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28 59회
"이 실패의 자리에 찾아오신 예수"
2019년 4월 28일 주일예배
요한복음 21 : 1 - 17 예레미야애가 3 : 19 - 22
외로운 개구리 한 마리가 전화로 자신의 장래에 대해 상담했습니다. 상담원이 말해줍니다. "당신은 당신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싶어하는 아름다운 소녀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개구리는 정말 기뻐 어쩔 줄 몰랐습니다. "아, 정말 잘됐네요. 그럼 파티 같은 곳에서 만나게 되나요?" "아니요, 생물시간 해부실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만남을 원합니까? 김윤탁의 책 [꽃은 져도 향기를 남긴다]에 실린 글입니다. "하나의 사랑이 끝났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의 사랑이 끝나면 당신이 만나야 할 운명적인 사랑이 다시 다가옵니다. 당신이 겪은 그동안의 슬픔과 허무 외로움을 품어 안을 나만의 멋진 소울메이트가 다가옵니다. 그러니 힘내십시오."
보스턴의 한 병원에 부모가 포기하고 치료를 담당했던 의사도 포기한 한 불쌍한 생명이 인공호흡기에 의해 실낱같은 생명을 유지한 채 구석에 누워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피골이 상접한 그를 가까이 하기조차 꺼려했고, 누구하나 그에게 간호의 손길을 뻗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이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던 한 은퇴 간호사가 병실 구석에 버려져 눈물마저 말라버린 어린 이 환자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됩니다. 이 불쌍한 환자를 부둥켜안은 간호사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그녀는 병원당국에 강력히 항의했지만, 병원은 부모도 포기한 아이를 의료진이 최선을 다했으나 자기들도 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차갑게 대답합니다. 그러나 이 은퇴한 간호사는 확신에 찬 소리로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훌륭한 미국 시민이 되어 봉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날부터 노 간호사는 죽음을 눈앞에 둔 이 생명을 돌보는 일에 모든 시간을 바쳐 헌신하기 시작합니다. 매일 이 아이를 목욕시키고, 피부를 접촉하며 사랑을 전달하고, 새 옷으로 갈아 입히며, 반응 없는 대화를 끊임없이 이어갑니다.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을 읽고, 손을 잡고 기도합니다. 볼을 맞대고 뽀뽀를 하지만, 한달 두 달, 세 달이 지나도 환자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주위에선 그만 포기하라고 야단이고, 의사들마저 방관자로서 조롱 섞인 말을 던집니다. 6개월 정도 시간이 흘러 노 간호사도 많이 지쳤습니다. 그러나 몸이 지칠수록 더욱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아이를 품에 안고 깜빡 잠들었는데 어디선가 자기가 늘 불러주던 찬송 소리가 들립니다. 잠을 깨어보니 품에 안고있던 아이가 웃는 얼굴로 그 찬송가를 흥얼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노 간호사의 기쁨은 어떤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이 어린 환자가 누군인지 아십니까? 바로 헬렌켈러의 스승인 설리번 여사입니다. 만약 노 간호사의 헌신적인 사랑이 없었더라면 설리번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고, 설리번이 없었다면 헬렌켈러 역시 불쌍한 한 생명으로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이 운명적인 만남이 기적을 가져온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철저하게 실패한 한 불행한 인물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의 실패는, 첫째,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에서 실패였습니다. 그는 처음 예수님을 안드레의 소개로 만난 뒤, 이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이 간절히 고대하던 메시야라는 생각을 품었습니다. 그 뒤 디베랴 바다에서 물고기 잡고 있을 때, 그 날도 한 마리 물고기도 잡지 못하고 어구를 정리하려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 배를 빌어 타시고 해변가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말씀 말씀도 은혜스러웠지만, 한 마리 물고기도 못 잡고 몹시 실망했던 그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렸더니, 그물이 찢어질 듯 많은 물고기를 잡게됩니다. 그래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그 앞에 엎드리자,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눅5:10)고 말씀에 배와 그물을 내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에서 실패합니다.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2),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26:35)라고 큰소리도 쳤던 그가 그만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마26:72),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26:74)며, 주님을 모른다고 맹세하고, 심지어 저주까지 하면서 믿음의 길에서 실패합니다.
