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19 107회
"봄날이 주는 하늘의 계시"
2020년 4월 19일 주일예배
아가서 2 : 10 - 17 ; 마태복음 16 : 2 - 3
어느 침례교회에서 초봄에 강가에서 침례식을 하는데, 목사님이 물 속에 한 초신자를 쑥 집어넣었다 꺼내며 물었습니다. "물이 차지요?" 그랬더니 이 초신자가 얼떨결에 "아, 아닙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곁에서 돕던 안수집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이 사람이 거짓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집어넣으시지요."^^ 요즘 날씨가 한낮에는 화창하고 따뜻해도, 강물은 몸을 담그기에 아직 차갑습니다.
계절은 음산했던 겨울이 지나가고 완연한 봄이 되었습니다. 지난 주일엔 주님이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신 부활절을 맞아 우리는 새 삶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은 왔지만 봄 같지 않듯, 자연은 올레드TV처럼 찬란한데, 우리 마음은 흑백TV처럼 무채색의 차가운 겨울입니다. 영국에선 14세기까지만 해도 한 해를 여름, 겨울 두 철로 나눴는데, 봄(spring)이란 말은 16세기부터, 가을(autumn)이란 말은 14세기 시인인 초서가 처음 썼다고 합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코로나19가 점차 소강하여 매일 확진자가 20명 대까지 줄어, 조심스럽게 일상의 회복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어서 이 땅이 그 찬란한 봄을 꽃피우게되길 고대합니다.
'철부지'라는 말을 사전에서는 '사리를 분별하는 지각이 없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철부지'라는 말은 원래 '절부지'(節不知)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그 뜻은 '계절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농사는 시기를 놓치면 1년을 망치기에 우리 조상들은 철을 아는 것을 매우 중요시했습니다. 그래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구분하여, 철에 맞춰 심고, 가꾸고, 거두는 그 철을 잘 알아야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매사추세츠의 호숫가의 통나무집에서 살며 자연주의적인 삶의 명상들을 기록한 책 [윌든]에서 말합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감동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아침과 봄에 얼마나 감동하는가에 따라 당신의 건강을 체크할 수 있다. 당신 속에 자연의 깨어남에 대해 아무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른 아침 산책의 기대로 마음이 설레어 잠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첫 파랑새의 지저귐이 전율을 일으키지 않는다면-눈치 채라. 당신의 봄과 아침은 이미 지나가 버렸음을." 우리는 봄을 느끼고 있습니까?
어느 현자는 말합니다. "자연은 매번 신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반복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 꽃을 보면 우리는 그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저 피어나는 꽃 속에 하나님의 미소가 있습니다. 눈부신 봄빛 햇살은 초라한 서민들의 늘어진 어깨에도 쏟아져 내리고, 생금가루 같은 햇빛은 죽은 행려병자의 남루한 누더기에 위에도 쏟아져 내립니다. 그러나 세상에 아무리 봄빛이 가득해도 마음에 햇살이 가득하지 않으면 그에게 봄은 오지 않은 것입니다. 그에게 겨울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말하자, 주님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16:2-3)고 되물으셨습니다. 신앙인은 이 땅의 자연현상과 계절의 변화를 통해 시대의 징조와 하늘의 계시를 살필 줄 알아야합니다. 우리는 새롭게 다가온 이 봄을 통해서도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시인 헤르만 헷세는 말했습니다. "어느 어린이나 알고 있다. 봄이 말하는 바를. 살아라, 뻗어라, 피어라, 바라라, 사랑하라, 기뻐하라, 새싹을 움트게 하라, 몸을 던져 삶을 두려워 말아라!"
