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관용

2020-06-14 106회

동문교회
031-701-0691 / 경기도성남시분당구야탑동 523번지
손세용 목사

마태복음 9장 18~26절

설교요약 :

"그리스도의 관용"
2020년 6월 14일 주일예배
마태복음 9 : 18 -26 ; 레위기 19 : 9 - 10


어떤 아내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남편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용서하는 마음과, 어떤 상황도 참을 수 있는 인내심을 주세요. 그러나 제게 힘과 지혜는 주지 마세요. 힘을 주시면 남편을 때려죽일 것 같고, 지혜를 주시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것 같거든요." 참으로 마음이 착한 여자의 기도입니다.^^^


하나님만 빼고 이 시대 모든 명사와 인터뷰했다는 CNN 시사토크쇼 '래리 킹 라이브'의 앵커 래리 킹이 한국에 와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게 가장 큰 영감을 준 사람은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다." 그는 남아공에 가서 인터뷰했던 만델라는 '어떤 종교지도자보다도 더 따뜻한 사람이었다'며, 그가 만난 영향력 있는 5만 명 중에 단연 만델라가 자신을 사로잡았다고 말했습니다. 루터 킹과 만델라는 모두 용기 있고, 정의로웠으며,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뜻한 가슴 없는 용기는 만용이 되고, 따뜻한 마음이 없는 정의는 흉기가 되고 맙니다.


존 칼린의 책 [인빅터스](Invictus)는 [우리가 꿈꾸는 기적]이란 제목으로 영화화됐는데,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남아공에서 럭비는 본래 백인들만의 스포츠입니다. 오래 전부터 백인들만 사용해온 남아공의 국기, 국가, 그리고 대표적인 럭비팀 스프링복스는 인종차별의 상징이었기에, 럭비경기가 벌어지면 흑인들은 남아공의 상대팀을 응원해왔다고 합니다. 27년 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만델라가 극적으로 대통령이 됐지만 나라의 통합은 불가능해 보였고, 백인들은 만델라의 당선으로 당할 복수를 불안하게 기다리며, 언제 분해될지 모르는 불안한 나라였습니다. 정권은 바뀌었지만 백인들만으로 구성된 스프링복스 팀의 유니폼은 흑인들이 가장 증오하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 남아공과 뉴질랜드의 월드컵 럭비 결승전이 벌어졌는데, 경기 5분전에 만델라가 스프링복스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에 등장했습니다. 그것은 흑인 지도자로서 백인들의 모든 것을 용서하고 수용하겠다는 사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약 5분동안 경기장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습니다. 그때 만델라는 따뜻이 미소지으며 백인 선수의 손을 잡자, 스탠드에서 누군가가 "넬슨~ 넬슨~ 넬슨~"하고 외쳤을 때, 그 소리는 온 경기장을 압도했고 흑인도 백인도 함께 울었습니다. 존 칼린은 말합니다. "만델라는 자신의 관용을 드러내는 이 조용한 상징적 행동으로 남아공을 새로운 국가로 전환시켰다. 그 날 남아공의 백인들은 만델라가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 '우리는 당신들의 과거를 용서합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들 백인들과 함께 열광하며 살아갈 것입니다'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흑인들도 그들의 지도자들을 따라 백인들을 용서하기로 동의한 것이다. 이렇게 용서와 화해의 새 날은 찾아왔다"


