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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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세용 목사님

고린도전서 12장 12~27절

설교요약 :

"주님의 몸된 교회와 지체인 성도"
2018년 1월 28일 주일예배
고린도전서 12 : 12 - 27 ; 시편 133 : 1

여러분, 이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이 사람은 평생 몸 속에 십자가를 품고 살아갑니다. 이 사람은 늘 말없이 온갖 수모를 참고 지내며 머리 둘 곳도 없이 벌판에서 외롭게 삽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의 이름은 '허수'인데,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오늘도 외롭게 들판에 서있는 '허수아비'랍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 허수아비처럼 주위 사람들과 아무런 교제도 없이 혼자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고슴도치 딜레마'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고슴도치들은 홀로 떨어져 살다가 추운 겨울이면 따스한 온기를 느끼려고 다른 고슴도치에게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갔다가 몸에 붙은 가시가 서로를 찔러 고통스러워 다시 뿔뿔이 흩어지는, 이런 모습을 '고슴도치 딜레마'라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모두 외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따뜻한 인정이 그리워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만 서로가 지닌 개성과 자존심으로 상처를 받고는 다시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모두가 외로워하면서도 가까이했다가 받을 상처 때문에 다가가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일본에는 '주문 실수가 넘치는 식당'이 있다고 합니다. 라면을 시켰는데 우동이 나오고 햄버거를 시켰는데 만두를 주는데도 화내는 이가 없고 항상 손님이 북적이는 인기 있는 맛집입니다. 이 식당이 특별한 것은 아르바이트생들 때문인데, 이곳 아르바이트생들은 모두 치매 걸린 할머니들입니다. 직전에 받은 주문을 잊어버리고 주문과 다른 메뉴를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할머니들은 최선을 다해 일하며, 웃음을 잃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많은 자원봉사자와 함께 운영되는 이 식당은 치매 환자들도 사회구성원의 일부라는 소속감과, 함께 하는 공동체의식을 불어 넣어주는 이해와 배려가 이 식당의 성공비결입니다. 실수하고 느리고 서툴어도 누구도 화내지 않는 이유가 이 할머니들을 모두 우리의 '어머니'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랍니다.


