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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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세용 목사

로마서 8장 18~30절

설교요약 :

"탄식을 영광으로 바꾸시는 성령"
2020년 5월 31일 주일예배
로마서 8 : 18- 30 ; 이사야 35 : 10


전에 조지 부시(George H. Bush) 미국 대통령이었을 때, 시골 초등학교를 방문했다가 어린 초등학생에게 곤혹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인 앤소니 핸드슨이란 꼬마가 대통령에게 "할아버지, 대통령 맞아요? 정말 대통령이면 증명해보세요"라고 말하자 부시는 난처했습니다. '대통령증명서'는 없고, 미국인들의 신분증은 기껏 '운전면허증' 밖에 없어, 그걸 내놓자 "여기에 대통령이란 말이 없잖아요"라고 말합니다. 신용카드를 보여주니 "여기에도 대통령이란 말이 없는데요"라고 말합니다. 이 아이의 말에 대답할 길이 없어 쩔쩔매다 밖으로 나가니, 거기에 까만 썬 글라스를 쓰고 우람하게 생긴 경호원들이 쭉 늘어서 있고, 커다란 리무진에 부시가 올라타는 것을 보고, 그때에야 이 꼬마가 하는 말이 "와, 진짜다"라고 하더랍니다.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데, 무얼 가지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교회만 나오면 그리스도인일까요? 친구 만나러 교회에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의 구별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잠14:27)고 말씀합니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엄위하심을 믿기에 하나님에 대해서나, 혹은 악을 행하는데 대해 두려움이 있지만, 믿음이 없으면 이런 것에 대해 아무 거리낌이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사랑과 헌신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20).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웃과 형제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성령으로 말미암은 거듭난 삶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5-6).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은 중생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일 수 없습니다.


어느 마을에 항상 술독에 빠져 아이들 장난감 하나 사주지 못하고, 집안 살림 다 거덜내는 주정뱅이가 예수 믿고 중생의 체험을 하자 친구들이 비웃습니다. "예수가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데, 자네는 그걸 믿는가?" 그 말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글쎄, 물이 포도주 된 것은 보지 못해서 잘 모르지만 이것은 확실하네. 예수님은 우리 집에서 맥주를 저금통장으로 바꾸었고, 소주를 아이들 장난감으로 바꾸셨네. 그리고 주정뱅이인 날 이렇게 변화시키셨는데, 까짓 물이 포도주 된 게 대수인가?"


오늘 말씀에는 '탄식'이라는 말이 22절과 23절, 그리고 26절에 세 번 나옵니다. 이 '탄식하다'는 말은 헬라어의 '스테나조'로, 성경에 세 번밖에 사용되지 않는데(막7:34, 히13:17), 슬픔이 너무 커서 말은 안 나오고 속으로 신음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본문에는 우주의 신음과, 인간의 신음과, 성령의 신음, 세 가지가 나오는데, 이를 살펴보면, 첫째는, 피조물, 곧 자연의 탄식입니다. 22절에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우리가 언뜻 보면 자연이 아름답다고 말하는데, 그 내면을 자세히 보면 자연은 탄식과 신음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악과 탐욕 때문으로,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절망과 고통을 끼칠 뿐만 아니라 자연까지 파괴하여, 이 땅의 모든 피조물에게 고통과 탄식을 끼칩니다. 본문에 '허무, 썩음, 종노릇, 고통' 등의 단어가 계속 나오는데, 이는 인간의 죄로 인한 생태계와 환경의 파괴로, 이 우주는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2천년 전에 이 말을 했는데, 오늘날 우주의 탄식은 참으로 실감나는 현실입니다. 발전의 상징인 자동차는 너무 많이 만들어져 도시의 공기를 죽음의 대기로 바꾸었습니다. 지난 1세기 동안 인간은 7만 종류의 화학물질로 바다와 강과 흙을 오염시켰고, 끝없는 소비문화는 지구를 쓰레기장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싸우기 좋아하는 인간은 모든 자연까지 파괴할 핵무기, 세균무기, 화학무기와 같은 가공할 무기를 만들어 일촉즉발 지구의 종말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며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지만, 오늘 날 이 땅은 수천 종의 동식물이 멸종위기에 있고, 지구는 더워져 사막이 늘고, 빙산이 녹아 바닷물이 높아져 땅을 침식하고, 방사선에 오염되고, 이산화탄소가 대기층을 덮고, 물은 썩어가고, 대량 살육의 전쟁이 계속되는 이 지구를 보고 하나님은 과연 지금도 보시며 좋아하고 계실까요?


