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19 309회
"자녀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
2020년 7월 19일 주일예배
신명기 6 : 1 - 9 ; 마태복음 28 : 20
자녀교육을 위해 미국에 이민간 가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녀석이 말썽을 피우기에 엄마가 그 녀석을 매로 때리며 야단쳤더니, 그 아들이 경찰에 '엄마가 자기를 때렸다'고 신고했습니다. 그러자 곧 경찰이 달려와서 경찰서에 끌려가 곤욕을 치르고 나왔습니다. 그 어머니는 얼마나 화가 나든지 그 아이를 데리고 한국에 와서 인천공항에 내리자마자, 아들 볼기를 실컷 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길로 비행기를 타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에선 어머니가 교회 가자고 하면 종교강요로 경찰에 신고하라고 하고, 구리시와 성남시, 경북 청송군은 교회에서 소그룹모임을 신고하면 포상금을 준다고 합니다.
사람마다 각기 나름의 유전자가 있다는 인간게놈프로젝트가 2003년에 완성되었습니다. 사람마다 각기 나름의 유전자가 있는데, 어떤 사람은 우울증의 유전자가 있어 우울증을 대물림시킬 수가 있고, 부정적인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그 유전자로 인하여 부정적인 태도로 살아갈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전자만으론 인간의 모든 생명현상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 이 연구를 통해 확인되었습니다. 인간에게는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이 중요한데, 환경적 요인이 유전자를 지배하는 '후성유전학'에 의해 사람의 운명이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손매남 한국상담개발원 원장은 "후성유전학은 정신적인 외상은 물론, 믿음이나 영성과, 감정이나 신념, 인간의 모든 문제까지 영향을 미친다"면서 "후성유전학은 우리의 생각과 선택에 따라 두뇌와 몸, 정신 건강과 영적 상태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과학"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선택의 영향력은 우리의 영혼과 육체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관계까지 뻗어나가게 되고, 수천 세대에까지 그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선민'이라는 유전자가 있는데, 이 선민의 유전자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선택하지 않으면 후성유전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오늘날 미국을 만든 두 대표적인 가정의 사례가 있습니다. 매일 기도하며 예배드린 조나단 에드워드의 가정은 3백 명의 목사와 선교사와 신학교수가 나왔고, 1백 명이 넘는 대학교수와, 1백 명 이상의 법률가가 나왔습니다. 60명의 의사와, 60명 이상의 작가와, 14명의 대학 총장과, 3명의 국회의원과, 한 명의 부통령이 나왔습니다. 반면 유흥주점을 경영한 맥스 주크의 후손 1,200명을 조사했더니 310명이 부랑자였고, 440명이 방탕하게 살다 죽었으며, 130명은 평균 13살에 교도소에 갔고, 그중 7명은 살인죄였습니다. 알코올중독자가 100명 이상, 60명은 상습적인 도둑, 190명은 창녀였습니다. 이들 중 기술을 배운 20명 중에 10명은 주에서 150만 달러의 비용을 들여 교도소에서 배웠는데, 그들이 사회에 공헌한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역사를 바꾸고 세계를 움직인 인물 다섯을 뽑는다면 물리학의 아인슈타인, 공산당 선언을 만든 칼 마르크스, 인간의 무의식의 세계를 연구한 프로이드, 물리학의 아버지 격인 뉴턴, 진화론을 전개한 다윈을 꼽는다고 합니다. 이들 중에 한 가지 공통점은 다윈을 제외한 네 명은 유대인이란 점입니다. 지난 100년 간 노벨상을 받은 사람들 300명 중에 유대인이 100명을 넘는데, 경제학 분야는 65%, 의학 분야는 23%, 물리학 분야는 22%가 유대인이랍니다. 유대인들의 그런 경쟁력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환경이 좋아서일까요? 나라를 잃고 수 천년 세계를 떠돌았으니 환경 때문일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나라가 망하고 100년이 지나면 그 나라는 역사에서 사라지는 것이 통례인데, 유대인들은 그런 통례를 깨고 수천 년을 지나오며 여섯 개 문명발상지로 흩어져 살아오면서, 그들만의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왔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지능이 우수해서일까요? 