국내에서 처음 '슬픔학'이란 용어를 소개한 '삶과죽음을생각하는회' 윤득형(46) 회장은 슬픔상담 전문가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대학 1학년 때 루게릭병으로 3년간 투병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평생 마음 아픈 사람들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고, 미국에 가서 슬픔치유상담을 공부하고 돌아와, 슬픔을 당한 사람들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깨닫게 하여 저들을 회복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는 자녀를 잃은 9명의 부모들이 어떻게 슬픔을 극복했는지 연구하면서, 기독교적 영성이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준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를 잃은 부모들이 정기적으로 교회활동, 성경 읽기, 봉사활동에 참여하면서 소속감을 느꼈습니다. 이 소속감은 하나님과 그리고 사람들과의 깊은 결속을 의미합니다. 이런 결속을 통해 하나님은 실제적인 방법으로 고통 당하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와 교회' '교회와 성도'의 관계에 대한 귀한 교훈을 줍니다. 첫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합니다. 27절에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말씀합니다. 뒤이어 나오는 28절을 보면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말씀은, 교회 내의 여러 가지 직분을 열거하여, 본문의 '그리스도의 몸'은 곧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란, 옛날 사람들이 예수님을 직접 보고 느낀 것처럼, 오늘날 교회를 통해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보고, 듣고, 느끼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세워진 몸이라는 뜻입니다. 즉,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드러내고 보여주고 대표하는 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의의요 목적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에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보여지지 않고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이 보여지는 교회들도 있는 듯 합니다. 어떤 교회에는 예수 그리스도보다 그 교회 목사가, 또 어떤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보다 그 교회 건물이, 또 다른 교회에서는 그 교회 교인 숫자나 헌금액수가 드러나 보이기도 합니다. 또 어떤 경우는 교인 중에 대단한 사람이 있어, 처음 교회 나오는 사람으로 소외감과 이질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느끼게 해주어야 합니다. 교인 수가 많지 않아도, 교회 건물이 신통하지 않아도, 그 교회에 오면, 예수가 느껴지고, 예수가 드러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다른 한 편으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란 말은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의 지도자들의 타락한 모습에 실망하여 '이런 사람들이 있는 교회를 어찌 교회라 할 수 있느냐?'하는 분노와 환멸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 추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곳은 여전히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의 교회 됨은 그 구성원들의 도덕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불러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출석하던 워싱턴 교회 사무실에 어느 날 전화가 왔습니다. "이번 주일 대통령께서 교회에 출석하실 것으로 기대되십니까?" 그러자 사무원이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대통령의 출석 여부는 불확실합니다. 확실한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예배에 함께 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임재로 교회는 교회가 되는 것이며, 그분의 자녀들인 우리는 모든 좌절을 딛고 일어나 세상을 이기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정직히 말하면 교회는 역사 속에서 잘하기도 하고 잘못하기도 했지만, 교회에서 빛이 완전히 사라졌던 때는 없었습니다. 그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면 교회 또한 그 존재가 소멸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빛은 어두움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데, 교회는 그 빛을 통해 세상의 소망이 됩니다. 교회가 때로 주님과 사람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기도 했지만, 여기까지 지속되어 온 것은 오직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교회를 향해 '내 교회'(마16:18)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둘째,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신자는 그 교회의 지체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27절). 신자 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각 부분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믿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소속이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자신이 알든 모르든, 이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팔이나 다리가 몸을 떠나 따로 존재할 수 없듯, 교회를 떠난 신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교회에 소속되지 않는 '가나안 신자'들이 늘면서 지체로서 봉사하는 것을 당위가 아니라, 선택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교부 오리겐은 "교회 없이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 자라는데 가정의 돌봄이 필수이듯, 우리의 영적인 성장과 신앙생활의 유지를 위해서도 교회는 필수적입니다. 교회 없는 독립적인 신앙생활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 말씀을 받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봉사를 통해 믿음이 자라고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며, 신앙생활을 해나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주님의 몸된 교회에 소속되어 지체의 역할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중국 내륙선교의 개척자인 허드슨 테일러는 선교사로서 이미 큰일을 이루고 고국의 교회에 크게 영향을 끼쳤음에도, 실제로는 극심한 영적 빈곤으로 인해 은밀한 영혼의 아픔을 갖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1869년 어느 날, 그의 영혼의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친구 매카티(McCarty)의 이런 편지가 그의 영적 눈을 뜨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내가 스스로 온갖 힘을 다해 믿음을 가지려고 하면 안 됩니다. 다만 신실하신 주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바라봤고 그때에 비로소 그가 말씀하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테일러는 즉시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결코 나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을 뿐 아니라, 나는 예수님의 지체요 그분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인 것을 깨달았다." 그는 주님과 한 몸인 사실과, 주님이 자기와 연합하여 일하심을 생생하게 인식하면서 안식할 수 있었고,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제 처음 믿기에, 그냥 예배만 참석하고 교회의 다른 일에는 참석하지 않겠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일에 관여하면 시간도 뺏기고 헌금도 해야하고 골치 아픈 일도 생기니 그냥 출석만 하며 조용히 믿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교회가 맘에 들지 않기에 교회야 어찌되는 나는 내 방식대로 믿겠다며 아예 교회를 떠나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지체가 지체 역할을 하지 않으면 그 몸도 지체도 병이 들게 되고 됩니다. 본문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어느 목사님이 교회에 출석하다 출석을 중단하고 있는 교우에게 권면의 편지를 보냈더니 이런 질문이 담긴 답장이 왔습니다. "목사님, 진정한 신앙생활을 위해 꼭 예배에 출석해야 하고, 교회 봉사를 해야 할까요? 저는 요즘 저 혼자만의 하나님과의 관계 유지를 통해 믿음의 삶이 가능한가를 실험하고 있는 중입니다. 정말 교회 없는 신앙은 불가능한가요?" 목사님이 답장을 썼습니다.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상상해 보십시오. 군대에서 훈련이나 소집에 불응한 군인이 정상일까요? 세금을 내지 않고 투표하지 않는 시민을 정상적이라 할 수 있을까요? 베이스캠프 없이 등정하는 등산가가 정상일까요? 병원이 없이 치료를 구하는 환자가 정상일까요? 학교나 스승이 없는 학생이 정상일까요? 벌집이 없이 날아다니는 벌이 정상일까요? 팀을 생각지 않는 축구선수가 정상일까요?" 주님의 몸인 교회를 떠나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 정상일까요? 좋은 교회는 좋은 성도들에 의해 이뤄집니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했다면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됨이 확실한데, 애써 이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 아닌 말썽 많은 인간들의 모임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지체된 사실을 좋은 일이라기보다 부담으로 여겨, 세상살이도 바쁘고 힘든데, 거기다 '교회 일'이란 또 하나의 부담을 지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지체된 것은 주님께 소속된 증거로서,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 선택받은 자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어떤 일이든 내가 지체로서 감당해야 할 일은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은 반드시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지체가 된 이상 지체로서 해야 할 일을 찾아 성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노래 잘하는 사람은 성가대원으로, 잘 가르치는 사람은 교회학교 교사로, 전도 잘하는 사람은 전도인으로, 행정능력이 있는 사람은 교회행정으로 봉사해야합니다. 남들처럼 배운 것이나, 많은 재산이나, 별난 재주 없어도, 굼벵이도 뒹구는 재주는 있듯, 교회의 지체로서 할 일은 누구나 있기에, 나는 못한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마틴 부버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을 보내실 땐 반드시 그 사람이 아니고선 할 수 없는 일이 있기에 그 일을 주어서 그를 세상에 보내셨기에,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그 일을 찾아 자기 할 일을 다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내게 주어진 사명을 찾아 그것을 이룰 뿐, 남과 비교하여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갖거나, 또는 남처럼 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왜 너희는 이러저러한 큰 일을 하지 않았느냐?"고 묻지 않으시고, "네가 할 일을 다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어떤 분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회나 금요 심야기도회에 나와 교회와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어떤 분은 교회 재정을 위해, 어떤 분은 교회학교를 위해, 어떤 분은 성가대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강단 꽃꽂이, 또 어떤 분은 운전봉사, 또 어떤 분은 교회행사를 위해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일, 또 애경사를 당한 가정을 방문하고, 상처받은 지체들을 찾아 위로하며 격려하고, 주방 봉사, 반주하는 일 등으로, 지체의 역할을 힘써 감당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신통방통하시다. 어떻게 인간들이 안경을 만들어 걸 줄 알고 귀를 거기다가 달아놓으셨을까?" 우리는 주님의 몸의 지체로써 자기 위치를 지키며, 그리스도를 위해 무언가 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교회의 지체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습니다. 남의 눈에 드러나고, 하기 쉬운 일만 하려니까 할 일이 없어 보입니다. 남이 하고 싶어하는 일은 남에게 맡기고,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려면 일은 많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내가 해야 합니다.


