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13 77회
"부모를 공경하라!"
2018년 5월 13일 주일예배
마태복음 15 : 1 - 10 : 신명기 5 : 16
어느 허름한 집의 주인이 '셋방 있음. 어린이 없는 분'이라고 써 붙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에 노크소리가 나더니 8살 가량 된 사내아이가 들어왔습니다. "아주머니, 창문에 써 붙인 걸 봤는데요, 아직 방이 나가지 않았나 해서요." 그리고 소년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계속했습니다. "어린아이는 없습니다. 나하고 늙은 부모님뿐입니다." 뒤에는 젊은 부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있었습니다. 셋방은 그들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어리지만 철든 아이로 인해 방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얼마 전에 신문에 [우리 아버지 만 달러에 팝니다]라는 제목의 광고가 실렸습니다. 내용인 즉, 자기 아버지가 수년 전부터 중풍과 치매로 병석에 누워 계셔서 그동안 밥도 먹여드리고 대소변도 받아냈는데, 이제는 지쳐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어 생각 끝에 아버지를 팔려고 결심했으니, 만 달러에 아버지를 사갈 사람 있으면 전화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광고를 보고 어떤 젊은 남자가 자기가 사겠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광고 낸 사람이 그 젊은이에게 환자 돌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니 1주일간 더 생각해보고, 꼭 사고싶은 생각이 들면 전화해달라고 말했습니다. 일주일 후에 그 젊은이가 그간 깊이 생각해봤는데 역시 아버지를 사서 모시기로 부부가 합의했다고 전화했습니다. 광고 낸 분이 그 젊은이에게 이유를 묻자, 자기 내외는 고아원에서 부모 얼굴도 모르고 자랐으며, 지금은 결혼하여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살고있지만,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며 모시고 살 수 있는 분이 있으면 좋겠다며, 형편이 넉넉하진 않지만 아버지를 사서 친아버지처럼 모시며 효도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정말로 아버지를 사서 모실 결심이 있으면 만 달러를 가지고 와서 모셔가라며 주소를 알려줬습니다. 젊은 내외가 알려준 주소로 찾아가니 부자들만 사는 마을에 있는 아주 큰 집이었습니다. 대문 안을 들어서니 마당에는 수영장이 있고 최고급 차가 있으며, 집안은 호텔처럼 꾸며져 있고, 거기에 노신사가 앉아 있었습니다. 젊은 내외는 생각과 너무 다른 분위기라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닌가 어리둥절해 하자, 노신사가 말하기를, 자기가 광고를 냈다며, 젊은이의 과거를 다시 한 번 듣고는 그들의 결심이 진실함을 확인하고, 정말로 만 달러에 아버지를 사서 친부모처럼 모시고 싶다면 자기를 사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놀라는 젊은 부부에게 노신사가 웃으며, '내가 나이는 많고 자식이 없어 자식이 될만한 착한 사람을 구하려고 거짓 광고를 냈는데, 젊은이를 만나서 반갑다'며, '이제 너는 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됐으니 이 집과 나의 모든 재산을 주겠다. 빨리 집에 가서 네 아들과 딸을 데려와 함께 살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부모 없이 자란 것이 한이 되어 다른 사람이라도 부모로 모시고 살려고 했더니 뜻밖에 이런 행운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유전과 계명을 첨예하게 대립시켜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은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3:3)고 첨가하여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과는 관계없이 지어낸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려고 덧붙인 말입니다. 안식일도 그렇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하였으면 그렇게 할 일이지, 왜 '불을 켜느니 마느니, 옷고름을 매느니 푸느니, 지팡이를 드느니 마느니' 이런 것을 덧붙여서 안식일의 소중한 근본 뜻을 잊어버렸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계율을 가지고 그걸 지켰다고 교만하고, 못 지켰다고 남을 정죄하는 것이 이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본문은 이런 형식주의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인간의 유전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떻게 저버리는가를 확연히 드러내 보이기 위하여 구체적인 실례를 드십니다. '고르반'은 본디 하나님께 바쳐진 선물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제물은 고르반 되었다'라고만 말하면 아무도 손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이것이 이기적 목적으로 이용되거나 왜곡되었습니다. 부모에게 당연히 드려야 할 것도 '고르반'하여 드리지 않고 심지어 부모 모시기를 거부하는 일이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계율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입술로만 하나님을 섬길 뿐 내적으로는 경건을 배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9절에선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친다고 책망하십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하시며, 저들이 실상은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는다고 책망하십니다. 인간적인 윤리와 인습을 따라서 소중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해버리고 말았다고 무섭게 책망하십니다.
