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24 174회
“긍정적인 믿음의 자세”
2021년 10월 24일 주일예배
고린도후서 1 : 12 - 22 ; 민수기 14 : 28
오늘 말씀인 고린도후서의 수신자인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이 심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가장 약할 때 세운 교회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선 마음이 약해져서 담대히 사람들 앞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개인 전도를 해야만 했습니다. 이곳에선 선교에 대한 후원마저 끊어졌는지, 스스로 천막을 깁는 일을 해가면서 자비량으로 겨우 전도의 명맥을 이어가면서 용기 없이 약한 마음으로 교회를 세워서 그런지, 고린도교회는 끊임없이 문제가 일어나고 분쟁이 많았습니다. 이곳을 떠난 후에 교회의 분쟁 소식을 듣고 이를 수습하려고 방문하려했다가 조금 지연되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또 비난과 오해가 생깁니다. 먼데서만 큰소리쳤지 가까이에선 아무 것도 아니다, 편지 쓸 때완 딴판이라는 비난도 쏟아져 나옵니다. 가지가지 비난과 부정적인 말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바울은 놀랍게 긍정적인 자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긍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후1:12). 바울은 사도로서 자기 진실성을 단언함으로, 자신이 성실치 못하다는 비난에 대해 윤리적으로 결백할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한 것임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14절)며 비난하는 사람들에게도 자랑이 되는 존재가 되길 바란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죽어 마땅한 죄인이며, 영원히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 자신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용납하는 사람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39)는 이웃 사랑에 대한 말씀은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함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긍정적인 자세를 갖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며 깨달아야할 두 가지 사실은 먼저, ‘내 죄가 얼마나 크면 주님께서 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했나’하는 우리 죄의 심각성을 깨달아야 하고, 나아가 ‘하나님께서 얼마나 나를 사랑하셨으면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사랑하셨나’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향해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사41:14)라고 말하고서, 역시 그들을 향해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겠다”(사43:4)는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한없이 비천하고 무가치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이제 소중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둘째,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고후2:14). 바울의 사도직을 부정하고 계속 바울을 비난하고 음해하는 고린도교회를 향해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4)라고 하여, 그토록 자신을 괴롭히는 고린도교회를 인해 항상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좀더 긍정적이고 따뜻한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의심의 안경을 쓰고 보면 의혹이 가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믿고 보면, 그렇게 편안하고 모든 사람이 다 선해 보입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자기 안에 부정적인 요인이 많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고, 은혜가 있으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너그럽고 긍정적인 태도로 대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고린도교회로부터 갖은 비난을 받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의 심령이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젖어 있었기에, 고린도교회가 장차 자기의 자랑이 될 것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나의 부정적인 시각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긍정적인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께도 언제나 긍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1:20). 여기 ‘아멘’이란 ‘진실로 그렇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하여주소서’라는 말로서, 우리말로는 ‘예!’라 할 수 있고, 영어로는 ‘yes’입니다. 성도들의 ‘아멘’은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예’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을 의미하는 것처럼, 성도들의 ‘아멘’은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을 표시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됩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민14:28). 우리가 감사하면 감사할 일로 만드시고, 원망하고 불평하면 모든 일을 불평할 일로 만드실 것이기에, 우리는 모든 일에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감사를 말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