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20 157회
"저 가나안을 향한 순례길"
2020년 9월 20일 주일예배
창세기 11 : 31 - 12 : 5 ; 히브리서 11 : 8 - 10
'남자의 얼굴은 이력서고 여자의 얼굴은 청구서'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는 흔히 이력서로 자신을 설명하는데, '이력'이란 말의 '이(履)'자는 '신발 이'자요, '역(歷)'은 '지낼 역'자로서, 그 사람이 신을 신고 지내온 발자취를 기록한 것을 말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는 것은 '그가 어떤 길을 걸어왔느냐'가 말해줍니다. 인생은 우연이 아닙니다. 지난날 내가 걸어온 길에 의해 오늘의 내 모습이 결정되었고, 그리고 오늘 나의 걸어가는 길에 따라 내일의 나의 운명도 결정됩니다.
어떤 목사님은 승용차에 나침반을 달고 다니는데, 친구들이 나침반을 보고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길 잃어버릴까 봐서 나침반 달고 다니나?"하고 묻곤 하는데, 그럴 땐 이렇게 대답한다고 합니다. "나는 이 나침반을 볼 때마다 '너는 지금 어디로 가느냐? 이대로 가다가 죽어도 후회 없는 길을 가고 있느냐?'라고 나 자신에게 묻는다"라고 대답한답니다. 되는 대로 사는 사람에겐 성공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대로 가다가 여기서 멈춰도 후회 없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그 목적지도 중요하지만, 한번 목표가 정해지면 꾸준히 가야만 합니다. 야생동물에 비하면 인간의 근력은 초라한 편인데, 성인 남자의 평균 악력은 50kg, 침팬지의 악력은 129kg, 오랑우탄은 193kg, 고릴라의 악력은 326kg입니다. 하지만 어떤 동물도 따라오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지구력입니다. 인간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동물도 42.195km를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릴 수 없습니다. 멕시코에 있는 '타라후마라'라는 원시 부족은 오직 달리기로만 사슴을 사냥하는데, 시속 70km로 달리는 사슴을 고작 시속 20km로 달리는 사냥꾼이 추적을 사슴은 순식간에 먼 지평선으로 달려가 버립니다. 하지만 사냥꾼은 서두르지 않고 묵묵히 쫓아갑니다. 달아난 사슴이 보이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고 발자국이나 냄새를 통해 도망친 방향을 찾아 계속 쫓아가면 시속 70km로 달리던 사슴의 속도는 점점 떨어지지만 타라후마라 부족은 사냥꾼은 시작할 때와 비슷한 속도로 끊임없이 달려갑니다. 그러면 이들은 아무런 도구도 쓰지 않고도 결국 지쳐 쓰러진 사슴을 잡게된다고 합니다.
사람은 한 걸음에 1미터씩 걸어서 30발자국을 간다면 30미터를 갈 수 있는데, 이것이 산술급수적 변화입니다. 그런데 만일 기계의 도움을 얻어 첫걸음에는 1미터, 두 번째 걸음에는 2미터, 세 번째는 4미터, 이렇게 2배씩 30발자국을 간다면 얼마나 걷게 될까요? 불과 29번째 발걸음이면 달에 도착하게 되고, 30번째 발걸음이면 다시 지구로 돌아오고도 남게된다고 합니다. 기하급수적 변화는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 우리는 천국에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동행할 때, 그 어떤 곳에도 미치지 못할 곳은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이 땅에서 나그네 삶을 살았음을 증거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11:13-14). 성도들은 이 땅에 발을 딛고 있지만, 저 멀리 있는 하늘에 있는 본향을 향해 순례하는 나그네로서, 한 곳에 집 짓고 안주하기보다 천막에 임시로 거처하는 생활을 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본문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가족이 본래 살던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가나안땅을 향해 옮겨간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는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땅으로 직행한 것이 아니라, 중간에 하란에 오래 머물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가나안땅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거쳐간 갈대아 우르와 하란과 가나안의 의미를 통해, 우리 믿음을 길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첫째, 아브라함이 떠난 곳, 갈대아 우르입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창11:31). 여기 '갈대아인의 우르'는 고대 바벨론의 도시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로서, 아브라함이 원래 살던 곳입니다. 지금은 이라크 남부에 자리잡고 있는 이곳은 유프라테스강으로 물이 넉넉한데, 이미 4천년 전부터 무역이 성행했고, 상업이 번성했던 도시입니다. 당시 인구가 30만에 육박했음을 보면, 얼마나 번창한 도시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곳은 당시 각종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문화가 발달한 곳으로, 특히 '나나'라는 달 신을 숭배하기로 유명했던 곳이었습니다.
