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25 80회
"나귀 타고 오시는 평화의 왕"
2018년 3월 25일 주일예배
누가복음 19 : 28 - 44 ; 스가랴 9 : 9 - 10
복싱 세계 헤비급챔피언을 세 번이나 차지한 무하마드 알리는 당대 강적을 모두 꺾고 최고의 자리에 오르자 기고만장했습니다. 어느 날 비행기에서 스튜어디스가 알리에게 안전벨트를 매라고 권하자 알리가 소리쳤습니다. "나는 세계 챔피언이야. 슈퍼맨이라고. 이런 벨트 따위는 필요 없어!" 그러자 스튜어디스가 미소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승객님, 슈퍼맨은 안전벨트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비행기가 필요 없습니다." 전능하신 예수님은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20세기의 성자 알버트 슈바이처가 아프리카의 랑바레네에 병원을 개설하고 자기전 재산을 병원 유지에 쏟아 부었으나 점점 몰려드는 환자들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어서 각지로 다니며 모금운동을 벌였습니다. 어느 날 자기 고향 알자스에 들러 모금하려는데 이 소식을 들은 고향의 동료들과 친지와 각계 인사들은 슈바이처를 맞으려고 기차역에 나갔습니다. 기차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기차의 1등 칸 앞으로 우르르 몰려갔는데 슈바이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허둥대며 찾았더니 그때 슈바이처는 맨 뒤칸인 3등 객차에서 내려 걸어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놀라 슈바이처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박사님, 어째서 3등 칸을 타고 오셨습니까?" 그러자 슈바이처는 빙그레 웃으며 "4등 칸이 없어서요"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가장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한국에 온 장로교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 박사는 열심히 한국말을 배워 의사소통이 가능해지자 한국 사람처럼 입고 한국 사람처럼 먹고 마시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때로는 나귀를 타기도 했지만 하루에 수십 리를 걸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는 입에 맞지 않는 된장찌개나 김치를 먹어가며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냄새나는 시골 오두막에서 함께 음식을 먹고 자고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순교적 정신이 없으면 못할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시골 주막에서 식사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생긴 서양 사람이 밥을 먹고 있으니까 마을 사람들이 신기하여 몰려나와 구경했습니다. 그 때 어떤 버릇없는 청년이 옆 사람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 그것이 밥을 먹을 줄 아네." 그 말을 들은 언더우드 박사가 밥을 먹다가 웃으며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예, 국도 먹을 줄 압니다." 그러자 청년이 놀란 표정으로 "야, 이것 봐라. 그것이 말도 할 줄 아네." 언더우드 박사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예, 글도 쓸 줄 압니다"라고 그의 말을 받았습니다. 사람을 가리켜 '그것'이라면 대단한 모욕인데도 언더우드는 복음을 위해 낮아지기를 마다하지 않았기에 그의 겸손한 모습에 감동을 받은 그 청년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언더우드가 이처럼 낮아지고 겸손해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님의 모습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일주일 남겨놓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약 3.5km 되는 거리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은 나귀를 잘 볼 수 없지만, 몇 십 년 전만 해도 나귀가 짐을 싣고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는 관광객들에게 돈을 받고 나귀를 태워 주고 있다고 합니다. 중동에 있는 나귀는 우리나라 나귀보다 더 작아서 키 큰 사람이 타면 발이 땅에 닿을 정도라고 하는데, 그래도 힘이 있어서 사람을 태우고도 거뜬히 다닌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을 스가랴서는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슥9:9-10). 이 말씀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메시야가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다는 예언입니다. 스가랴는 구약의 마지막 때 예언자로, 그후 이스라엘에 예언이 끊어진 지 몇 백년이 지나서, 백성들은 메시야를 학수고대하였는데, 이 예언대로 메시야께서 평화의 왕으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무리들은 종려나무가지 꺾어 흔들며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38절)하고 외쳤습니다. 이 찬송은 시편 말씀,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시118:25-26)라는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예수께서 왕으로 높여짐으로써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임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에 전쟁과 갈등과 미움과 다툼이 끊임이 없는 것은,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지 않고, 인간이 스스로 왕 노릇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평화를 주러 오신 주님은 생애 마지막,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영접해야할까요? 첫째, 내 자신의 생명과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먼저 제자들에게 분부하셨습니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30-31절). 그래서 제자들은 건너 마을에 가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귀를 끌어다가 예수님을 태우고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나귀 주인은 예수님이 제자를 보내 "주가 쓰시겠다"고 하시자, 아무 이의 없이 나귀를 예수님께 보내드립니다. 이것이 사전에 예수께서 그 나귀를 쓰시기로 약속된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을 잘 알고 있던 사이라서 그냥 보내드린 것인지, 확실히 알 길은 없지만, 아무튼 이 주인은 예수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여 나귀를 예수님께 보내드림으로 모든 것의 주인이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가 가진 것을 "내가 쓰겠다"하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신다면 아마도 믿는 사람 중에는 거의가 "아 그럼 쓰셔야지요"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내용은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보내 말씀하신 것입니다. 매일 모는 승용차를 단 하루만 누가 가져가도 무척 불편하여 쉽게 내주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직접 말씀을 하시면 차마 거절 못해도,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면 핑계대기 쉽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누가 요구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본래 내 것이 아니고, 남의 것을 빌려쓰고 있는데, 주인이 "돌려달라, 이제 내가 써야겠다"고 한다면, "아니오, 내가 더 써야하니 내줄 수 없소"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이 악하다보니, 남의 돈을 빌려쓰고는 갚지 않고, 돌려 달래도 돌려주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도적이요 강도입니다. 빌린 물건도 오래 가지고 있으면 자기 것으로 착각하는 수가 있습니다. 주인이 자기 것을 요구하는데, 멀쩡히 자기 손에 가지고 있으면서 내놓지 않으면 그는 매우 악한 사람입니다.
