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6-24 78회
"그리스도인의 소원"
2018년 6월 24일 주일예배
빌립보서 1 : 19 - 26 ; 전도서 3 : 12
사형 집행을 앞두고 간수가 사형수에게 물어봅니다. "오늘이 자네의 마지막 아닌가?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해 보게." 그러자 사형수가 대답합니다. "마지막으로 복어를 맘껏 먹어보고 싶습니다. 복어 잘못 먹으면 죽는다고 해서 지금까지 단 한번도 못 먹어봤거든요." 죽을까봐 먹지 못한 복어를, 이젠 죽더라도 꼭 먹어보고 싶었던가 봅니다. 여러분에게도 과연 목숨을 내걸만한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A.W. 토즈는 자아발견의 방법으로 몇 가지를 듣고 있습니다. 첫째, 내 소원이 무엇인가, 그 소원이 저속한가 고상한가, 그것을 보면 나를 알 수 있다, 둘째,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 제일 많이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내 존재 가치의 판단기준이 될 것이다, 셋째, 돈을 어디다 많이 쓰는가, 이것이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방법이다. 길거리에서 어려운 사람이 돈 100원만 달라고 해도 외면하면서, 술집에서는 돈 십만 원을 아무렇지 않게 팁으로 주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내가 바라는 나의 가장 간절한 소원이 무엇인가?, 하루 종일 무엇을 가장 많이 생각하고 있는가? 그리고 돈을 어디에 가장 많이 쓰고 있는가? 이런 질문에 의해 나의 인간 됨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김구 선생이 쓴 [백범일지]의 '나의 소원'편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첫째도 조국의 자주독립이요, 둘째도 자주독립이요, 셋째도 자주독립이요'하고 나는 대답할 것입니다." 과연 우리나라 최고의 애국자요 최고의 독립운동가다운 참 지도자의 혼을 드러내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달리 잔병치레가 많았던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어느 날 예수님께서 찾아 오셔서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다고 합니다. 이때 아퀴나스는 병을 낫게 해달라고 다른 것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뢰기를 "오직 예수님, 예수님을 더 알기 원합니다." 이것이 그의 간절한 바람이었고 삶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6.25 때 목사님 한 분이 인민군에게 붙잡혀 총살당하게 되었는데, 총살 직전에 인민군이 "마지막 소원이 뭐냐?"고 묻자, "찬송 한번 부르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 마지막 소원이니까 들어준다." 그래서 [하늘가는 밝은 길이] 그 찬송을 냅다 불렀답니다. 2절을 부르는데, "따당!"하고 총소리가 나기에 '아이구, 죽는가 보다'하고 쓰러졌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어떤 사람의 등에 업혀서 남쪽으로 오고있더랍니다. 그 인민군 중에 장로님의 아들이 있었는데, 목사님이 찬송 부르자 감동이 되어 옆에 서있는 인민군들을 다 쏘아 버리고, 목사님을 등에 엎고 남쪽으로 와서,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는데, 제가 아는 은퇴하신 목사님의 친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대단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공동번역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 그러나 내가 이 세상에 더 살아서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과연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 둘 사이에 끼어 있으나 마음 같아서는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 또 그 편이 훨씬 낫겠습니다."(빌1:22-23).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가 자기 삶의 전부이기에, 자신이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살아서 보람된 일을 하게된다면, 죽는 것과 사는 것 가운데 어느 편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차라리 죽어서 천국에 가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겠다고 말합니다.