조사에 의하면 유대인들도 태어날 때는 그냥 평균적인 지능이랍니다. 무엇이 유대인들로 하여금 세계사를 주도하는 자리에 서게 했을까요? 종교와 교육을 합친 특별한 시스템 때문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의 삶의 핵심은 그들의 종교인 유대교(Judaism)이고, 유대교의 중심은 구약성경입니다. 유대인의 우수성의 핵심은 그들의 경전인 구약성경을 어려서부터 반복교육을 통해 삶의 체질화를 이룬 결과입니다. 그 말씀의 대표적인 내용이 쉐마(Shema)로 알려진 신명기 6장으로, '이스라엘아 들으라'로 시작되는 말씀을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는 것으로, 이 말씀의 실천과 반복교육이 유대인의 탁월성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쉐마의 교훈은 무엇일까요? 첫째, 무엇을 가르치느냐 입니다.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신6:1). 여기 '명령과 규례와 법도'란 의식법과, 시민법과, 기타 제반 규례들을 포함한 하나님의 전 율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말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가르쳐야할 것은 성경인데, 그 교훈의 핵심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2, 5).
우리는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도 많은데, 그 외에 학원이나 개인교습을 통해 피아노, 바이올린, 미술학원, 태권도, 속셈학원, 웅변, 서예, 컴퓨터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교육은 간단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는 말씀이 유대인의 자녀교육의 핵심이요 전부라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은 교육이 이 율법에서 비롯되었고, 이 율법을 위해 필요하다고 여깁니다.
아인슈타인이 노년에 쓴 '나의 부고'라는 글에서 아버지가 나침반을 처음 보여주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어느 쪽으로 돌려도 나침반 바늘이 항상 북쪽을 가리키는 모습이 무척 신기하게 보여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 그 경험은 내게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사물의 이면에는 반드시 깊숙이 감춰진 무언가가 있다." 아버지의 나침반이 아인슈타인을 만들었습니다. 아버지가 건네준 책 한 권, 꿈이 담긴 말 한 마디가 자녀에겐 인생의 나침반이 될 수 있습니다. 별이 없고 나침반이 없으면 사람은 방황하기 마련입니다. 그저 제 자리를 맴돌거나, 어디를 향해 가는 줄도 모르고 항해하게 됩니다. 영원한 진리의 말씀을 모르면 급변하는 세상에서 방황하다가 실종하게 될 위험이 큽니다.
영어 단어 중 '재앙'을 뜻하는 '디제스터'(disaster)란 말이 있는데, 그 어원을 보면 '사라지다'라는 뜻의 'dis'와 '별'이란 뜻의 'aster'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별이 사라지는 것이 재앙이라는 말입니다. 나침반이 없던 옛날에는 항해할 때 북극성을 보고 방향을 잡았는데, 구름이 끼거나 비가 오면 별이 보이지 않으면 그야말로 재앙입니다. 코로나19의 사태는 그야말로 재앙, '디제스터'(Disaster)입니다. 별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과학시대, 별이 보이지 않아도 항해를 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진리의 빛이 되는 성경 말씀만 붙든다면, 아무리 어두운 구름에 가린 망망대해를 무사히 건널 수 있습니다. 구원의 별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전대미문의 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역사는 '그리스도 이전이냐, 이후냐'하는 BC와 AD로 나뉘었는데, 이제는 '코로나 이전이냐, 이후냐'라는 'before Corona'와 'after Disease'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세상은 다시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new Normal' 시대가 되었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벧전1:25)는 말씀처럼, 세상은 아무리 변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시기에, 하나님 말씀은 북극성처럼 영원한 길을 비춰줍니다.
