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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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세용 목사님

빌립보서 2장 5~11절

설교요약 :

"예수님 마음을 품으십시오"
2018년 3월 4일 주일예배
빌립보서 2 : 5 - 11 ; 이사야 53 : 7


셰익스피어 이후 최고 극작가라는 버나드 쇼에게 미국 무용수 이사도라 던컨이 "우리가 결혼하면 당신의 명석한 두뇌와, 나의 아름다운 미모를 닮은 우수한 아기가 태어날 것"이라며 청혼하자, 쇼는 정중히 사양하며 "잘못하면 나의 형편없는 외모와 당신의 명석하지 못한 머리를 닮은 아기가 태어날까 두렵다"고 대답했답니다. 이사도라 던컨은 자기 아름다운 외모를 뽐냈고, 버나드 쇼는 자신의 명석한 두뇌를 과시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루키즘'(Lookism)이란 말을 아십니까? 우리말로 '외모지상주의'라 하여, 외모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보는 관점을 말합니다. 이 말은 칼럼니스트 윌리엄 새파이어(William Safire)가 뉴욕타임스에 연재하던 칼럼 [온 랭귀지]를 통해 알려졌는데, 루키즘이 심할수록 개인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이 강한 사회가 되는데, 한국갤럽의 2015년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6%가 '우리 인생에서 외모는 중요하다'고 대답했습니다. 2013년 영국의 시사지 [이코노미스트]는 인구대비 성형수술이 가장 많은 나라는 한국으로서 인구 천 명당 13.5건 성형수술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느 성형외과엔 '어머님 날 낳으시고, 원장님 날 만드셨네!'라고 써있다고 합니다.


월간 [좋은생각] 2009년 11월호에 실린 방송작가 김수정씨의 글입니다. 유럽엔 책 대신 사람을 읽는 '리빙 라이브러리'가 있어, 준비된 사람 목록을 훑어본 뒤 읽고 싶은 사람을 선택한다. 런던의 리빙 라이브러리에서 나는 빅토리아를 만났다. 빅토리아는 수많은 도서목록 중에서도 눈에 팍 띄는 친구였는데, 그건 그녀가 선천성 안면기형이란 병을 앓기 때문이다. 얼굴 크기가 보통 사람의 두 배도 넘는 데다 좌우가 심하게 비대칭이고 돌출된 눈은 빨갛게 충혈돼 무서운 인상이었다. 그런데 막상 대화를 나눠보니 빅토리아는 지적이면서도 유머가 철철 넘치는, 그야말로 매력 그 자체였다. 알고 보니 변호사 공부를 하는 학생이었다. "책표지만으로 내용을 판단하지 마라"라는 서양 속담처럼, 역시 사람을 겉으로만 판단할 건 아니지 싶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나는 그녀와의 수다에 푹 빠졌고, 그녀의 기형적인 외모는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더 이상 그녀를 외모로만 판단하지 않았다. 그 때, 나와 열심히 수다를 떨던 빅토리아가 고개를 들고 갑자기 환하게 웃는데 저쪽에서 영화배우 주드 로를 닮은 남자가 다가와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빅토리아가 자기 남편이라고 소개했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이렇게 잘 생긴 남자가 자신과 정반대인 여자와 왜 결혼했을까. 허둥지둥하는 나를 보며 빅토리아는 미소짓고 한마디를 던졌다. "이 남자 눈에는 내가 제일 예쁘대요." 남들이 보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보는 특별한 재능을 가져서 더욱 행복해 보였다.