예수님이 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는 것입니까? 소중한 하나님의 계명 때문입니다. 다른 해석은 더 내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명은 무엇보다도 최우선으로, 어떤 이유나 결과도 물을 것이 없습니다. '내게 돌아올 이득이 무엇이냐'하는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은 나를 위한 명령이요 복 주시기 위한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그대로 지킬 따름입니다. 여기에 축복의 길이 있습니다. '인습에 위배된다, 내 철학과 다르다' 다 소용없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 되도록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감사한 마음으로 그대로 지킬 것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은 엄한 계명입니다. 이 계명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축복의 길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은 "부모를 섬기지 않고, 공경하지 않아도 될 구실은 전혀 없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절대적이다. 무조건적이다. 경제적인 구실이나, 사회적인 여건, 교육적인 이유, 정치적인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종교적인 이유도 구실이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부모에게 드려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렸으므로 부모님께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당시 장로의 유전에 의하면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는 부모를 소홀히 대해도 무방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3절).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라는 변명조차 구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효(孝)의 절대성입니다.
오늘날 같은 탈 권위시대에도 부모를 공경해야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 부모님은 나를 낳아주신 생명의 전달자이기 때문입니다.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잠23:22). 생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지만, 우리 부모를 통해 전달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를 낳아주신 부모는 하나님과 창조사역에 동역자가 되셨기에, 구약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태도와, 부모에 대한 자식의 태도를 동등하게 취급합니다. 원래 '경외'라는 말은 하나님께 대해서만 쓰이는데(잠1:7, 욥28:28등) 부모에게만은 허락되어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라"(레19:3)고 하여,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죄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 유치부에 다니는 어린아이가 어느 날 집에 돌아와서 무엇을 열심히 외우고 있는데, 부모가 가만 들어보니 십계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린아이가 제 5계명을 외우며 "네 부모를 공격하라. 네 부모를 공격하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빠가 "이놈아, 공격이 아니고 공경이야 공경!" "공격하라와 공경하라는 어떻게 달라요?" 아이가 묻자 아빠는 대답했습니다. "공경은 아빠 말씀을 잘 듣고 사랑하는 거고, 공격은 아빠한테 덤비고 말씀을 안 듣는 것이지." 그러자 대뜸 아이가 말을 받습니다. "그런데 아빠는 왜 할아버지 공경하지 않고 공격해?" 아빠는 할말 없어졌습니다.