바울에게는 살고 죽는 문제보다도 더 큰 존재의 이유와 목적이 있었는데, 그것만 이뤄진다면, 자기야 살든 죽든 아무런 거리낄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뚜렷한 인생관을 가졌기에, 그는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사랑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위하여 죽을 대상과 가치를 지닌 사람은 행복하다'고 합니다. 내가 위하여 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대상과, 열정을 지닌 사람은 남이야 뭐라 하든, 그는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첫째, 그는 자기 기대와 소망에 대하여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20절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20절a).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기대와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 소망과 전혀 반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건강하길 소원하면서도 절제하지 못하고, 성공하길 바라면서도 노력하지 않습니다. 명예를 바라면서도 원칙과 양심에 따라 살지 않습니다. 이처럼 자기 기대 따로, 현실 따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엇을 부끄러워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가난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다만 게으른 것이 부끄러움입니다. 부자도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나눌 줄 모르는 것이 부끄러움입니다. 때로 우리는 문벌이나 학벌이 좋지 못하다고 부끄럽게 생각하지만, 진실하지 못하고 비굴한 것이 부끄러움입니다. 때로는 용모가 초췌하다고 부끄러워하는데, 외모보다 마음이 더러운 것이 부끄러움입니다. 또한 체구가 왜소한 것을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마음이 작은 것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부끄러워하며 무엇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부정한 출세, 부정한 재물이 부끄러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격에 맞지 않는 칭찬을 들을 때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비굴함과 불신과 불충성과 게으름에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소망에 대하여 부끄럽지 않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있으나, 도적질했거나 부도덕한 행위로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 유대인들의 시기로 감옥에 갇혔기에 부끄럽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감옥에 갇힘으로 인하여 로마황실의 수비대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게 되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졌기에 기뻐하였습니다(빌1:12).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일로 감옥에 갇히게 되는 일이 있는데, 그저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보다도, 무슨 일로 감옥에 갇혔느냐 하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전에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 투쟁을 하다가 감옥에 갇혔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도리어 자랑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민주화가 이루어진 오늘, 높은 자리에 올랐다가, 부정부패 혐의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민족시인 윤동주는 1943년 7월 14일 일본에서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1945년 2월, 해방을 보지 못하고 감옥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그가 마지막 2년 간 감옥 생활했던 후쿠오카 형무소에 남아있는 기록을 보면, 그는 최후의 순간에 한 가지 일에 몰두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형무소에서 그의 동태를 감시하던 간수가 기록한 글에 이런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윤동주는 고향집에 편지해서 차입한 신약성서를 옥중에서 읽고 있다. 그는 날마다 이 책에 빠져있다."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인생의 최후를 마무리하던 그에게 시는 그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시인 [서시(序詩)]에서 그의 신앙고백적인 소망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걸어가야겠다/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우리도 하늘과 양심 앞에 한 점 부끄러움 없도록 자기 소임을 다하며 믿음으로 진실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둘째,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께만 영광 돌리기를 원했습니다. 20절 후반 절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1:2l).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있는데, 머잖아 받게 될 재판에서, 재판 결과와 상관없이 복음을 담대히 변증할 수 있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는 재판에서 자신이 감옥에서 풀려나든지, 아니면 사형선고를 받게되든지 간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재판석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오직 그리스도만을 증언함으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기를 원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생사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께 영광이 돌아가고, 복음이 전파되는 그것이었습니다. 자신은 선교를 위해 태어났기에 선교하는 그것이 목적이지 사는 것은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2절 이하에 보면,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서 불편하게 보내고 있지만, 그것이 전도의 기회가 되었다, 핍박받고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효과적인 선교의 기회가 되었고, 생사의 갈림길에 있지만, 오히려 주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고 간증합니다. 이것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을 그런 소원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해산하는 여인은 그 견딜 수 없는 진통 속에서도 사랑하는 아기를 출산한 큰 기쁨을 누립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20절). 바울에게는 자기 생명보다도 더 소중한 주님이 계셨고, 그분을 영화롭게 해드릴 수만 있다면 자기 생명조차 아깝지 않기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1)라고 고백합니다. 인생의 목적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말합니다. "인생의 제일 가는 목적이 무엇이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입니다. 이사야서도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고 말씀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살고, 이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음이 신앙인의 존재의 고백입니다.
허석구 선교사의 [가든지 보내든지]란 글입니다. 오래 전 암 병동에 두 사람이 입원했다. 한 사람은 의과대학인턴 심재학씨, 또 한 사람은 유명회사의 부장이었다. "저를 낫게 하시면 몽골에 의료선교사로 가겠습니다"라고 서원한 심재학씨는 29세에 하나님나라로 부름받았다. 의과대학인턴을 하며 선교를 준비했던 그는 선교의 출발선에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가 품은 뜻을 기억하는 친구와 후배들이 그의 뜻을 이어 몽골에 의료선교사로 가게되었다. 외과의사로 몽골에 첨단 외과수술기술을 전수하고 많은 교회를 세우는데 헌신한 박선생도 그런 사람이다. 그는 몽골 연세친선병원 안에 심재학 기념 의학도서관도 마련했다. 한편, 같은 병원에 입원했던 부장은 "저를 고쳐주시면 주님의 종으로 살겠다"고 기도했고, 1%밖에 소생 가능성이 없었으나 기적적으로 나아 신학을 공부하고 2009년 여름 해외단기선교 차 몽골을 방문했다. 연세친선병원 아침예배 때 말씀을 전했는데, 그 예배장소가 심재학 도서관이었다. 그는 함께 암병동에서 투병했던 심재학씨의 기념패를 그곳에서 보고 놀랐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다. 한 사람은 죽어서도 친구를 통해 몽골에 선교하고, 한 사람은 살아서 선교사역을 한 것이다. 살아서 주의 일을 할 수도 있고, 죽어서 주의 일을 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대로 사람을 사용하신다.