어느 교회에 한 청년이 머리를 어깨에 닿도록 기르고 수염도 깍지 않고 교회에 나오기에 목사님이 "왜 머리를 그렇게 길게 기르느냐?"고 묻자, 이 청년이 대답은 하지 않고 벽에 걸려 있는 예수님의 성화만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하는 말이 "예수님을 닮고 싶어서요"라고 말하더랍니다. 긴 머리를 하고 다니는 것이 예수님을 닮는 것일까요? 제2차 대전 후 독일의 한 회의에서 내린 '크리스천'에 대한 정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돈 스티븐이라는 사람이 미국에 있는 수천 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신은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20%가 이런저런 이유를 댔지만, 나머지 80%는 똑같은 대답이었습니다. "내가 아는 가까운 사람이 예수 믿고 고백한 간증과 변화된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아 나도 예수 믿게 되었다." 이웃이 예수 믿고 변화되어 예수님을 닮은 모습에 감동 받아 자기도 예수를 믿게 됐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 믿고 변화되어 가정을 구원하고 세상을 변화시켰는데, 요즘은 이런 일이 없다면 요즘은 사람들이 예수는 믿지만 주님을 닮은 사람이 적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한다면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본문에서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첫째, 자기를 비운 마음입니다. 본문 7절에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자신을 비운 마음'이 곧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에케노센]으로, 영어로는 'emptied himself'인데 기독론에서 매우 중요한 용어입니다. 예수님의 근본은 하나님이신데, 그 형체를 벗으시고 이제 종의 형체를 입으셨다고 말씀합니다. 뺐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기 위해 당신의 권리, 당신의 영광, 당신의 능력, 당신의 주장을 다 포기해버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는데,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해 누가 뭐라 해도 요지부동입니다. 얼마나 완고한지 자기 생각과 다르면 조금도 수용하지 않고 누가 말해도 막무가내입니다. 우리 신앙의 원칙을 지키는데는 확고하고 분명해야 하지만, 자신의 개인적 생각은 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아는 지식이나 경험을 절대화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경계해야 할 두 원수는 이성주의와 신비주의인데, 이 둘은 모두 인본주의입니다. 이성주의는 하나님의 계시를 자기 이성으로만 이해하려는 인본주의요, 신비주의 역시 자기 체험을 절대화하기에 이것도 인본주의입니다. 신앙이 성숙해 갈수록 자신은 비우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나타나게 됩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영생을 얻고자 예수님께 나왔던 청년이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묻자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 청년은 "내가 어려서부터 계명을 다 지켰습니다"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네게 있는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시자 그 청년은 재산이 많은 고로 슬픈 낯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청년은 아무 것도 비우지 않고 있는 그 위에 영생을 얻고자 했습니다. '내가 율법을 다 지켰습니다'며 자기 교만과 위선과 허위, 그리고 재산도 비우지 않고 영생만 얻으려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면 그 사람 앞에 자신을 비우게 됩니다. 어디 가서 음식을 시켜도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는 그가 좋아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영화보다는 그 가 좋아하는 영화를 보자고 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내 주장을 강요하지 않고, 그의 뜻을 존중해 줍니다. 그런데 요즘은 서로가 자신은 조금도 비우지 않은 채, 하나가 되려하니 걸핏하면 싸우고 다투다가 그만 헤어져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결혼하려면 각자가 적어도 50% 이상은 자신을 비워야한다'고 결혼하는 이들에게 당부하는데, 자신을 비울 생각이 없으면 아예 결혼을 하지 않는 게 낫습니다.


하덕규의 [가사나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슬픔 무성한 가시나무숲 같네/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우리는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무얼 비웠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가 이전에 자랑하던 것들을 다 해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빌3:5-8). 우리가 예수 믿기 위해선 먼저 자기 의를 버리고 '나는 죄인입니다'하는 고백없인 주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선 교만을 버려야 하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선 자기 의지를 버려야 합니다. 내 경험과 지식, 명예, 의지를 비워야, 그 안에 예수님의 은총이 담게 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소서"라고 부르짖다가, 끝내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이루어지이다"라며 생명까지도 비우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미 가득 찬 그릇에는 아무 것도 채울 수가 없습니다. 가득 찬 그릇은 변화의 가능성도, 성장의 가능성도 없기에 가득 찬 그릇보다 텅 빈 그릇이 아름답습니다. 노자는 "항아리를 쓸모 있게 하는 것은 도공이 빚는 흙이 아니라 항아리 안의 빈 공간이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쓸모 있는 그릇이 되기 위해 우리는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흙덩이 같은 탐욕과 이기심을 비워야 합니다. 미움과 질투와 시기를 비워야 합니다. 헛된 욕망과 집착을 비울 때, 우리는 쓸모 있는 그릇이 됩니다.


