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09 225회
"함께 하는 공동체의 모습"
2020년 8월 9일 주일예배
골로새서 4 : 7 - 18 ; 전도서 4 : 9 - 12
캐나다 남자와 영국 여자가 사귀다가 캐나다에서 결혼식을 하고, 영국으로 신혼여행을 갔습니다.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자 아내는 영국여권을 가졌기에 내국인 입국심사창구로 가고, 캐나다인 남편은 외국인 창구로 갔더니, 입국심사관이 여행목적을 물었습니다. 그래서 "신혼여행 왔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입국심사관은 이 사람을 훑어보며 말합니다. "참 이상하군요. 신혼여행을 혼자도 다니다니..."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폴 트루니에는 '혼자서 못하는 두 가지는 결혼과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혼자서는 어려운 세상을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영화 [투 엔드 올 워즈](To end all wars)는 어네스트 고든의 자전적 소설을 영화화한 것입니다. 어네스트 고든은 이십대 초반 스코틀랜드사단 소속으로 2차 대전에 참전했다 곧 일본군에 생포되어, 미얀마 충까이 포로수용소에 갇힙니다. 섭씨 50도의 무더위에 벌레에 물리고 돌멩이에 맨발이 베이면서 일본군 간수는 게으름을 부린다 싶으면 때려죽이거나, 목을 잘라 죽이면서, 영양부족과 질병으로 8만 명이 목숨을 잃어, 철도 1마일 당 393명씩 죽어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포로들은 남의 물건을 훔치고, 죽어 가는 전우의 물건을 강탈하며, 음식찌꺼기를 서로 차지하려고 싸웁니다. 이때 고든은 심각한 병으로 중환자수용소로 옮겨 '병으로 죽는 것이 충까이에서 최후의 승자가 되는 길'이라 여기고, 모든 걸 포기하고 죽음을 기다리는데, 그곳에 아직 삶의 희망을 잃지 않은 두 명의 포로가 들어옵니다. 그들도 육체적으론 죽음의 그림자가 드려있었지만 무언지 알 수 없는 힘이 그들을 희망으로 이끌었습니다. 이들은 자기도 부족한 식사를 병세가 더 위중한 동료에게 나눠주며, 고된 노동에 차출될 땐 먼저 자원하고, 고든의 썩어 가는 다리와 몸의 상처를 소독해주며, 서서히 마비되는 몸을 밤새워 마사지해줍니다. 이들의 정성어린 간호 때문이었는지 고든은 점차 회복되었고, 고든뿐만 아니라 다른 환자들도 기쁜 마음으로 돌보는 이들 모습에, 모든 포로들은 엄청난 삶의 변화를 갖게됩니다. 지니고 있었던 물건을 함께 나누는 일이 이곳저곳에서 벌어졌고, 더욱 극적인 것은 그곳에서 예배가 드려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두 사람의 희생정신은 포로들의 이기심을 몰아냈고, 그동안 잊었던 하나님을 다시 찾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고든은 여기서 살아나 20년 후에, 프린스턴대학 교목이 되어 당시 체험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음은 여전히 주변을 떠돌고 있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었지만 포로들은 죽음의 세력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이기심, 미움, 교만 따위는 생명력을 짓누르는 요소들인데, 반면 사랑, 자기희생, 믿음은 생명의 핵심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지요. 충까이에서 죽음은 더 이상 마지막을 뜻하는 말이 아니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공동체로 출발했습니다. 초대교회는 결코 완전무결한 교회가 아니었지만, 당시 세상을 변화시켰던 그 원동력은 바로 공동체적인 신앙이었습니다. 이 공동체는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는데,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인격적인 조화와 교제로 존재하셨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요1:1-2). 주님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거하셨지 결코 홀로 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함께 하지 않고 개인주의에 사로잡힐 때 빠지는 병리현상이 있습니다. 첫째, 고독이란 병에 사로잡힙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2:17).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먼저 아담만 지으시고 보시자 이것이 좋지 않아, 아담을 돕는 배필로 하와를 지으시고 짝지어 함께 사는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사람은 이웃과 함께 살도록 지어졌기에, 다른 이를 멀리하고 혼자서 살려한다면 그는 다른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고독이라는 병에 걸리게 되고 맙니다.
