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19 150회
“고향을 넘어 영원한 본향으로”
2021년 9월 19일 주일예배
히브리서 11 : 13 - 16 ; 창세기 30 : 25 - 26
오늘 창세기에는 고향을 찾으려는 믿음의 조상 야곱의 간절한 소망이 나옵니다. 그는 형 에서의 보복을 피해 고향을 떠난 지 이미 20년 세월을 보냈습니다. 외삼촌 라반에게 와서 두 아내와 열 명이 넘는 자식도 낳았는데도, 그곳 하란에선 이방인이요 나그네였기에 삼촌 라반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합니다.
야곱과 같이 고향을 떠나온 또 하나의 실향민이 히브리서에 나오는데, 바로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에겐 육신의 고향 외에 또 다른 고향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인들 왜 고향 갈대아 우르를 생각지 않았으랴 만, 그는 영원한 본향, 천국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 지상에서는 자기들이 타향사람이며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그들이 찾고 있던 고향이 따로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입니다”(히11:13-14. 공동번역)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고향뿐 아니라 언젠가 돌아갈 영혼의 본향, 천국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선 나그네요, 이방인이라면 세상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까요? 첫째, 우리는 앞으로 찾아가야 할 본향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15절에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육신의 고향 갈대아 우르를 그리워했다면 고향에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을 잊고 살았기에, 다시 그 메소포타미아 지방엔 돌아갈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늘 마음속에 사모했던 곳은 어디입니까?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16절). 아브라함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둘째, 우리는 본향 가는 길을 잃지 않도록 땅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합니다. 15절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러나 아브라함은 육신의 고향에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라 했는데, ‘외국인’이란 헬라어 ‘크세노이’는 ‘낯선 사람’으로, 현지인과 언어, 풍속, 생활양식이 달라 이방인처럼 멸시받았습니다. 또 ‘나그네’의 헬라어 ‘파레피데모스’는 ‘임시로 거주하는 자’로서, 고향이 있지만 얼마동안 다른 곳에 임시로 머무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땅에 임시로 머물렀습니다.
성도는 외국인과 나그네기에 세상에 대해 초연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
칼뱅은 사도신경의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 고백은 우리의 행복이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우리가 나그네처럼 이 낯선 땅을 여행하고 있다는 것을 지시하고 있다. 우리는 여행하고 있다. 이 진술이 사도신경에 있는 것은 우리가 이 땅의 것을 무시하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도록 가르치기 위해서다.” 땅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합니다.
셋째, 나그네길에는 가볍게 살아가는 것이 지혜입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히12:1). 여행하며 깨닫는 지혜는 가급적 짐을 적게 하는 것입니다. 여행하면서 이것저것 필요한 게 많을 듯 싶어 짐을 크게 꾸리면 ‘내가 여행객인가, 짐꾼인가?’ 고민하게 됩니다. 가져가면 쓸데가 있겠다 싶어 많은 짐을 들고 다니는데, 막상 가보면 그 짐들이 다 필요한 것도 아닌데, 잔뜩 무겁게 들고 다니며 여행만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가에 있지 않다.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에 있다’는 말처럼, 우리는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나그네길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첫째, 주님 앞에 부끄러움 없도록 끝까지 충성해야 합니다. 주님은 종말을 바라보던 요한에게 말씀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우리는 잠시 거쳐가는 나그네 삶을 분명하고 깨끗하게 살아야합니다. 우리 삶을 판단할 분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1세기 순교자들의 그 담대한 신앙은 바로 천국신앙 때문입니다. 천국을 믿기에, 세상에서 좀 손해보더라도, 주님이 더 좋은 것을 주실 줄 믿고 초연했습니다. 제임스 그레이는 말합니다. “고향길 가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 도상에서 조그만 어려움이야 얼마든지 견딜 수 있지 않겠는가.”
둘째, 원한을 품고 천국 가지 않도록 모든 이와 화해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8:18). 주님 뵐 때 부끄럽지 않도록 모든 매듭을 풀어야합니다. 문제가 복잡한 것은, 이 땅에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한 달을 살지, 하루를 살지 누가 압니까? 너무 이 땅 생활에 자신을 가지지 말고, 언제 어느 때 끝날는지 모르기에, 모든 매듭을 풀고 가야 합니다.
셋째, 서로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7,8). 우리는 천국에 가서 주님을 뵈어야 할텐데,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라도 사랑해야 할 사람을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 땅에서 나그네 삶이 얼마가 남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 기한이 얼마이든 후회 없도록 이 땅에서의 타향살이를 아름답게 하여, 본향에 가는 날 주님을 기쁘게 뵈어야하겠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