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다섯 시의 은총

2019-12-15 160회

동문교회
031-701-0691 / 경기도성남시분당구야탑동 523번지
손세용 목사

마태복음 20장 1~16절

설교요약 :

"오후 다섯 시의 은총"
2019 12월 15일 주일예배
마태복음 20 : 1 - 16 전도서 9 : 10


서양의 어느 공동묘지의 한 무덤의 묘비명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있다고 합니다. "여기 이 돌 밑에 찌머워뜨 잠들다. 오전 10시에 잠들었으니, 아침 한 끼를 아낄 수 있었노라." 또 다른 묘비에는 "여기 이 흙 속에 사랑하는 내 아내 잠들어 있다. 내 아내가 평생 한 일은 잔소리뿐이었느니, 지나가는 길손들이여 잠잠하시라. 내 아내가 다시 깨어나 잔소리하지 않도록!" 죽음에 대해서조차 이런 여유와 위트를 갖는 것은 좋지만, 인생을 가벼운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은 좀 지나치지 않나 싶습니다.


셰익스피어 이후 최고 극작가로 알려진 버나드 쇼의 묘비명은 매우 해학적입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버나드 쇼는 자기가 해야할 일들을 '미루며 우물쭈물하다 이렇게 죽게되었다'며, 자기 삶을 후회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영국의 비콘필드 백작은 "젊어선 실수만 하고, 장년 때는 욕심 때문에 싸움만 하고, 이제 늙어서 남은 것은 후회뿐이로다"고 말했습니다. 인생을 후회 없이 사는 자가 승리자입니다. 로빈 S. 샤르마는 "애야, 네가 태어났을 때, 너는 울면서 태어났지만, 사람들은 기뻐했단다. 네가 죽을 때 사람들은 너의 죽음을 슬퍼할지라도, 너는 기뻐할 수 있어야한단다"고 말했듯, 우리는 죽음 앞에서 후회 없는 생을 살아야합니다.


1998년 7월 18일, 전 세계에 관심과 흥미를 끌었던 세기적인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바로 남아프리카 공화국대통령이며 민권 운동가인 80세의 넬슨 만델라와, 전 모잠비크 대통령 미망인이었던 그라샤 마셸(52세)의 결혼입니다. 요하네스버그 근교의 대통령 저택에서 만델라의 80회 생일에 맞춰 거행된 이 결혼식은,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데스몬드 투투 주교와, 음베키 부통령 등 주요각료와, 친지 등만 참석하여 조촐히 치러졌습니다. 두 사람의 로맨스그레이는 만델라가 1996년 위니 만델라와 공식 이혼 직후부터였습니다. 1997년 3월 만델라의 동남아순방 땐 마셀이 동행하는 등 공개적인 연애에도 불구하고 마셸의 미온적인 태도 때문에 결혼이 늦어졌는데, 투투 주교가 '대통령이 연애는 하면서도 결혼은 않는다'고 불평하고, 남아공 언론들이 결혼을 부추기자 마셸도 결국 결혼에 동의했습니다. 만델라와 결혼한 마셸은 지성과 강인함을 겸비한 아프리카의 대표적인 여성지도자로서, 모잠비크 초대 대통령이었던 사모라 마셸과 결혼했는데, 1986년 비행기 추락사고로 남편과 사별했습니다. 이날 결혼식에서 만델라는 새롭게 신부가 된 마셸에게 "인생의 황혼기에 나는 그녀의 사랑과 헌신으로 꽃처럼 다시 피어나고 있다"는 헌사를 했고, 마셸은 "만델라의 상징과 신화는 우리가 이상을 계속 추구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화답함으로, 오랜 세월 남아공의 독립과 민권운동을 위해 싸워온 만델라의 인생의 황혼에 가슴 설레는 사랑과 희망을 안겨준, '석양의 은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5,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제 육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제 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마20:5-6). 여기서 말하는 시간은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시간으로, 저녁 6시부터 아침 6시까지는 세시간씩 나누어 오후 6시부터 9시까지는 제 1경(一更), 오후 9시부터 자정까지는 제 2경(二更), 자정부터 새벽 3시까지는 제 3경(三更), 3시부터 아침 6시는 제 4경(四更)이라 했습니다. 낮 시간은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를 12시간으로 나누어 본문의 제 6시는 정오이고, 제 9시는 오후 3시, 11시는 오후 5시를 가리켰습니다.