셋째,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겐 유익한 삶을 사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1:24). 바울은 23절에선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은 어서 세상을 떠나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24절에선 자기가 아직 육신으로 거하는 것이 너희에게 더 유익하겠다며, 다른 이들을 유익을 위해 더 살아야할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살고 죽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도 살아서 유익하다면 살기 원하고, 죽어서 유익하다면 죽겠다는 것이 그의 태도입니다.
23절에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떠나서'란 말의 헬라어 [아날뤼에인]은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천막을 걷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캠프생활을 하다 끝나면 천막을 걷어 차에 싣고 집으로 옵니다. 천막을 걷는다는 것은 죽음이요, 떠난다는 뜻입니다. 둘째, 닻을 감는다는 의미입니다. 배가 정박할 때는 닻을 내렸다가, 떠날 때가 되면 닻을 끌어올리고 다음 목적지로 출항합니다. 일이 끝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요, 새로운 출발입니다.
바울은 '좋은 것'과 '유익한 것'을 구별할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좋은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이 유익하다는 말을 생각해 보면, 앞에서 '더 좋다'는 헬라어로 [크레이손]으로 좋은 것의 비교급이요, 영어의 'the better'입니다. 그리고 이 '유익하다'는 [아낭카이오테론]으로 '필요하다'(more necessary)는 의미도 있는데, 이것이 본문의 뜻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유익하다는 말은 곧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좋다는 말은 감정적이요, 필요하다는 말은 의지적입니다. 예를 들어 사탕은 달콤하여 입에는 좋으나 유익하지 않습니다. 약은 입에 쓰나 몸에는 유익합니다. 영어의 'want'와 'need'는 다릅니다. 내가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은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선택할 때는 유익하고 필요한 것을 골라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나 유익하고 필요한 것을 선택합니다.
24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위해서는 어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좋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고 말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 육신으로 세상에 더 사는 것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돈을 벌거나 잘 산다는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신령한 기쁨을 위함입니다. 세상에는 이와 달리,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퇴보시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예수 믿던 사람도 안 믿게 되고, 잘 믿던 사람도 신앙이 떨어집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부끄러운 생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못 주고 근심을 주고, 많은 걱정을 끼쳐 부모, 형제와 사회에 큰 걱정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자신의 존재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는지, 피해를 끼치는지가 문제입니다.
우리는 어떤 생의 철학으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자신의 기쁨과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믿음 없는 사람에게 믿음을 주고, 다른 이의 신앙에 이바지해야 합니다. 남의 믿음을 더 온전케 하는 유익한 생을 살아야합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습니다. 우리는 남이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할 줄도 알면서, 다른 사람의 기쁨을 더 크게 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남의 슬픔은 줄어들게 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울하다가도 이런 사람만 만나면 어느새 슬픈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남을 기쁘게 하는 것은 돈 가지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슬픈 마음에다 설상가상으로 화만 돋우고 고요한 마음에 오히려 돌을 던집니다.
몇 해 전, 영국 [더 타임스지] 서울 특파원 앤드류 샐먼(Andrew Salmon) 기자가 이런 기사를 썼습니다. 1951년 1월 3일 새벽 한국전쟁에 참여한 영국병사 데이비드 스트래쳔(David Strachan)은 경기도 고양시 인근 들판에서 중공군과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최전방 참호 속에서 갑자기 그의 코앞에 나타난 중공군을 향해 무의식적으로 총을 당겼는데, 적병의 몸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참호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스트래쳔은 자기보다 더 어려 보이는 중공군 병사가 바로 자기 밑에서 신음하며 4시간에 걸쳐 숨을 거두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한국전이 끝난 후 그는 영국으로 돌아가 전역하고, 수십 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악몽 속에서 그의 침실로 걸어 들어오는 생생한 인기척을 느끼고 깨어 일어납니다. 60년 전 그가 죽인 중공군이 피묻은 군복을 입고 그의 발치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그 후 오랫동안 이 중공군 병사의 환영(幻影)으로 시달리자, 정신과 의사는 그에게 한국 방문을 권했습니다. 가고 싶지 않은 악몽 같은 한국이었으나 그는 치료를 위해 한국에 왔다가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달라진 한국을 발견합니다. 그는 전쟁과 주검, 굶주림과 달리 번영한 한국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벨트 버클이 고장나 가죽 수선 집에 들어갔다가 그가 참전 용사임을 안 주인은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수선비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 집을 나오면서 자기의 존재의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뭉클한 감동과 함께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뺨에 흘러내렸습니다. 그는 '내가 결코 헛된 일을 위해 이 땅에서 피 흘려 싸운 것이 아님'을 확인했습니다. 그 후로는 중공군의 환영이 다시 그에게 나타나지 않았고, 다시는 자신을 괴롭히지도 않았다고 말합니다.