둘째, 어디에서 가르치느냐 입니다.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6:7). 우리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할 곳은 어느 곳에서나 가르쳐야 합니다. 오늘 말씀대로 집에서나 길에서나, 누웠을 때나 일어날 때나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게 이 율법을 가르쳐야합니다. 먼저 가정에서 가르쳐야 하지만, 가정에서만 다 가르칠 수 없기에 교회에서도 가르치는 것입니다. '강론할 것이라'는 말씀은 가정뿐 아니라 교회에서 공적으로 선포하는 말씀을 통해 계속적으로 훈련받아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스펄전은 말합니다. "가정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지배될 때에 천사들이 그들과 동거하며 그들의 가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때, 천사가 그 일원이 될 것이다." 경건한 가정 분위기를 먼저 만들어야 교육이 되기에, 그 다음에 가르치라고 합니다. 그리고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7절)라고 말씀합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누가 가르치는 것입니까? 부모님이 가르칩니다. 부모님이 가르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어디에서 가르칩니까? 가정에서 가르칩니다. 무엇을 가르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칩니다. 먼저 행하고 본을 보여주며 가르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토라(율법), 모라(선생), 호라(부모)는 모두 [야라]라는 같은 어근에서 나온 말로, '가르친다, 교훈한다, 어떤 모양으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인 이스라엘에게 토라를 주셨고, 이스라엘의 부모는 자기 자녀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사명이 있기에, 부모란 말은 '토라를 가르친다'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6:7). 유대인은 가정에서 부모를 통해 글을 배우고, 하나님을 알게 되며, 토라를 배우고, 회당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모든 교육을 학교나 학원에 모두 맡겨 버리고 선생님이 모든 교육을 다 맡아 줄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점수 이상 무엇을 해 줄 수 있습니까? 한국 교육의 문제점은 아이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많이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이 안다고 훌륭한 교육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서구에서는 필요 이상의 과중한 공부를 학교에서 시키지 않는 다고 합니다. 깊은 연구는 전문가에게 맡기면 됩니다. 모든 교육이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참된 신앙적 교육의 장은 가정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생활은 전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자녀들에게 신앙을 심어주니 아버지의 신앙을 이어받는 전래의 신앙이요, 가문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녀에게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가르치며 민족의 지도자 모세를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을 주신 것을 가르쳐,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전승되어 온 신앙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것입니다.
평양에 살던 '강돈욱'은 교육가로서, 교회의 장로였습니다. 그는 강반석이라는 딸을 그가 세운 창덕기독학교의 교사인 김형직을 남편을 짝지어주었습니다. 일본의 탄압이 심해지자 딸과 사위는 만주로 보내면서, 외손주는 영특하고 리더십이 뛰어나 소련으로 유학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외손주가 바로 김성주, 민족분단의 주범이자 625 한국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입니다. 해방이 되자 김일성은 소련을 등에 업고 1948년 10월 10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주석이 되어, 자기에게 반대하는 목사들은 다 구속시켜버렸습니다. 한 믿음의 가정에서 생긴 슬프고 충격적인 일입니다. 양승헌 목사가 평양에 가서 김일성 자서전을 보니, 이런 글이 있더랍니다. "어머니는 일요일마다 내 손을 붙들고 교회에 갔다. 목사의 설교는 길고 지루했다. 어머니는 계속 졸고 있었다." 자녀에게 신앙을 물려주지 못해 일어난 민족의 비극입니다.
지방에 사는 어떤 장로님은 자기 딸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여 기숙사로 들어가게 될 때, 딸과 두 가지를 약속했다고 합니다. 하나는 매일 밤 10시에 부모와 딸이 서로를 위해 기도하자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매일 아침 잠언을 한 장씩 읽는 것이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이렇게 객지 생활을 하는 딸의 인격과 생활을 하나님께 맡기도록 했던 것입니다. 딸은 그 약속을 잘 지켰습니다. 매일 밤,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부모를 위해 함께 기도함으로써, 일상의 생활도 경건해졌습니다. 또 31장으로 되어 있는 잠언을 한 달에 한 번, 일년이면 열 두 번을 읽게 되면서,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비록 부모와 자녀가 떨어져 지내고 있다 하더라도, 계속된 관심과 대화로 자녀를 지도할 수 있습니다.