이태리 속담에 '고독은 심지어 낙원에서도 견딜 수 없다'고 했듯, 사람이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고독입니다. 오늘날 만연해 가는 개인주의 사회는 인류의 종말을 재촉합니다.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나는 전류의 흐름이 그치고 필라멘트가 끊어진 텅 빈 전구처럼 고독하다"며 고독과 허무를 이기지 못해 권총으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고독은 아무도 없는 절해고도에서만 겪는 것이 아니라, 물결처럼 밀려다니는 군중들 속에서도 다른 이와 교감하지 못할 때 '세상엔 나를 아는 자가 없고, 아무도 나와 함께 하는 이 없이 온 세상에 나 홀로다'는 생각에 고독에 빠집니다.
둘째, 사람이 서로 함께 하며 돕지 않으면 보다 효과적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산마루 위의 기치 같으리라 하셨느라"(사30:17). 한 사람이 천 명을 물리친다면, 다섯 명이 함께 하면 한 나라를 물리친다고 말씀합니다. 18세기 영국의 바늘(핀) 공장에서 10명의 노동자들이 힘을 합쳐 분업을 했더니 하루에 48,000개의 바늘, 즉 한 노동자 당 4,800개의 바늘을 생산했는데, 분업하지 않고 혼자서 바늘을 만드니 한 노동자가 하루에 20개도 만들지 못했습니다. 힘을 합치니 생산능률이 240배나 높아진 것입니다. 일본 격언에 "우리 중 그 누구도, 우리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똑똑하진 않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독불장군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팀웍과 조화를 이루어가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셋째, 함께 힘을 합치지 않으면 공격해오는 적을 당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12). 탈무드에 나오는 말입니다. '한 가닥의 갈대는 쉽게 부러지지만 한 다발로 묶으면 굉장히 튼튼하다. 개의 떼거리는 모이기만 하면 서로 싸우지만, 이리가 나타나면 서로 싸움을 그친다.' 이 이야기는 나라와 시대를 가리지 않고 등장합니다. 징기스칸이 죽을 때 아들들을 모아놓고 화살을 주며 부러뜨리라고 했습니다. 쉽게 부러뜨리자, 이번에는 화살 한 다발을 주며 부러뜨리라고 하자, 아무도 부러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서로 힘을 합치면 어떤 적도 막아낼 수 있지만, 하나가 되지 못하면 작은 적의 공격에도 당해내지 못하고 멸망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함께'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이 단어가 쓰여진 문맥을 통해 교회 공동체의 성격과 역할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공동 운명체라는 사실입니다. 본문 7절입니다.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골4:7). 여기서 바울은 두기고를 소개하면서,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 함께 부름 받아서 함께 그리스도의 종이 된 공동 운명체라는 말입니다.
여기 언급하는 두기고는 본래 소아시아지방 출신으로(행20:4),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때, 바울과 함께 드로아를 여행한 적이 있는데, 그는 에베소교회에도 천거되었고(엡6:21), 바울의 사자로 파송되기도 했습니다(딤후4:12, 딛3:12). 물론 바울이 먼저 하나님께 부름 받았고, 바울이 주도적으로 일하며 두기고는 바울의 일에 협력하는 위치였지만, 그래도 주님 일을 위해 주님께로부터 종으로 세움을 입은 '함께 된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같이 부름을 받아 '함께 된 종'들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여러 사람의 이름을 열거하며, 그들 하나하나를 골로새교인들에게 소상히 소개하는 것을 보면, 그의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 이름을 기억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들을 깊이 염려하며 신실하게 애정을 쏟아 부었습니다. 바울은 독불장군 식으로 혼자 일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했습니다. 아리스다고는 그와 함께 갇힌 자였고, 마가와 유스도는 그와 함께 사역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자기 동역자들을 인정하고 자랑했습니다. 바울의 동역자들은 바울을 위해 열심히 수고했는데, 바울은 그들의 노력과 충성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순수한 감사의 표현을 합니다. 이로 볼 때, 바울은 성도와 동역자들 하나 하나를 소중히 여기며, 저들과 친밀한 교제로, 교회를 견고히 세워나갔던 것입니다.
