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21 91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2018년 1월 21일 주일예배
누가복음 10 : 25 - 37 ; 잠언 11 : 24 - 25
한 남자가 이웃으로부터 문자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저는 당신의 와이프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말하지 않고 그냥 계속 사용하려다가, 제 양심에 찔려 솔직히 고백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사용하도록 허락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남자는 이 문자를 받고 아내와 대판 싸웠습니다. 조금 뒤 그에게 다시 메시지가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철자에 실수가 있었네요. 'wife'가 아니라 'wifi'(무선인터넷)입니다." 와이파이쯤은 이웃과 함께 써도 됩니다. 좋은 집이란 어떤 집일까요?
중국 남북조시대 송계아라는 고위관리가 관직에서 물러나 살집을 보러 다니는데, 남들이 추천한 몇 곳을 다녀도 마음에 들지 않다 여승진이란 사람의 백만금짜리 이웃집을 천백만금을 주고 샀습니다. 여승진이 "왜 그렇게 많은 돈을 주고 이사하는가?" 묻자, 송계아가 대답합니다. "백만금은 집값이고, 천만금은 당신과 이웃이 되기 위한 값입니다." 송계아는 집의 가장 중요한 조건을 좋은 이웃으로 보았습니다.
요즘은 점점 이웃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파트 바로 옆 칸에 누가 사는지, 무얼 하는 사람인지, 몇 식구인지, 알 수도, 알아서도 안 되는 세상이 되어, 옆집에서 사람이 죽어도, 아무도 몰라 한 달 넘게 시신이 그대로 방치되는 일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웃과 교제가 없다보니까, 이전의 따뜻한 인정이 오가던 마을 공동체는 찾아볼 수 없고, 모두가 홀로 외롭게 사는 단독가구들로 전락해 가고 있습니다.
영국의 테레사 메이 총리는 엊그제인 1월 17일 트레이시 크라우치 체육 및 시민사회 장관을 고독 문제를 전담할 '외로움 장관'(minister for loneliness)으로 처음 임명했습니다. 영국은 적십자사 조사로 인구 6500만 명 중 900만 명이 외로움을 느낀다고 대답했습니다. 네덜란드 정신건강연구소에서 외로움이 치매발생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했는데, 노인 다섯 명 중 한 명이 지금 '외로움을 느낀다'고 대답하여, 이들의 13.4%가 3년 뒤 치매에 걸렸고, '외롭지 않다'고 답한 사람은 5.7%만 치매가 왔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외로움을 '느낀다'고 말한 노인이 사별이나 별거 등으로 '실제로 외로운' 노인보다 치매 걸린 비율이 훨씬 높았다는 점입니다.
일본에선 남성 네 명 중 하나는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다 생을 마치는데, 이렇게 혼자 사는 이가 많아, 일본을 '단신(單身) 사회'라고 부릅니다. 무연고 고독사가 늘어나면서, 안부전화 걸어주는 '외로움 비즈니스'나, 유품정리 회사가 인기랍니다. 이태리 속담에 "고독은 심지어 낙원에서도 견딜 수 없다"고 하는데, 이런 고독은 이웃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폐쇄성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마22:37-40)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좋지 못한 동기로 던진 질문이지만, 어쩌면 인간이 가져야 할 가장 근원적이고도 궁극적인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요즘 말로 바꾸면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혹은 "어떻게 하면 천국 들어갈 수 있습니까?"하는 뜻입니다. 모든 인간이 가장 진지하게 물어야 할 질문인데, 이 율법교사는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이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좋지 못한 속내를 아시고 그에게 반문하십니다. "그래 네가 율법교사인데, 율법에는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그러자 이 율법교사는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27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정확히 대답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인 줄은 알면서도 스스로는 그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복음에서 이런 무서운 책망을 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눅11:46). 예수님이 이렇게 책망하신 것을 보면 저들이 얼마나 악한 위선자들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들 율법교사들은 사람들에게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해라. 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해라. 어느 율법을 지켜라"하며 사람에게 짐을 잔뜩 지워주고는, 자기는 손 하나도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모습을 아시면서 그가 말로는 옳은 말을 하자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28절)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이 율법교사가 진실했다면, 예수님의 이런 책망에 "선생님, 제가 이렇게 형편이 없습니다. 제 힘으로는 도저히 이런 말씀을 다 지켜 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주님이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하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비와 은총을 구했을 텐데 그는 자기가 이런 계명을 다 지켰다는 듯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하고 예수님께 되물었습니다. 자기 딴엔 자기 이웃에게 크게 못할 짓 한 것이 없으니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했다고 스스로 자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60미터나 되는 높은 지역에 있는데, 여리고는 해수면보다 300미터 가량 낮은 곳에 있습니다. 