플라벨의 시입니다. "하나님이 한 영혼을 채우시려 할 때는/먼저 그것을 비우신다./하나님이 한 영혼을 부요하게 하시려고 할 때는/먼저 그것을 가난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한 영혼을 높이시려 할 때는/먼저 그것으로 하여금/자신의 비참함과 결핍과 무를 느끼게 하신다./그에게 의존해서 지혜를 구할 만큼 어리석고/그의 힘으로 덧입어야 할 만큼 연약하고/하나님의 명예 외에는 아무 명예도 없을 만큼 낮고/그분의 발 앞에서 먼지 속에 있을 만큼 멸시받고/하나님이 모든 것이 되실 만큼 아무 것도 아닌 자..." 얼마나 자신을 비우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도 비례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마음은 자기를 낮추신 마음입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빌2:8). '자기를 낮추셨다'는 헬라어 [에타페이노센]은 자기를 철저히 비하시킨 겸손으로, 종의 모습으로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약해지셨고, 죄인 취급받으셨고, 무능하고, 어리석은 자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에 대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11:29)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 영광의 보좌에 앉아 계시던 분이 이 낮고 천한 역사의 시궁창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오직 겸손에 있습니다. 교만한 마음으론 주님을 뵈올 길이 없습니다. 겸손한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고개를 꼿꼿이 쳐들면 낮고 천한 곳에 오신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어떤 랍비가 길을 가는데 제자가 묻습니다. "선생님, 진리란 길가에 있는 조약돌처럼 널려있다고 하셨는데,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 진리를 터득하지 못할까요?" 랍비가 대답합니다. "진리는 조약돌처럼 많지만 사람들이 허리를 굽히지 않아 그 돌을 주울 수가 없지." 그렇습니다. 허리를 굽혀 자신을 낮춰야 낮은 곳에 계신 주님을 뵐 수 있습니다.


이집트의 테벤니시에 있는 한 수도원에 나이 많은 노인이 자기를 받아달라고 간청하자, 젊은 수도사들은 일도 할 수 없는 노인이 들어온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습니다. 배고픔과 가난 때문에 온 것으로 생각하고 멸시했으나 노인은 묵묵히 자기 맡은 채소밭을 부지런히 가꾸며 천한 일까지 떠맡아 일했습니다. 3년이 지나, 어느 수도원에서 갑자기 사라진 원장을 찾아 전국을 헤매던 수도사들이 그 수도원의 채소밭에서 호미를 들고 일하는 그 노인이 그들이 찾던 원장임을 확인하자 그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모든 이들이 존경하던 피누피우스였음을 몰라보고 초보자로 대했던 수도사들은 충격을 받고 용서를 구하자, 그는 울며 그토록 오랫동안 찾다가 드디어 얻게 된 겸손한 생활을 마귀의 시기로 빼앗겨 이 낮은 자리에서 여생을 마치지 못하게됐다고 슬퍼했습니다. 다시 도망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당했던 피누피우스는 야밤에 또 도주하여 배를 타고 해외로 건너가 베들레헴에 있는 한 수도원에 다시 초보자로 입회했으나 거기서도 성지순례를 간 이집트 수도사들에게 들켜 원상 복귀하고 말았습니다. 대수도원의 원장으로 명령만 내리다가는 겸손을 이룰 수 없음을 절감하여 그가 선택한 해결책은 초보자로 돌아가서 묵묵히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는 비결도 오직 겸손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5:5)라고 했습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속죄의 비결은 겸손이다"고 했습니다. 인도 선교의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윌리엄 케리는 어렸을 때 구둣방에서 일했습니다. 그가 선교사로 인도에 갔을 때, 인도에 있던 지식층들이 그를 무시하였습니다. 어느 날 한 연회석에서 어떤 사람이 "당신은 한 때 구두 공장의 직공 이었다면서요?"라고 묻자 윌리엄 케리는 더 큰 목소리로 "각하, 아닙니다. 구두 공장의 직공이 아니라 헌 신발을 고치는 구두수선공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자신을 더 낮추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겸손했던 그의 헌신으로 인도에 위대한 선교의 발자취를 남길 수 있었습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쓴 비문은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윌리엄 케리. 1761년 생. 죄 많고 약하고 능력 없는 벌레인 나는 당신의 긍휼하신 성수에 기대어 잠드나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받는 온갖 시험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도 바로 겸손에 있습니다. 많은 경우 시험에 드는 것이 바로 교만 때문입니다. 두 단계만 내려가서 생각하면 그 어떤 것도 시험에 들 일이 없다고 합니다. 사막에서 수도하던 마카리우스가 습지에서 야자 잎을 베어 수실로 돌아오는 도중 큰 낫을 든 마귀가 힘껏 그를 내려쳤으나 헛수고였습니다. 마귀는 "마카리우스야, 네 힘이 대단하다. 내가 너를 대적해서 어떤 것도 할 수가 없구나! 보아라. 나는 네가 하는 일은 모조리 할 수 있다. 너는 금식한다. 나도 전혀 먹지 않고 산다. 너는 잠을 자지 않고 철야를 한다. 내게도 잠이란 없다. 그런데 네가 나보다 나은 것이 단 한 가지 있다." 마카리우스는 그것이 뭐냐고 묻자, 마귀는 "그것은 너의 겸손이다. 그것 때문에 나는 도저히 네게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겸손은 가장 강력한 무기로서 마귀는 겸손 앞에서 맥을 못 췄습니다. 겸손을 이루는 것은 모든 것을 얻는 길입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업적과 성취에 있지 않고, 겸손의 정도에 있습니다.