그런데 본문 3절에는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요21:3a)라고 말씀합니다. 이 때는 본문 1절에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요21:1)고 하여, 베드로가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버리고 떠났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부활을 몇 번이나 목격하고도 주님을 떠나 갈릴리로 물고기 잡으러 가버립니다. 아마도 주님이 부활하셨지만, 그 앞에 떳떳이 나설 수 없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부활이 꿈만 같고 환상을 보는 듯하며, 현실과 상관없는 피안의 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는 주님을 따르는 그 길에 더 이상 기대를 접고 지난 날 어부의 길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둘째, 베드로의 실패는 하던 일에서도 실패한 것입니다.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요21:3b). 베드로는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며, 다른 제자들까지 선동하여 갈릴리에서 밤새껏 그물을 던졌는데, 이상하게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히지 않습니다. 좋은 마음으로 시작한 것도 아닌데, 이처럼 밤새껏 그물 던져도 아무 효과가 없자 그의 마음은 더욱 참담했습니다. 밤새껏 헛수고에 정신적 육체적 피로가 몰려왔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떠났더니, 이 때문에 벌받아서 물고기조차 잡히지 않는가?'하는 생각에 마음조차도 괴롭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실패로 인한 실의와 낙심에 빠졌던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오셔서 그를 회복시켜주십니다. 첫째, 처음 주님을 따르던 옛 추억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베드로가 한 마리 물고기도 잡지 못하고 지친 몸으로 그물을 사리고 있는데, 저쪽에서 낯익은 소리로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요일21:5)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래서 "없나이다"하고 대답했더니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요21:6)라고 말씀하시기에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졌더니,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가 고기가 잡힙니다. 이 순간 베드로는 처음 예수님을 따르던 그 때 기억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 날도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고 그물을 씻고 있는데 주님이 오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5:4)는 말씀에 그물을 내렸더니, 두 배 가득히 물고기를 잡게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때 처음 예수님을 만났던 추억이 떠오르면서, 처음 예수님을 만났던 때의 설렘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오래 전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실렸던 글입니다. 그리스도인이며 작가였던 아서 고든(Arthur Gordon)이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무력증에 빠져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할 지경에 이르자, 작가가 글을 쓸 수 없다는 충격에 그는 자살을 생각하다가 의사이며 상담자인 친구를 찾아가 자기의 사정을 털어놓았습니다.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네." 고민하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친구가 물었습니다. "자네가 어렸을 때 가장 하고 싶어하고 좋아했던 일은 무엇이었나?" "내가 어렸을 때 좋아했던 것은 해변에서 파도소리를 듣는 일이었지." "그러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보겠나?" 별다른 대안이나 희망이 없었던 고든은 친구가 써준 처방전을 가지고 어릴 때 놀러갔던 해변에 가서 친구 말대로 아침 9시에 첫 번째 처방전을 펴보았습니다. "자네가 좋아하는 파도 소리, 갈매기 소리를 잘 들어보게." 그는 바닷가에서 어린 시절 듣던 파도와 갈매기 소리에 귀기울입니다. 12시에 두 번째 처방전을 펼쳤습니다. "자네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행복했다고 기억되는 순간들을 생각해보게." 그는 행복했던 추억들을 떠올리자 마음에 조금씩 기쁨이 생겼습니다. 3시에 처방전을 펴 보았습니다. "자네 인생의 동기와 의미를 검토해보게." 그는 자신이 왜 글을 쓰는지 생각해보니, 자기 명예와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자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고 의미 없고 헛된 내 이름을 위해서 살았구나'라는 자신의 추했던 모습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6시에 마지막 처방전을 폈습니다. "자네의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며 그 죄들을 모래사장에 써보게." 고든은 모래밭에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 저는 주님의 영광이 아닌 제 욕망을 위해 살았습니다. 하나님도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죄들을 다 쓰기도 전에 밀물이 들어와 그가 써놓은 죄들을 지워버립니다. 이 모습을 본 고든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시간 인생에 전환점을 맞게 되었습니다.
둘째, 베드로의 사랑을 회복해 주십니다. 조반을 마친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21:15). 여기서 '이 사람'으로 번역된 'του των'이란 헬라어는 중성 지시대명사로 '이 사람들'로 번역했지만, '이것들'로 번역할 수도 있기에 '네가 지금 물고기 잡는 배나 그물이나 네 옛날 직업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말씀도 되고, 또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말씀으로도 가능하며, '네가 나를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는 말씀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물으신 '사랑'은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인 사랑을 뜻하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물으셨습니다. "아가파스 메?" 그러나 베드로는 차마 '예, 아가페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지 못하고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는데, 이 말은 '친구의 우정과 같은 사랑'이란 '필리아'로 대답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21:16)고 물으시면서, '이 사람들보다'라는 말은 빼셨으나, 이번에도 '아가페'로 물으시니, 베드로는 이번에도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며 또 '필리아'로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세 번째 '필레이스 메?', 즉 '필리아의 사랑으로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사랑이 없다"(요15:13)고 하셨는데, '진짜 친구는 함께 목숨을 버리는데 너는 정말 친구의 사랑은 하고 있느냐?'는 뜻으로 물으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근심하며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21:17)라고 아뢰는 겸손한 자리에까지 내려갑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거듭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왜 네가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줄 아느냐? 바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며, 이제 그 사랑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네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했더라면 이렇게 실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는 뜻입니다. 사랑처럼 위대한 것이 없습니다. 정말 내가 누굴 뜨겁게 사랑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행복의 기본 조건은 사랑입니다. 받는다는 입장에서가 아니라, 사랑한다는 입장에 서보기 바랍니다. 끝까지 사랑하고, 완전히 사랑하면 나는 행복합니다. 사실 불행이 있다면 사랑이 식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이 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이 상대적이었다는 말입니다.
