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18 286회
"섬기는 자라 되라!"
2020년 10월 18일 주일예배
마가복음 10 : 35 - 45 ; 시편 75 : 4 - 7
어떤 사람이 진짜상아로 만든 인형이라고 해서 샀더니 전문가가 가짜라기에 상인에게 따졌습니다. "이 인형을 진짜상아로 만들었다고 해서 샀는데 알아보니 가짜 더군요."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혹시 그 코끼리가 이빨이 썩어 의치를 했었는지는 모르지만요." 상아의 구별은 머리카락이나 옷에 문질러 정전기가 생기면 가짜고, 안 생기면 진짜랍니다. 살아 있는 코끼리 생이빨을 뽑으면 분홍빛이 점차 아이보리 색깔로 변하는데 이것이 최상품이고, 상아제품 중 흰색은 코끼리뼈가 많기에 아이보리 색깔을 고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짜 크리스천일까요, 가짜일까요?
미국 남북전쟁 때 '프레드릭스버그 대전투'에서 많은 부상자를 중간에 남겨놓고 쌍방이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북군병사가 물통을 들고 나가자, 남군이 사격하는데, 이 병사는 목숨걸고 남군, 북군 가리지 않고 부상자들에게 물을 주자 사격이 멈추고, 쌍방은 잠시 휴전하고 서로 부상자처리를 했습니다. 그때 남군 장교가 묻습니다. "What is your name?(자네 이름이 뭔가?)" 그가 대답합니다. "My name is Christian(내 이름은 크리스천입니다)" 그는 부모가 지어준 이름대신, 총탄에 맞아 죽을지 모르는 사지 한복판의 죽어가는 사람들을 향해 뛰어나가게 만든 이름을 댔습니다. 그의 '크리스천'이란 이름은 결코 값싸고 편리한 이름이 아니라 목숨과, 전 존재를 건 이름이었습니다. 오늘 이 땅에서 교회 이미지가 추락하고, 신앙의 진정성이 의심받고 있다면, 이런 '진짜' 크리스천의 수가 적기 때문 아닐까요?
인간의 권력추구와 지배욕구는 인간존재 깊은 곳에 자리잡은 가장 강렬한 욕구로서, 니체는 '인간 존재의 본질은 권력에 대한 의지'라고 말했습니다. 인간관계를 위협하는 모든 갈등에 이 권력과 지배욕구가 숨어있습니다. 가정에서 부부의 갈등, 고부의 갈등도 원인은 '누가 지배하느냐'는 문제입니다. 정치에도 안정과 타협이 없이 갈등이 계속되는 것도 모두 지배하려고만 할 뿐, 진정으로 국가나 국민을 위해 봉사하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기독교 사상가인 말컴 머거리치는 "바로 이런 힘을 추구하는 철학이야말로 현대 정신사의 타락의 징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마더 테레사가 화려한 보석으로 꾸미고 나온 전 세계의 수많은 대통령, 수상, 국왕들 앞에서 인도 전통 의상인 낡고 단순한 사리를 입고 앉아 있는데, 한 정치인이 물었습니다. "당신이 하는 일이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지기는 했지만, 별다른 성공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가끔 좌절하거나 실망한 적도 있으리라 생각됩니다만,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러자 테레사가 대답했습니다. "천만에요. 전 실망하거나 좌절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제게 성공의 임무를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랑의 임무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궁극적 임무는 성공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과 어떻게 다를까요? 첫째,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크심을 믿음으로 거룩한 두려움이 있으나,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기에 신에 대해서나, 악을 행하는 일에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2:19)라며, 당시 하나님을 떠나 두려움 없이 죄를 짓던 백성들을 책망하였습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사랑과 봉사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20).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웃과 형제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는, 사랑이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에 누구를 사랑하지 않는 일에 대해서 아무런 가책이나 죄의식이 없습니다.
셋째, 성령으로 거듭난 삶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5-6).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은 중생이 없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라며,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는 신앙고백도 오직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개인적인 청탁을 하는 모습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12명 제자 중에 베드로와 함께 주님이 가장 아끼고 사랑한 제자들입니다. 주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실 때나, 변화산에도 이 세 명의 제자들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제자들은 몰라도 이들만은 예수님을 잘 이해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어야 했을 텐데, 다른 제자들보다도 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십자가를 지시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그 비장한 때에도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자기네 두 형제가 '좌정승, 우정승을 하게 해 달라'고 인사 청탁이나 했던 것입니다.