태생적으로 교만한 인간이 어떻게 겸손할 수 있을까요? "겸손이란 무엇입니까?"하고 묻는 수도사에게 한 원로는 대답합니다. "자신을 죄인으로 간주하며, 다른 모든 사람 밑에 자신을 두는 것이다." 그가 "자신을 모든 사람 밑에 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묻자, 원로는 "그것은 다른 사람의 죄에 관심을 갖지 않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며 항상 자신의 죄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겸손은 자신은 울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존재임 깨닫고, 끊임없이 자신을 책망하고 자신을 개선해나가야 얻을 수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교만은 천사를 사단으로 만들었고, 겸손은 인간을 천사로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D.L 무디는 "믿음은 최대의 것을 얻으며, 사랑은 최대의 역사를 이룬다. 그러나 겸손은 가장 많은 것을 보존한다"고도 말했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마음은 죽기까지 복종하신 마음입니다. 본문 8절 하반 절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8). 복종하는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복종을 뜻하는 헬라어 [후페쿠스]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죽기까지 복종한다는 것은 무조건 복종을 말합니다. 복종을 뜻하는 말에, 순종은 즐거운 마음으로 따르는 것이요, 복종은 납득이 가지 않지만 따르는 것이고, 굴종은 억지로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려서부터 부모님께 순종하며 받드셨고(눅2:51), 죽음 앞에서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


어려서 부모에게 복종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예수를 믿어도 제멋대로 여서, 영적 권위 앞에도 복종할 줄을 모르고 자기만 옳다고 고집입니다. 복종의 덕을 익히지 못한 사람은 직장이나 사회생활에서 늘 불평이 많고 원망이 많아, 뭔가 제 뜻대로 안되면 그렇게 힘들어합니다. 개성도 좋고, 의지도 좋으나, 어느 때에 가서는 딱 꺾어 버리고 복종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부모가 자식한테 야단치니 자식은 부모의 말씀에 자꾸 말대꾸를 하기에 "부모 앞에 어찌 꼬박꼬박 말대꾸냐?"하고 나무라자, 자식이 "말대꾸하는 것이 아니라, 이치가 그렇지 않습니까?"하고 똑바로 쳐다보더랍니다. 부모에게 이치 따지면서 어느 때 순종할 수 있습니까? 어른 앞에서 아는 척 하지 말고, 대단치 않은 경험 따위 내놓지 말고, 모든 걸 딱 꺾어버려야 합니다.