둘째, 나를 위해 사랑과 희생을 다하신 분들이시기에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5). 세상의 사랑에는 시기와 질투가 있으나, 부모의 사랑은 맹목적이며, 절대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부모로부터 이런 절대적인 사랑을 받은 자식은 그 희생적인 사랑을 쏟으신 분들에게 이제는 효도와 공경을 통해 그 은덕에 다소라도 보답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 자기 부모에게 효를 뿌린 자가 자기 자식으로부터 효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에게 불효를 심은 자는 자식으로부터 불효를 거두게 됩니다. 성경은 또한 하늘의 상급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부모에게 마땅한 도리를 하면 축복이 있다는 약속입니다. 신천희 시인의 [외상값]이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어머니/당신의 뱃속에/열 달 동안 세 들어 살고도/한 달 치의 방세도 내지 못했습니다.//어머니 몇 년씩이나 받아먹은/따뜻한 우유값도/한 푼도 갚지 못했습니다.//그것은 어머니/이승에서 갚아야하는 것을/알면서도//저승까지/지고 가려는 당신에 대한/나의 뻔뻔한 채무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이기에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신명기 5장 16절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 5계명은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의 하나님께 대한 계명과 같이 신적인 계명이고, 제6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가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계명, 즉 윤리적인 계명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십계명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엘로힘)이란 말이 제1계명부터 제5계명까지만 사용되고, 제6계명부터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일체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 1계명부터 5계명까지는 하나님과 관련된 계명이요, 제 6계명부터는 이웃에 대한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텍사스의 한 사내가 아내와 네 자녀를 버리고 캘리포니아로 가서 30년 동안 오직 자기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는 돈 한푼 없이 죽었는데, 자기의 시체를 고향 텍사스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텍사스에 살고 있던 자식들은 모두 그 소식을 듣고 분개했습니다. 자식들은 말하기를 "그 사람이 우리와 무슨 상관 있어? 그가 아버지로서 우리에게 해준 게 뭔데? 그 사람 때문에 어머니와 우리 모두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왜 우리가 그 시체에 수고와 돈을 들여야 하지?" 그러나 신앙심이 깊은 큰아들은 아무 말 없이 동생들의 불평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캘리포니아로 가서 아버지의 시체를 운구해 오기 위해 자기 트랙터와 농기계들을 저당 잡혔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난 후 큰아들은 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씌어 있을 뿐, 어떤 부모라는 말은 없단다." 부모 공경은 자식들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절대적인 명령으로 오직 순종만 요구될 뿐입니다.
그러면 부모님을 어떻게 공경할 수 있습니까? 첫째, 부모님의 몸을 편하게 해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먼저 부모님을 편히 모시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부모가 늙어 자립할 능력이 없어지고 육신마저 병이 들면 자식은 그 부모를 극진히 부양해 드려야 합니다. 오늘날 가정들을 보면, 남녀가 결혼하고 나면,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 외에는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지고 맙니다. 주택이 아무리 80평 100평이라도, 남편, 아내, 자녀들을 위한 공간은 있어도 나이든 부모를 모실만한 공간은 찾기 어려운 것입니다. 부부와 자식 외에는 다른 이들에 대한 마음이 없으니까, 연세 든 부모를 모실만한 공간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쩔 수 없이 부모를 모시게 되면 이빨 사이에 끼인 무엇처럼 불편해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오래만 살겠다고 바동대시는 우리 부모님들을 보면 안쓰럽기조차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 특히 자기를 길러주신 부모를 부양하지 않는 자는 불신 죄보다 더 악하다고 합니다. 부모 돌아가신 후에 잘해드리는 것은 소용이 없고, 살아 계실 때 잘 모셔야합니다. 관 하나에 6백만 원짜리가 있고 수의 한 벌에 천만 원짜리도 있다는데, 사람들이 이렇게 큰돈을 들여 죽은 부모의 장례를 치르는 것은 좋지 않은 속셈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나이 많고, 병든 부모가 내게 해줄 것은 한가지도 없다. 하지만 돌아가셔서 귀신이 되면 복을 줄 수 있다'는 미신 때문이랍니다. 이 얼마나 기가 찰 노릇입니까? 이것은 부모에게 자식된 도리를 다하자는 것이 아니라, 귀신이나 잘 섬겨 복 받자는 것입니다.
이주연 목사가 열고 있는 노숙인을 위한 산마루해맞이대학에서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는 일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소아마비로 손과 발을 못쓰는 한 노숙자가 글을 쓰지 못하고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목사님, 제 어머니가 제기동 슈퍼에서 박스를 줍고 계세요. 그것을 해서 먹고살아요. 저는 그것을 돕고 지내는 것이 제 일생 소원이에요. 지금도 돕고 있는데, 저는 어머니 하시는 그 일을 죽을 때까지 돕고 싶어요." 그의 말에 순간 분위기가 숙연해지고 모두의 마음이 찡해졌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소원은 과연 무엇입니까?