설교가 스펄전 목사가 런던 메트로폴리탄 교회에서 목회할 때, 교인 중 한 나이 많은 할머니는 주일마다 그 날 등록한 초신자 20명의 명단을 집에 가져다가, 그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그들의 신앙과, 시험을 이기도록 기도했습니다. 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스펄전은 장례식을 집례하며 "그는 나의 가장 훌륭한 동역자였다"고 말했습니다. 구역장, 권찰, 교구장이 매일 교회에 나와 그 교구의 교인들을 위해, 어려운 문제를 당한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 목회의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골4:10). 아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 출신으로 에베소에서 폭도들이 소요를 일으켜 바울이 돌팔매질을 당해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바울과 함께 있으며 같이 고통을 겪었고, 함께 투옥되었으며(행19:29), 그 후에 바울을 따라 예루살렘에 갔다가, 바울이 죄수 아닌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호송될 때도, 바울을 수행하여 유라굴로 풍랑 가운데서도 바울을 지키며 함께 있었던 인물입니다. 본문에도 보면 바울이 로마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바울 곁을 떠나지 않고, 바울의 옥바라지를 하면서, 묵묵히 바울의 고난에 함께 동참하였습니다. 이런 동역자가 곁에 있었기에 바울은 그 어려운 고난 속에서도 끝까지 인내하며,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리스다고가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었거나, 무슨 대단한 일을 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단지,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바울이 고난을 겪을 때, 그 곁을 떠나지 않고, 그와 함께 고난을 함께 한 의리의 인물이었습니다. 사람이 성공하고 출세하면 찾아와 함께 하는 사람이 많지만, 어려움과 고난을 겪게되면, 같이 어려움 당할까봐, 함께 있다가도 등지는 것이 세상 인심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들이 겪는 모든 고난 속에서 함께 고통을 나누며, 환난 중에도 끈끈하게 결속을 지켰기에 숫자로는 많지 않던 초대교회가 세상에 큰 영향력을 끼쳤던 것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머리가 둘인 기형아가 두 아이냐 한 아이냐에 대한 구별이, 한쪽 머리를 때렸을 때, 맞은 쪽 아이가 우는데 다른 쪽 머리도 울면 한 아이이고, 다른 쪽은 울지 않으면 두 아이라고 합니다. 한쪽이 아플 때 다른 한쪽도 함께 아파하고, 기쁠 때도 함께 기뻐하면 하나의 공동체지만, 만일 기쁨과 아픔이 연합되지 못하면 하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공동체는 기쁨도 슬픔도 사랑도 아픔도 함께 합니다.
대학교의 한 심리학 교수가 사람이 고통을 얼마나 잘 견딜 수 있는가를 이렇게 실험했습니다. 텅 빈 실험실에서 한 학생으로 하여금 어름이 가득 채워진 물동이에 맨발을 집어넣고 혼자 얼마나 오래 견딜 수 있는가를 실험한 것입니다. 이렇게 실험하고서 다음에는 실험실에 그의 친한 친구를 함께 있게 한 다음 같은 실험을 해보았습니다. 이렇게 여러 명의 학생들에게 같은 실험을 했더니, 일반적으로 친구가 곁에 있으면 혼자 있을 때보다 갑절이상의 시간을 견딜 수 있다는 실험결과가 나왔습니다. 고통가운데 함께 한다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이웃들의 고통을 해석하려고 하지말고 이웃의 고통에 함께 하는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고통을 대비하여 서로 인생의 고난을 함께 나누는 교제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2천 년 전 육신을 입고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의 골짜기에 찾아오신 이유입니다. 그분의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로서, 그 별명은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이십니다. 그분고 함께 하면 어떤 고난의 골짜기도 건널 수 있습니다.
