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25 139회
"그리스도인의 개혁 신앙"
2020년 10월 25일 주일예배
사도행전 4 : 13 - 22 ; 시편 46 : 10
어느 유명잡지 독자 질문 난에 이런 편지가 실렸습니다. "나는 지금 어느 여자와 동거 중인데, 이 여자가 결혼을 하자고 합니다. 그런데 나는 결혼할 의사가 조금도 없는데,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도덕이나 윤리 같은 말은 제발 빼고 말씀해주십시오." 그러자 이런 답변이 실렸습니다. "선생님 편지를 잘 받았습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도덕성에 있다고 믿습니다. 선생님 입장에서 조언 받기를 원한다면 가축병원 의사에게 문의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도덕을 빼고는 인간이 아니듯, 하나님의 뜻을 전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1910년경 기독교인들과 신민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확산되자, 일본은 이를 막으려고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을 조작하여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한 [105인 사건]을 저지릅니다. 이때 남강 이승훈 선생은 일본순사에게 끌려가 얼마나 맞았던지 "예수님 건만 아니라면, 누구와 간통을 했다고 뒤집어 씌워도 그렇다고 대답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교회에 큰 핍박이 밀려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잡혀가서 감옥에 갇히고 고문당하자, 서양문물이나 배우려고 교회에 나왔던 이광수, 주요한 같은 개화교인은 모두 다 물러가고 순수한 기독교인만 남게 되었다고 백낙준 박사는 말합니다. 믿음의 지조를 지킬 줄 알아야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신앙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2차 세계대전 후 많은 독일인을 감동시킨 설교를 했던 헬무트 틸리케는 [스펄전과의 만남]이란 책을 썼습니다. 설교가 사람들의 인기를 얻지 못하고, 인본주의와 모더니즘이 절정을 이루며 신학이 미신으로 여겨지던 지난 세기 말엽에, 설교의 왕자로 알려진 스펄전은 런던에서 매주일 아침 6천 명의 회중에게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매주 월요일에는 스펄전의 설교가 미국으로 전송되어 미국신문에 실렸습니다. 틸릭케는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면 삶이 보다 쉬워진다거나, 복음이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준다거나, 기독교가 아니면 문명이 쇠망한다거나, 국가와 사회에는 종교가 필요하다는 것은 그의 설교의 주제가 아니었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선전하려고 애쓰는 기독교 실용주의의 일종이다. 이런 것들은 스펄전에게는 완전히 생소한 것이었다. 그는 오직 구원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진실로 믿지는 않은 채 기독교 사상만 받아들이거나, 기독교의 핵심인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련이 없이 기독교의 사회적 가르침만을 취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사상은 하나의 사상으로만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스펄전은 가장 중요한 것은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당당히 말한다. 진실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가는 것이다. 기독교화 된 서양을 포함해서 그 외의 모든 것은 물 탄 사회복음이며, 다 쓸데없는 소리다." 믿음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제 503주년 기념주일입니다. '개혁'이란 영어로 'reformation'이라 하여 're-form', 즉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로서, 처음 시작할 때의 그 깨끗하고 순수했던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 것입니다. 본래의 순수한 복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개혁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인 것으로 늘 새롭게 결단하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가만히 정지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가치가 변질되지 않도록 주변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합니다. 마치 나침반이 정북(正北)을 가리키기 위해선, 바늘이 고정되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야만 바른 방향을 가리킬 수 있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종교개혁의 근본 관심은 사회도, 경제도 아니고, 정치도 아니고 하나님과 나와의 바른 관계입니다. 거창하게 세상을 바꾼다는 얘기가 아니라, 근본 관심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바르게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될 때, 먼저 나 자신이 변화되고, 내가 변화될 때 가정도 교회도 그리고 세상도 변화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자신과의 근본 관계에 대한 변화가 없이, 어떤 제도나 겉모습만 바꾸려 하기 때문에 개혁은 늘 실패하게 되고 맙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믿음을 분명하게 정립하고, 거기서부터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한 골동품 장사가 시골의 어느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문간에서 개가 밥을 먹고 있는데 그 밥그릇이 아주 귀한 골동품이더랍니다. 그래서 골동품 장사는 그것을 사기로 마음먹습니다. 밥그릇을 사자고 하면 팔지 않을 것 같아 일단 개를 사자고 주인에게 흥정합니다. 별 값어치가 없는 개를 후하게 몇 십만 원을 주겠다고 하니 주인이 기꺼이 그러자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개를 샀습니다. 이제 밥그릇만 손에 넣으면 됩니다. "주인장, 그 개 밥그릇까지 끼워서 삽시다." 그러자 주인이 하는 말이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안됩니다. 그 밥그릇 때문에 개를 백 마리도 더 팔았는데요."