이곳은 36Km 거리로서, 그 높이의 차이가 1,000미터나 되는 경사가 가파른 비탈길로서, 길옆에는 암석들이 많아, 제롬(Jerome)에 의하면 A.D. 4세기말까지도 그곳에 강도 떼가 횡행했다고 합니다. 그 길을 가던 어떤 사람을 강도들이 그의 돈과 짐과 옷을 빼앗고, 그를 때려 거의 죽게되자, 버리고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런데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 그를 보고 피해 지나가고, 또 한 레위인도 그를 보자 피하여 그냥 지나가 버렸는데,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던 중에 그를 보고는 불쌍히 여겨서, 그에게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어 응급 치료를 해 줍니다. 그리고는 그를 자기 나귀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정성껏 돌보아 준 뒤에, 이튿날 급히 다녀와야 할 곳이 있어서 주막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의 돈을 주면서 말합니다.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이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십시오. 만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다시 돌아올 때 갚아드리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당시 있었던 실제사건으로 보여집니다. 그 이유는 여기 등장하는 네 사람 중에 세 명이 유대인이고 한 사람이 사마리아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의 피가 섞였다고 그들을 짐승 취급하며 멸시했는데, 유대인인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나 다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갔는데, 그렇게 멸시하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에게 다쳐 죽어 가는 유대인을 보살펴주고 치료해 주었다고 예수님이 꾸며서 말했다면, 유대인들은 당장 예수님을 명예훼손죄로 고소하거나 돌로 쳤을 텐데, 예수님이 이 이야기를 하셨을 때, 아무도 이 말씀의 사실성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 것을 보면, 이 이야기는 실제 있었던 사건임에 분명합니다.
예수께서 이 이야기를 마치고 그 율법교사에게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라 할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시자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이 이웃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율법을 잘 알고 있다고 자랑하고, 그 율법을 다 지켰다고 큰소리치지 말고, 너희가 멸시하는 저 사마리아 사람처럼, 너도 가서 이와 같이 어려운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몇 가지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첫째, 우리는 이웃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0절에 보면,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고 하여, 이 사람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거의 죽을 지경으로, 속히 응급조치하고 치료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이처럼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때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치료해주고, 비용까지 부담하여 여관에 데려가 돌봐주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눅10:34). 가장 필요할 때 가장 필요한 일을 한 것입니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거미처럼 있어서 안 되는 해로운 사람과,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개미 같은 사람, 꼭 있어야 할 꿀벌과 같은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강도는 있어서는 안될 사람이요,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있으나 마나한 사람이며, 사마리아인은 없어선 안될 꿀벌과 같이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신 것은, 이 사마리아인처럼 가정이나, 사회, 교회나 국가 등 어느 곳에서나 꼭 필요하여,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 되라는 교훈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미국을 여행하는 중에 어느 자매를 만났습니다. 그 자매는 자살하고 싶은 괴로운 심정을 테레사 수녀에게 고백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지 묻는 그 자매에게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자살하기 전에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세요. 딱 한 달만 내가 일하고 있는 인도의 캘커타에 와서 나의 일을 좀 도와주신다면 그 다음에 당신이 어떻게 해야 될지 말씀해 드리죠." 그 자매는 테레사 수녀의 말대로 캘커타 슬럼가에 가서 가난하고 병들어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돕고 섬겼습니다. 그들을 위해 몸 바쳐 일하다 보니까 그녀의 마음에 삶에 대한 의욕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그 자매는 그들을 돕고 섬기는데서 순수한 환희를 느꼈고 한달 후에는 테레사의 다른 조언이 필요 없게 되자 그곳에서 일하면서 테레사의 좋은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가정에서나, 친구들 사이에서, 그리고 직장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작은 친절과, 따뜻한 미소, 그리고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가능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꺼리고 경원시(敬遠視)한다면, 내가 그 사람들에게 필요로 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될 때,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2세는 말했습니다. "누구나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누구나 남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으니까. 사랑할 줄 아는 가슴만 있으면 된다. 영혼은 사랑으로 성장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이것은 진실이니까"