미국의 라젠트(Stephen Lagent) 국회의원은 1995년 오럴 로버츠 대학 졸업식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루는 사무실에서 나와 길 건너에 있는 국회의사당에 가려는데 수많은 비밀경호원들이 길가에 서 있는 것을 보고, 한 경호원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날 모로코의 왕이 국회의사당에서 미국 대통령을 만나는데, 모로코 왕은 어느 곳을 가든지, 12명의 아내와 심장 기증자를 비롯해서 수행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기 때문에, 국회 의사당에 출입하는 시민들을 통제하는 중이라는 대답이었습니다. 모로코 왕이 어디를 가든지 따라다니는 '심장 기증자'란, 언제 어디서나 왕의 심장에 이상이 생기면 즉시 자기 심장을 왕에게 주어야 할 의무를 띠고 있는 장기 기증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모로코 왕을 위해 필요할 때면 언제나 자기 심장과 목숨을 그대로 바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사람이 왕을 수행하는 사명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각오와 결의로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가장 존귀하신 왕 예수의 수행원들입니다. 이 땅의 왕을 위해서도 언제나 따라다니며 왕을 위해 자기 생명인 심장을 바치려는 사람들이 12명이나 된다는데, 우리의 왕 되신 예수님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둘째, 우리의 왕이 되신 주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본문 38절 이후의 말씀입니다.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눅19:38-40).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또한 겉옷을 벗어 길에다 깔고 그 위로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걸어가게 하는 왕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보이며, 호산나를 외치는데, '호산나'란 '우리를 지금 구원하소서'(save us now)로서, 당신은 우리 왕이시니 지금 우리를 구원해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이를 보고 정치적으로 문제가 된다며 예수님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39절)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40절). 잠잠해서는 안 된다, 당연히 소리쳐야 하고, 환영받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돌은 예루살렘 성벽을 가리키는데, 실제 이 말씀 후 40년 만에 예루살렘이 망하고 성벽이 무너집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은 반드시 영광을 받으셔야 하고, 그 권세는 그대로 집행될 것입니다.
존 스토트는 영국 여왕이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할 때,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여왕의 머리에 왕관이 씌워지기 바로 직전이라고 말했습니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성당 안에서 동, 서, 남, 북 각 방향의 청중들을 향하여 네 번 소리를 지릅니다. '귀빈 여러분, 저는 이분이 틀림없는 영국 여왕임을 여러분께 소개해 드립니다. 여러분은 이분에게 기꺼이 충성을 맹세하겠습니까?' 대주교가 물을 때마다 웨스트민스터 성당 안에 모인 청중들이 큰 소리로 승인의 대답을 네 번 해야만 비로소 왕관이 여왕의 머리에 씌워집니다." 스토트는 말을 계속 잇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저도 오늘 여러분들께, 예수 그리스도께서 틀림없는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 되심을 소개해 드립니다. 여러분은 이 분께 기꺼이 충성을 맹세하겠습니까?" 이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한 모든 사람이 필히 대답해야 할 질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왕 되신 우리 주님께 어떻게 찬송과 영광과 충성을 바칩니까?