오늘 말씀에 예수께서 한 관리의 딸과,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고쳐주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관리의 딸과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매우 대조적인 신분입니다. 먼저, 두 사람은 사회적 신분에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한 관리'(아르콘)란 '통치자', 또는 '지배자'란 뜻으로 어떤 관직이나 종교기관의 장급 인사를 일컫는 말입니다. 마가와 누가는 이 사람을 '회당장 야이로'라고 했습니다(막5:22, 눅8:41). 당시 회당에는 몇 명의 관리가 회당건물의 유지와 보존과 운용 및 회당예배의 질서와 신성을 유지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본문의 이 관리는 가버나움의 회당장으로서, 이름이 '야이로'인데, 누가복음에는 '열두 살 된 외딸'(눅8:42)이라 하여, 좋은 집안의 사랑 받는 외동딸이었습니다. 그런데 열두 해 혈루증 앓던 여인은 그녀의 이름도 모를 만큼 천한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그녀는 12년이나 투병했는데, 유대인들에게 '12'는 완전수인데 그녀는 주님께로부터 치료받기 전까지 철저하고도 완벽한 고난의 세월을 보냈음을 암시할 만큼 불쌍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경제적으로도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회장장은 그 지역의 유지로서 경제적으로도 부유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이 회당장이 예수님을 모시고 집으로 갈 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하지마소서"(눅8:49)라고 소식을 전한 사람이 있었던 것을 보면, 심부름시킬 노예를 둘만큼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는 혈루증을 앓던 여인에 대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막5:26)라고 하여, 12년 동안 투병하면서 가진 재산도 다 허비한 가난한 여인임을 보여줍니다.


이뿐 아니라 두 사람은 종교적으로도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야이로의 딸은 그 지역 예배의 중심인 회당을 관리하고 대표하였기에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종교적인 경건이 인정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혈루증 앓던 여인은, 단지 몸만 병든 것이 아니라, 이 혈루증은 의식적으로도 불결하게 여겨 지역공동체에서 격리되었습니다. 구약에 "만일 여인의 피의 유출이 그의 불결기가 아닌데도 여러 날이 간다든지 그 유출이 그의 불결기를 지나도 계속되면 그 부정을 유출하는 모든 날 동안은 그 불결한 때와 같이 부정한즉"(레15:25)하여, 혈루증은 부정하여 기피의 대상이었습니다.


주님은 회당장의 딸과, 혈루증을 앓던 두 여인 모두 고쳐주십니다. 22절에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고 하여, 혈루증 앓던 여인을 고쳐주십니다. 25절에는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고 하여, 죽었던 회당장의 딸을 살려주십니다. 차이가 있다면, 혈루증 앓던 여인은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는 믿음'(마9:21)으로 고침 받았고, 야이로의 딸은 주님이 '달리다굼'하시며, 손을 잡아 일으키심으로 살아났습니다(막5:41).


이렇게 두 사람을 고쳐주신 모습을 통해 주님의 넓은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첫째, 주님은 신분의 고하나 소유의 빈부를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관리의 딸이나(18절),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가난한 여인이나(20절) 차별하지 않고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칫 그 사람 자체로 바라보지 않고, 그가 지닌 신분이나 지위, 혹은 지식이나 재산으로 평가하여, 그를 무시하거나 또는 아부하며 굽실거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가난하고 약한 자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부자나 높은 지위의 사람을 미워하거나 역차별하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가 부자든 가난하든, 지위가 높든 낮든, 외적인 모습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을 자비와 긍휼로 대하시며 저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주님이 탄생하실 때, 아기 예수께 찾아와 경배드린 사람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란 비싼 예물을 가진 동방박사들과, 들에서 양을 치던 가난한 목자들이었습니다. 또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에는 갈릴리에서 물고기 잡던 가난한 어부들이 있었지만, 아리마대 요셉 같은 부자나(마27:57), 니고데모 같은 지위 높은 관원(요3:1)도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주님은 사람을 가난하고 배우지 못했다고 무시하지 않으셨고, 그렇다고 사람이 돈이 많고 높은 지위에 있다고 해서 이를 비판하거나 정죄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야말로 부자도 가난한 자도 모두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를 돕고 억눌린 자를 보살펴야하지만, 그렇다고 사회를 무조건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라는 이분법으로 사회를 분열시키는 것도 결코 바람직한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가난한 자가 무조건 의로운 것이 아니듯, 부자라고 해서 무조건 악한 것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과, 부자든 가난하든 누구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에게 복음을 전하여 저들을 구원받도록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끌고 영접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트리에이지 윤리'(Ethics of Triage)가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 때 많은 부상자가 야전병원에 실려오는데 의약품이 모자라 모두다 치료할 수 없자, 약간의 처치로 살 사람은 치료해주고 살지 못할 사람은 아예 치료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도움을 줄 것이냐 말 것이냐의 선택을 '트리에이지'라고 합니다. 주님은 강자생존의 '트리에이지 윤리'를 배격합니다. 그래서 굶주린 5천 명 중에 빵 5개를 가장 강하고 장래성 있는 5명에게만 먹이고 4,995명은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똑똑하든, 바보든, 건강한 남자든, 장애 여성이든, 굶는 것은 똑같다고 보시며, 학식과 권력의 높고 낮음은 문제되지 않고, 모두를 동일하게 보신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이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남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이런 모두에 대한 사랑으로 5병2어가 5천 명을 먹인 것처럼, 차별 없는 사랑이 놀라운 결과를 가져옴을 주님은 보여주셨습니다.