이집트 스케테 사막에 사는 네 명의 수도사가 원로 팜보를 방문하여, 그들 서로의 덕을 칭찬했습니다. 첫 번째 수도사는 금식을 많이 했고, 두 번째 사람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며, 세 번째 수도사는 사랑이 많았습니다. 네 번째 사람은 22년 동안 한 원로를 끔찍하게 받들며 순종하고 살았습니다. 듣고 있던 팜보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들 중에 마지막 사람이 더 큰 덕을 갖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각기 자신이 원하는 덕을 획득했지만, 마지막 사람은 자신의 뜻을 억제하고 다른 사람의 뜻대로 행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끝까지 인내한다면 순교자가 됩니다."


주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셨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만왕의 왕으로 높이시고, 모든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신학적으로 '주(主) 되심'(Lordship)입니다. 누가 높아질 수 있습니까?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스스로 낮추며, 복종하는 사람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W.A 크리스웰은 "가장 잘 엎드리는 자가 가장 잘 설 수 있다. 가장 오래 엎드리는 자가 가장 오래 설 수 있다. 가장 낮게 엎드리는 자가 가장 높게 설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왜 은혜를 모르고, 왜 그렇게 피곤하고 짜증스럽습니까? 주님의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비굴해집니까? 예수님처럼 자신을 비우지 못해서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닮아 갈 때, 하나님께서 높여주십니다.


어느 간호사의 글입니다. 아침에 출근해 보니 아직 진료가 시작되기 전,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25살 남짓 돼 보이는 젊은 아가씨와 흰머리 희끗희끗한 아주머니가 두 손을 꼭 잡고 병원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작은 소리로 얘기를 주고받으며 엄마가 딸의 손을 쓰다듬으며 긴장하면서도 따뜻한 미소로 위로하고 있었습니다. 진료실로 들어온 아주머니는 원장님께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애, 애가 제 딸 아이예요. 옛날 초등학교 들어가지 전에 외가에 놀러갔다가 농기구에 다쳐 왼손 손가락을 모두 잘렸어요. 다행이 네 손가락은 접합수술에 성공했지만 네 번째 손가락은 그러질 못했어요. 다음 달에 우리 딸이 시집을 가게됐어요. 사위 될 녀석은 괜찮다고 하지만 그래도 어디 그런가요? 이 못난 에미, 보잘것없고 어린 마음에 상처 많이 줬지만 그래도 결혼반지 끼울 손가락 주고 싶은 게 이 못난 어미 바람이에요. 그래서 말인데 늙고 못생긴 손이지만 제 손가락으로 접합수술이 가능한지..." 그 순간 딸도 그녀도 원장선생님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병원 원장님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한 채 "그럼요 가능합니다... 예쁘게 수술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고, 그 말을 들은 모녀와 나도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손가락 잘라주는 어머니의 마음을 지으신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시집가는 딸 결혼반지 못 낄까봐 손가락 하나 잘라준 어머니의 희생엔 감동하는데, 우릴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주님의 사랑에 대해선 얼마나 감격하고 있습니까? 하늘 영광을 버리고 비천한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시며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주님의 마음을 우리도 품어야 하겠습니다.


F.B. 마이어는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은 높은 선반 위에 있어 우리의 키가 클수록 더 많은 선물을 가질 수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은혜의 선물은 아래로 내려갈 수록 많이 쌓여있기에, 선물을 받으려면 높아질 것이 아니라,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고, 낮은 곳으로 내려가길 힘써야 된다." 낮은 곳에 물이 고이듯, 우리가 낮아져야만 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CCM [아버지의 마음이 있는 곳에] 입니다.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아버지 당신의 눈물이 고인 곳에 나의 눈물이 고이길 원해요/아버지 당신이 바라보는 영혼에게 나의 두 눈이 향하길 원해요/아버지 당신이 울고있는 어두운 땅에 나의 두 발이 향하길 원해요/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내 모든 뜻 아버지의 뜻이 될 수 있기를/나의 온몸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삶 당신의 삶 되기를" 성 어거스틴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서 그 분이 더 위대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그 분을 섬기면 우리가 오히려 위대해진다"고 말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자신을 비우고 주님의 마음을 품어 하늘 뜻을 이루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빌립보서 2장 5~11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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