이스라엘의 포도수확은 태양력으로는 8-9월인 '엘룰월'에 합니다. 이 포도수확철에, 어떤 포도원주인이 길거리에 나가 추수할 품꾼들을 모집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냈는데, 우리 시간으로 아침 6시에 거리에 나가 품꾼을 만나 하루에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하고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그리고 제3시(아침 9시)에 또 다른 사람에게 상당한 품삯을 주기로 하고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제6시(낮 12시)에도 사람을 만나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제9시(오후 3시)에도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제11시(오후 5시)에도 길거리에 서있는 사람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고 물으니,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어서 이렇게 하루 종일 서 있었습니다"라는 대답에,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며 들여보냈습니다.


이렇게 품꾼들을 포도원에서 일을 시킨 후에, 일이 끝나는 제 12시, 즉 오후 6시에 임금을 지급하는데, 제 11시에 온 사람들부터 품삯을 줍니다. 그런데 1시간 일한 사람이 하루 품삯인 1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본 일찍 온 사람은 '아마 우리에게는 더 주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차례가 되어 품삯을 받고 보니, 저희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자 "나중 온 사람들은 불과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한 데나리온을 주고, 아침부터 종일 수고한 우리에게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줄 수 있느냐?"고 항의합니다. 그때 주인이 대답하기를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20:13-15)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상식으론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몇 가지 문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불과 한 시간밖에 일하지 못할 사람을 왜 일시켰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매우 비경제적이고 무모한 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여기에 포도원 주인의 깊은 사랑이 있습니다. 이 포도원 주인은 일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이들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품삯을 주려고 일을 시킨 것입니다. 특히 이 말씀은 천국에 대한 비유로서, 천국의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기에, 말씀이면 아무 못할 일이 없기에 일이 목적이라면, 말씀 한 마디에 당신 뜻대로 이뤄질 것이기에 불완전한 인간들을 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천사들도 있는데도, 어리석고 부족한 인간들에게 일을 맡기시는 것은, 이 일을 핑계로 상주시기 위함입니다. 일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은 그 자체가 곧 '은혜'입니다.


둘째, 왜 아침부터 일한 사람부터 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맨 마지막에 온 사람부터 임금을 지불했느냐는 점입니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은 온종일 일했기에, 마지막에 온 사람부터 지불하면 이들은 그만큼 더 기다려야하기에 불공평해 보입니다. 그런데 경기가 안 좋으면 일할 사람은 많고 일거리가 없어 일자리 얻기가 어려운데, 이럴 때 먼저 선발되어 일하게 된 사람은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아침부터 일한 사람은 우선 그 날 자기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고, 또 받을 임금으로 가족을 굶기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녁 5시에 일을 한 노동자는 일을 못하고 빈손으로 집에 돌아가면 가족들은 그대로 굶어야할 처지라서 그 때까지도 집에 못 가고 길거리에서 서성이며 그들을 고용해줄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포도원주인은 이런 사정을 알고 열한 시에 온 사람부터 임금을 지불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침부터 온 사람들은 저녁때 들어온 노동자들을 보며, '뭐야 이거! 이제야 오다니!'하는 고참 특유의 차가운 시선을 보냈을지도 모릅니다. 원태연 시인의 시입니다. [공쳤어] "같은 말인데 / 골프치고 온 아줌마와 / 생선팔다 온 아줌마는 / 왜 표정이 틀릴까. / 왜 그럴까?" 포도원 주인은 이렇게 약한 자에 대한 '배려'로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먼저 돈을 주어 집으로 보냈던 것입니다.