둘째, 마음을 편하게 해드려야 합니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23:25). 그것은 부모님을 마음으로 공경하는 것으로, 이는 부모를 높여드리는 것이요, 그 말씀에 순종하며, 그분이 꼭 필요한 분임을 느끼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중국 고사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효에는 세 가지가 있다. 가장 큰 효는 공경이요, 다음의 효는 욕을 돌리지 않는 것이요, 다음의 효는 봉양이라." 제때 밥이나 드렸다고 해서 효도가 아니라 부모를 공경함이 참된 효도입니다. 기자가 젊은이들에게 "효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60퍼센트가 '속상하지 않게 해드리는 것'이라고 대답이고, 6.2퍼센트가 '그저 극진히 대접하는 것'이라는 대답뿐 '공경'이란 말은 없더랍니다. 부모를 공경할 줄 아는 자는 없어 세상이 이렇게 혼란합니다.
가끔 고급식당에 부모를 모시고 나와 식사하는 모습을 봅니다. 곁에서 보기에는 참 좋아 보이지만, 실상 부모들은 익숙지 않은 나이프와 포크로 썰어서 먹는 비싼 양식이 불편합니다. 부모가 좋아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비싼 것이니 많이 잡수시라'고 다그치니 먹기 싫어도 먹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박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나의 주관, 나의 생각대로 하는 효도는 효도라는 구실로 오히려 부모를 괴롭히는 것이 됩니다. 그래놓고도 스스로는 할 만큼 다했다고 자족하고 있는 것이니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속으로부터 부모님께 대한 존경과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 부모님의 영혼을 편하게 해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부모님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43). 어차피 자식이 언제까지 부모 곁에 있을 수는 없고, 언젠가 이 땅을 떠나실 것입니다. 그분들이 영원히 천국에서 편히 사실 수 있도록 믿음을 갖게 해드리는 것이 가장 큰 효도입니다. 신앙과 효도는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께 영원한 천국을 안내해드려야 합니다. 사람은 젊어도 예수 믿어야 구원받고, 나이가 70, 80이 넘어도 예수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어떤 분에게 부모님 예수 믿느냐고 물었더니 "우리 부모는 늙어서 믿어도 소용없다"고 말합니다. 예수 믿고 천국가게 해드리는 것이 진정한 효도입니다.
'아버지학교' 교재에 실린 글입니다. - 몇 번이고 불러보아도 대답이 없으신 아버지께 이 글을 드립니다. 한번 두 번 아니 수없이 글을 써봐도 받지 못하실 아버지이기에 지금껏 이런 편지를 쓰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 아니, 어쩌면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더 어울릴 것 같은 그런 연세에 이 땅 위에 저를 존재케 해주신 아버지, 때로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남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아버지 쉰 아홉, 어머니 마흔 하나,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아버지 어머니 그 사이에서 저는 태어났지요.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가 소천(召天)하시기 전까지 부자간에 대화는 없었고, 그저 귀여운 아들이 자라 가는 것을 보고 만족해하셨던 아버지! 아버지! 지금 제 나이 서른 셋,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14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무더운 날이면 더욱 아버지의 모습이 아른거립니다. 콩밭 사이에 쭈그리고 앉아 수건 하나 목에 두르시고 밭을 매 가셨던 모습, 푸르게 자라나며 꽃 피우기를 기도하시며 논둑 길을 헤집고 다니시던 모습, 유난히 막걸리와 담배를 좋아하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이 무더운 여름에 그리워집니다. 늦둥이 아들이라 매 한 번 들지 않으셨기에 버릇없이 자랐습니다. 아버지 살아 계실 땐 지병이셨던 해소와 천식 때문에 늘 고생하셨지요. 예배당에 앉아 아버지와 함께 예배드릴 때였습니다. 설교시간에 심하게 기침하셨던 것이 어린 제게는 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웠기에, "다시는 교회 나오지 마세요!"하고 드렸던 말씀 때문에 그 뒤로는 교회에 나가지 않으신 아버지, 아버지의 가슴을 무너지게 했던 자식의 말 한마디가 지금도 제 가슴을 울리고 있습니다. 그런 제가 지금 목사가 되어 있습니다. 못된 자식이지요? 교회에 아버지를 못 나오시게 했던 그 망나니 녀석이 목사가 되어 있다니요. 천국에서 저의 모습을 보시고 웃고 계실 아버지! 늦게나마 아버지께 용서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늦게 복음을 접하시고 온 가족을 구원해 주셨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최선을 다하는 복음의 메신저가 되기 위해서 노력할 것입니다. 아버지! 지금 손자녀석이 네 살이에요. 때로는 아버지가 살아 계시면 서진이를 얼마나 귀여워 하실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저와 같은 겁없고 건방진 그리고 불효자인 자식을 만들고 싶지 않기에 때로는 매를 들고 한답니다. 아버지! 오늘처럼 이렇게 아버지를 많이 불러본 적도 없을 거예요.- 부모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최고의 효도입니다.