셋째, 교회 공동체는 또한 함께 일하는 공동체입니다.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이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골4:11). '정의(正義)'를 뜻하는 '유스도'란 이름은 본문 외엔 그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가 어디서 사역했는지 알 수 없으나 그는 골로새교회와 인연이 있었고, 바울이 이 서신을 쓸 때는 로마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아리스다고, 마가와 함께 그를 할례당이라고 한 것을 보면(10절), 그는 유대인으로 복음을 위해 바울과 함께 헌신한 동역자였고, 바울의 위로자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앞장서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인정받는 일은 좋아하지만,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알아주지 않는 일은 하려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에는 그야말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하나님의 종들을 도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묵묵히 도우며 일하는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의 역사는 아름답게 이뤄집니다.
더글라스 웹스터의 [낮아짐]에 실린 글입니다. - 베트남전쟁 때 미군조종사 찰스 플럼은 전투기가 격추되어 낙하산을 타고 간신히 탈출했습니다. 몇 년 후, 아내와 함께 어느 식당에서 식사하는데, 낯선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건냅니다. "실례지만 키티호크 항공모함에서 발진했다가 적군의 포탄에 격추된 전투기의 조종사 플럼 씨 아닙니까?" "어떻게 저를 아시지요?" "제가 당신 낙하산을 관리했으니까요. 그때 낙하산이 제대로 작동했는지 모르겠네요." 플럼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물론이지요. 만약 그때 낙하산이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거예요!" 현역 시절 플럼은 명색이 전투기 조종사였기에 일개 사병에 불과했던 그에게 인사도 건네지 않았고, 눈길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병이 세심하고 정교하게 낙하산을 접어준 덕택에 자기 목숨을 부지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낙하산을 접어주고 있습니까? 누구의 발을 씻기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낮아지심을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은 분명 낮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희생을 통해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 높든 낮든 함께 섬기며 일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주님의 일을 함께 할 수 있을까요? 첫째, 주님의 일하는 이들을 몸으로 도와 함께 일할 수 있습니다.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이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는 11절 말씀처럼 함께 일함으로 주의 일에 동참합니다. 캐나다의 옥수수농사를 짓는 농촌마을에서 한 어린아이가 옥수수 밭에 들어갔다가 그만 방향을 잃고 실종되었습니다. 아무리 밖에서 이 아이의 이름을 불러대도, 바람으로 우수수 옥수수 잎이 부딪히는 소리에 이 아이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고 울며 엄마 아빠를 불러댔지만, 그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이 아이를 찾지 못하고, 다음 날, 인근 학교에 연락을 하여 보이스카웃 단원들이 모두 몰려와 손을 잡고 옥수수 밭을 전부 훑다가 옥수수 밭 한가운데서 밤새 두려움과 추위로 인해 그만 심장마비로 죽은 아이를 발견했습니다. 보이스카웃 대장이 오열하는 부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진작 이렇게 손을 잡았더라면, 이 아이를 살릴 수 있었을 텐데요." 우리가 같이 손을 잡고 함께 일하기만 한다면, 얼마나 많은 생명들을 살려낼 수 있고, 얼마나 크고 위대한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둘째, 기도로 함께 일할 수 있습니다. 12절에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에바브라는 기도로 바울의 사역에 함께 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골4:3)라며, 하나님께서 전도의 문을 열어주셔서 그리스도의 비밀을 담대히 말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에게 그의 그 위대한 사역의 비밀을 묻자, 대답하기를 "저에게 그런 비밀은 없습니다. 있다면 일만 오천 명의 성도들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저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교회의 승리는 자기 능력이나 지혜로 인한 것이 아니라 뒤에서 기도해 주는 성도들의 중보기도로 인한 것입니다.
