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01 85회
"주님의 부활이 가져온 변화"
2018년 4월 1일 부활주일
사도행전 5 : 33 - 42 ; 이사야 25 : 7 - 8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 기자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에 어떤 변화가 있고,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그러자 잠시 생각에 잠긴 아이젠하워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있고말고. 골프 시합에서 나한테 이기는 사람들이 예전에 비해 아주 많아졌단 말이야." 전에 대통령이었을 때는 사람들이 감히 대통에게 골프를 이기려하지 않고 져줬지만, 이젠 그런 부담이 없어진 모양입니다. 격의 없는 소통은 오히려 긍정적인 변화라 할 수 있습니다.
히스이 고타로가 쓴 책 [3초만에 행복해지는 명언 테라피]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독일의 의사 중에 환자의 혈액을 보존해두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혈액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병에 걸렸는지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혈액은 밀폐하여 보존하기에 성분이 변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2년 후 무슨 이유 때문인지 혈액 성분에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그것도 너무 신기하게, 2년 전에 채취한 혈액의 상태가 아닌, 현재 그 환자로부터 뽑은 혈액 상태로 변해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2년 전에 어떤 병에 걸렸던 사람이 지금 건강이 회복되면, 병에 걸렸던 2년 전에 채혈하여 보관했던 혈액까지도 지금의 건강한 혈액으로 바뀌더라고 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그 의사는 2천 명이나 되는 환자의 임상실험을 통해서 이 사실을 확인하고 독일에서 논문으로 발표했다고 합니다.
또 이런 이야기도 소개합니다. 작가가 우시지마 마사토(牛島正人)씨의 음성 트레이닝에서 참가했는데, 자기 몸의 피곤한 부위가 있으면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상대방의 같은 부위를 마사지해주도록 했습니다. 상대방의 피곤하고 아픈 부위가 아니라, 자신의 피곤하고 아픈 부위와 같은 상대방의 신체 부위를 마사지한 것입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자신의 피곤한 부분이 풀리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요? 우리의 몸도 서로 '공명'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도 있습니다. 어느 외국 신문에 미숙아로 태어난 쌍둥이가 인큐베이터 속에서 서로 마주보며 누워있는 사진이 실렸습니다. 이 쌍둥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먼저 태어난 아이는 괜찮지만 나중에 태어난 아이는 심장이 약해 곧 죽을 것이라고 의사가 진단했습니다. 이때 한 간호사가 이 둘을 한 인큐베이터에 나란히 뉘어놓았더니 건강한 형이 팔을 뻗어 아픈 동생을 감싸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옆에 뉘인 동생의 심장이 안정을 되찾더니, 조금씩 나아져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회복하여 건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소문을 듣고 찾아온 신문기자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서로 포옹하고 있는 사진에 '생명을 구하는 포옹'이란 제목을 붙여 보도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품어주시면 우리도 살아나게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 등 사도들은 처음 예수님을 만나자 '이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이 간절히 고대하던 메시야'라는 생각에 배와 그물까지 버리고 따랐지만, 끝내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26:35)라고 큰소리쳤는데, 그 후에는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26:72)하며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더니,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26:74)하며, 주님과 아무 상관없다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주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며 맹세한 순간 '곧 닭이 울더라'(마26:74b)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그때 베드로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26:75). 주님은 원수들에게 끌려가 고초를 겪으시는데, 자신은 행여 무슨 위험한 일이 닥칠까봐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한 자신의 모습에, 닭 우는소리를 듣고 한없는 수치와 패배감, 주님의 얼굴을 뵐 수 없는 면목 없음과 송구스러움으로 인해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며 울었던 것입니다.