교도소에 수감된 어떤 사람의 [어머니의 눈물]이란 제목의 참회의 글입니다. "작년 겨울 첫 면회를 오신 어머니께서는 창 너머로 고개 숙인 채 땅만 내려다보고 있는 이 불효자식에게 한마디의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어머니께서는 '춥지?' 이 한마디를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 보셨습니다. 이 한마디를 하시고 억지로 눈물을 참으시느라고 어머니의 눈가는 붉어지더니 한줄기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그것은 그냥 눈물이 아닌 피눈물 이셨습니다. '춥지?' 겨우 그 한마디하시고 접견시간을 다 보내버리신 어머니는 성경책 한 권을 남기시고 떠나가셨습니다." 그 후 다시 면회가 없으신 어머니에 대하여 불평하고 있을 무렵, 형이 면회를 왔기에, 형에게 어머니에 대한 불평을 하자, 형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야, 이놈아 아직도 정신 못 차리니, 너 어머니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하고 말하였습니다. 불길한 느낌이 들어 다그쳐 묻자, 형은 어머니가 며칠 전화를 안 받으셔서 찾아가 보니 "자식의 죄가 내 죄 때문이라"고, 엄동설한 추운 계절에 방에 불을 끊으시고 나도 감옥생활을 해야한다며, 자식의 죄와 어미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시다가 몸져누우셨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금수만도 못한 내 두 눈에 처음으로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날부터 나는 어머니가 남기고 가신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어머니의 눈물이 내 죄에 대한 하나님의 눈물이요, 하나님의 사랑이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 뒤늦게 후회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일이 때가 있습니다. 부모님 살아 계실 때 불효하다가 돌아가신 뒤에야 후회해보았자 소용이 없습니다. 부모를 거스름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부모를 순종함은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존재의 방식입니다. 척 팔라닉은 말했습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생명을 주고도, 이제 자신의 인생까지 주려고 한다." 이러한 부모의 몸과 마음뿐만 아니라, 그 영혼까지 편히 모시도록 위해서 기도를 잊지 말 것입니다.
정호승 시인의 [못]이라는 시입니다. "벽에 박아두었던 못을 뺀다/벽을 빠져나오면서 못이 구부러진다/구부러진 못을 그대로 둔다/구부러진 못을 망치로 억지로 펴서/다시 쾅쾅 벽에 못질하던 때가 있었으나/구부러진 못의 병들고 녹슨 가슴을/애써 헝겊으로 닦아놓는다/뇌경색으로 쓰러진 늙은 아버지/공중목욕탕으로 모시고 가서/때밀이용 침상 위에 눕혀놓는다/구부러진 못이다 아버지도/때밀이 청년이 벌거벗은 아버지를 펴려고 해도/더 이상 펴지지 않는다/아버지도 한때 벽에 박혀 녹이 슬도록/모든 무게를 견뎌냈으나/벽을 빠져나오면서 그만/구부러진 못이 되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은 하늘의 엄숙한 천명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있고, 그리고 이에 대한 축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셨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부모를 공경하여 자식된 도리를 다할 때 여기에 땅에서도 잘되고 장수하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