유념할 것은 '갈대아 우르'에서 [우르]는 '목마르다, 폐허가 되었다, 황폐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라는 사실입니다. 갈대아 우르는 겉으로는 무역이 성행하고 상업이 발달하여, 당시 상당히 부유한 도시였고, 주변에 유프라테스 강이 흘러 물이 넉넉했음에도 이곳은 목마른 도시였던 것입니다. 비록 물질문명은 발달하여, 도시는 부유하고 자원이 넉넉했지만, 영적으로는 참으로 갈급한 곳, 황폐한 곳, 목마른 도시였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여호수아 24장 2절에서 그 단서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이곳은 바로 우상을 숭배하던 도시였습니다. 하나님 없는 세속적인 쾌락과 물질주의로 인해 이 도시는 더 큰 갈증과 목마름으로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마치 수가성 여인이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어도 채울 수 없는 갈망으로 누군가 또 다른 남자를 만나기 위해 다른 여인들은 찾지 않는 뜨거운 정오에 우물가에 나왔던 그 목마름이 갈대아 우르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물질문명의 발달과 경제적으로 풍요했던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었지만, 우상숭배의 도시에서 그의 심령은 공허했고, 영혼은 타는 목마름 속에, 영적 허기로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파스칼은 말하길 "인간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구멍이 있다. 그 구멍은 세상의 쾌락이나 물질과 명예와 권세론 채울 수 없다. 그런 것은 도리어 실망과 불만족과 허무만 남게된다. 오직 그 구멍을 채울 수 있는 것은 한없이 부어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실 때만 진정한 만족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어떤 음료로도 해갈할 수 없는 목과, 어떤 음식으로도 채울 수 없는 배가 있기에, 결코 재물이나, 하나님 없는 자유나, 말초적인 쾌락으론 결코 행복할 수 없고, 오직 주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품에 안길 때만 진정 행복합니다.
하루하루 의미 없이 피곤하게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도종환 시인은 [귀가(歸家)]라는 시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지쳐있었다./ 모두들 인사말처럼 바쁘다고 하였고/ 헤어지기 위한 악수를 더 많이 하며/ 총총히 돌아서 갔다./ 그들은 모두 낯선 거리를 지치도록 헤매거나/ 볕 안 드는 사무실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일을 하였다./ 부는 바람 소리와 기다리는/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지는 노을과 사람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밤이 깊어서야 어두운 골목길을 혼자 돌아와/ 돌아오기가 무섭게 지쳐 쓰러지곤 하였다./ 모두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라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몸에서 조금씩 사람의 냄새가/ 사라져 가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터전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쓰지 못한 편지는/ 끝내 쓰지 못하고 말리라/ 오늘 하지 않고 생각 속으로 미루어둔/ 따뜻한 말 한마디는/ 결국 생각과 함께 잊혀지고/ 내일도 우리는 여전히 바쁠 것이다./ 내일도 우리는 어두운 골목길을/ 지친 걸음으로 혼자 돌아올 것이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황폐하고 목마른 땅을 떠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땅을 향해 믿음의 순례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행7:2b-4). 그는 목마른 땅에서 생수의 땅을 향해,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순례의 길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결단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저 생명의 땅을 향해 신앙의 순례를 떠난 것입니다.
둘째, 지체하는 곳 하란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을 향해 길을 가다가 하란에 이르게 되자, 웬일인지 더 나아가지 않고 그곳에 머무르고 말았습니다. 본문 31절입니다.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이 '하란'이란 지명에 대하여 게세니우스(Gesenius)라는 언어학자는 '낭비하며 지체하는 곳'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을 향해 순례의 길을 가다가 이곳 하란에 이르자, 웬일인지 그곳에 머물며 시간을 낭비하며 지체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그 단서를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행7:4). 아브라함이 하란에 머물며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지 않고 지체하다가 아버지 데라가 죽자, 그제야 길을 떠나 가나안을 향해 옮겨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에 머물었던 이유는 아버지 데라 때문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데라]의 이름이 '연기하다'는 뜻이라고 언어학자 게세니우스는 말합니다. 이를 통해 추리해볼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목마른 갈대아 우르를 떠나 생명의 땅 가나안을 향해 가다가, '낭비하며, 지체하는' [하란]에 머문 이유는 아버지 데라가 '내일 떠나자, 내달에 떠나자, 내년에 떠나자'며 자꾸 출발을 지연시킨 때문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래서는 아무래도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향해 길을 가지 못하겠다"싶어 그곳에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를 데려가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창12:1)는 말씀대로 갈대아 우르라는 고향은 떠났지만, 그의 친척 아비 집은 떠나지 못함으로, 하란에서 시간낭비와 의미 없는 허송세월을 보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이런저런 구실로 떠나야할 길을 연기하고 낭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때론 가족 때문에, 때론 앞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리고 안일과 나태로 인해, 차일피일 미루고 연기하며 낭비의 세월을 보내고 있진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쓸모 없는 것에 집착할 때 그것을 제거하십니다. 때로 우리에게 물질이 우상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면 물질을 거둬 가시거나, 건강이 핑계로 불순종하면 건강을 거둬 가시고, 또는 직장이나 가정까지도 하나님보다 더 중요시하여 우상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아브라함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때서야 정신차리고 가나안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며 삶을 낭비하게 만드는 헛된 일을 핑계로 소중한 인생을 낭비해선 안됩니다.