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골동품 장사나, 개 밥그릇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그것으로 개를 팔고 앉아 있는 주인이나,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언제나 이렇게 어리석습니다. 우리 믿음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은 사실상 첫 번째 종교개혁에 대한 기록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종교개혁은 지금으로부터 503년 전 마르틴 루터에 의해 이루어졌고, 칼뱅에 의해 정리되었으며, 많은 종교개혁자들에 의하여 계속적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그런데 사실 초대 기독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도 생각해 보면 종교개혁이었습니다. 기독교는 본래 유대교로부터 나타났고, 구약성경을 그 기초로 하여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회당이 개혁되어서 기독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타난 사건 자체가 그대로 종교개혁의 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배제된 채, 인간이 주인이 되고, 인간이 만든 교리와 제도가 중심이 된 인본주의의 조직화 된 교회가, 성령의 역사로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 있는 교회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못박는 결의를 했고, 자신도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던 산헤드린 공회에서 지난날의 과오를 물리치고 이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4:19). 이 용기와 믿음이 마침내 교회를 탄생시켰고 오랫동안 생명력을 잃은 채, 시신과 같던 교회가 살아있는 새로운 교회로 탄생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의 정신은 어떤 믿음의 자세입니까? 첫째,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신앙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 사도들은 그리스도 외엔 그 무엇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음을 선포합니다. 이것은 매우 혁신적인 것으로,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천명합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세주'라는 사실입니다. 예수 외에 다른 이의 죄를 대신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고, 오직 예수만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여 살아나신, 메시아임을 의미합니다. '구원'이란 헬라어 '소테리아'는 앉은뱅이가 고침 받는 육체적인 구원뿐만 아니라, 죄와 죽음과 영원한 심판으로부터 구원받는 전인격적이고 완전한 구원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사람 중에는 이 구원을 받지 않아도 될 대상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로마 카톨릭의 잘못의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는 종교다원주의입니다. 이런 다원주의적 포용성이 세상으로부터는 아주 관용적인 종교로 환영받고 있습니다. 이 종교다원주의는 카톨릭 신학자 '라너'에 제기되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런 입장으로 카톨릭의 선교정책도 세워져,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입장을 지양하고 수용하는 입장을 보입니다. 그런데 문화는 포용할 수 있지만, 내게 아버지는 오직 한 분뿐이듯, 우리의 구세주도 오직 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2+2는 4 외엔 다른 어떤 것도 정답이 아니듯, 기독교는 그리스도 외엔 구원의 길이 없다고 주장한다고, 세상에서 편협한 종교로 오해받고 있습니다.
산을 올라가는 데는 여러 개의 길이 있듯이, 천국에 올라가는 데도 천주교나 개신교, 유대교뿐만 아니라, 불교나 이슬람교 같은 다른 종교도 나름대로 구원의 길이 있다는 천주교의 종교다원주의는 그 구원에 대한 근본 출발에서 잘못이 있습니다. 인간이 구원이라는 산을 올라가는 데는, 좋은 길도 나쁜 길도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좋은 길이 카톨릭이고, 그 다음은 개신교이며, 그 다음은 유대교이고, 그 외에 불교나 유교, 이슬람교도 산에 올라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와 이것을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여러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노력하여 산에 올라가는 인간의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위로부터 내미시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붙잡음으로 얻게 됩니다.
연세대학교 교목이던 윤병상 목사님이 교양과정으로 기독교에 대해 가르쳤는데, 학생들이 "교수님, 기독교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불교나 유교에 대해서도 가르쳐주십시오."라고 요청하기에 그러마 대답했는데, 유교에 대해선 이 목사님이 유교적인 가정에서 자랐기에 어느 정도 가르칠 수 있는데, 불교는 도무지 아는 것이 없어 많은 불교서적을 읽으며 공부해도 모르겠기에, 절에 가서 스님에게 자기 신분과 찾아온 목적을 말하고 불교에 대해 알 수 있는 길을 묻자, '불교란 책으로 알 수 있는 종교가 아니니 직접 절에 와서 참선도 해보고, 수도생활을 해야 알 수 있다'기에, 그때부터 십 년 가량 방학 때마다 절에 들어가서 승려들과 함께 지내며 직접 몸으로 배웠다고 합니다. 어느 해 여름 절에서 수련회가 있기에 참석했더니, 끝날 때쯤 사회자가 "이 자리에는 연세대학교 교수인 목사님도 참석했다"고 소개하더랍니다. 어쩔 수 없이 앞에 나가 인사했더니, 한 사람이 "목사님은 십년 가량 절에 와서 불교를 연구했으면, 이젠 불교신자가 될 법도 한데 아직 그렇게 안됐습니까?"하고 농담처럼 묻기에, 목사님이 정색하고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참 대답하십니다. 나는 불교를 연구하면 할수록 도저히 내가 부처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더욱 드는데, 여러분은 스스로 부처가 되겠다고 이렇게 노력하는 걸 보니 참 대단하십니다"며,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받겠다는 그들을 꼬집었다고 합니다.