'계절의 여왕' 5월은 신록이 우거지고, 온갖 꽃들이 피어나는 지상낙원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우찌무라 간조는 자연의 탄식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람은 천연의 미, 자연의 아름다움을 말한다. 하지만 그 미는 겨우 표면으로 그친다. 이면으로 들어가면 자연은 미가 아니라 추(醜)이다. 조화가 아니라 혼란이다. 평화가 아니라 전쟁이다. 여름의 야산에 백화가 피기를 다투는 양상은 아름답지만, 곤충과 벌레가 끼는 모습은 얼마나 살벌하고 파괴적인가? 시인의 마음은 이것을 보면 공포에 떨고 찬미의 노래는 끊겨 버리리라. 뱀은 개구리를 잡아 삼키려 하고, 개구리는 벌레를 잡아먹으려 하며, 벌레는 서로를 죽이려 하지 않는가? 뱀을 노리는 독수리가 있고, 독수리를 노리는 다른 새가 있다. 꾀꼬리의 소리가 아름답다고 해도, 뱀은 그 둥지에 침입하여 알을 삼키려 하고, 매는 그 새끼와 어미 새를 엿보며 둥지 속의 단란을 깨뜨리고 있지 아니한가? 여름의 숲은 결코 에덴의 동산이 아니다. 수중에서도 마찬가지다. 연못의 몇 마리의 기성장어가 있으면 다른 어류들은 복부에 구명이 뚫리고 피를 빨리우고 쓰러져 그 자취를 끊기에 이르른다. 그들이 삶을 두려워함은 아주 심각하다.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희롱하는 모습, 족제비가 닭을 습격하는 모습은 무정하기 그지없고, 잔인하기 짝이 없다. 꽃피는 벚꽃은 아름답지만 그 새 잎을 갉아먹는 벌레는 보기마저 소름끼치고, 솔을 먹는 청귀뚜라미며, 벼를 말라죽게 하는 비류는 이루 다 셀 수 없다. 실로 귀를 땅에 대고 들어 보라. 자연의 신음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는가? 가로되 나는 슬프다. 나는 고통스럽다. 인자여, 나를 빨리 구원하라. 당신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스러움에 들어가기를 원하노라."


피조물들은 인간의 죄악에 신음하면서 진정한 회복을 갈망합니다. 19절에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 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날 것을 자연도 고대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피조물들도 그 타락의 영향권에 들어있기에, 하나님 자녀가 그 영광을 회복함으로 피조물들도 그 영광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인간의 죄로 인한 폐해와 부조화가 청산되고 완전한 상태로 미와, 축복의 회복이 이루어지길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연과 환경까지도 잘 보존하고 간수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 성도의 탄식이 나타납니다. 23절에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성도의 탄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이신 예수님께 나와 구원, 기쁨, 평안의 열매를 얻게 되었지만, 아직 이 땅에서 육체로 살아가는 동안에는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입니다.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는 말은, 성도는 구원의 은혜로 의롭게 되어 거룩함을 입은 자이나, 주님이 만유를 회복하실 때를 기다리는 자(행3:21)이기 때문에, 여전히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성도의 몸 안에서 투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혼은 주님의 십자가로 인해 죄사함과 구원의 은총을 입었지만,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동안엔 이런저런 육체적인 고통은 그치지 않고 아직 남아 있습니다. 성도들이 삶 속에서 고난을 피할 수 없는 것은 우리 영혼은 구원받았지만, 몸의 구원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우리 영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몸은 본능적인 욕망으로 인해 굶주릴 수 있고, 병들 수 있기에 신음하고 탄식합니다. 우리 몸은 이 땅에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과, 배고픔과 추위와 더위와 온갖 질병의 고통에 시달리며 "하나님, 어찌하여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하며 절로 탄식합니다.