둘째, 그러나 주님은 약자에 대한 배려와 관심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18절에 보면, 먼저 주님께 도움을 요청한 사람은 회당장인데, 22절을 보면 먼저 고침 받은 사람은 혈루증 앓던 여인입니다. 또 18절에는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고 하여, 회당장의 딸은 방금 죽었다고 했지만, 마가복음에는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막5:23)라 하여, 지금 목숨이 경각에 달린 급박한 상황이었습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은, 오래 고생하기는 했지만, 당장 고쳐주지 않는다고 곧 죽을 상황이 아닌데도 주님은 혈루증 앓던 여인을 먼저 고쳐주십니다. 주님은 죽은 자도 살리실 능력이 있으셨기에, 회당장의 딸이 죽더라도 살려내실 수 있으셨지만, 약한 자에 대해 배려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영접해야 하지만, 특히 약하고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바울은 영혼구원을 위해 그토록 열심을 다했지만, 가난한 자를 돕는 일에도 항상 힘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왔노라"(갈2:10). 부자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복음만일지도 모르나,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게는 복음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도움도 필요합니다. 세상은 권력과 소유에 의해 좌우되지만, 신앙인은 말씀과 주님의 사랑을 따라 행해야합니다. 사랑은 모두에게 필요하지만, 특히 소외되고 약자들에겐 더 절실합니다.


강철왕 카네기의 성공비결은 재물관리가 아닌 진실한 인간관계였습니다. 그가 평생 용서를 인생의 기반으로 삼게된 청년 때의 소중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거액의 공금이 든 가방을 들고 기차를 탔는데, 좌석이 없어 통로바닥에 앉아 잠깐 조는 사이 가방이 기차 밖으로 퉁겨나갔습니다. 다급한 그는 기관사에게 뛰어가 호소하자 이해심 많은 기관사는 어려운 일이었지만 열차를 후진시켜주었습니다. 그래서 카네기는 개울가에 떨어진 가방을 찾고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습니다. 그는 개울가에서 가방뿐 아니라 용서와 관용이란 인생의 보석도 발견하고서 의도적으로 잘못하지 않는 한, 성실하게 노력하면 그의 실수도 품어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셋째, 주님은 부정하고 허물 많은 자에게도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혈루증은 육체적인 고통만이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부정한 병이었습니다. "여인의 유출이 있는 모든 날 동안에 그가 눕는 침상은 그에게 불결한 때의 침상과 같고 그가 앉는 모든 자리도 부정함이 불결한 때의 부정과 같으니, 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다 부정한 즉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요"(레15:27). 유대인에게 피는 생명을 상징하여, 매일 피를 흘리는 것은 저주로 취급되어, 나병 환자와 같이 종교적으로 부정하였기에, 사회적으로도 격리되었던 부정한 병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부정한 여인이 다가와 옷자락을 잡는데도,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9:22)고 말씀하시며, 그녀를 치료해주십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할뿐더러, 옷에 손을 대면 함께 부정해질 수 있기에 결코 허용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주님은 이 부정한 여인이 옷을 만지는 것을 허용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고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영혼의 구원까지도 베풀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8:11)며, 그녀를 용서하시고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너그러운 사랑의 주님이셨습니다.