봄을 노래한 아가서 말씀에서 우리는 봄의 몇 가지 특성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봄은 사랑의 계절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아2:10-11). 추운 겨울을 보내고 따스한 봄날이 오자, 사랑하는 연인이 만나 함께 가자고 노래합니다. 사랑의 특성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14:23). '나를 사랑하는 자와 거처를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서로 보고 싶어하고, 만나서 함께 하기를 원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봄은 사랑의 계절입니다. 겨우내 차가운 날씨에 집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이젠 바깥출입을 하면서, 추위에 움츠렸던 마음이 따뜻한 봄바람으로 활짝 기지개를 켜고, 어둡고 두터운 외투로 싸매었던 몸을 가볍고 화사한 옷으로 갈아입으면서,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연정이 분홍빛 진달래처럼 꽃피는 계절입니다. 그래서 시인 하이네는 "즐거운 봄이 찾아와 / 온갖 꽃들이 피어날 때에 / 그때 내 가슴속에는 / 사랑의 싹이 움트기 시작하였네 // 즐거운 봄이 찾아와 / 온갖 새들이 노래할 때에 / 그리운 사람의 손목을 잡고 / 불타는 이 심정을 호소하였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그런데 전국 방방곡곡에 기다리던 봄이 왔건만 사람들 마음은 혹독한 겨울입니다. 모두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봄의 향취를 즐길 겨를이 없어, 꽃구경은 고사하고 계절의 변화조차 체감할 수 없습니다. 달갑지 않은 미세 먼지로 마스크 행렬로 넘쳐났던 요 몇 년 새의 고통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습니다. 바이러스의 공습에 한반도의 봄이 완전히 빼앗겨, 해마다 이맘때면 전국에서 열리던 봄꽃축제와 식목행사 등은 줄줄이 취소되어버렸습니다. 매화, 산수유, 벚꽃 등은 변함 없이 화사하게 피었지만, 사람들이 찾아와 행여나 코로나 바이러스를 퍼트릴까봐 전국 각지에서 열리던 꽃 축제와 식목일 행사는 모두 취소되었고, 애써 가꾸었던 꽃밭은 갈아엎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외국 재난영화의 카피문구처럼 '아무것도 만지지 마라, 누구도 만나지 마라'라는 말로, 사람 만나는 것을 기피하고 경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고도, 주님이 명하신 사명의 자리를 떠나 갈릴리 바다에 가서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한 마리 물고기도 잡지 못한 채, 허기와 추위에 떨며 피곤에 지치고, 실패로 인한 낙심과 좌절감에 젖어있던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모닥불 피워놓으시고, 아침 식사까지 준비해주시고는, 오직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며 사랑만을 물으신 뒤, "내 양을 치라"고 새롭게 사명을 주시고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받았다면, 이제는 우리 또한 이웃과 따뜻한 사랑을 나누도록 움츠러들었던 자리에서 일어나 사랑을 나누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월간 [좋은 생각]에 실린 '국밥 한 그릇'이란 글입니다. - 비 내리는 날 의자가 네 개뿐인, 허름한 돼지 국밥 집에 들어갔다. 뜨거운 국물에 부추를 듬뿍 넣고 휘휘 저은 뒤 두어 수저 드는데 일병 계급장을 단 군인과 그의 아버지인 듯한 아저씨가 들어왔다. 한쪽 수족이 불편한 아저씨는 나도 잘 안다. 우리 동네 골목을 다니며 종이를 줍는 분이다. 새벽 운동 길에 마주치면 눈인사하는 터라 그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 모자를 벗으며 깍듯이 인사했다. "우리 아들이라요. 휴가를 나와서…." 빗물이 줄줄 흐르는 유리창 너머로 그가 끌고 온 리어카가 보였다. 커다란 냉장고 포장 상자가 가득 실렸다. 누군가 밀어주지 않으면 경사진 이곳까지 오기 힘든 짐이다. 누군가는 아마도 아들이지 싶다. "어여 먹어라. 배고팠지?" 아버지는 자꾸 사양하는 아들에게 자신의 국그릇에 담긴 고기를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아들이 국밥 먹는 모습을 보며 자꾸 웃었다. 그의 사정은 동네 사람이 다 안다. 직장에 다니다 풍이 와서 3년 간 병원에서 지냈고, 그사이 아내는 집을 나갔다. 하나뿐인 아들 학비 대느라 고물행상을 했다. 아저씨에게 아들은 삶을 지탱하는 희망 꽃이다. 오늘은 그 꽃에 거름을 주려나 보다. 아저씨 형편을 아는데도, 국밥 고기를 평소와 다름없이 준 식당 주인 할머니가 야속했다. 