이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생각해봅니다. 첫째, 예수님의 마음을 너무나 헤아리지 못한 점입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눅10:33-34). 예수님은 조금 전에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을 말씀하셨는데도 야고보와 요한은 이 수난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께 '자기들을 높은 자리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을 보면, 예수님을 너무나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지난 2000년 5월호 [생명의 삶]에, 상담연구소장으로, 노숙자 쉼터 다일사 상담책임자였던 김희성씨에게 보내진 한 노숙자의 이런 편지가 실렸었습니다. "선생님, 이제는 아무 생각이 없고 그저 어디에서 점심을 얻어먹을 수 있나 하는 생각뿐입니다. 노숙자라는 현실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인 채 서울역에 누워 있는 자신이 놀랍기만 합니다. 나는 건설 현장 기술자로 일하다가 실직한 후 22만원밖에 없어서 좌절하고 있는데, 대학 1학년인 딸이 용돈을 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홧김에 내던진 통장을 들고 나간 몇 시간 후에 20만원 어치 화장품을 사들고 들어온 모습을 보고 가정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한 가정에서 함께 살면서, 자식이 이렇게 부모의 사정과 마음을 몰랐듯, 야고보와 요한도 지금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비통하신 지 모른 채, 자기들만 높은 자리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둘째, 다른 제자들은 생각지 않고 오직 자신들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던 점입니다. 12제자 중 수제자는 베드로고, 요한은 나이가 가장 어렸는데도, 저희 둘만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으면, 다른 제자들은 어쩌라는 말입니까? 공동체의식이 없는 지극히 이기적인 발상으로, 그 동안 제자들 간에 유지됐던 평화와 질서가 깨지고,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냈다'(막10:41)는 반응을 보면, 이때부터 제자들 간에 팽팽한 대립과 경쟁이 조성되었던 것입니다.
박경철 씨의 [착한 인생, 당신에게 배웁니다]라는 글입니다. "몇 명의 여행자에게 세상을 일주하는 제일 좋은 여행방법을 물었더니, 어떤 이는 역사기행을, 어떤 이는 크루즈여행을, 어떤 이는 자전거횡단을 추천하는데, 그 중에 가장 나이 든 사람이 친구와 함께 가는 여행이 가장 좋은 여행이라고 대답했다." 신앙생활도 좋은 사람과 함께 주님을 섬기는 것이 가장 기쁘고 좋은 입니다. '나쁜 사람'이란 하나님도, 교회도, 이웃도 없이, 오직 '나뿐인 사람', 즉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야고보와 요한은 다른 제자들은 생각할 줄 모르고 오직 자기들 밖에 몰랐습니다.
셋째, 저들은 자기들이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구했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38절). 주님은 제자들이 '크고 으뜸이 되고자'하는 그 소원을 나무라진 않으시고 '어떤 면에서 큰 자가 되고 으뜸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10:43-44절). 참으로 크고, 높아지려면 먼저 종과 같이 낮아지고, 섬기고 봉사해야, 큰 자가 되고 으뜸이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10:42-44). 믿지 않는 이방인의 성향에 대해서 '저희를 임으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는 것'임을 지적하시면서, 나를 믿는 너희들은 이런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믿는 자가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사는 법은 무엇일까요? 첫째, 스스로 자신을 높이려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야합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10:42-44).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은 높은 자리에서 사람들을 다스리고, 부리려는 것이지만, 주님의 제자들은 하늘 영광을 버리고 낮아지신 예수님을 본받아, 자신을 스스로 낮추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종이 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높을 長'자에 벼슬 '官'자를 써서 '장관'이라 부르는데, 서양에선 '섬기다', 혹은 '하인'이란 뜻의 'minister'라고 부릅니다. '벼슬'이란 섬기고 봉사하는 자리인데 우리나라에선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고 다스리시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교회의 직분도 봉사하는 자리인데, 계급으로 생각은 분명 잘못된 생각입니다.