그는 끝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지 못하고 피신해 있다가, 나중엔 주님을 따르는 사도의 길에서 떠나 물고기를 잡는 옛 생활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물고기 잡는 그 어부의 일마저도 그는 실패하게 됩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요21:3). 모든 일에서 철저히 실패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전혀 새롭게 변화된 제자들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그토록 두려워 벌벌 떨던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부활의 주님을 경험하자, 담대히 거리에 나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이 베드로와 제자들을 잡아다가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행4:18)고 위협하자, 저들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9-20)면서, 그들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나가서 담대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니, 수많은 무리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자 대제사장이 사도들을 잡아다 감옥에 가두자, 주의 사자가 밤에 감옥 문을 열고 제자들을 끌어내어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행5:20)고 명하니, 저들은 성전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대제사장은 산헤드린 공회와, 장로들을 모으고, 사도들을 끌어다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한다"(행5:28)고 책망하자,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5:29)며 담대하게 대답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져온 변화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이 두려워 떨던 제자들이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고 다시 사는 부활신앙을 갖게 했습니다. 계집 종 앞에서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판결한 산헤드린공회 앞에서 아무 두려움 없이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행5:30-31)며, 담대히 주님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그것은 주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것처럼, 자기도 죽음에 던져진다해도 다시 살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어디서 이런 담력이 생겼겠습니까? 첫 번째, 하나님 앞에 있다는 사실에서 이런 담력이 생겼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4:19). 지금 저들은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없습니다. '세상사람 다 나를 대적할지라도 하나님만 내 곁에 계시면 된다'는 이런 단순한 마음이 담대한 용기의 근원이 됩니다. 고독하고 약해지고 의심이 많아지는 복잡한 문제는 내가 하나님 앞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내 운명, 내 영원한 생명이 지금 하나님 앞에 있음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바로 참된 의미에서 이 같은 경건 의식이 있을 때 아무 두려울 게 없어집니다.
두 번째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현존이 용기를 줍니다.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를 고친 일로 핍박하자,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행4:10). 베드로는 주님이 부활하셔서 이렇게 살아 역사하시니 아무 것도 주저할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생명을 지금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는 죽으면 부활할 것이기에 죽어도 좋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에 거칠 것이 없습니다. 부활생명을 피부로 체험하는 데서 용기가 나옵니다.
세 번째는 성령충만 때문입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4:31).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영이 사도들의 마음을 감동시킴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의 사건이 된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부활생명이 저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때 사도들은 아무 거칠 것이 없어집니다. 이제는 원수도 사랑할 수 있고, 핍박하는 자들을 오히려 불쌍하게 여깁니다. 성령 충만함으로 사도들은 저렇듯 의연하고 담대하게 나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지 말라고 협박하는 순간에도 그 핍박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그리스도 되신다고 정면으로 증거할 수 있는 담대함이 있었습니다.
평양과학기술대학을 세우려는 계획으로 북한을 방문한 목사님이 북한에 있는 고관들과 행사를 치르고 저녁에 파티를 하는데 이렇게 묻더랍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도우려고 하는 겁니까? 목사님의 아버지가 우리 공산당원에 의해 총살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10여 년 동안 돕고 있는데, 그 돕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슨 대가를 요구하십니까?" 그래서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대가는 없습니다. 내가 평양시내에다 굉장한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그런 얘기는 안 하겠습니다. 그런데 내가 목사로서 무얼 요구한다는 걸 다 알고 있으면서 왜 물어보십니까?" 그러자 "그래도 한 말씀 해주세요"하기에 "딱 한마디만 할게요. 예수 믿는 사람들 죽이지 마세요. 이것만 약속해주면 제가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저들은 당시 몇 해 전에도 400명을 죽였다고 인정하더랍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 죽이지 말아달라고 했더니, 그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안 죽일 수가 없어요." "왜요?" "반동이거든요." "어째서?" "공산당보다 기독교인은 훨씬 쌥니다." 왜 세냐고 물었더니 "공산당원들은 죽음을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전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찌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죽이는 겁니다. 