에 대비하는 겁니다. 이 코티솔은 저녁에 휴식을 취할 때 점차 줄어들면서 대신 멜라토닌이라는 성장호르몬이 분비되면서 잠을 잘 준비를 하는데, 이 멜라토닌은 아침이 되면서 줄어듭니다. 이와 같이 코티솔과 멜라토닌은 24시간을 주기로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사이클을 반복합니다. 따라서 해가 서산에 넘어가면 우리 신체는 휴식을 취할 준비를 하는데, 현대 문명의 문제점은 밤 11시 12시가 되어도 우리의 주변을 마치 낮과 같이 밝게 하여 호르몬의 전환 사이클에 장애를 주어 양질의 수면을 취하는데 문제를 일으킨다는 겁니다. 이러한 생활이 지속되면 신체의 혈중 아드레날린 농도가 올라가게 됩니다. 늘 정신 없이 일을 하는 사람의 혈중 아드레날린 농도는 쉴 때도 상당히 높은 상태로 유지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사람이 휴식을 취하게 되면 어느 정도 혈중 아드레날린 농도가 저하되기 시작하는데 이때 'Post adrenalin blue'라는 우울증이 발생합니다. 과도히 흥분한 상태 후에 따르는 허탈감이 바로 과도한 아드레날린 분비 후에 나타나는 일종의 금단현상입니다. 신체적으로 휴식은 바로 이런 아드레날린 금단현상을 수용하여 혈중 아드레날린 농도를 정상상태로 낮추는데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따라서 신체적으로 진정한 휴식을 위해서는 또 다른 흥분을 야기하는 것보다, 조용히 휴식을 취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쉬어야 할 때입니다]라는 글입니다. "방글방글 웃고 있는 아기를 보고도 마음이 밝아지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식구들 얼굴을 마주 보고도 살짝 웃어주지 못한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창문을 비추는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하루가 궁금하지 않고 전화도 기다려지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오랜만에 걸려온 친구의 전화를 받고 '바쁘다'는 말만하고 끊었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서도 소리만 들릴 뿐 마음에 감동이 흐르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슬픈 영화를 봐도 눈물이 나오지 않고, 슬픈 연속극을 보면서 극본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오래된 사진첩을 넘기다가 반가운 얼굴을 발견하고도 궁금해지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기 위해 한 번 더 뒤돌아보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아침과 저녁이 같고 맑은 날과 비 오는 날도 같고 산이나 바다에서 똑같은 느낌을 받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당신은 그동안 참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일 한 가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쉬는 일입니다."


영성 신학자 마르바 던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서부 개척시대에 한 무리의 마차가 미국 중부 도시 세인트루이스를 떠나 서부 오리건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일행은 모두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어서 안식일에는 이동을 안하고 쉬었습니다. 그러나 겨울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어서 일부 사람들은 폭설이 내리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안식일에도 계속 달리자고 제안했습니다.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그들은 두 팀으로 나뉘어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안식일에 쉬는 팀과 안식일에도 달리는 팀으로 말입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말할 것도 없이 안식일에 쉰 팀이 더 빨리 오리건에 도착했습니다. 안식일에 충분히 쉰 그 활력으로 엿새 동안 더 빨리 더 힘차게 달릴 수 있었습니다. 마르바 던은 이 이야기의 결론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명을 존중하는 자들을 존중하신다."


아프리카에서 노예사냥꾼들에게 잡혀서 끌려와 미국에서 백인들에게 학대받던 흑인노예들이 이런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그 어느 날, 내일이 일요일이 되리라, 그 어느 날, 날마다 일요일이 되리라" 날마다 중노동에 짐승처럼 혹사당하며 시달렸지만, 주일에는 그래도 쉴 수 있었기에, 그들은 천국에 대한 소망을 이렇게 노래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안식을 감사하며, 그 선물을 만끽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의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 몇 년 전에 나의 아내가 그녀 자신만의 시간을 갖기 원했다. 그래서 어느 날 내가 휴무일 때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보, 오늘은 내가 아론을 돌볼 테니, 차를 타고 나가서 가고 싶은 데 가서 하고 싶었던 일을 하다가 돌아오구려. 쇼핑을 하든지 아니면 해변으로 가든지 또는 친구를 방문하러 가든지 당신 마음대로 하구려." 아내는 '지금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내는 곧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아내는 혼자 외출했다. 아론과 내가 집에서 3km 반경 이내에 있는 어린이 공원을 찾아다니며 노는 동안 아내는 산장에 있는 호수를 향하여 갔다. 그녀는 나무 아래에 있는 아늑한 장소를 찾아서 그 동안 읽고 싶었던 소설책을 꺼내어 읽으며 6시간 동안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보냈다. 전화벨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칭얼거리는 아이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앞에 난장판이나 소란도 없었다. 그저 찬란한 햇빛과 푸른 하늘, 반짝이는 물결 그리고 이따금씩 보이는 배가 전부였다. 아내는 잠깐 낮잠까지 즐기고 난 후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가까운 시내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나중에 아내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알다시피 그때 난 생전 처음으로 혼자 식당에 들어가 보았어요. 그것은 전혀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20년 동안이나 함께 살아왔지만 아내가 잠시라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나는 지금까지 전혀 깨닫지 못했다. - 20년 결혼생활 동안에 불과 여섯 시간의 휴식이었지만, 그 아내에게는 말할 수 없는 평안함과 삶의 신선한 활력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런 혼자만의 시간을 매일 갖거나, 여섯 달이나, 혹은 육 년쯤 주어진다면, 그것은 휴식이 아니라, 완전히 별거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온 초창기 선교사들은 요즘 승합차 비슷한 큼직한 자동차를 타고 다녔습니다. 선교사 한 분이 차를 몰아 시골길을 가는데 한 할머니가 시장 갔다 돌아오는 길에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지나갑니다. "할머니 이 차에 타십시오." 선교사의 차에 올라탄 할머니는 차에 타고서도 머리의 짐을 내려놓을 줄을 모릅니다. "할머니 짐 내려놓고 편히 가세요." 할머니 왈 "나 하나 탄 것도 미안한데 어떻게 짐까지 내려놓겠소." 여러분 주님 앞에 왔으면 내 영혼의 문제뿐만 아니라, 내 인생의 문제들도 모두 주님께 맡겨 보십시오. 주님 안에서 평안과 자유를 누리십시오.


우리가 일을 하면서 그 목적도 잃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신도 몰래 일의 노예가 되어 건강도, 영혼 평안도 잃어버린 채 일 벌레로 전락해버린 것은 아닙니까? 일할 땐 열심히 일해야 하지만, 때론 한적한 곳을 찾는 여유도 있어야 합니다. 영혼을 재충전하고, 자기존재를 재정립해야 합니다. 밤의 섭리를 이해하고, 안식의 경륜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되게 하심이요, 소생케 하심이요, 온전케 하심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좀 쉬자'

마가복음 6장 30~34절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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