어느 날 스펄전 목사님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아내가 물었습니다. "왜 울고 있어요?" 그러자 스펄전 목사님이 말합니다. "오늘은 말야, 내가 십자가를 생각하고 아무리 바라봐도 전혀 감동이 없어 너무나 슬퍼요." 오늘 우리의 모습이 십자가의 감동이 사라진 모습은 아닙니까? 예수께서 날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내 죄를 용서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사실이 당연하게 느껴지고, 그 사랑에 대해 아무 감사도 없고, 우리의 찬양에 아무런 감동도 없이 그저 타성으로 부르고 있진 않습니까? 우리는 진심으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찬양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 왕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합니다. 41절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눈물 흘리십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까이 오셔서 성을 보시고 우십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시자 사람들은 정치적 메시야의 기대를 걸고 흥분하여 예수님께 열광적인 환호와 찬양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울고 계실까요? 사람들의 '호산나!' 찬양 소리를 들으면서 예수님의 눈에선 뜨거운 눈물을 흘리시는데, 그 눈물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42절에서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로마 정권을 부수고 그들에게 정치적 자유를 줄 메시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무력을 가지고 오신 메시야가 아니라 평화의 주님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평화의 의미를 알았다면 좋을 것을, 그러나 지금 너희의 눈에는 내가 숨기어져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한 당시 민중들은, 정치적인 자유 이상의 본질적인 문제, 죄로부터 자유케 하여 구원하시는 주님을 몰라, 멸망으로 치달을 것을 보시며 '내가 너희의 눈에는 가려져 있구나'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던 것입니다.
[형통의 믿음을 계승하라]에 실린 글입니다. 어느 교회에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첫날부터 교인들이 은혜를 받는데 장로님 한 분은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습니다. 집회 마지막 시간이 되자 그 장로님이 울부짖으며 회개를 했습니다. 장로님에게는 남매가 있는데 딸은 신앙생활을 잘하는 반면, 결혼한 아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 아들은 주일이면 골프나 치러 다니고, 식구들을 데리고 여행을 가고, 친구들과 사귀면서 담배와 술을 즐겼습니다. 그러니 그 아들 때문에 장로님은 항상 마음이 아팠습니다. 교인들이 인사만 소홀해도 '내 아들놈이 신앙생활을 잘못하니까 내가 이런 대접을 받는구나'라는 자격지심이 생겨 아들이 미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아들에게 소화가 잘되지 않는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소화제를 먹어도 소용이 없고 점점 얼굴이 상해 갔습니다.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병원에 가보니 위암이었습니다. 얼마나 심각했던지 의사가 배를 열었다가 수술할 수 없다고 그냥 덮고 말 지경이었습니다.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상황에 이르자 장로님에게 주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아들이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비뚤어지고 저렇게 된 것은 너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음성을 듣고 장로님은 크게 회개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교인들 앞에서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제가 이제 알게 됐습니다. 문제는 제 아들이 아니라 저였습니다." 야곱에게 왜 환난이 있었습니까? 야곱이 벧엘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눈물로 서약했던 그 믿음을 잊어버리고 세상 재미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야곱은 깨달았습니다. 온 가족을 데리고 벧엘로 올라갔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영광스럽고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눈물을 흘릴 차례입니다. 우리 민족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때라고 생각합니다. 고통받는 우리의 이웃들을 위해서 우리가 눈물을 흘려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이웃들이 고통 속에 사는 이유, 아직도 우리가 충분한 눈물을 흘리지 못한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한국민족을 위해서 충분히 눈물을 흘리지 못했기 때문에 이 땅의 민중들의 고통의 행진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눈물을 요구하십니다. 이제는 울어야 할 시간입니다. 아직도 안타까운 민족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울어야 합니다. 아직도 예수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 거리 속에 수많은 우리 이웃들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울어야 합니다. 우리가 울면 민족이 살 것입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가 거두리로다."
김응국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얼마 전 아내가 왼쪽 가슴에서 뭐가 만져진다기에 병원에 갔다. 조직 검사 결과 9mm의 암세포가 발견되었다는 진단에 아내도 울고 나도 울었다. 나는 시집와서 고생만 한 아내에게 찾아온 어려움이 내 죄 때문인 것 같아 눈물로 용서를 구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서운했다. "왜 제가 아니고 아내입니까? 제 죄에 대한 벌은 제가 받아야 마땅한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합니까?" 수술을 위해 병원에 가는 길에 아내가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지식과 말씀으로 하나님을 섬기지만 나는 몸밖에 드릴 것이 없는데..." 과거에 가정 교회로 모일 때부터 지금까지 교회 식사를 위해 반찬을 마련하고 김치는 담그는 등 아내가 맡아서 하는 일이 많다. 그런 아내는 이제 수술을 앞둔 상황에서 "나의 이 몸으로 주심을 섬기기 원합니다. 이 몸으로 주님을 섬기는 일에 지장이 없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차 안에서 찬송가 143장 '웬 말인가 날 위하여'를 불렀다. 둘이서 눈물을 흘리며 불렀지만 그것은 기쁨의 찬송이었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신앙이란 이렇게 고난의 깊은 골짜기에서 찬송하게 하는 것이다. 기도할 수 없을 때 기도가 터져 나오고, 찬송할 수 없을 때 찬송이 터져 나오게 하는 것이다. 지금 현실은 우리의 기대나 생각과 다를지라도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길 것을 하나님이 약속해 주셨기 때문이다.