어쩌면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죽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목사님이 거기서 죽을 뻔하고 살아난 사람들 만났더니 "그 때 죽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말하더랍니다. 기독교인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예수의 이름으로 죽을 수 있다면 그것은 최고의 영광으로 사양할 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을 위해 죽을 수 있다면 그것은 선택받은 자로서 특권이요,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이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시기에 아무 거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승리를 위해 살아갈 뿐만 아니라, 승리를 보장받고 살아갑니다. 승리를 믿고만 사는 것이 아니라, 승리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승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계시되고 확증되어 있습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참된 기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본문 41절을 보겠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1). 사도들이 지금 기뻐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돈을 벌었다거나, 세상에서 출세를 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들은 도리어 채찍질을 당하였고,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위협을 받고 공회에서 나오는 길입니다. 그런데도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매를 맞으면서도 기뻐할 수 있는 기쁨이란 절대적인 기쁨입니다. 모든 상황과 조건을 초월한 참된 기쁨입니다. 사도들은 그토록 매를 맞고 위협을 당하는 처지에서도 도리어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미국에서 강철왕으로 불리던 대부호요, 기부금으로 은혜를 많이 베푼 사람이었던 앤드류 카네기는 1835년에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열세 살이 되던 때 빈곤을 피해서 이민을 떠난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왔습니다. 앤드류는 피츠버그의 전신전화국에서 전보배달 소년으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철저히 일하는 성격의 앤드류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자기 배달구역의 중요한 사람들의 이름과 집 주소를 외웠습니다. 왜냐하면 이름이 잘 알려진 사람들의 전보가 종종 주소 없이 올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배달의 어려움이 있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앤드류는 매 주일마다 임금을 받으면 그것을 부모님께 드렸고, 그 돈은 가정의 살림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습니다. 하루는 임금을 타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앤드류의 차례가 되었는데, 매니저가 봉급을 안주고 자기를 한 옆으로 밀어 제쳐놓는 것이었습니다. 앤드류는 서서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소년들이 봉급을 받는 모습을 보며 생각하니 자기가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실수를 저질렀음이 틀림없었습니다. 앤드류는 겁이 났습니다. '내가 해고를 당하면 이제 엄마, 아버지의 어려운 살림형편이 어떻게 될까?' 그는 겁이 나서 계속 떨고 서 있었습니다. 드디어 임금을 다 나누어 준 매니저가 앤드류에게 다가와 말을 했습니다. "앤드류야, 너는 나에게 아주 특별한 배달원이다. 너는 언제나 다른 아이들보다 전보를 더욱 정확하고 실수 없이 잘 배달했고, 내가 믿을 수 있는 소년이다. 그래서 오늘부터 너의 봉급을 매주 2달러 25센트씩 더 올려준다." 후에 세계의 대부호로 큰 성공을 한 카네기는 말하기를 자기 평생에 그처럼 감격스럽고 기뻤던 때는 없었다고 했습니다. 앤드류는 어찌나 기뻤던지 더 받은 돈 2달러 25센트에 대하여 그 날 저녁에는 부모에게 말을 하지 않고 그것을 혼자 움켜쥐고 잔 다음, 그 이튿날 아침 식탁에서 말을 했다고 합니다. 어린 카네기가 주인에게 밀쳐져서 한쪽에서 무서워 떨고 있을 때, 그는 누구보다도 절망적이고 불행한 소년이었으나, 그의 절망은 곧 대환희, 대성공, 축복이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떨며 절망했습니다. 제자들은 목숨이 두려워서 문을 꼭꼭 잠그고 벌벌 떨었지만, 용맹한 사자들과 같이 능력으로 충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도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십니다.
이것이 믿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영원히 살 수 있는 티켓은 이미 받았으니 남은 생애가 좀 복잡하면 어떠하고, 고생하면 어떻습니까? 사실, 너무 순탄한 생애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을 잘 맺을 수 있다면 고생이 더 멋있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결과를 아셨으므로 죽음 앞에서도 담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시고, 마지막에는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말 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무슨 일이든 우연으로 보지말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하여 역사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부활은 제자들로 하여금 분명한 생의 목적과 사명을 갖게 했습니다. 사도들은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으로부터,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라'는 엄명을 받았는데도,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42절)라고 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우리의 왕이 되신 사실을 증거하는 일임을 알았습니다. 사도들은 이 사명을 이루기만 한다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자기 생명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오늘도 살아 계셔서 그 부활의 소식을 듣는 이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또 참된 기쁨을 주시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인생의 참된 사명을 깨우쳐 주십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또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지 깨닫게 하시고, 또한 내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내 생의 참된 의미와 존재의 이유를 깨닫고, 오늘을 살아야 할 생명의 이유를 보여주십니다.