둘째, 오직 성경만이 우리 신앙의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신앙입니다.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8-20). 사도들은 대제사장과 사두개인의 노기등등한 위협에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따를 것을 다짐하며 그 말씀을 전할 것을 천명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당시 로마 카톨릭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 말씀보다, 인간이 세운 제도와 조직과, 교황의 칙령을 더 중요시 여기고 있었던 당시의 잘못된 제도였습니다.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성경을 연구하다 당시 카톨릭이 가르치는 교리들이 성경에서 너무나 떠나있음을 깨닫고 95가지 질문을 비텐베르그 성당 벽에 붙이면서 "이런 것들이 과연 성경적인가 함께 연구하고 토론하여 교회를 새롭게 하자"고 제의했으나, 카톨릭은 루터의 주장을 수용은커녕 그를 정죄하여 파문해버렸습니다. 교회로부터 파문 당한 루터는, 이로 인해 본래 의도와 달리 종교개혁을 감행했는데, 이 종교개혁 운동은 단지 교회개혁으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이로 인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배경이 되었고, 학문과 과학의 발달과 사회개혁까지 이루게 되었습니다.
20세기 미국의 기독교계 석학이요 저술가인 프랜시스 쉐퍼 박사는 "앞으로 다가오는 시대에 인류가 당면하게 될 최대의 위기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지켜져 오던 절대 가치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쉐퍼 박사의 이 지적은 매우 통찰력 있고 의미 있는 지적이었습니다. 미국정부의 지도자가 '현대문화에 있어서 가치관의 회복'이란 주제로 연설하자, 하버드대학 출신의 한 학생이 "당신의 가치관은 무슨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어디에 표준을 두고 근거해서 그런 가치관을 회복하자는 것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정부 지도자가 강연을 마치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학생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도둑질하지 말자, 간음하지 말자, 살인하지 말자'는 이런 규범을 어디에 근거해서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공산당은 목적만 옳다면 사람을 죽여도 좋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사람을 죽여도 좋을 그 목적은 어떤 기준에 의해 정해질 수 있습니까? 옛날 일본의 도덕은 천황에 의해 정해진다고 했으나 이 천황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전범으로서 세계 앞에 자기의 잘못을 사죄해야만 했습니다. 모든 일은 표준이 있고 기준이 있어야만 그 가치를 잴 수 있지, 상대주의에 빠지면 그 어떤 것도 참된 가치를 지닐 수 없고, 불변의 진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자(尺)와, 저울이 있어야 하듯, 모든 가치관에도 표준과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전에는 성경은 일점 일획의 오류가 없는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여 성서의 절대성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런데 19세기 이후 자유주의 신학에 의해, 성서 비평학이 소개되면서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우리에게 주신 정확 무오한 절대적인 신언(神言)이기 보다, 오랫동안 구전으로 내려오던 종교적인 전통이나 자료들에 의해 형성되고, 이를 수집하고 편집하여 만들어낸 종교 문서처럼 소개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성경에 대한 권위가 상실되었고, 이렇다 보니 말씀에 대한 절대 순종이 아닌, 종교적 교훈집 정도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말씀의 절대가치가 상실되고, 소위 상황윤리에 의해 성경 말씀도 상황에 의해 해석되고 가르쳐져야한다며, 말씀보다 상황을 우선시하는 상대주의 신앙에 빠져버렸습니다.
이어령 박사는 "많은 이들이 한국교회가 위기라고 하는데, 그 원인과 대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한국교회가 위기가 아니라, 문명에 위기가 온 것이지요. 바이오테크놀로지가 와서, 생명을 물질적으로, 과학으로, 인공적으로 만들고, 교회의 역할을 과학자들이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면 듣지 않지만, 과학이라고 하면 다 들어요. '이거 먹으면 암 걸린다'고 하면 시장에서 그 물건이 싹없어집니다. 하지만 이게 얼마나 틀린 것입니까? 먹으면 암 걸린다고 해서 사카린이 자취를 감췄는데, 이제 괜찮다고 하질 않습니까.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도 먹는 인간들이, 과학자들이 먹지 말라면 안 먹습니다. 이렇게 과학이 세졌어요." 이 시대는 절대적인 하나님 말씀보다 학자들의 불완전한 학설을 절대 신뢰하는 이런 미신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셋째,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돌리는 신앙입니다.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행4:21). 공회 결정이 사도들로부터 거부되자 그들을 협박하면서도 '백성을 인하여' 해칠 수 없었습니다. 공회는 백성의 환심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도들을 위협하며 석방했습니다. 사도들이 행한 표적을 목격한 군중들은 이 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이때 베드로와 요한은 자기 능력과 자기 용기를 자랑하며, 자기 영광을 구할 수 있었으나, 이 일을 통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렸습니다.