박정도라는 사람의 [이웃집 아저씨의 관용]이란 제목의 이런 글이 있습니다. - 시골에서 태어나 자라다 보니 집집마다 소, 염소, 닭, 개, 고양이 등 가축을 길러 팔아서 살림에 보태거나, 잡아서 거의 채식만 하는 몸에 부족한 영양분을 보충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라서 가축을 길러 집안 살림에 보탰는데 가축을 보살피는 것은 거의 내 몫이었다. 낮에는 산이나 들, 집 마당에 풀어놓아 자유롭게 놀게 하다가 밤엔 우리에 가두었다. 하루는 저녁 무렵에 닭을 우리에 가두려고 하는데 이웃집 닭이 몇 마리 섞여 놀고 있었다. 이웃집의 닭을 내쫓고 우리 닭만 가두었는데 한 마리가 계속 맴돌며 가지 않았다. 나는 이웃집 닭을 내쫓는다고 장작개비를 던졌는데 그만 그 닭이 장작개비에 맞아 죽어버렸다. 겁이 덜컥 나서 얼른 죽은 닭을 옆집 볏짚 가리 속에 숨기고는 모른 척 했다. 그러나 이웃집에서는 어떻게 알았는지 나의 소행임을 눈치 채고 나를 불렀다. 주눅이 들어 야단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웃집 아저씨는 이미 닭은 죽었으니 너무 염려 말라고 오히려 나를 안심시켰고, 그 닭으로 맛있게 한 요리를 같이 먹자고 하셨다. 그리고 누구나 실수를 할 수도 있으니 염려말고 다음부터는 아저씨네 가축도 잘 돌봐달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 때 잘못을 저지르고 용서를 받은 뒤로 나는 남의 잘못이나 실수를 보면 자초지종을 면밀히 살 핀 뒤에 관대히 처리하는 버릇이 생겼다. 사람의 눈에는 상대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먼저 보이고 실수나 과오를 관대하게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불가피한 실수일 경우에는 꾸중보다는 애정 어린 격려나 따스한 충고가 그 사람을 성숙하게 만드는 촉진제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주님의 넓은 마음인, 관용을 배워야합니다. '관용'이란 헬라어 [에피에이케스]는 '인내, 부드러운 마음, 절제'로서, 한 마디로 '덕'을 뜻합니다. 또한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향해 너그럽게 대하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관용'이란 '옳은 일보다도 더 큰 어떤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것은 정당하다"고 주장하지만, 세상에는 정당한 것보다 더 큰 것인 덕이 필요합니다.


관용의 소극적인 의미는 다른 사람의 허물이나 약점을 감싸주고 덮어준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면서, 그가 행한 대로하면 마땅히 처벌하고 응징해야 하지만, 그 허물과 잘못을 덮어주고, 용납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 위해선 모든 죄는 밝혀야 하고, 그 죄 값은 치르도록 해야한다"고 말하지만, 세상사가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알면서도 모른 척 해야만 할 때가 있고, 분명히 잘못한 일임에도 그것을 감싸주고 덮어주어야만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일이면 십자가를 져야하셨기에 겟세마네에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36:38)고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에게 부탁하셨는데, 저들은 피곤하다는 이유로 몇 번을 깨웠지만 계속 잠만 잤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향해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26:41)하시고, 끝까지 저들을 용납하시고 사랑하시며 품어주셨습니다.


결혼 15년 된 부부가 점점 불평이 생기고 의견대립이 늘어갔습니다. 그래서 결혼생활을 좀더 성공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기로 의논하다 아내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그것은 한달 동안 각자 통을 하나씩 가지고, 상대에 대한 불평이나 결점이 발견할 때마다 그것을 써서 통에 넣고 이것을 한달 후에 서로 바꿔서 검토하면, 자기의 어떤 결점이 상대방에게 괴로움이 되는지 알 수 있고, 그것을 시정함으로써 결혼생활을 행복하게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아내는 남편의 결점을 볼 때마다 열심히 적어 통에 넣었습니다. 예를 들면, 목욕하고 타월을 그냥 목욕탕 바닥에 놓아둔 것, 설탕을 쓰고 뚜껑을 안 닫은 채 열어놓은 것, 양말을 빨래 통에 넣지 않고 아무 데나 벗어 놓은 것, 치약을 엉터리로 짜서 쓰는 것 등을 한달 동안 매일 열심히 써서 통에 넣었습니다. 이렇게 한 달을 보내고 저녁에 두 사람이 각자의 통을 바꾸어, 종이를 한 장씩 꺼내 읽었습니다. 남편이 먼저 아내의 글을 꺼내 읽었습니다. 다음엔 아내가 남편 통에서 한 장씩 꺼내 읽는데, 남편의 통에서 나온 쪽지는 모두 똑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남편은 아내의 결점을 볼 때마다, 종이에다 매번 그렇게 써서 넣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남의 허물까지 감싸줄 수 있어야 합니다.