노르웨이에 살던 들오리 떼가 추워지는 날씨를 피해 지중해 해변으로 이동을 하다가 네덜란드 상공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들오리 한 마리가 아래로 내려다보니 어떤 집 뜰에 집오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평화롭게 먹이를 먹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날갯죽지가 아파 오는 것을 느낀 들오리 한 마리는 떼를 떠나 홀로 내려앉았습니다. 집오리들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며칠을 지내게 됩니다. 그러나 문득 이래서는 안되지 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 날아오르려 하니 그 동안 날지는 않고 계속 배불리 곡식을 먹기만 하여 몸이 무거워져 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럭저럭 몇 달이 지나 가을이 되자 들오리 떼들이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으며 지중해로 날아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곳에 머물러 있던 한 마리 들오리는 날아오르려 애를 썼지만 이제는 영영 날아오르지 못한 채 추운 겨울을 맞아 얼어죽고 말았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입니다. 아브라함이 드디어 가나안 땅에 도착합니다.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창12:5). 여기서 '가나안'은 세 가지 의미입니다. 먼저 지리적인 장소로, 팔레스타인에서 오론테스 강에 이르는 해안지역을 지칭하는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부릅니다. 다음은 영원한 천국으로, 우리가 이 땅을 떠나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거할 천국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소명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 살던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셨듯이,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명하시는 소명의 장소를 가나안이라 하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소개하는 가나안땅은 '생명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라고 합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 부족함 없이 우리로 풍성한 축복을 누리게 하는 곳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이 땅에서도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게 되며, 이 세상을 떠난 후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천국에 이르는 길을 알고 있습니까? 과연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천국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까? 천국을 잃어버린 인생은 가장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이 LA에서 공부하는데, 주일에는 어느 한인교회에서 설교목사로 봉사하게 되었는데, 가난한 신학생이라 학교 기숙사에서 교회까지 먼 길을 대중교통으로 다녔습니다. 그 교회에서 이 목사님에게 교회에 올 때 타고 오라고 승용차를 한 대 사서 보내주었습니다. 목사님이 그 차를 받고는 주일에 곧바로 운전해서 교회로 찾아갔더니, 교인들이 놀라며 하는 말이 "아니 목사님, 어떻게 미리 와보지 않고 단번에 그 복잡한 길을 겁없이 운전해오셨습니까?"라고 묻기에, "교회에 오는 길이니까 그냥 달려왔지요. 무슨 잘못된 일이 생기면 그대로 천당에 직행하니까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 어떤 분도 전에, 무언간 피치 못할 일로 주일에 교회에 나오지 못하고 어딘가 차를 운전하여 가게 되면, 꼭 기독교방송을 틀어놓고 운전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천국을 바라보고 길을 가야합니다.
그렇다면 저 영원한 가나안땅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 우리가 가야할 그 길을 잃지 않도록 우리의 목표를 날마다 확인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3-14). 우리는 영원한 가나안을 향해 길을 가는 순례자입니다. 천국의 푯대만 바라보며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고 분명히 앞을 확인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오래 전 알프스에서 길 잃은 사람이 13일간 방황하다 구출됐는데, 그는 매일 12시간씩 걸었으나 6㎞ 반경의 같은 장소를 맴돌기만 했습니다. 사람은 눈을 가리면 똑바로 걷지 못하고, 100m쯤 가면 결국 계속 맴돌게 되는데, 이런 현상을 윤형방황(輸形彷徨)이라고 합니다. 똑바로 걸으려면 30보쯤 걷고 멈췄다가 가야할 방향을 마음에 그리며 다시 30보씩 걸어야합니다. 우리 믿음의 행로도 그냥 걷기만 하면 본래 길에서 벗어나 방황하게되기에 가던 길을 멈추고 본래 목표를 점검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 믿음의 발걸음을 멈추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며 신앙의 경주를 계속해야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라"(히12:1). 우리의 신앙의 출발이 아무리 갈대아 우르에서 잘 시작했을지라도, 하란에 머물려 그 자리만 맴돌면 안됩니다. 우리 믿음의 전진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가 그를 붙들고 앞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게 지연시켰을 때, 하나님은 끝내 데라를 데려가심으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가나안을 향해 다시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제 자리만 맴돌다가 이런 불행을 자초하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영국의 정치가 조셉 챔벌린이 젊을 때 교회학교에서 가르쳤는데, 그가 좋아하는 말씀은 바로 "그들이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창12:5)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그에게 성공적인 인생을 위한 두 가지 조건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첫째는 올바른 목적지를 갖는 것입니다. 곧 그들은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났다'는 것이고, 둘째는 '마침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더라'는 말씀처럼, 한번 시작한 후엔 계속 그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경주는 끝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가장 보기 흉한 것은 불타다가 꺼진 채 까만 그을음만 남은 나무처럼, 신앙생활도 처음엔 열심히 믿는 듯 하다 그 열정이 꺼져버려, 불신앙에 빠져 타락해버린 모습입니다. '살 뻔했다'는 말보다 '죽을 뻔했다'는 말이 나은 것처럼, 구원받지 못하고 '구원받을 뻔한' 자리에 머무는 것처럼 불행한 일이 없습니다.