오늘 본문의 발단이 된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고쳤을 때, 많은 사람들이 놀라서 자기들을 쳐다보자,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3:12, 16). '이 일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니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지, 왜 우리를 바라보느냐?'며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스개 이야기인데, 공자 선생님이 죽기 전에 제자들에게 "내가 죽거든 내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유언하자, 제자들은 '선생님이 왜 이런 유언을 하셨을까?'하고 곰곰이 생각한 끝에 깨닫기를 '아, 공자 앞에선 문자쓰지 말라는 말이구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칼뱅도 세상을 떠나며 유언하길 "내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고, 내 흔적이 없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유지를 따라 지금도 제네바에 가면 장 칼뱅의 무덤에는 이름이 없고, 단지 그의 무덤을 알아보기 위해 묘비에 '장 칼뱅'의 이니셜인 'J. C'라는 글자만 새겨져있습니다. 칼뱅은 자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는 일을 결코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로마 교황 노켄티어스(1243-1254년에 재위)가 바티칸에 있는 그 호화로운 금과 은으로 된 식기들을 감상하면서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베드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내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좋게 되었소"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퀴나스가 즉시 대답했습니다. "성하(聖下), 옳습니다. 하오나 그와 함께 베드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는 말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교회나 성도가 물질에 집착하게 되면, 그 거룩함도, 그리고 하늘의 은총과, 그 능력도 함께 잃고 만다는 경고의 일화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말씀과 그분의 영광을 외면하고 세상의 영화와 물질에 대해 빠져들면, 성도는 그 하나님의 은혜도 잃게 되고, 아울러 믿음의 능력도 상실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어느 날 아침 혼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빵과 몇 조각의 고기를 놓고 식사하는데, 무릎 앞에 애완견이 루터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개가 루터의 손이 식탁에 가면 식탁을 보고, 루터의 손이 입으로 가면 입을 보고, 올려보고 내려보고 하며 간절히 쳐다봅니다. 루터는 그 때 큰 깨달음이 와서 고기 조각을 떼어 개에게 주고 그 먹는 것을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개가 내가 먹는 이 고기조각을 쳐다보는 것처럼, 내가 하나님만을 저렇게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개는 고기조각을 쳐다보며 다른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데, 자신은 기도하며 "하나님 아버지!" 불러놓고도, 이 생각 저 생각하고 있으니, 도대체 얼마나 죄송한지 몰랐습니다. 그는 오로지 자기 마음이 하나님께만 향하길 소원하며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말씀으로!'를 외치며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종교개혁의 핵심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은퇴한 어느 성도 집에 강도가 들었습니다. 권총을 들이대고 "엎드려!" 식구들을 방 가운데 몰아넣습니다. 이 성도는 부들부들 떨며 "목숨만 살려주시면 있는 대로 다 드리겠습니다." 퇴직금 받은 것 얼마, 적금 통장까지 모조리 내어놓았습니다. "앞으로 10분 동안 일어나면 온 가족이 죽을 줄 아시오." 이불을 덮어놓고 강도는 집을 떠나갔습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내 아들아, '목숨만 살려주시면 있는 대로 다 드리겠습니다', 참 내가 듣고 싶었던 신앙고백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듣고 싶었던 신앙고백을 내가 들었다. 그런데 그 고백을 강도 앞에서 해야 했더냐? 누가 네 목숨을 살려 주었더냐? 네가 진정 엎드려야 할 곳이 어디더냐? 모든 것 내어놓아야 할 곳이 강도 앞이었더냐?" 이 성도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목놓아 울었습니다. "목숨 바쳐 내 주님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라도 깨닫고 이 늙은 몸 주님 앞에 드립니다. 주님, 이제라도 고치소서. 하루를 섬겨도 고친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방지일 목사님이 99세 때 중앙일보 기자가 물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무엇인가?" "죄 사함이다. 하나님 나라에는 죄가 없다. 그래서 죄를 안고선 그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러니 죄로 얼룩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나?" "신앙은 투항이다. 내가 들고 있는 총과 칼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투항하는 것이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46:10).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 루터는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라"(Let God, Be God!'고 했습니다. 우리도 사도들의 신앙을 본받아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돌리는 참된 개혁 신앙을 지켜가야 하겠습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