장로님 한 분이 사업에 실패하여 많은 빚을 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아내와 자식들에게도 면목이 없어 견딜 수 없었습니다. 하루는 괴로운 마음에 밤늦게까지 배회하며 '이대로 집을 나갈까, 아니면 그만 죽어버릴까'하는 생각까지 하다가 통행금지 시간이 다 돼서야 힘없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보니 집 안팎에 불을 환하게 켜놓고 몸가짐을 단정히 한 아내가 다소곳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들어서자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하고 밝게 맞아들이며 방으로 이끌더니 기도한 다음에 이렇게 말합니다. "온 세상 사람이 당신에게 손가락질한다해도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비록 부도나서 많은 빚을 졌지만 당신의 진실은 부도나지 않은 것을 믿습니다. 당신은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이뿐 아니라 나는 당신이 다시 일어날 것을 확신합니다. 옛날 욥이 다시 일어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처럼 당신도 하나님의 축복으로 언젠가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변함 없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장로님은 체면 불구하고 아내 앞에서 그만 목놓아 울었습니다. 그는 아내의 손을 맞잡고 기도하고 말했습니다. "온 세상이 다 나를 죄인으로 보더라도 당신만 내 진실을 믿어준다면 나는 반드시 다시 일어날거요." 그 날 이후 이 장로님은 다시 용기를 얻고 마침내 사업을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도, 물고기 잡는 일도 실패하여 실의와 낙심 가운데 있던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그를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감싸신 그 사랑이 베드로를 다시 일어서게 했습니다.
셋째, 베드로를 믿고 다시 일을 맡기십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주십니다. 사람에게 가장 괴로운 것은 아무리 일을 해도 성과가 없고, 맺히는 결과가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밤새껏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고 하시는 말씀에 순종했더니, 큰 물고기 153 마리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일을 하려 해도 아무 할 일이 없는 것처럼 사람을 나약하게 만들고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실패한 베드로에게 다시 사명을 주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주님은 사랑하고 돌보던 양떼를 베드로에게 맡기시며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라고 하십니다. 이제는 무엇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베드로에게 주님은 양떼를 먹이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처음 그를 부르실 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라 되게 하리라"(마4:19)라는 소중한 사명을 주셨건만, 그 책임을 망각하고, 다시 물고기나 잡던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는 거룩한 사명을 다시 주시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너는 아무리 봐도 싹수가 없다. 내가 그토록 너를 사랑하고 네게 소중한 책임을 맡겼건만, 다른 제자들까지 선동하여 물고기 잡으러 가다니. 이제 너한테는 아무 일도 못 맡기겠다"고 말씀하실 법한데 다시 그를 믿고 일을 맡겨주십니다.
고대 기록에는 예수님이 승천하시자, 가브리엘이 주님이 땅에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묻자, 주님은 인류를 구원하려고 십자가를 지셨는데,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씀합니다. 가브리엘이 "이 일을 위해 어떤 계획을 세우셨습니까?" 묻자, "제자들에게 맡긴 복음을 그들이 사람들에게 전할 것이다"라고 대답하십니다. 놀란 듯이 가브리엘이 "그들이 실패라도 하면 어쩔 셈입니까?"라고 물으니,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다른 계획은 전혀 없다. 그들을 믿는다!"
후에 베드로는 로마에서 주님의 양들을 치며 목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네로의 박해가 시시각각으로 몰려오자, 성도들은 베드로에게 어서 로마를 떠나 피신하라고 권유합니다. 교회의 지도자인 베드로라도 살아 남아야 다시 교회를 재건할 수 있지 않느냐는 말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말이 옳다고 여겨, 로마시내를 벗어나 아피아 가도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군지 눈에 익은 듯한 분이 베드로가 떠나온 로마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유심히 살펴보니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깜짝 놀라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쿠오바디스 도미네)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나는 네가 내버리고 떠나는 로마의 내 양떼들을 찾아가 그들을 보살피다 너를 대신해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려고 로마로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다시 로마로 돌아가 주님의 양떼를 먹이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그 길로 로마로 되돌아가 성도들을 보살피다가 잡혀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순교를 당할 때, 십자가에 못을 박으려고 하자, 베드로가 말하기를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는데, 내가 어찌 감히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겠는가? 나는 거꾸로 못 박에 달라"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못이 박혀 순교를 당했다고 전해집니다.