셋째, 왜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의 임금과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의 임금이 다같이 한 데나리온이냐는 점입니다. 여기서 포도원주인은 불평을 들었지만, 하루 한 데나리온 임금을 약속대로 지불했기에, 포도원주인이 계약 위반을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인이 나중 사람에게 돈을 지불한 것은 단지 노동에 대한 임금이 아니라, 일거리를 기다리며 저녁 5시까지도 포기하지 못하고 애타게 기다린 딱한 사정에 대한 호의였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남에게 무엇을 받을 때는 기뻐하지만, 남이 받는 것을 보면 기뻐하지 못하고 도리어 불평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천국은 주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주님이 사람을 보실 때 무엇을 보실까요? 단지 그 사람의 능력이나, 스펙을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절망적인 처지에서도 오직 주님의 은총을 고대하는 자가 축복 받는 곳이 천국입니다. 오직 주인에게 고용된 것이 감사하여 얼마에 고용됐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오직 주인의 처분만 바라며 겸손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충성하는 자에게 베푸신 '보상'입니다.


그러면 '열한 시'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첫째 이 '열한 시'는 절망의 시간입니다. 이 열한 시에는 좌절이 있을 뿐입니다. 이제 더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미 오늘 하루 일은 끝났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빈 지게를 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배고픈 자식들의 칭얼대는 소리를 마음으로 들으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해 돌리려는데, 이들에게 포도원 주인이 다가와 묻습니다. "왜 당신들은 이렇게 서성거리고 있소?" 그들이 대답합니다. "아무도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고, 써주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런 비참한 대답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대답이라기보다 절규요, 절망의 탄식입니다. 사람들은 절망에 빠지면 가스 불로 온 가족이 집단자살도 하고, 한강에 뛰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고, 내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인생이 마치 오후 5시처럼 허탈과 좌절의 시간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의 줄을 결코 놓아서는 안됩니다.


사람에게 어떤 희망이 없다는 것은 곧 죽음과 같습니다. 심리학자들이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물이 든 항아리에 쥐를 넣고 캄캄하게 했더니, 30분만에 죽었습니다. 체력이 아니라 절망감 때문에 빨리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항아리에 한 가닥 빛을 비춰주었을 때, 쥐는 무려 36시간을 생존했습니다. 문제는 희망입니다. 단테의 신곡(神曲)에 보면 지옥문에 "너희들 이곳에 들어가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는 말이 쓰여있다고 합니다. "미래가 없다"는 말은 가장 무서운 저주입니다. 어떤 기회도 일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없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괴로운 절망입니다. 덴마크의 우수의 철학자 키엘 케골은 '절망이야말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했습니다.


둘째, 이 '열한 시'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아무 하릴없이 아침부터 서성거리던 이 사람에게 포도원 주인이 "내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고 말합니다. 하루종일 얼마나 고대했던 음성입니까?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일할 수 있었던 것도 너무 고맙고 감사한데 임금도 아침부터 일한 사람보다 먼저 받았고, 그들과 똑같이 받았습니다. 주님은 당시 어부, 세리, 창녀, 죄인들, 눈멀고 귀 먹고, 말못하며 희망조차 가질 수 없는 가난하고 헐벗은 인생들에게 희망과 용기와, 천국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태형 기자가 노숙생활을 하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50세 한 성도에게도 행복했던 순간을 물어보았습니다. "노숙자였을 때였어요. 빈말이 아닙니다. 그때가 아니었다면 영영 모르고 살 뻔했으니까요." 평온한 인생을 살다 사업에 실패, 노숙생활을 하던 그에게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도 하나님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임을 알게 된 그때가 그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오후 5시 인생인데 주님께로부터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을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셔서 부르셨습니다. 아침부터 하루종일 일하고 계약조건에 의해 보수 받는 자들이 아닙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4:4-5). 무자격한 자를 불러 써주신 은혜를 입었습니다.