미국 의회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마더 테레사가 미국 의회를 방문하여 연설했을 때라고 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연설자에게 박수를 잘 보내는데, 테레사의 연설이 끝났을 땐 한 사람도 박수를 치지 않더랍니다. 5분 동안 완전히 침묵이 그들을 사로잡았는데, 그때 의회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박수를 칠 여유가 없었다고 합니다. 숨막히는 감동이 그들의 목과 가슴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지막 테레사가 던진 한 마디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섬길 줄 아는 사람만이 다스릴 자격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지도자는 이웃과 공동체를 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둘째, 세상 사람들은 섬김을 받으려고만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10:43-44). 야고보와 요한은 그냥 높아지려고만 했지, 참된 의미에서 크고 으뜸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높은 자리에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사람들을 부리고 호령하는 것이 크고 으뜸이 되는 것으로 여겨, 주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기를 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 크고 으뜸이 되는 길은 다른 사람을 섬기고 모든 이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극복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제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네덜란드 종교현상학자 판델레우는 '종교는 섬기는 것이고, 마술은 지배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주님은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왔다"고 하셨습니다.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원인은 바로 모두가 다른 사람을 지배하며, 섬김을 받으려고만 하기 때문이기에, 이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종의 정신으로 섬김으로서만 치유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세족식을 행하며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3-15). 우리가 주님의 제자일진데 서로 발을 씻기는 종의 자세로 섬기며 봉사를 실천해야만 합니다.
1878년 윌리엄 부스의 구세군이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자, 미국에서 한때 주교가 되려고 꿈꿨던 사무엘 브랭글이 구세군에 입대하기 위해 영국에 왔습니다. 부스 사령관은 처음 브랭글을 보며, "당신은 너무 오랫동안 보스로 군림해왔다"며, 그에게 다른 훈련병들의 군화 닦는 일을 시켰습니다. 실망한 브랭글은 "내가 기껏 군화나 닦으려고 대서양을 건너왔단 말인가?"하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때 환상 중에 거칠고 무식한 어부들의 발을 씻어주시려고 엎드리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그들의 발을 씻기셨군요. 그렇다면 저도 그들의 구두를 닦겠습니다." 브랭글이 기꺼이 그들의 더러운 군화를 닦았을 때, 그는 예수님처럼 사는 놀라운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이후에 그는 구세군 최초의 미국인 감독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다른 이의 발을 씻기고자 하는 자세가 아니면 참된 주님의 일꾼이 될 수 없습니다.
셋째, 세상 사람들은 고난과 희생을 기피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희생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주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45절)며,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도를 가르쳐주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8:34).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길은 곧 십자가의 길입니다. 이 시대 주님의 교회가 나약해진 이유는 고난 없는 안일과 편안함만 찾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아무 고난과 십자가가 없이 믿으려하기에, 성도들은 무기력해지고, 무능력해집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의 숫자는 비록 작았지만, 그럼에도 저들은 세상을 뒤집어 놓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고난도 박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 받는 것을 도리어 영광으로 생각했을 때, 저들은 세상을 뒤흔들어 놓는 무서운 힘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가슴아픈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 속에는 각기 자기 입장에만 골몰할 뿐, 하나님도, 교회도, 내 옆에 있는 형제나 지체에게 대한 관심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내가 싫고 귀찮으면, 그뿐입니다. 모든 것이 나 중심이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뿐, 희생과 봉사가 점점 메말라 가고있는 모습입니다. 영국 기독교 사상가요 언론인인 멀콤 머거리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용주의가 이 땅의 기독교인들의 삶에 미친 가장 커다란 영향이 있다면 그것은 오늘의 기독교인들에게서 참된 결단, 헌신을 빼앗아 간 것이다." 