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26 460회
"그러므로 이르노니 염려하지 말라!"
2020년 1월 26일 주일예배
마태복음 6 : 25 - 34 ; 잠언 17 : 22
누가 '염려하지 않을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염려하려면 두 가지만 염려해라. 지금 아픈가, 안 아픈가? 안 아프면 염려하지 마라. 아프면 두 가지만 염려해라. 고칠 병인가, 못 고칠 병인가? 고칠 병이면 염려하지 마라. 못 고칠 병이면 두 가지만 염려해라. 죽을병인가, 안 죽을병인가? 안 죽을병이면 염려하지 마라. 죽을병이면 두 가지만 염려해라. 천국 갈 것인가, 지옥 갈 것 같은가? 천국에 갈 것 같으면 염려하지 마라. 지옥에 간다면? 지옥 갈 놈이 무슨 염려냐? 벌받는 게 당연하지!"
여러분, '플라시보 효과'라는 말을 아십니까? '플라시보'(Placebo)란 '기쁘게 해드리겠습니다'라는 라틴어인데, 환자에게 설탕이나, 소금 등 가짜 약을 주면서 좋은 약이라고 하면, 진짜 약 이상의 효과를 나타내는 '위약효과'를 말합니다. 이와 반대로 '노시보 효과'도 있습니다. '노시보'(Nocebo)란 '당신을 해칠 것이다'라는 뜻인데, 의사의 말이 환자에게 부정적인 기대를 유발하여, 아무 의학적 이유 없이 환자에게 피해를 입히는 현상입니다. 의사가 소화제를 주면서 '이것을 먹으면 머리가 아플 것'이라고 말하면, 이것을 먹은 사람이 진짜로 두통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환자들에게 정제된 설탕을 주며 토할 수도 있다고 말했더니 환자의 80%가 토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상담대학원생 증후군'이라는 것도 있답니다. 한 학생이 "교수님, 오늘 공부한 우울증증세와 제 증세가 똑같은데요"라고 호소하며 정신질환의 준거들을 열거하는데, "그건 우울증이 아니고 정상적인 우울이다"고 말해주어도 한사코 자기는 우울증이라고 우기는데, 우울증을 공부하는 주간에는 흔히 있는 일이랍니다. 수면장애를 공부하는 주간에는 자신도 불면증이라고 호소하는 수강생이 많답니다. 그리고 '의대생증후군'도 있는데, 의대생들은 피곤해서 눈썹이 실룩이면 루게릭 병이 아닌가, 입이 마르면 당뇨병이 아닌가, 손가락이 뻑뻑하면 류머티스는 아닌가하는 건강 염려증으로, 정신과의사 조셉 내텔손은 의대생의 79%가 이 병을 호소한답니다. 이처럼 병에 관심을 집중하면 피해망상으로 실제로 몸과 마음에 병이 생기는 증상입니다. 이를 보면, 우리에게 나타난 실제적 사실보다, 우리의 염려나 근심으로 인한 부정적인 생각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얼마나 병들게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환자가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어 이미 전 세계에서 1,372명이 감염되었고, 사망자도 40명을 넘어섰습니다. 이미 2003년 '사스'와 2009년의 '신종플루', 2015년에 '메르스'라는 역병으로 몸살을 앓았는데, 전문가들은 '우한 폐렴의 감염규모가 사스보다 10배는 클 것'으로 경고하고 있어 모두 근심이 가득한데다, 2019년 우리나라 GDP성장이 2.0%로서 10년 전 세계 금융위기 당시 0.8%이후로 가장 낮은 수준이어서, 이래저래 걱정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전래민요 [진도 아리랑]에는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살림살이 수심도 많다"는 가락처럼, 이 땅의 삶에는 수심도 많고, 술 마시면 시흥이 절로 나서 시를 쓴 이태백은 술로도 달랠 수 없는 근심을 이렇게 토로합니다. "칼을 들어 흐르는 물을 내리쳐도 물은 끊이지 않고 계속 흐르며, 잔을 들어 술 마시며 걱정을 씻으려 해도 걱정은 더욱 쌓여만 가네." 하나님은 우리의 이런 약함과 염려를 아시고, '염려하지 말라' 혹은 '근심하지 말라'는 성경말씀을 무려 550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누릴 수 있는 축복 중 하나는 바로 이런 근심과 염려에서 자유할 수 있는 것인데, 인간은 어리석게 염려함으로 스스로 자신을 해치고 있습니다. 폴 투르니에는 "아무도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스스로가 자신을 죽일 뿐이다"고 말했고, 한 의사는 "질병보다는 질병에 대한 염려 때문에 죽는 확률이 더 높다"고 말했습니다.