고기 몇 점 더 준다고 손해 보지 않을 텐데…. 그러나 기우였다. 부자를 묵묵히 보던 할머니는 찬장에서 양푼을 꺼내 그 안의 고기를 부자의 국그릇에 수북히 넣었다. "그냥 들어요. 내 돈 안 받을 테니." 부자보다 내 눈시울이 먼저 뜨거워졌다. 눈물방울이 맺히기는 아들과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국밥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계산하며 만 5천 원을 디밀었다. 할머니는 "5천 원인데요?"하며 만 원을 도로 내밀었다. "저 아저씨와 아들 밥값이에요." 턱으로 부자를 가리키며 조그맣게 말하고 재빠르게 식당을 나왔다. 아저씨의 리어카 위로 깨알같은 빗방울이 자꾸 내려왔다. 봄답지 않은 차가운 날씨에도 담장 곁의 개나리는 노란 꽃을 피웠다. 돼지 국밥을 맛있게 먹는 부자에게도 화사한 봄이 얼른 찾아와 진짜 '부자'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밥은 봄처럼, 국은 여름처럼, 장은 가을처럼, 술은 겨울처럼'이란 말대로, 봄빛은 따뜻한 햇살로 얼어붙은 대지를 품어주는데, 우리는 굶주린 이웃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이라도 나눌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봄은 희망의 계절입니다.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아2:11)라는 말씀에서 '겨울'은, 음울하고 추우므로 식물의 성장이 멈추고 모든 활동이 제한 받는 계절이기에 '시련' 또는 '시험'의 때를 암시합니다. 그리고 '비도 그쳤다'는 말은, 팔레스타인의 겨울은 기압이 불규칙하게 형성되어 비가 자주 내리는데, 이 비는 9, 10월의 파종기에 내리는 이른 비나, 3, 4월의 추수기에 내리는 늦은 비처럼 유익하지 않고, 추위를 더욱 강화시키는 을씨년스런 비입니다. 성경에서 비는 일반적으로 곡식의 성장을 돕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나(호6:3; 욜2:23; 요7:37-39), 여기서 비는 사람들에게 추위를 더욱 가중시키고 활동을 제한케 하는 '시련', '고난' 등을 암시합니다(마7:25, 27). 여기서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다'고 말한 것은 이제 어려움과 시련의 때가 지나갔으니 희망과 기쁨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2:10)고 말합니다. 지금 솔로몬 왕은 술람미 여인에게 봄을 맞아 약동하는 자연 속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그동안 술람미 여인은 사모의 정으로 지쳐있었는데, 이제 어두운 마음을 훌훌 떨치고 꽃피고 새 우는 저 봄 동산으로 가자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에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 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아2:12)라며, 저 아름다운 희망의 봄 동산으로 나아갈 것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춥고 암울한 시련과 고통의 계절이 지나고 꽃피는 화사한 봄이 왔음을 노래합니다. 꽃이 피는 모습이 봄을 시각적으로 묘사한다면, 새가 노래하는 모습은 청각적인 표현입니다. 여기서 새는 산비둘기를 말하는데, 팔레스타인에서는 봄이 되면 새로운 계절이 왔음을 알리는 봄의 전령사입니다. 봄은 새 출발의 계절입니다. 학교에 입학하여 새로운 학문을 시작하고, 청운의 꿈을 안고 사회에 진출하는 계절도 바로 봄입니다. 농부는 묵은 땅을 갈아 업고, 씨뿌리고 모종을 심으며 한해 농사를 시작합니다.
민수기 17장에 보면, 이스라엘 12지파가 각 대표들의 이름을 새긴 지팡이를 하나씩 가져다 제단의 법궤 앞에 놓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보니, 열두 지팡이 중에 레위 지파의 대표인 아론의 지팡이에만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민17:8). 그래서 이 지팡이의 소유자인 아론의 레위 지파를 제사장지파가 되게 했습니다. 봄이 깃든 지파를 이스라엘의 제사장이 되게 하여, 이스라엘에 구원과 축복을 주는 지파가 되게 하셨습니다. 삼라만상이 깨어나는 봄에, 우리의 믿음도 아론의 싹이 난 지팡이처럼 새순이 움트고, 꽃피워, 새로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은 새순을 틔우는 자에게 나타납니다. 봄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일깨워주고, 새 출발하도록 촉구합니다. 봄이 되었어도 싹을 틔우지 않는 나무는 죽은 나무입니다. '봄은 희망을 통역해 준다'고 합니다. 메마른 가지에 새싹이 나듯, 우리들도 희망의 새싹을 틔워야만 합니다.