때로 고난의 밤을 지날 때, 우리는 그 고난 저편에 있는 영광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 내가 이 고난을 겪는데 주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탄식합니다. 시편 기자들도 종종 이런 질문을 했는데, 이것을 '숨어 있는 하나님(hidden God)'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무기력과 절망, 자포자기와 한숨, 우울증과 탄식이 부끄럽고 추해 보여도 그것 없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깊은 곳'에서 만나십니다. 성 어거스틴이 말했습니다. "탄식은 인간에게 큰 힘이지만 하나님께는 큰 약점이 된다." 우리의 탄식에 하나님은 가장 약하십니다. 어머니의 가장 큰 약점은 자녀의 슬피 우는 소리이기에, 자식 우는 소리에 어머니는 모든 걸 팽개치고 달려오듯, 하나님은 성도들의 탄식을 들으시고 찾아오셔서 구원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셋째, 이어서 성령의 탄식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26절). 성령은 자신의 문제로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피조물이 그 영광을 잃어버리고 고통과 싸움과 삶의 경쟁 속에서 신음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탄식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 받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에 빠져 비틀거리고 방황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성령은 함께 탄식하십니다. 그러나 그 탄식은 절망적인 비탄이 아니라 이 탄식을 통해 우리를 도우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성령께서는 우리가 약할 때, 우리 곁에 다가오셔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에게 힘과 능력이 되어 주십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 페니(J.C. Penney)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사업에 투신했으나 심한 재정난으로 죽으려고까지 했고, 미시간주 베틀크릭에 있는 격리병원에 수용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낙망하고 좌절한 그에게 찬송소리가 들리기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맥없이 그곳을 찾아갔더니 어느 작은 방에서 기도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뒷자리에 앉았는데 잘 아는 찬송 '너 근심 걱정 말아라'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찬송이 그의 마음에 큰 확신을 갖게 하자, 그는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 그 후에 그는 고백하기를 "나는 무한한 어두운 공간에서 찬란한 태양 빛으로 옮겨지는 느낌이었고, 마음속의 무거운 짐이 옮겨져서 그 방을 나올 때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나는 마비된 심령으로 풀이 죽어 들어갔으나 해방되어 기쁜 마음으로 나왔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성령은 어떻게 도우십니까? 먼저, 성령은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와 함께 해주십니다. 주님은 십자가 지기 전날 밤, 슬퍼하며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 이는 보혜사 성령에 대한 약속입니다. '보혜사'의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곁에'를 뜻하는 '파라'와, '부름 받다'는 '클레토스'의 합성어로 '곁에서 돕기 위해 부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이 [파라클레토스]는 '상담자'(counselor), 혹은 '위로자'(comforter)나, '돕는 자'(helper)라고 번역합니다.


새마을운동의 정신적 토대를 마련한 류태영 박사가 어느 겨울 내의도 못 입고 새벽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매서운 추위에 아무리 몸을 구부려 열을 모아 보려해도 도무지 추위가 가시지 않는데 어느 순간 온몸이 따뜻해졌습니다. '이게 뭐지? 누가 나한테 담요를 덮어 준건가?' 그는 궁금했지만 기도하다가 다른 데 눈 돌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기도에 집중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눈을 떴는데 그의 몸에 담요가 보이지 않아 이리저리 손을 뻗어보았지만 담요는커녕 아무 것도 잡히질 않았습니다. '아, 이게 성령체험인가? 성령님이 나를 꼭 안아 주신 거였나?' 성령님은 추위 속에서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던 그를 따스하게 감싸주셨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26절에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때로 우리는 고난의 한밤중에 기도할 때, 무얼 기도할지조차 몰라 당황하며, 무엇을 빌지도 모를 때가 있습니다. 인간은 능력뿐만 아니라 지혜도 부족하여, 무엇이 내게 유익하고 해로운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구하는 대로 주님이 다 응답해주실 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나의 최선을 아시고 나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나의 삶이 나의 비틀거림과 부정직과 나의 그릇된 선택에도 불구하고 오늘 여기까지 버티고 서 있는 이유가 성령의 기도 때문입니다.


여러 해 전 많이 부르던 복음성가 중에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가 있습니다. "당신이 지쳐서 기도 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당신이 외로이 홀로 남았을 때/ 당신은 누구에게 위로를 얻나/ 주님은 아시네 당신의 마음을/ 그대 홀로 있지 못함을/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내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누군가 기도하네/ 내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마음이 아파 기도할 수조차 없을 때,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 위해 기도해주시는 성령을 의지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선을 위해 함께 역사한다'고 하십니다. 만물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기에, 그 모든 것은 선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따라서 성도를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는 원동력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해 간구하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27절). 오늘 내가 탄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도 성령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심으로 이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결과적으로 선이 되도록 섭리하십니다.