더 타임즈 기자에게 스트래쳔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는 것(giving)과 사랑하는 것(loving) 둘 사이엔 차이가 없어요. 50년 전 나는 내 일생의 1년을 한국에서 바쳤어요. 나의 작은 공헌이 한국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 잘 모르고 살았지요. 다시 찾은 한국을 둘러보며 환대를 받았습니다. 한국은 모든 것이 최신식이고, 멋지고, 기운차고, 세속적이긴 하지만, 모든 것이 번영하는 국가였습니다. 나는 한국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한테 감사하지 마세요. 내 인생을 가치 있는 인생으로 만들어 준 것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그는 한국의 번영으로 그의 참전의 명분을 정당화하여 오히려 한국인들에게 감사를 전하였던 것입니다.
26절에서 바울은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가장 높은 차원의 봉사는 상대방의 명예에 보탬을 주는 것입니다. 내가 남을 도와준답시고 그 사람을 열등의식에 사로잡히게 하고, 그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봉사가 아닙니다. 모름지기 상대방의 기분, 명예, 자랑을 높이도록 해야 합니다. 링컨이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간절한 소원 하나가 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밝히며 조금이라도 세상이 좋아지는 것을 볼 때까지 살고 싶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사는 것이 보람 있고, 행복하게 사는 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미국의 볼티모어 선(Baltimore Sun)지가 독자들에게 설문을 냈습니다. "당신은 1년만 살고 죽는다면 그 1년을 어떻게 살겠습니까?" 수많은 응답 가운데, 집을 사겠다든지, 은행 저축잔고를 올리겠다는 등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갖는 물질적 희망은 전혀 없었고, 가장 많은 내용이 "더 많은 도움을 주겠다. 더 많은 미소를 주겠다. 더 많은 사랑을 주겠다. 조금이라도 이 세상을 더 밝게 해보겠다"는 내용들이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이처럼 죽음을 생각하면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생을 생각하는데, 왜 죽음을 생각지 못하면 허무한 것만 추구하며 인생을 헛되이 낭비할까요? 안도현 시인의 [너와 나]라는 시입니다. "밤하늘에 별이 있다면/ 방바닥에는 걸레가 있다." 밤하늘의 별처럼 순순한 마음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방바닥의 걸레처럼 세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그가 있는 곳을 빛나고 향기롭게 합니다.
6.25때, 맥아더 장군이 북한군과 대치하며 벙커를 지키고 있던 한국 병사에게 "전세가 이렇게 밀리고 있는데 왜 도망을 가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국병사가 대답합니다. "후퇴하라는 명령은 없었습니다." 감동 받은 맥아더 장군은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말하자, 한국 병사는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충분한 실탄과 총을 지원해 주십시오." 자신을 이 벙커에서 빼달라는 대답을 예상했던 맥아더 장군에게 이 한국군 병사의 말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전력을 다해서 이 나라 한국을 지켜야 한다." 그 후 인천상륙작전이 실시되었고, 수만 명의 미국 병사가 한국을 지키기 위하여 싸우다가 전사하였습니다.
어느 목사님에게 패트라는 젊은 여자가 우울한 얼굴로 찾아왔습니다. 사연인 즉 2년 전 기도하며 선교사가 되기로 약속했지만 결혼이 더 급하다는 생각에 신랑감을 찾느라고 2년 동안 교사로 지냈으나, 아직도 알맞은 남자가 없고 늘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분명한 어조로 "정말 소원을 이루기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어렵지만 순종하여 아프리카 기니아에 선교사로 갔는데, 그 밀림에서 훌륭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여 살게됐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더 좋고, 더 필요한 것인지, 또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37:4).
지혜자는 말합니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다"(전3:12). 우리는 얼마를 더 살지 모릅니다. 그것이 사실 크게 문제될 것도 없습니다. 얼마를 더 살든, 우리는 바라는 그 기대와 소망이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면서, 주님을 존귀케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며 살 것입니다. 이것만 확실하다면 사도 바울의 고백대로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는 고백이 우리의 고백일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