셋째, 이 '열한 시'는 이제 마지막 기회의 시간입니다. 만약에 서성거리던 품꾼이 자기를 써주는 사람이 없다고 그냥 돌아가 버렸다면 그는 가족들과 함께 때울 끼니조차 없이 그대로 쫄쫄 굶어야 했을 것입니다. 최후로 그에게 찾아온 11시, 그 때를 찾은 자에게는 구원이요 은혜이지만, 그 때를 놓친 자에게는 심판의 시간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고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그 은혜를 만홀히 여기고 그 구원의 호의를 거절한 자에게는 무서운 심판이 초래되는 이중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라는 말씀에 이어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고 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서성거려서는 안됩니다. 설사 우리의 삶이 오후 5시의 삶이라 해도 망설이거나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천국의 포도원이 주는 놀랍고도 풍성한 약속이 있는 한 우리는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절망을 소망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눈물을 웃음으로 바꿔주시기에 더 이상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이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기에, 남은 시간이 얼마든 우리가 하늘나라의 포도원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곳엔 상상할 수 없는 풍성하고 놀라운 삶이 있습니다.


어떤 돈 많은 부자가 빌리 그레함 전도집회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빌리 그레함 전도 대원 중 단 피아트(Dan Piatt)가 어느 날 그 부자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그의 사무실로 찾아갔습니다. 그 부자는 피아트에게 말하기를 "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흥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백만 불 짜리 사업 계약을 하기 위해서 지금 두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밤에 당신에게 전화할 테니 그때 만나서 하던 이야기를 끝맺읍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한밤중까지 기다렸으나 전화 연락이 없었습니다. 다음 날이 되자 피아트는 조간신문에서 그 부자가 지난밤 9시 30분 경에 병원에서 죽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는 자세한 내용을 알려고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병원 당국자들이 말하기를 어제 초저녁에 병원에 실려 온 그는 죽기 전에 '내가 왜 그걸 못했을까? 내가 왜 그걸 못했을까?'하는 말을 되풀이 하다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마지막 열 한시를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첫째, 우리를 포도원 품꾼으로 불러주신 것을 귀히 여겨야합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엡3:7).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일꾼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꾼 된 것은 철저히 주님의 은혜입니다. 내게 그럴 능력이나 자격과 공로가 있어서 주님의 일꾼이 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일꾼 됨을 특권과 영광으로 받아야 합니다.


38세에 캘커타에 들어가 87세까지 귀한 일을 하다 세상을 떠난 마더 테레사는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봉사함으로 내가 은혜를 받기에, 봉사하는 것이 내게 은혜요, 선물이요, 기회입니다. 여러분, 내가 건강해서 하나님의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하라고 건강을 주셨습니다. 내가 돈 있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일하라고 돈을 주셨습니다. 내가 재능이 있어 봉사하는 것도 아니라, 세상을 위해 봉사하라고 재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에게 주신 그 건강과, 물질과 재능을 주의 일을 위해 쓰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네게 내 일을 하라고 세상에 보냈더니, 내 일은 하지 않고 계속 네 일만 하는구나. 이제 그만 돌아와라.' 우리에게 일이 주어졌음을 은혜로 알고 이를 감사히 받아야 하겠습니다.


둘째, 기회를 잃지 않도록 주어진 시간을 소중히 해야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5-16). 지금은 은혜의 시간이며, 또 마지막 기회인 열한 시입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세월을 구원하라'는 뜻입니다. 이제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 시간마저 놓치면 영영 기회가 없기에 마지막 기회를 살려야합니다. 이 시간마저 놓치면, 그 시간과 함께 영영 자신을 잃고 맙니다.