그리스에 집안이 가난하여 학교를 다니지 못해 겨우 자기 이름만 쓸 줄 아는 사람이 은행에서 수위를 모집하기에 응시를 했지만 이름밖에 쓸 줄 몰라서 떨어졌습니다. 낙심천만한 그는 "하나님, 나는 왜 이렇게 가난한 집에 태어나 공부를 못해 수위시험에도 떨어져야 합니까?"하고 통곡하며 기도하자 "내 계획은 다르다. 너는 미국으로 이민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는 후손에겐 배우지 못한 슬픔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열심히 일하여 큰돈을 벌어 중년이 되자 월가에서도 알아주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의 60회 생일 파티에 참석한 한 기자가 "선생님, 자서전을 내십시오"라고 하자 "나는 내 이름밖에 쓸 줄을 모릅니다"고 말했습니다. 기자가 "만일 선생님이 글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더 큰일을 하셨을까요?"하자, "내가 글을 알았더라면 나는 기껏 은행의 수위장이나 됐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하나님은 우리를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우리가 잠시 환난 중에 있으나 하나님은, 끝내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시91:15). 환난 많은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정 러시아에서 한 병사가 국경 요새에서 경비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노름으로 정부 돈을 횡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감사를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 병사는, 장부에 자기가 빚진 돈을 적은 다음 '엄청난 빚을 누가 다 갚을 수 있겠는가?'라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장차 겪게 될 수치를 생각하며 밤에 자살을 결심했는데, 깜빡 잠들었습니다. 그 밤에 니콜라스 황제가 시찰을 나와 그 막사에 들렀더니 병사는 잠들어 있고, 그 옆에 메모지와 장부가 놓여있자, 황제는 그것을 보고는 거기에 뭐라고 적은 뒤 막사를 빠져 나왔습니다. 병사는 잠에서 깨어나 자살하려다, 자신이 적은 글 밑에 "니콜라스!"라는 글씨를 발견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황제께서 나의 모든 죄를 아시고 빚을 갚아주신다고 하셨구나. 이제 나는 죽을 필요가 없구나!"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이 "천재란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되어지는 것이다"고 말하자 한 기자가 에디슨에게 물었습니다. "그 99%의 노력과 1%의 영감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합니까?" 그러자 에디슨이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사실은 1%의 영감이 더 중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노력과 수고, 땀과 열심이 모두 중요하지만, 여기에 1%로 여겨지는 천부적인 은사가 없으면 인간의 모든 노력은 무위가 됩니다. 운동선수의 피땀 흘리는 훈련도 체력이 없이는 안되고, 수험생이 밤잠 설치는 공부도, 기본적인 두뇌가 주어져야만 공부가 가능합니다. 사업가가 근검절약하고 불철주야 노력하지만, 무엇보다도 때를 잘 만나고 사람을 잘 만나야 합니다.


존 웨슬리가 선교사로 미국에 배를 타고 가는데, 사납게 휘몰아치는 폭풍우에 배가 몇 번이나 뒤집힐 듯하여, 사람들은 풍랑에 이리저리 내몰렸습니다. 웨슬리는 지금까지 선한 삶을 살고자 노력했건만 이제는 죄 가운데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때 모라비안 교도들은 거센 풍랑 속에서도 기쁨과 평화에 충만하여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존은 '왜 나는 느끼지 못할까?'하며, 인생에서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미국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영국으로 돌아와서 1738년 5월 24일, 존은 모라비안 친구들의 초청으로 런던 알더스케이트에서 열리는 모라비안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설교자는 루터의 로마서 주석을 읽고 있었는데, 시름에 잠긴 존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었습니다. 웨슬리는 그 날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9시가 되기 15분 전 쯤, 설교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키셨다고 말했다. 그때 내 마음도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 오직 그분을 신뢰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리스도가 내 죄를 모두 용서하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신다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그는 그동안 철저히 규칙을 지키며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았고, 목사와 선교사로 활동했지만,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완전히 대속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는 경건은 갖췄지만 정작 중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몰랐던 것입니다. 그는 회심한 후 모라비안 찬송 중에 진젠돌프 백작이 쓴 [그리스도의 보혈과 칭의]를 영어로 번역했는데, 이것이 그의 간증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위대한 날에 나는 담대히 설 것입니다./ 내 무거운 죄의 짐을 누가 질 것입니까?/ 죄와 두려움, 죄책감과 수치심에서 나는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지치고 고된 마음으로 해오던 일들이 모두 기쁨과 사랑으로 채워졌습니다. 이 체험은 웨슬리만이 아니라 영국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각지를 돌며 복음을 전했고, 이로 인해 부흥의 불길은 삽시간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1700년대 프랑스는 혁명과 반혁명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며, 편안한 가정이 없었고, 하루도 편안한 뉴스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불란서 거리는 계속 피로 뒤덮였으나, 당시 영국은 달랐습니다. 부패하긴 불란서나 영국이나 마찬가지였으나, 영국은 웨슬리, 위필드 같은 사람들로 인해, 혼란 대신 영적 부흥으로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발돋움하였습니다.


우리는 자연과 인간의 탄식이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때에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성령님의 탄식이 있기에, 우리의 탄식은 영광으로 승화됩니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사35:10). 우리를 위해 탄식하며 기도하시는 성령의 은혜로, 날마다 성령 충만하여 내일의 영광을 바라봄으로, 오늘의 탄식이 찬송으로 변화되기를 축원합니다.

로마서 8장 18~30절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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