실패는 누구나 경험하는 삶의 한 부분입니다. 실패는 일상적이며 보편적인 삶의 경험으로서, 누구나 어느 때나 겪을 수 있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누구나 '내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거나, 자신의 실패가 노출될 때, 한없는 분노와 수치감을 갖습니다. 스탈린이 집권하자마자 제일 먼저 했던 일은, 어린 시절 친구를 하나씩 다 죽여버린 일입니다. 이런 행동의 심리적 동기는 '자기 부끄러운 과거를 묻어버리기 위한 인간의 파괴적인 성향의 노출'이었습니다.
실패를 잘 극복하고, 거기서 교훈을 얻으면, 그 실패가 디딤돌이 되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지만, 한 번의 실패로 모든 걸 포기하거나, 아무 교훈을 얻지 못하면 같은 실패가 거듭됩니다. 미국의 세일즈직종에서 신입사원을 뽑을 땐 지적능력보다 실패 친화도를 보는데, 세 번 거절해도 다섯 번 권유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패를 인생의 패배로 받아들이는데, 미국은 실패를 경험으로 여겨, 입시나 사업에 실패했다고 자살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C. S. 루이스는 사탄의 전략에 대해 말합니다. "사탄은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실패에 연연해하도록 한다. 그때부터 전쟁에서 지는 것이다." 누구나 겪는 실패로 자포자기해선 안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고백합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3:19-22). '성공의 반대말은 실패가 아니라 포기'입니다.
오혜령 씨는 60, 70년대에 희곡 작가로, 배우로, 방송인으로, 또 수필 작가로 숱한 소녀들의 편지나 엽서에 그녀의 글귀가 인용될 정도로 사랑 받던 사람입니다. 그녀는 미션스쿨을 다녀 기독교에 대해 잘 안다 했으나 소위 똑똑한 지성인들처럼 '내 그물은 내가 채운다'는 자기 과신으로 예수 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37세 꽃다운 나이에 위암과 임파선 암으로 3개월 시한부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날마다 죽음을 기다리며, 매일 달력에 빨간 색연필로 빗금을 쳐나가며 죽을 날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예정된 죽음의 날짜가 며칠 지난 어느 날, 물만 먹어도 토했고, 혈변의 고통은 계속 되었습니다. 그때 매주 그녀에게 꽃을 보내주는 사람이 그 날도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메모와 함께 백합 50송이를 보내왔습니다. 그녀는 반시간 가량 꽃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데 정신이 몽롱합니다. 그때 갑자기 목덜미를 강하게 낚아채는 손길에 방바닥에 나동그라졌습니다. 직감적으로 예수님이 자기를 찾아오신 것을 느꼈습니다. 그녀의 그물이 텅 비어 있을 때 실패의 현장에 주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왜 죽음의 한복판에까지 따라오시는 것입니까?" 그 말을 내뱉자 그동안 주님을 몰라라하면서 마음대로 살았던 자기 죄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어디서부터 회개해야할지 몰라 눈물만 쏟아졌습니다. 며칠 동안 화선지에 붓글씨로 자기 죄를 썼습니다. 수십 개의 양초가 녹아 내릴 때까지 회개하고 또 회개했습니다. 그렇게 회개하기를 반년 가까이 된 어느 날, 그 날도 기도와 찬양을 하며 혼자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온몸에 오한이 덮쳐옵니다. '이제 죽는 시간이 다가왔구나' 그녀는 죽음을 예감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너무 추워 이불깃을 잡아당기는데 겨드랑이에 잡히던 임파선 암 덩어리가 만져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어깨에 나 있던 복숭아씨만 하던 멍울도 사라져버렸고, 복수로 차 올랐던 배도 완전히 꺼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살아 계신 주님께서 두 번째로 자기를 찾아오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부터 그녀의 그물은 고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녀는 경기도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서 평화의 집을 운영하며 버림받은 노인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그녀가 쓴 시입니다. "당신 없는 생의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물고기가 잡히기를 바랐던 지난날들은/죽은 시간이었습니다./오, 주님, 이제 당신께서 그물을 채워주소서/그러면 저는 비로소 살 것입니다./인생의 가장자리에 서 계신 부활의 주님,/당신 없이 한평생 수고해 보아야/우리 인생은 빈 그물이옵니다." 오혜령 씨에게 찾아오신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데, 내가 포기해선 안됩니다. 주님은 오늘도 실패하여 고통 중에 몸부림치는 모든 성도들에게 찾아오셔서 어루만져주시며, 다시 일어서도록 힘주십니다. 이 주님의 손길을 붙잡고, 새롭게 일어서시길 기원합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