세계 2차 대전 때 35만 명의 미국 청년들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는데, 놀라운 것은 이 전쟁에 대한 불안과 염려로 인한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은 무려 백만이나 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이를 보면 염려와 근심은 전쟁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이며 해독을 끼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근심과 걱정과, 생활의 염려로 피곤에 지쳐 있고, 얼굴은 웃음을 잃은 채,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할 것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첫째, 우리 생활의 의식주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6:25). 여기 언급한 '목숨'은 헬라어로 '퓌스케'인데, 육체적 죽음에도 멸절되지 않는 영혼을 말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영혼이 물질적인 '먹을 것과 마실 것 입을 것'으로 지나치게 염려하여 그 영혼이 상하면 되겠느냐 하십니다.
주님은 먹는 것에 크게 관심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물론 먹어야 살지만 요즘은 너무 먹어서 탈입니다. 미식가다 뭐다 하는 허울좋은 이름으로 먹을 것 찾아 돌아다니는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음식문화의 발달은 정신문화의 퇴보를 가져온다는 사실입니다. 먹는 일에 정신 팔면서 무슨 가치 있는 일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또 의복은 어떻습니까? 필리핀의 이멜다는 옷이 1,200벌이었다는데, 그 중엔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옷도 많을 것입니다. 얼마나 부질없고 헛된 일입니까?
둘째, 막연한 내일의 문제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6:34).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들을 보면, 당장 부딪쳐 있는 현실 문제이기보다는 '내일 어떤 불길한 일이나 사고는 없을지, 불황이 닥치진 않을지...'하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걱정으로 근심과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100년 전에 미국에서 백만장자가 지금 억만장자보다 적었을 때입니다. 지금은 10억 불 짜리 부자도 많은데, 당시는 백만장자가 열 손가락 안에 들던 때, 'millionaire'라는 말이 미국에서 엄청난 부자라는 말로 통하던 때, 한 사람의 한 달 생활비가 $10 내외였습니다. 그 때 한 백만장자가 세상을 떠나며 50만 불이 잔고에 남아, 미망인은 다른 일하지 않고 이 돈을 아껴서 잘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7년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계산해보니까 은행잔고에 3만 불이 줄어 47만 불이 남았습니다. 이 분이 3만 불이 비었다는 이 사실을 깨닫고는 그 때부터 이 돈이 다 떨어지면 내가 얼마나 비참해질까 고민하다가 자살했습니다. 이것이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셋째, 죽음의 문제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에 대해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고 말씀하십니다. 성도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가는 과정이요, 저 아름다운 천국이 이르는 길이기에, 이 죽음에 대한 염려나 불안을 떨쳐야 할 것입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사람들의 걱정 가운데 50%이상이 죽음에 대한 불안에서 비롯된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어차피 병들게 되어 있고, 그리고 언젠가는 죽게 되는데 건강할 때 병들 것을 걱정하고, 죽을까봐 걱정하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미련한 짓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죽을까에 대해선 걱정 안 한다"고 말하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차피 죽을 테니까, 죽을까 걱정해서 안 죽는다면 걱정해보겠지만, 죽음을 걱정해도 죽고, 걱정 안 해도 죽을 텐데,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것을 가지고 무엇 때문에 미리부터 걱정하느냐?"는 것입니다.
본문은 염려하지 말아야 할 두 가지 이유를 말씀합니다. 첫째, 염려는 쓸데없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마6:27). 어떤 이는 "염려란 마치 자동차 기어를 중립에 놓고 액셀레이터를 밟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기어가 중립에 있으면 아무리 액셀레이터를 밟아도 자동차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염려해도 문제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열등감 중 하나는, 자기들을 지배하는 로마인들보다 키가 작은 것이었습니다. 키 문제로 스스로 불행하게 생각하던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키가 작다고 불만을 갖고 염려한다고 해서, 너희들의 키가 커지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지혜문학서에 보면 "어쩔 수 없는 것을 염려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고, 어쩔 수 있는 것을 염려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고 말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염려해도 안 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염려할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면 됩니다.