아직 바람이 찬 봄날, 공터에서 다섯 살배기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자기의 꿈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말없이 가만히 있자, 아이들이 물었습니다. "야, 너는 뭐가 될래?" 친구들이 재촉하는데도 그 아이는 망설이기만 하다가 뭔가 결심한 듯 벌떡 일어서더니 햇볕이 잘 드는 벽으로 뛰어가 기대어 섰습니다. "난 햇볕이 될래, 너희들 모두 이리로 와봐." 어리둥절해 하던 아이들이 달려가 모두 그 아이 옆에 섰습니다. "와, 따뜻하다"하며 벽에 붙어 섰습니다. 이 아이들을 지켜보던 이웃집 아주머니가 그 아이에게 햇볕이 되려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 할머니는 시장에서 나물을 파는데 할머니가 앉아 계신 곳에는 햇볕이 잘 들지 않아요." 그 아이는 잠깐 동안만 할머니를 비추곤 금방 다른 데로 옮겨가는 햇볕이 얄미워서 어른이 되면 햇볕이 되어 할머니를 하루종일 따뜻하게 비춰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아이의 마음은 햇살을 가득 품은 것처럼 따뜻했습니다.
시인 정호승은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고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 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 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 말고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겨울밤은 깊어서 눈만 내리어 돌아갈 길 없는 오늘 눈 오는 밤도/ 하루의 일을 끝낸 작업장 부근 촛불도 꺼져 가는 어둔 방에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절망도 없는 이 절망의 세상 슬픔도 없는 이 슬픔의 세상/ 사랑하며 살아가면 봄눈이 온다. 눈 맞으며 기다리던 기다림 만나/ 눈 맞으며 그리웁던 그리움 만나 얼씨구나 부둥켜안고 웃어보아라./ 절씨구나 뺨 부비며 울어보아라.//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 봄눈 내리는 보리밭길 걷는 자들은 누구든지 달려와서 가슴 가득히/ 꿈을 받아라. 꿈을 받아라."
셋째, 봄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찬양하는 계절입니다.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 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2:12-13). 봄철에 새들은 노래하고, 꽃은 그 아름다운 자태와 향기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성 프랜시스는 새에게도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우리는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감동할 줄 모르면 감사할 줄도 모릅니다. 살아 있다는 자체만도 얼마나 큰 은총인지 알아야합니다. 가족과 함께 한 밥상에서 밥 먹는 게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마음대로 걸을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지금 자기가 얼마나 큰 보배를 갖고 있는지 몰라 그것을 즐기지 못하면, 자기 집 울타리에 개나리꽃이 피어있는데 봄을 찾아 천리만리 밖으로 떠도는 사람입니다.
중국의 고전인 [열자]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송나라에 누더기 베옷으로 어렵게 겨울을 지내는 가난한 백성이 있었습니다. 이 농부가 추웠던 겨울이 가고 밭에 나가 일을 하는데 누더기 등에 봄볕이 따스하게 내려 쬐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따끈한 방에서 살며, 솜옷에다, 초피며 호피 옷까지 입고 있는 사람이 있는 줄을 모르는 이 가난한 백성은 아내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등에 내리쬐는 따사한 봄볕을 나랏님께 바치면 얼마나 좋아 하실까?" 이 고사가 뿌리가 되어 왕이나 국가에 바치는 작디작은 충성을 헌훤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농부가 등에 내려 쪼이는 따뜻한 봄볕까지도 나라님께 바치려고 했다면, 이런 따스한 봄날을 주신 하나님께 우리는 어떤 충성과 헌신을 바쳐야 할까요? 길가에 핀 이름 없는 들꽃까지도 창조주 하나님의 은총과 그 섭리를 아름다운 자태와 향내로 찬양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 희망의 새봄에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따뜻한 사랑을 감사해야 할까요?
넷째, 봄은 한편 유혹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아2:15). 팔레스타인에서 여우는 포도원에 굴을 파고 서식하면서 봄철 포도나무에 싹이 돋고 꽃이 필 무렵 포도나무를 갉아먹거나 해친다고 합니다. 에스겔서에는 거짓 선지자를 여우에 비유했습니다. "이스라엘아 너의 선지자들은 황무지에 있는 여우같으니라"(겔13:4). 누가복음은 헤롯왕을 '여우'로 비유합니다(눅13:32). 여기서 말하는 '여우'란 주님과 성도 사이에 개입해서 성도의 삶에서 영적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하는 대적 세력들을 암시합니다.