셋째, 그 나라를 대비하여 오늘의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달란트의 비유처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일생을 결산될 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1)하는 칭찬과 상급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무신론자로서 저명한 언론이었던 말컴 마거릿지가 캘커타의 마더 테레사를 방문하여 3일 동안 그녀의 모습을 취재하고 오랜 무신론을 버리고 기독교인이 될 것을 결심하면서 "나는 아직 기독교 신앙의 깊이를 알지 못하지만, 무엇이 한 인간의 생애를 그토록 온전히 헌신케 하겠는가, 자기를 버리고 온전히 헌신할 때는 무엇인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1620년 7월 22일, 청교도들은 네덜란드의 델프트 항을 떠나 미국 뉴잉글랜드로 갈 만반의 준비를 갖췄습니다. 지도자들은 "위대하고 숭고한 행위에는 여러 고난이 뒤따르게 마련이라"고 용기를 북돋웠지만, 항해를 가로막는 장애는 끝도 없이 이어졌고, 일단 출항하면 여러 위기에 봉착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한시라도 빨리 나가고 싶었습니다. 지도자 중 하나였던 윌리엄 브래드포드(William Bradford)는 저서 [플리머스 식민의 역사](History of Plymouth Plantation)에서 "엄청난 위험이지만 절망적이진 않았다. 어려움이 도처에 널렸지만 우리를 압도하지는 못할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존경받던 존 로빈슨(John Robinson) 목사가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이 귀환 길에 오르는 내용인 에스라 8장 21절을 본문으로 고별설교하자, 메이플라워호 청교도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설교였습니다. 로빈슨은 "이스라엘의 귀환 백성처럼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가 되었고 에스라를 돌보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설교를 마친 후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청교도 이주민을 주님께서 돌봐주시길 기도하고, 눈물 흘리며 작별인사를 했는데, 그는 네덜란드에 남아, 그곳에 머물다가 언젠가 떠나게 될 청교도를 돌보아야만 했습니다.
청교도들은 첫 정박지인 영국 플리머스에 잠시 체류한 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가로질러 항해하였는데, 여정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선원들이 험악하게 시비를 걸며 비아냥거리기 일수였고, 때로 거센 풍랑으로 선체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11월 11일 메이플라워호가 미국 매사추세츠의 케이프 코드에 도착하자, 자주적 식민지 정부를 수립하고 다수결 원칙에 따라 운영할 것을 다짐한 메이플라워 결의문을 작성하여 미국의 민주정치 확립에 토대가 되었습니다. 혹독한 겨울이 지나자 영국 어부들에게 영어를 배운 스콴토(Squanto)와 사모셋(Samoset) 인디언이 찾아와 옥수수재배와 낚시를 가르쳐주며, 이들의 생존을 결정적으로 도왔습니다. 정착한 첫 해 52명이 죽었지만 첫 추수를 마치자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며, 도와준 인디언부족과 사흘 간 함께 축제를 벌였습니다. 윌리엄 브래드포드는 '참 보잘것없는 출발이었지만 이렇게도 위대한 일이 일어났다. 온 세상이 놀라워하고 감탄한다. 이 불꽃은 많은 사람을 비출 것이다'며 위대한 나라의 태동을 예고했습니다.
순례자는 자기가 가야할 궁극적인 본향을 알고 있는 사람인데, 만일 우리가 그 궁극적인 본향을 알지 못하고 인생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순례자가 아니라, 방황하는 나그네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지금 목마름의 땅 갈대아 우르에 있습니까? 가나안을 향해 순례를 나섰지만, 이런저런 구실로 지체하고 있는 하란에 있습니까?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갔으며...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11:8-10). 저 앞에 있는 가나안을 바라보고, 오늘도 힘차게 믿음의 길을 걸어갑시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