둘째, 염려는 불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1-32). 여기 '이방인'은 믿지 않는 자를 뜻합니다. 염려하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여 돌보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믿는다면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의 반대말을 '불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어휘적인 표현이고, '믿음'의 실질적인 반대 의미는 '염려'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있으면 염려하지 않을 것이고, 염려하고 있다면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여 평생 5만 번 이상 기도응답을 받은 죠지 뮬러는 "염려의 시작은 신앙의 끝이다. 그러나 신앙의 시작은 염려의 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근심하고 걱정하는 이유는 현실이 어렵기 때문만이 아니라,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믿고 기도할 뿐,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비는 새끼 한 마리에게 수놈과 암놈이 번갈아 하루 100번 이상 먹이를 물어다준다고 합니다. 제비 한 쌍에 새끼가 5마리면 하루에 약 500마리 곤충을 잡아 먹이기에, 새끼를 키우는 3주 동안에만 1만 마리 이상을 잡아 먹이는데, 하나님은 그 모든 제비와 동물들을 다 먹이십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새도 먹이시는데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독생자까지 주셨습니다. 존 하가이는 '염려는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내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기에, 다윗은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다"(시31:15)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칼뱅은 하나님의 손길을 알지도 믿지도 못하는 것이 인생 최고의 불행이며, 하나님의 손길을 알고 믿는 것이 최고의 위로와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염려를 떨칠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며 자기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6:26, 28).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피조물들을 한번 지으신 다음엔 아무 관심 없이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름 없는 새나 들풀도 이 땅에 살아가는데 어려움 없도록 돌보시고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자비하신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런 하찮은 미물들까지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자상하게 돌보시는데,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시며, 당신이 택하신 자녀들은 반드시 책임져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해하여 '하나님은 공중 나는 새가 심거나 거두지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데 저들을 먹여주시니, 우리도 아무 일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어련히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라'는 말씀은 공중을 나는 새들은 아무 일하지 않고 유유자적하게 나는 것이 아니라 먹이를 찾아 분주히 하늘을 날고, 백합화도 가만히 서있는 것이 아니라, 쉬지 않고 땅에서 물과 양분을 빨아올리고, 햇빛을 받아 탄소동화작용하며 자신을 가꿉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믿고 자기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할 때 염려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행동이 없으면, 생각만 하면서,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져 심신이 지치게 됩니다. 생각을 멈추고 일어나 움직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행동하고 보면 걱정이 없는데, 행동은 하지 않고 생각만 하니 걱정만 가득하여,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생각은 자꾸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어져 시간이 흐를수록 나쁜 생각만 자꾸 들면서 시험에 빠져 염려의 노예가 됩니다. 지금 당장 생각을 접어버리고 일단 행동으로 옮겨보십시오. 그러면 대부분의 염려는 떨쳐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크롬웰의 특사인 화이트 락이 스웨덴에 가면서 조국에 대한 불안한 마음으로 잠 못 이루자, 사환이 "당신이 태어나기 전에도 하나님은 세상을 잘 다스렸지요?"하고 묻습니다. "물론!"라고 대답하자 "당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하나님은 세상을 잘 다스리시겠지요?"라는 질문에 "물론!"하고 대답하니 "당신께서 살아 있는 지금도 하나님은 세상을 잘 다스릴 줄 믿습니까?"하니, 대답도 없이 평안히 잠들었습니다.
둘째는, 중요한 것을 먼저 추구하는 가치관의 우선순위가 있어야 합니다. 33절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염려'라는 말은 헬라어로 '메림나오'로서 '갈라진 마음'이란 뜻입니다. 일본어 '심빠이(心配)'라는 말 역시 마음이 갈라진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왜 염려합니까? 어느 한 가지에 몰두하면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할까, 저것을 할까?'하며 마음이 고정되지 못하고 흔들릴 때, 염려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 최대 관심사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주기도문대로,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지금 여기에서 이뤄지길 구해야합니다.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당시 해군사령관이던 스원스 씨에게 정치이념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지금까지 저는 세 가지 원칙에 따라 살아왔습니다. 첫째, 파도가 밀려올 때는 사자처럼 용감히 대처했지요. 둘째, 파도가 배를 덮을 때는 쥐를 잡으며 작은 일부터 해결해 나갔습니다. 쥐가 선창을 갉아먹어 구멍을 뚫으면 파선하게 되니까요. 셋째,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당황할 때는 무조건 정의의 편에서 행동했습니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가 3층 다락방에서 40도를 오르내리는 고열과 통증으로 꼼짝도 못하고 사흘 동안 누워 있다가 의사 친구에게 전화했으나, 그 친구는 빨리 오지 않았습니다. 쇼는 신경질이 나면서 더욱 몸이 아픈데, 누군가 계단을 급히 뛰어올라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친구 의사가 왕진가방을 들고 단숨에 3층을 뛰어 올라오며 다락방 문을 왈칵 밀고 들어서는 순간, 이 의사는 숨을 훅 몰아쉬더니 그 자리에 고꾸라졌습니다. 비명도 못 지르고 쓰러져버린 친구를 보고 화들짝 놀란 버나드 쇼는 후닥닥 침대에서 튀어 일어나 심장에 귀를 대어보고, 눈을 뒤집어 보고, 허리띠를 풀고, 인공호흡을 하고, 정신 없이 땀흘리며 주무른 끝에 드디어 친구가 눈을 떴습니다. 친구가 살아났다고 환호하는 쇼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나는 가보겠네. 왕진비 내놓게." "이 사람아, 쓰러진 건 자넬세. 정신 차려! 내가 자네를 인공호흡까지 시켰네." "그런가? 자네가 병을 고쳐달라고 나를 불렀는데 내가 쓰러지니까 자네는 놀랬지? 내가 더 위험해 보이니까 자네는 자네 병을 잊고 내게 매달렸지? 이게 바로 나의 치료법일세. 인간은 자신보다 남을 더 염려할 때 자신의 병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되는 법일세. 이제 자네 병은 다 나았네. 왕진비나 두둑이 내놓게."