봄철은 잠시만 눈을 떼도 여우가 애써 가꿔놓은 포도밭을 망가뜨리기 쉬운 유혹의 때입니다. 본 훼퍼는 그의 책 [유혹]에서 "우리에게 죄악이 침투해 들어올 때, 마음에 울리는 경보를 무시하려는 생각이 가장 큰 유혹이다"고 지적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양심은 죄악이 가까이 올 때 경보를 울리는데, 이 경보에 따라 우리 행위를 지켜가야 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119:9-11).
참새와 나비와 하루살이가 만나 신나게 놀았습니다. 저녁이 되자 나비가 내일 다시 만나서 놀자고 말하니, 하루살이에겐 내일이 없기에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튿날부터는 참새와 나비만이 만나서 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겨울이 다가오자 참새는 봄이 오면 다시 만나서 놀자고 나비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비는 내년에 새로운 봄이 다시 온다는 말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당장의 이익과 즐거움만 위해 산다면 하루살이의 차원이 되고, 이생이 전부인 줄 알고 땅에만 매여 산다면 나비의 차원일 것입니다. 이 생의 계절이 끝나면 내생의 새봄이 온다는 것을 알고 이에 합당하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어떤 마을에 많은 꽃과 나무가 가득한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큰 성에 한 거인이 살았습니다. 이 거인이 몇 년 간 성을 비우자 동네 아이들이 정원에 와서 놀았는데 어느 날 거인이 돌아와 "이곳은 오직 나만의 정원이야!"라며 아이들을 내쫓고, '다시 이곳에 들어오면 고발하겠다'는 팻말까지 붙였습니다. 겁에 질린 아이들은 이후론 찾아오지 않았고, 아이들이 오지 않자 정원에는 봄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다른 곳은 봄이 오고 여름이 와도, 자기밖에 모르는 거인이 사는 이 정원은 늘 눈보라와 우박과 서리가 내리는 겨울만 계속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원 담장 구멍으로 아이들이 들어와 놀기 시작하자 이곳에 봄이 다시 찾아와 나무마다 잎이 피고 꽃이 만발했습니다. 그런데 구석에 있던 한 아이는 키가 작아 나무에 올라가지 못하자, 그 나무는 눈으로 덮여있고 위에선 찬바람이 몰아쳤습니다. 거인은 그제야 '내가 너무 이기적이어서 정원에 봄이 안 왔다'고 깨닫고, 아이를 나무에 앉혀주자 나무는 봄으로 변했고 새들이 찾아왔습니다. 거인은 담장을 허물고 정원을 열어 아이들과 함께 놀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거인은 늙어 의자에 앉아 아이들을 보며 말했습니다. "나한텐 꽃은 많지만 가장 아름다운 꽃은 아이들이야." 그런데 거인이 나무에 올려주었던 아이는 그 후론 보이지 않아 몹시 보고 싶었습니다. 어느 겨울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정원 외진 곳에 잎이 반짝이고 빛나는 열매가 가득한 한 나무 밑에 그 아이가 서있어 거인이 달려가니, 아이의 손과 발등에 상처가 있었습니다. 거인은 노하여 아이를 학대한 자를 칼로 베겠다고 소리치자, 아이가 말합니다. "아니다. 이것은 사랑의 상처니라. 그대는 언젠가 나를 그대의 정원에서 놀게 해주었는데, 오늘은 내가 그대를 나의 정원으로 인도하리라." 그 날 아이들이 정원으로 들어와 보니 거인은 꽃이 만발한 나무 아래 죽어있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자기만 아는 거인]인데, 아이들과 십자가의 사랑과 봄이 무르익은 정원을 천국으로 그렸습니다.
김종해 시인의 시 [그대 앞에 봄이 있다]입니다.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낮은 곳에 묻어 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와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우리는 영혼의 봄날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소망의 봄이 아름다운 신부처럼 우리 앞에 다가왔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햇빛이 가득해도 마음에 은혜가 깃들지 않으면, 아직도 봄은 오지 않은 것이고, 아직도 겨울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생명이 깨어나는 봄날, 서로 따뜻한 사랑을 나누며, 새로운 희망을 싹틔우고, 새봄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우리 보금자리를 허는 작은 여우를 막아내야 하겠습니다.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