관용의 적극적인 의미는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고 그를 세워주는 것입니다. 사람의 잘못과 허물을 덮어주는 것만으론 부족합니다. 적극적으로 그의 필요를 채워, 그를 세워주는 것이 관용의 참뜻입니다. 주님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며 다른 제자들까지 선동해 갈릴리로 가버린 베드로가 고기도 못 잡고 추위에 떨며, 피곤하고 시장한 것을 아시고, 불피워놓고, 조반까지 준비해주시고, "이리 와서 조반 먹으라"고 하시고, 식사 후에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고 하여, 그가 '잘못했다'고 빌기 전에 먼저 그를 용납하시고, 세워주셨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남아공과 호주의 럭비월드컵이 열리던 날, 베케 베케라는 흑인 청년은, 결코 백인을 용서하지 않고, 백인의 게임을 응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TV를 보다 갑자기 마음이 무너지면서, 자기 가슴속에 쌓인 증오가 녹아 내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새로운 현실이야. 이제 남아공의 팀은 나의 팀이야! 그들이 누구든 그들의 피부색이 무엇이든 그들은 나의 팀이야!" 하나님은 그 날 남아공에게 게임에서도 극적인 승리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다음 주일 만델라는 남아공에서 가장 인종편견이 심했던 네덜란드 개혁교회를 찾았고, 백인 목사와 교인들은 역사상 차음으로 자신의 교회를 방문한 흑인 성도 만델라를 끌어안고 함께 찬양을 부르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남아공에는 진정한 역사의 새 날이 찾아왔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진보 아니면 보수, 내편 아니면 적이라는 지나친 흑백논리가 판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흑백을 통합했던 넬슨 만델라는 "진정한 화해를 이루려면 적과 함께 일해야한다. 그러면 적은 당신의 동반자가 된다"는 믿음으로 정치했다고 합니다.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19:9-10). 성경은 내 것이라고 나 혼자만 먹으려고 움켜쥐지 말고, 어려운 이웃도 배려하여 너그럽게 나누고 베풀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느 아파트 근처의 세탁소에 불이 나 세탁소 전부를 태우자, 며칠 후 아파트 벽보에 '사과문'이 붙었습니다. 사과문에는 불이 나 옷이 모두 타서 죄송하다는 말과 옷을 맡기신 분들은 옷을 신고해달라는 내용이 적혀있었습니다. 공고가 붙은 후, 한 주민이 공고문 아래에 글을 적고 갔습니다. 으레 옷 수량을 적은 글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아저씨! 저는 양복 한 벌인데 받지 않겠습니다. 그 많은 옷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용기를 내세요'라는 글이 적혀있었습니다. 그 말 한마디에 아파트 주민들이 속속 배상을 받지 않겠다고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누군가 금일봉을 전했고, 그 사실이 알려지자 또 다른 누군가도, 또 다른 누군가도 도움의 손길을 보냈습니다. 얼마 후 아파트 벽보에 또 한 장의 종이가 붙었습니다. 다름 아닌 '감사문'이었습니다. '주민 여러분! 고맙습니다! 월남전에서 벌어온 돈으로 어렵게 일궈온 삶이었는데, 한순간에 모두 잃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따뜻한 사랑이 제게 삶의 희망을 주었고, 저는 다시 일어 설 수 있었습니다. 꼭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관용해야할 이유는, 주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대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5). 주님 뵐 날이 가까웠기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너그러울 뿐만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도 포용하고, 그의 잘못도 용납할 때, 우리는 너그러운 주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 18~26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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