중국교회의 지도자 워치만 니의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형제가 기차여행을 하는데, 세 사람이 한 그룹이 된 이들과 마주보며 앉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긴 여행의 무료함를 달래기 위해 카드놀이를 하자고 제안하더랍니다. 네 명이 함께 하는 게임이어서 그에게도 카드놀이를 하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를 정중하게 사양했더니, "아니, 카드놀이 할 줄 모르십니까?"라고 묻더랍니다. 그래서 그가 "할 줄은 알지요"라고 대답하자, 그중 한 사람이 "그럼 그 손 가지고 있다 무얼 하시게요?"라고 되묻더랍니다. 이때 이 형제가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손이 제 손이 아닙니다. 그리고 달리 할 일이 있어서요."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묻는 그들에게 자기가 최근에 예수 믿게 된 신앙간증을 하고서, 이제는 그의 몸이 주님의 몸이 되고, 그의 손이 주님의 손이 되었는데, 아무래도 주님의 손으로 카드놀이 하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실 것 같아서 사양한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시며 구원해주신 우리의 생명인데, 우리는 이 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죽게 되었다 거듭난 목숨으로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엘리위즐이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다. 교육의 반대는 무지가 아니라 무관심이다. 아름다움의 반대는 추함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삶의 반대는 죽음이 아니라 삶과 죽음 모두에 대한 무관심이다." 주님이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셨음에도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 무관심으로 요지부동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우리는 웅크린 자리에서 일어나 힘차게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암이 말기에 접어든 환자가 있었습니다. 의사는 치료를 포기하여 그녀를 퇴원시켰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신의 은총뿐이었습니다. 그녀는 몹시 말랐고 온몸엔 참기 어려운 고통이 왔으나,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집밖으로 나갔습니다. 죽음을 준비하고 싶었던 그녀는 선물을 사서 정성껏 포장하고 깨알같은 글씨로 그 동안의 추억, 고마웠던 일들을 쓴 카드도 한 장 붙였습니다. 가족이나 친척, 친구, 의사와 간호사, 다른 환자 등 그 동안 알고 지냈던 모든 사람들이 대상이었습니다. 낮에는 이렇게 선물을 사고 지쳐서 집에 돌아오면 해질 무렵까지 카드에 글을 썼습니다. 때로는 눈물로 얼룩진 카드가 되기 십상이었습니다. 그렇게 날이 갈수록 그녀의 침대 머리맡에는 선물이 쌓여갔습니다. 죽은 다음에 선물들을 나눠주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선물을 빠짐없이 준비하기 전까지는 목숨을 부지시켜 달라고.' 하나님은 그녀의 기도를 들어주셨는지 그녀는 담당의사가 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가냘픈 목숨을 연장시켜갔습니다. 매일 저녁이면 다음날 선물할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를 위해 기도했고 준비할 선물에 대해, 또 쓰려는 추억과 감사에 대한 생각하다 잠들곤 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선물이 방안 가득 찼습니다. 이제는 적어도 그녀가 아는 모든 사람을 위한 선물과 편지가 준비된 것 같아, 그녀는 이제는 죽어도 좋을 때라는 생각에 하나님께 기도 드렸습니다. '이제는 데려가도 좋으시다는 것을, 그간 생명의 시간을 연장해주셔서 고맙다는 것을', 특히 고통을 잊기 위해 다른 환자들이 마약 성분의 진통제 주사를 맞는 것에 비하면 자신은 그런 것 없이도 견딜 정도의 고통만을 주신 것에 더없이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그녀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아직 창 틈으로 들어오는 강한 햇빛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일어나 밖으로 나가 또 선물을 샀습니다. 이제는 모르는 사람, 가까운 곳에 있는 고아원의 불쌍한 아이들을 생각했습니다. 카드의 글도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내용으로 썼습니다. 그렇게 매일 그녀는 고아원뿐 아니라 양로원, 시립병원 등 불쌍하다 싶은 사람들을 위해 선물을 사고 또 글을 썼습니다. 그때로부터 십여 년이 흐른 지금, 그녀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진찰 결과 암세포는 어디 갔는지 모두 사라졌다고 합니다. 의사들은 이미 기적의 한계를 넘었다고 했고, 그녀의 선물 준비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방안에 더 이상 선물 둘 곳이 없어 이미 한차례 그간 준비한 선물들을 임자들에게 나눠주었고, 지금은 새로운 사람들을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선물 값을 위해 그녀는 일을 시작했고, 하나님께 덤으로 받은 인생을 정성스런 선물로 갚고 있습니다.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시며,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사25:7-8). 주님의 부활의 은총입니다.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