둘째, 선을 아는데서 그치지 말고 실천하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율법교사에게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28절)하시고, 이어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37절)고 이르셨습니다. 이 율법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선 능통한 지식인이었으나 그것을 그저 머리로 알 뿐, 전혀 실천이 없는 죽은 지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율법교사의 실천이 없는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실천 없는 지식은 번민만 더할 뿐입니다. 행하지 못할 바엔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났습니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란 말처럼 알기는 하는데 행하지 않기에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전도사로 부임한 교회에서 청년부를 지도할 때, 청년들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현대판으로 각색하여 성극을 공연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깡패를 만나 가진 돈을 다 빼앗기고 쓰러졌는데, 그곳에 한 목사가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는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교회 장로님도 역시 그 다친 사람을 보고 피해 지나가 버립니다. 그런데 세 번째로 한 청년이 그곳을 지나다 그 모습을 보고는 분개하여 열변을 토합니다. "요즘 교회가 다 썩었고, 목회자나 장로들도 모두 위선자들뿐이다, 세상 말세가 되었다"며 아주 비분강개합니다. 여기까지 보면서 저는 속으로 '교회와 지도자들을 비판하기 위한 상투적인 내용이구나'하고 조금 진부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뒤를 이어 다른 청년이 하나 등장하더니, '교회가 다 썩었다'며 비판하고 있던 청년을 향해, "아니, 당신은 지금 이 사람이 다 죽어가고 있는데 무엇을 하고 있느냐?"며 그 쓰러진 환자를 들쳐업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단막극을 보고서, '청년들의 생각이 참 기발하고 예리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대체로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사람이 사실은 자신은 더 안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남에게 충고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실천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다른 이에게 참된 이웃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율법교사가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묻자,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후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율법교사가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하자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하시며, 강도 만난 자들의 이웃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의에 도취되어 스스로 잘난 냥 으스대며, 입으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면서도, 아무도 가까이 이웃으로 두지 않는 율법교사에게 '가서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웃이 될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 이웃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이를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눅10:33-35).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이에게 기름과 포도주를 발라 응급조치를 해 주었습니다. 당시 기름은 상처의 통증을 식히는데 쓰고, 포도주는 살균제로 쓰였던 것들입니다.
그리고 탈진한 환자를 나귀에 태워 여관에 데려다 계속 그를 돌봐주었습니다. 35절에 '이튿날'이란 말을 시리아어 시내역 본(Syriaic Sinaitic)에는 '그 날 새벽에'라 하여, 새벽 일찍 떠나야할 만큼 바빴는데, 강도 만난 이를 위해 자신의 바쁜 시간을 냈습니다. 또 '데나리온 둘'을 여관주인에게 주며 강도 만난 이를 보살펴주고, 돈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고 했습니다. 역사가 폴리비우스(Polybius)는 그 시대 하루 숙박비가 1/32데나리온으로 이 돈은 2개월 넘는 숙박비라고 했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정신적, 물질적, 육체적, 시간적인 희생으로 유대인의 이웃이 되었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길을 가다가 3만원을 주웠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목사님이 집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집사님 만약에 복권에 당첨되어 30억 원이 생긴다면 어디에 쓰겠습니까?" "30억 원이요? 우선 한 3억 정도 떼서 불우이웃 돕기 성금 내고 목사님께도 한 1억 드리고, 선교헌금도 하고, 교회 에어컨도 하나 놔드리지요. 허허헛." "그럼 만약 공돈 3천만 원이 생긴다면 어디에 쓰시겠습니까?" "3천만 원도 작은 돈이 아니네요. 공돈이니 한 천만 원 정도는 남을 위해 쓰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공돈 30만원이 생기면 어떻게 쓰겠습니까?" "뭐, 한 반정도 떼어서 좋은 일 하지요." "집사님. 한번만 더 묻겠습니다. 공돈 3만원이 생기면 어디에 쓰겠습니까?" 집사님은 우물쭈물 아무 말 못하고 주머니 속의 3만원만 만지작거리더랍니다.