이 말은 영국뿐만 아니라, 오늘 한국 교회에도 그대로 적중하였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국권침탈로 극심한 가난과 전염병으로 시달리던 지난 1912년, 푸른 눈의 간호사가 이 땅에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독일에서 태어나서 미국으로 건너가 간호학공부를 마치자, 안락한 삶을 뒤로하고 32살 처녀의 몸으로 조선 땅에 왔습니다. 조선에 도착한 그녀는 조랑말을 타고 전국을 순회하며 한센병환자를 포함해 온갖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보살피며, 자기 이름조차 갖지 못하고 '큰 년', '작은 년', '지리산 댁' 등으로 불리던 수백 명의 여성에게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렇게 곳곳을 찾아 순회할 때마다 온몸에 달라붙는 이를 잡느라 밤새우는 것이 그녀의 일상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보건의료시설은 매우 열악했는데, 이런 현실에서 그녀는 광주 제중병원을 중심으로 아픈 사람들을 돌보고 가난한 여인들의 교육에 힘썼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인 수양딸 13명과 나환자 아들 1명 등 14명의 아이를 입양해 기르기도 했습니다. 한센인을 돌보고 고아들을 자식 삼아 살던 그녀는 정작 자신은 끼니를 챙겨먹지 못할 정도로 궁핍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도우려고 자기 생활비마저 쪼개어 썼던 것입니다. 그렇게 22년 세월을 조선에 헌신하면서, 그녀는 말했습니다. "내일 나 먹기 위해 오늘 굶는 사람을 그대로 못 본 척 할 수 없고, 옷장에 옷을 넣어놓고서 당장 추위에 떠는 사람을 모른 척 할 수 없었습니다." 평생을 누렇게 바랜 옥양목저고리에 검정고무신을 신고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는 소박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것까지 사치로 생각했던 그녀는 먹을 것을 줄여가며 모으고 모아 가난하고 아픈 사람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결국에 그녀는 영양실조로 5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장기마저도 의학 연구용으로 기증했습니다. 그녀가 남긴 것은 걸인에게 나눠주고 남은 동전 7전, 강냉이가루 2홉, 그리고 반쪽 짜리 담요 외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녀가 죽자 천여 명에 달하는 장례행렬이 이어졌습니다. 그녀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사람들은 '어머니'라 부르며 함께 했습니다. 푸른 눈을 가졌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어머니로 살다간 그녀가 서서평(엘리자베스 쉐핑) 선교사입니다. 평생 가난한 자, 병든 자를 위해 자신의 의식주까지도 희생하며 철저히 봉사와 섬김의 삶을 살다 주님 품에 안겼습니다. 그녀의 이 놀라운 헌신으로 그녀가 섬겼던 호남지역이 어디보다 놀라운 복음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존 파이퍼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아낌없이 해주신 것에서부터 우리가 다른 이를 위해 기꺼이 해주어야하는 것으로 옮겨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값없이 받았는데, 이제는 다른 이웃을 섬기는데 우리 자신을 드리는 일로 이어져야 합니다. "믿음은 최상의 것을 얻게 하고, 겸손은 최상의 것을 지키게 하며, 사랑은 최상의 것을 행하게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로 최상의 구원을 얻었다면, 이제 겸손하게 이 믿음을 지키고, 주님께 받은 사랑으로 최상의 봉사를 행해야 하겠습니다.
아마도 슈바이처를 모르는 분은 없겠지만, 메리언 프레밍거를 아는 분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메리언은 본래 헝가리 귀족의 딸로서,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전 세계에 군림하는 여왕으로 최고의 권력을 누리는 것이 꿈 な이었습니다. 그녀의 꿈은 어느 정도 성공하여, 할리우드 영화감독 프레밍거의 아내가 되었는데, 몇 년 후 이혼으로 끝났으나, 그녀는 파리로 옮겨 아직도 돈과 권력이라는 든든한 배경으로 사교계의 여왕으로 사람들의 각광을 받으며 새롭게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에게 이끌려 슈바이처의 강연을 듣는데, 슈바이처의 이 말에 지금까지의 모든 가치관이 흔들리는 충격을 받습니다. "결국 우리의 삶은 마지막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은 섬김을 받고자 하는 삶이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천하보다 귀한 우리 이웃을 진지하게 섬기고자 하는 섬김의 삶이었는가? 이것으로 우리 삶의 질은 결정됩니다." 충격을 받은 메리언은 심히 고민하다가 아프리카로 떠나, 슈바이처에게 간호보조사로 써줄 것을 부탁하여, 팔을 걷어붙이고 허드렛일을 하며 흑인들을 끌어안고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그들을 섬겼습니다. 빼어난 미모에도, 묵묵히 남들이 싫어하는 허드렛일을 하며 평생 슈바이처 곁에서 동역했던 이 여인의 모습은 이 병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뉴욕에 묻혔지만 그녀의 비문이 아프리카 병원 옆에 새겨졌습니다. "모든 것을 바쳐 이웃을 섬겼던 하나님의 딸 메리언"이라고.
교부 이그나시우스의 기도입니다. "영원한 말씀이신 독생자 예수님이시여, 참 관대와 고결을 가르쳐주옵소서. 당신에게 합당하게 당신을 섬기도록 가르쳐주옵소서. 계산 없이 주는 것을 가르쳐주옵소서. 상처 입는 일에 구애됨이 없이 싸우는 것을 가르쳐주옵소서. 휴식을 구하지 않고 일하는 것을 가르쳐 주옵소서. 대가를 구하지 않고 희생하는 것을 가르쳐주옵소서. 그리하여 충성하는 자에게 주시는 큰 기쁨을 알게 하여주옵소서." 오늘 구약의 말씀입니다.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시75:4-7). 스스로 자신을 높이려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높여주시도록 자신을 낮추고 겸손히 섬기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