우리에게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올해도 이제 보름밖에 안 남았습니다. 우리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도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에 기회가 또 오겠지'하며 차일피일 미루다가 영영 기회를 놓쳐버릴 수 있습니다. 열한 시에 포도원에 들어가 일한 사람이 그 시간마저 놓쳤다면, 다시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뉴욕의 '언약의 집'이란 크리스천자선단체는, 버림받거나 집을 나온 청소년들에게 구직신청서 쓰고, 면접보고, 직장생활의 기본규칙을 가르쳐 직업을 얻게 해줍니다. 1시간을 운전해오는 자원봉사자에게 봉사하는 이유를 묻자,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제게 참으로 좋은 분이셨고, 저는 정말 좋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백만장자나 대기업의 사장도 아닌 평범한 시민이었으나, 자신을 보살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봉사하면서도, 봉사할 수 있는 것을 은혜로 알고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셋째, 주어진 기회에 열심히 봉사해야 합니다. 만약 그 사람이 은혜로 주어진 기회마저 빈둥댔다면, 주인은 어떻게 했을까요? "너는 아무래도 안되겠다. 마지막으로 열심히 일할 기회를 줬어도 그 기회를 우습게 안다면 네겐 더 이상 어떤 호의도 합당치 않다"며 그를 바깥 어두운 곳에 쫓아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은혜로 일꾼 되었기에 더욱 충성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평생토록 자기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해득실로 얽힌 세상에서, 손해보다는 이익을, 실보다는 득만을 취하면서 살다보니 노년이 되었을 때, 주위엔 아무도 없었고, 쓸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외로움을 달래줄 것이라곤 사과 궤짝에 넣은 돈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에게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헌신할 마지막 기회였으나 그는 그 마지막 기회마저 자기를 위해 써버렸습니다. 가졌던 돈을 다 털어 순금으로 만든 관을 구입하여 그 속에서 죽기로 했습니다. 결국 그는 금관 속에서 죽은 채로 매장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밤, 그의 시체는 금관을 탐낸 무리들에 의해 무덤 밖에 내팽개쳐져 굶주린 들쥐에게 뜯어 먹히고 말았습니다.


요즘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이은상 교수의 [너 뭐 하다 왔니?]라는 책이 화재입니다. 저자 이은상 교수는 1989년 가을, 남편 황희철 목사와 함께 한국에서 열린 '세계 환경 세미나'에 참석하여 난지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귀국했습니다. 세상적으론 남부러울 것 없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조용히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좋은 것들과 많은 은사를 줬는데, 너는 뭐하다 왔니?" 주님의 그 짧은 질문은 그들 부부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 앞에 백퍼센트 순종의 길을 떠났습니다. 주님이 타신 나귀가 되어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살까' 싶은 곳까지 갔습니다. 얼마 전 남편은 먼저 하나님 품에 갔는데, 장례식마저 영혼구원의 통로로 사용해주신 것을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이 "너 뭐하다 왔니?" 물으시는 질문에 저자는 '저의 대답은 순종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성 어거스틴의 [너무 늦게야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입니다. "너무 늦게야 주심을 사랑합니다/ 오래오래 보았으나/ 새롭게 아름다우신 주님을/ 이토록 뒤늦게야 사랑합니다/ 주님은 제 안에 계셨고/ 저는 주님의 바깥에 있었나이다/ 주님을 찾다가 추할 대로 추해진 제가/ 주님이 만드신 그 아름다움 위에/ 이제야 비로소 넘어졌나이다// 너무 늦게야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이 저를 소리쳐 부르사/ 저의 귀먹은 것을 열어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빛을 저에게 보이사/ 저의 눈먼 것을 밝혀주시고/ 저에게 향기를 불어넣어 주시니/ 그 향기를 마시고 이제 주리고 목마름같이/ 주님을 사모하나이다." '내가 무심코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그렇게도 살고 싶어했던 내일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어머니가 너무 열심히 일하자, 아들이 보다못해서 묻습니다. "왜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십니까?" 어머니는 "촛불이 하나밖에 없는데 자꾸만 타 들어가니 꺼지기 전에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지혜자는 권면합니다.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9:10). 누구나 일을 하고자해도 언젠가 할 수 없는 때가 다가옵니다. 지금 남은 기회를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힘써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0장 1~16절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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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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