셋째는, 내일이 아닌 오늘에 족한 은혜를 구해야합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6:34). 우리는 염려를 해결하기 위해 오늘의 노력을 기울이지만, 내일은 내일 찾아오기에 내일 문제는 오늘 처리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일은 오늘의 은혜로 족하고, 내일은 새로 은혜를 주실 테니, 내일 일은 그 새 은혜로 감당해야합니다.
학교에서 종을 치는 종치기가 날마다 계속 종치는 일로 노이로제에 걸렸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왜 그렇게 행복하지 못한 지 물어보았습니다. 그 종치기는 매우 고통스럽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이 종을 36,000번 쳐야 합니다. 매일 이 학교에서 10번씩 종을 치는데 계산해보면 일주일에 70번, 한 달이면 300번, 일년이면 3,600번이기 때문에 내가 이 일을 다 끝내려면 앞으로도 10년을 더 쳐야 합니다." 그 말을 듣던 사람이 보다 못해서 이런 충고를 했습니다. "형제님! 하루에 10번씩만 종을 치시고 한번에 한 번씩만 종을 치시면 되지 않습니까?"
일본 교세라 창립자이며 명예회장으로 일본 경영자로서 최고의 존경을 받는 이나모리 가즈오는 말합니다. "나는 장기적인 경영계획을 세워본 적이 없다. 내일 일은커녕 오늘 일조차 제대로 예측 못하는데 10년 후가 보일 리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하기 위해 늘 노력해왔다. 오늘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공부하면 내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제와 내일이란 두 날로부터 자유하면, 언제나 평안할 수 있습니다. 지난 문제는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내일 일은 '여호와이레'를 의지하며, 오늘 일에 나의 성실을 다하면 됩니다.
유명한 [천국의 열쇠]를 쓴 A.J. 크로닌이 가난한 환경에서 어렵게 의과대학을 졸업하면서, 그는 드디어 지겨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는 희망과 포부로 들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개원 첫날부터 계속 크고 작은 사고들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심지어 분명히 성공적인 수술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환자의 상태가 수술 전보다 더욱 악화되어 결국 죽음에 이른 사건까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1년이 지난 뒤엔 빚을 갚기는커녕 더 많은 빚더미에 올라앉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크로닌은 무겁고 착잡한 심정으로 무작정 길을 나서 정처 없이 거리를 배회하다 어느 허름한 예배당 앞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생전 처음 교회에 들어가 십자가 앞에 엎드렸습니다. 한번도 기도해보지 않았기에 무슨 말을 해야할지 막막하여 그저 "하나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라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그때 마음속에 조용한 음성이 메아리쳤습니다. "의사로서 네 목표가 올바로 세워져 있느냐? 진정 돈 벌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먼저 환자의 건강을 생각해라. 그리고 최선을 다해 그들의 건강을 되찾아주어라." 그 날 예배당에서 떨리는 경험은 그를 새로운 의사로 태어나게 했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돈버는 것보다 환자의 건강을 염려하며 치료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은 대부분 건강과 웃음을 찾아 돌아갔고, 그와 함께 그는 많은 돈도 벌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았기에, 그 돈을 모두 선교기금으로 내놓았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불필요한 욕심을 떨쳤더니, 염려를 떨치고 의사로서 크게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나치수용소에 있던 코리텐붐 여사는 말했습니다. "만일 이 세상을 보면 우리는 절망할 것이다. 만일 우리 내면을 바라보면 낙담할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안식할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이란 하나님께 집중하면서, 그분께 내 삶의 초점을 맞추는 것인데, 우리는 자신만 바라보기에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문서에 나오는 성도들의 이름 중에는 '티테디오스'(Titedios)라는 이름이 많았습니다. '티테디오스 요한', '티테디오스 바울', '티테디오스 알미니우스' 등, 그런데 이 '티테디오스'라는 말은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들이 예수 믿고나서 자신의 삶이 변하게되자, 자기 이름에 덧붙인 애칭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그들은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놀라운 은혜를 입고서 이 이름을 붙였습니다.
잠언에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17:22)고 했습니다. 뼈를 마르게 하는 염려와 근심을 십자가 밑에 내려놓읍시다. 어두워져 가는 세상을 연연하지 말고, 다가오는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이루며 삽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할 때,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