셋째, 어떻게 가르쳐야 합니까? 7절에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신6:7)고 말씀합니다. '부지런히'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샤난'인데, 그저 열심히 가르치는 것보다 더 깊은 뜻으로, 영어로 'repeat', 반복하여 가르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원래는 '갈다'라는 말로 'sharpen' 날카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칼이나 낫을 갈 때는 숫돌에 물을 뿌려가며 살살 갈아야하지 서두르면 날이 넘어버립니다. 앞뒤로 살살 오랫동안 갈아야 제대로 날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수들은 쉬는 동안 마냥 대팻날을 가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가르치라, 서두르지 마라, 반복해서 가르치라' 칼을 갈듯이 가르치라고 합니다. 그래서 믿어 알도록, 사랑하도록, 순종하도록 해야 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 여기 '마음을 다하고'에서 마음이란 히브리어로 지성의 소재를 말하며, 지식과 재능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뜻을 다하여'란, 감성과 인격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의 즐거움이나, 우리의 행복도 하나님이니 인격 전부를 다 기울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힘을 다하여', 체력을 말합니다. 이처럼 구체적인 생활 전부를 기울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들의 교육 이념이요 철학입니다.
헛셀 포드의 [십계명 강해]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흑인 하인과 같이 바다 낚시를 갔다가 저녁나절 돌아오면서 피곤해진 주인은 그 하인에게 "모터보트의 키를 잡고 있어라. 그리고 저기 보이는 북극성만 보고 달리면 우리 집에 당도하게 되지. 그동안 난 좀 자야겠다"하고서 방향타를 잡게 했더니, 한참 있다가 하인이 다급한 목소리로 주인을 깨우며 말합니다. "주인님, 주인님, 이 보트가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북극성을 지나치고 말았어요. 다시 다른 별을 가르쳐주셔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십계명은 옛날, 옛날 3,500년 전에 주신 말씀이지, 지금은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어떤 배도 북극성을 앞질러 갈 수 없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벧전1:24-25).
왜 배우는 것이 이처럼 중요합니까? 배워야만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2:42)고 하여, 가장 힘쓴 것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자녀들을 어려서부터 교회학교에서 말씀 속에 자라게 해야합니다. 존 헤이우드(John Heywood)는 "배우지 않으려면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했습니다. 사랑도 연습하며 발전하고 신앙도 훈련하며 성장합니다. 난폭한 망아지를 길들여 명마가 되듯이 훈련은 인간의 정신을 길러줍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치 산 자가 죽은 자보다 우월하듯이, 교육받은 자는 교육받지 않은 자보다 훨씬 우수하다"고도 말했습니다. 브라우닝(Browning, E.B.)은 '무지는 무죄가 아니라 유죄'라며, 몰랐으니 상관없다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 죄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사무엘 존스(Jones, S.)는 말합니다. '무지가 고의적인 경우일 때에는 무지 그 자체가 범죄이다.' 그렇습니다. 배우지 않은 것이 죄요, 가르치지 않은 것이 잘못입니다.