일본의 크리스천 작가 엔도 슈샤꾸의 [그리스도의 생애]는 예수님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갈릴리에서 자라나 예루살렘 성 밖에서 살해된, 마르고 수족이 가는 사나이, 개같이 살해되면서도 숨을 거둘 때까지도 오로지 사랑만으로 산 사나이. 그는 생전의 현실 속에서 무력했으며, 다만 사랑만을 말하고, 사랑만을 살고, 사랑의 하나님을 증명했을 뿐이다. 왜 이토록 무력하게 됐던 사나이가 사람들로부터 망각되지 않았는가? 왜 그토록 개같이 살해된 사나이가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어서 그들의 삶의 스타일을 바꾸어놓았던가? 이 예수의 신비성은 우리가 합리적으로 해석하려 해도 해석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것이다." 이런 주님을 어떻게 대하십니까?
선교 단체 WEC(Worldwide Evangelization for Christ)의 설립자인 C.T. 스터드 선교사가 아내와 자녀들을 두고 홀로 아프리카로 떠난 것은 그 어떤 시련보다 극복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되지 못한 당시 상황에서 선교는 곧 순교라는 말이 조금도 과장된 말이 아니었습니다. 출발하기 전 날 밤, 한 젊은이가 스터드에게 다가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쉰 세 살의 나이에 조국과 부인과 자녀들을 두고 떠나신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스터드가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며,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그분을 위한 나의 어떤 희생도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네." 그가 남긴 이 고백은 훗날 WEC의 정신을 대변하는 슬로건이 되었습니다. 그가 부인 프리실라에게 남긴 편지 내용은 이러합니다. "헤어질 때 본 당신의 눈물과 하나님의 위로로 흘린 당신의 기쁨의 눈물을 생각하니 나도 눈물이 나는구려. 앞으로도 계속 입술뿐 아니라 삶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당신을 잘 모를 것이오. 당신이 가장 큰 대가를 치르고 있음을 내가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말이오.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없지만... 사랑하오. 여보, 영원히 사랑하리다. 하나님은 희생의 크기에 맞는 상급을 주실 것이오.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끝까지 서로 사랑합시다. 단, 예수님을 조금 더 사랑합시다." 우리는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을까요? 우리의 눈엔 세상 욕심이 뒤덮여 십자가가 가려져 있진 않은가요?
정완연 시인은 그의 시, [초봄]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입김을 불어 유리창을 닦아내면/새 한 마리 날아가며 하늘빛을 닦아낸다/내일은 목련꽃 찾아와 구름 빛도 닦으리." 그렇습니다. 오늘은 입김 불어 유리창을 닦아내듯이 오늘 나의 영혼을 닦아야 합니다. 마음이 깨끗하면 하늘도 보이고 '내일은 목련꽃 찾아와' 피어나듯 더 큰 부활의 영광도 보게될 것입니다. 겸손히 나귀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의 앞길에 십자가와 부활이 드려져 있음을 우리는 내다보아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인 하워드 A 켈리는 의과대학을 졸업하는 날 밤 다음과 같은 일기를 썼습니다. "주님, 내 자신과 나의 시간과 나의 능력과 나의 열정, 이 모든 것을 당신께 드립니다. 당신의 도구로 사용되기를 원하오니 나를 정결케 하시고 제가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세상에서의 어떠한 성공이라도 제게 허락하지 마옵소서." 우리도 이런 기도를 드려야하지 않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왕으로 임하셨습니다. 비록 초라하게 나귀를 타고 십자가를 향한 고난의 길을 걸으셨지만, 그분은 이제 무덤 문을 여시고 부활하셔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십니다. 지금 평화의 왕을 모시지 못하면 이젠 심판주로 임하실 것입니다. 그 영광의 주님께 우리 자신을 드려 헌신하며, 입을 열어 '호산나!' 찬송을 불러야 하겠습니다. 죽어 가는 영혼을 보고 눈물지으시는 주님의 뜻을 헤아려 우리도 생명 살리는 일에 나섬으로,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게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