셋째, 물질로 주님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라"(골4:15). 눔바는 자기 집을 드려 교회로 삼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드려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고, 또 기도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지만, 또 다른 방법은 내게 있는 물질로 하나님의 일에 함께 동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편지하며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4:18)라고 말했습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비록 몸으로는 바울과 함께 하지 못했지만, 정성어린 물질로 바울의 사역에 큰 힘이 되고 그의 사역에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에서 한 소녀가 선교의 소명을 받고 대학에서 간호학을 배워 간호사가 되어 중국으로 가려고 신체검사를 했는데 심장병이 있다는 사실에 깊게 실망하였습니다. "하나님, 이 눌림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녀는 하나님 앞에서 울부짖었습니다. 그 후 그녀는 LA 근처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한 선교대회에서 중국에 선교사로 가려는 자매가 준비를 다 갖추었지만, 후원이 없어 떠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동역자가 되자. 나는 이곳의 직장에서 내 월급의 절반을 당신에게 보낼 테니, 당신은 중국에 가라." 그 자매는 후에 큰 회사 사장이 되어 선교사 다섯 명을 부양했습니다. 그녀도 선교사들과 함께 하나님께 상을 받을 것입니다.
세계선교에 큰 발자취를 남긴 '허드슨 테일러'는 영국으로부터 중국에 파견된 몇 년 후에, 그의 생애에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는 의욕적인 선교사로서 여러 가지 개척적인 선교의 프로젝트를 시행했는데, 너무나 열심히 하다 보니까 선교본부와 의견에 충돌이 생겼고, 끝내 선교본부로부터 경고가 날아왔습니다. "선교회를 탈퇴하던가, 아니면 지금까지 추진하던 모든 프로젝트를 중단하고 선교회방침에 순종하던가 선택하라!" 테일러는 이 편지를 받고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테일러는 또 한 장의 편지를 받습니다. 그것은 영국에 있는 애인으로부터 온 편지인데, 허드슨 테일러가 안정된 생활을 거부하고 너무 모험적인 라이프스타일의 삶을 살기에 '이런 사람과 내 일생을 같이 할 수가 있을까?' 불안하게 여겨, "우리 교제를 끝내자"는 절교편지였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설상가상의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이때 그는 선교를 포기하고, 심지어 인생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까지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테일러를 그 위기에서 건졌던 것은, 그의 곁에 한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친구는 테일러보다 나이가 20살이나 많은 스코트랜드 출신의 윌리엄 번스라는 선교사였습니다. 그가 테일러를 보니 아주 가능성이 많은 사람으로 여겨져, 그가 좋아 자기보다 어렸지만 테일러를 열심히 따라 다녔습니다. 이 윌리엄 번스가 절망과 낙심에 빠진 테일러에게 이런 제안을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나와 함께 여행을 떠나자!" 그래서 두 사람은 무려 7개월 간 중국 여행을 떠났습니다. 중국 여기저기를 돌아보며 쉬기도 하고, 또 같이 사역하기도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면서 테일러는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윌리엄 번스가 함께 여행한 그 7개월 동안 테일러에게 계속해서 한 말은 두 가지였다고 합니다. 하나는 "나는 자네를 믿네"라는 말이었고, 또 다른 말은 "나는 자네를 따라갈 거야"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이 두 마디 말이, 위대한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를 다시 회복시키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습니다. 만약 테일러에게 그 친구가 없었다면 그는 결정적인 인생의 고비에서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라고 그는 훗날 회고했습니다. 윌리엄 번스가 없었다면 19세기를 위대한 세기라 부르게 한 허드슨 테일러의 사역은 펼쳐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전4:9-10).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대로, 우리는 저 천국에까지 가야만 합니다. 하나로 부름 받은 운명공동체로서, 고난도 시련도 함께 나누며, 주님의 사역도 함께 힘을 모아 이루어야 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하신 말씀대로,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천국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
내가 그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내는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언하노라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내가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