국민일보 임한창 종교국장의 [자녀가 땅끝이다]라는 칼럼입니다. "일본 남단 해역에 오키노토리라는 아주 작은 섬은 간조 때는 2m, 만조 때는 30㎝ 높이의 바위만 보이는 작은 섬이다. 일본은 산호초 사이에 우뚝 솟은 이곳이 파도에 마모되어 사라지거나 해수면 상승으로 가라앉지 않도록 촉각을 곤두세운다. 만약 이 섬이 잠겨 흔적을 감춘다면 일본은 엄청난 영해를 잃게 된다. 그래서 돌출 부분에 시멘트를 발라 마모를 막고 있다...이 작은 섬으로 인해 일본은 본토보다 큰 40만㎢의 영해를 확보하여 작은 바위 하나가 국가 지도를 바꾸어 놓은 셈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질그릇처럼 연약하나 이 보잘것없는 질그릇 속에 엄청난 보화가 담겨 있다. 사람의 몸은 아주 작지만, 그곳에 하나님의 영이 깃들면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가 된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 가족과 친척과 사회와 국가가 변한다. 예수는 지극히 작고 나약한 인간을 향해 이렇게 명령하신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나의 땅 끝은 어디인가? 복음이 가장 신속하고 절실하게 전해져야 할 곳은 북한인가? 중동인가? 이스라엘인가? 아니다. 우리의 땅 끝은 사랑하는 자녀다. 자녀를 신앙으로 바르게 양육하는 것이 '땅 끝 선교'다... 자녀는 오키노토리 섬과 같이 그들의 영혼의 밑바닥에 엄청난 보화가 쌓여 있다. 세파에 마모되거나 휩쓸리지 않도록 그들의 영혼에 항상 깊은 관심을 가져야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잘 자란 자녀는 세상을 변화시키므로 내 자녀뿐만 아니라 남의 자녀도 잘 자라도록 도와야한다. 세상에 태어나는 자녀들은 모두 우리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오키노토리 산호초를 섬으로 만들어 영토를 확보하려고 약 1조원의 돈을 쏟아 붓고 있다는데, 우리 세대의 땅끝인 자녀들을 위해서는 얼마를 쏟아 부어야 할까요?
유대인의 탈무드에 보면 아키바라는 랍비 이야기가 나옵니다. 로마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있을 때(AD.70년경) 내일이면 함락 당할 위기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비통한 울부짖음과 불안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에 랍비 아키바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다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는 하인들을 시켜 자기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하고 또 며칠 후에는 죽었다고 소문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관속으로 들어가 성밖으로 나갔습니다. 그 날 밤에 아키바는 로마 장군에게 나아가 "우리는 서로 피를 흘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내일 아침이면 예루살렘 성문을 활짝 열고 전혀 항거함이 없이 로마 군인을 다 맞이해 들이겠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마을 한 가운데 조그만 집이 하나 있는데 그 집만은 절대 손대지 말아주십시오. 우리에게 있는 돈은 다 가져가도 좋습니다. 사람을 붙들어 가도 좋습니다. 다만 성안에 있는 그 집 하나만은 손을 대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하고 말하자, 로마 장군이 "그 안에 무엇이 있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책이 있는 곳입니다." "책뿐이라면 그까짓 것 문제될 것이 없지. 그렇게 합시다. 우리 전쟁을 끝냅시다." 그 이튿날 문을 열어 주기로 하고 아키바는 바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밤에 유대의 믿음의 어머니들을 불러모았습니다. 책이 들어 있는 그 조그만 집에 어머니들이 울면서 모였을 때 아키바는 여기서 유명한 설교를 합니다. "어머니 여러분, 다 없어도 됩니다. 다 빼앗겨도 됩니다. 그러나 단 한가지 어머님들의 가슴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져 있으면, 또한 탈무드가 있으면 우리 백성은 영원히 존속됩니다. 여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이 백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날이 옵니다." 이 위대한 설교와 함께 거기서 어머니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그 성경 위에서 엎드려 울며 기도로 밤을 새웠습니다. 이튿날, 예루살렘 성이 점령되어 수많은 사람이 잡혀가고 재물을 탈취 당하는 역사가 있었지만, 유대의 믿음의 어머니들 가슴속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과 탈무드는 어머니들의 가슴과 가슴으로 전승되어 오늘의 이스라엘을 있게 하였습니다.
어떤 화가가 그린 그림에 한밤중에 작은 배 한 척이 바다를 가로질러 항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풍랑이 일어 금방이라도 파도가 배를 삼킬 듯 무섭게 달려들어 배가 위태로워 보이는데, 항해사는 캄캄한 밤하늘에 뚜렷이 빛나는 하나의 별, 북극성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내가 저 별을 잃어버리면 나를 잃어버린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가장 간곡하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가르쳐 지키게 하라'하신 주님의 지상명령을 따라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 저들을 구원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