사람의 당하는 고난이 이웃을 받아들이게 해줍니다. 한쪽에서 가까이 다가가도, 상대방이 교만하여 마음을 열지 않으면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본문의 강도 만난 유대인이 만일 작은 상처를 입었다면, 사마리아 사람이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라고 말했을 때, "더러운 손을 내 몸에 대지 말라"고 소리쳤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거의 죽을'(30절) 지경이었기에, 사마리아 사람의 도움을 달게 받아들였습니다. 이 고난과 이 어려운 역경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을 이웃으로 맺어준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이웃이 되어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먼저 자기 자신에게 유익이 됩니다. 이 선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받던 사람이었는데, 이 일로 인해 예수님께로부터 인정받았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10:37). 어쩌면 강도 만난 사람이 이후에 이 일이 고마워 참된 친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어떤 칭찬이나 대가를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주님으로부터 참된 이웃에 대한 좋은 모델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그토록 원수시 하던 유대인으로부터도 감사와 함께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상대방에게 유익이 됩니다. 이 사마리아인의 친절로 인해, 거반 죽어가던 사람이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같은 동족인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냥 지나가고 그대로 길거리에 버려져 그대로 죽고 말 사람이 이 사마리아인의 친절과 정성으로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생명이 온 천하보다도 귀하다고 하셨는데, 이 사람의 선행으로 인하여 온 천하를 살리는 놀라운 위대한 일을 해낸 것입니다.
이런 친절이 이 땅에 천국을 이루게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 여기 '하나님 나라는 너희들 가운데 있다'는 말씀은, 서로 좋은 사이로 살아가는 이웃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이뤄진다는 뜻입니다. 사르트르는 '이웃이 지옥이다'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이웃이 하늘이다'고 가르치십니다.
'마트 CCTV 담당 알바생의 가슴 따뜻한 이야기'입니다. 23세 여성입니다. 19살 때부터 매장 입구 도우미로 아르바이트했는데, 한 스토어에서 오래 있다보니 제 업무는 절도 검거가 주 담당이 되었습니다. 그 날도 어김없이 방재실에서 CCTV를 보는데 어느 꾀죄죄한 아주머니가 유모차에 칭얼대는 아이를 태우고 유모차 아래 짐 싣는 공간에 분유 두 통을 넣고 계산도 하지 않은 채 매장 밖으로 나갔습니다. 대부분 절도한 사람들은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물품들인데 갓난아기가 먹는 분유를 보니 '얼마나 절박하고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아기가 배가 고팠으면...'하는 생각에 마음이 저렸습니다. 절도하는 모습을 보면 즉시 팀장님께 보고해야 하는데 보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CCTV는 아주머니를 찍고 있었고 보관되는 자료이기에 모른 척 지나 갈 수도 없어 밖으로 나가 아주머니를 따라가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대부분 절도한 사람들은 아니라며 화를 내며 부인하는데 아주머니는 주저앉아 잘못했다며 펑펑 울자, 갓난아기마저 같이 울었습니다. 저는 아직 미혼이지만 언젠가 결혼하면 저 역시 아이 모유하나 먹이기 힘든 상황이 되면, 나 역시 그 아주머니처럼 절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제가 계산해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분유 값이 그렇게 비싼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2통 사는데 5만원이 넘더군요. 아주머니가 왜 아가씨가 사주느냐고 묻기에, 그냥 아기가 너무 예뻐서 선물해주는 거라고 말하고 보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보안요원으로 잘못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CCTV자료는 보존되기에 언젠가 들킬 것 같은 두려움으로 석 달이 지난 후 회식자리에서 팀장님께 솔직히 말씀드렸습니다. 혼날 줄 알았는데 팀장님이 10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주시며, 분유 2통 값과, 나머지 잔돈은 잘했다는 칭찬으로 주는 보너스라고 했습니다. 약 2년이 지난 일인데 그 아기는 지금쯤 아장아장 걸어 다니고 있겠지요?
김혜자 씨의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에 나오는 글입니다. "세계 인구를 100명으로 축소시키면 50명은 영양부족, 20명은 영양실조이며, 그중 한 명은 굶어죽기 직전인데 15명은 비만이다."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전쟁과 가난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녀는 신에게 항의했습니다. "왜 당신은 이 사람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건가요?" 그러자 신이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널 보내지 않았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려운 사람들에게 찾아가라고 하시며, 그리고 그들의 이웃이 되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11:24-25). 구제하는 사람은 평생을 구제할 것이 있도록 풍족해 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선을 행할 수 있는 그 자체가 축복입니다. 복 달라고 기도한다고 복 받는 것이 아니라 복 받을 일을 해야 복을 받게 되니, 복된 이웃이 됩시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