셋째,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하는 일에는 귀하고 천하거나, 더 중요하고 덜 중한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고전12:15-20).


이 말씀은 지체 상호간에 아무런 차이가 없이 모두가 똑같이 귀중하다고 합니다. 스스로를 천한 지체로 여겨 열등감으로 의기소침해하는 발과 귀에게 말씀하십니다. "발아, 귀야, 서럽게 생각 말아라. 내가 원해서 너희를 발과, 귀로 세우지 않았느냐? 내가 너희를 인정하면 되지 않았느냐?" 반대로 21절에서는 비교적 귀한 지체로 볼 수 있는 눈과 머리가 자신을 뽐내며 저희보다 천해 보이는 손이나 발을 무시하고 경시해선 안 된다고 하십니다. 전체로 보면 눈이든, 손이든, 발이든, 귀든, 모두 소중한 것이지, 그것이 눈이어서 더 중요하고, 발이어서 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본문 22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약해 보이는 지체가 더 귀중함을 가르칩니다.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22절). 강하다, 약하다, 귀하다, 천하다는 것들은 사람들이 그렇게 보는 것일 뿐, 하나님은 약하고, 모자라고, 못나 보이는 그 부분을 더욱 귀히 여기시고, 꼭 필요한 소중한 지체입니다. 사람 보기엔 낮아 보이고, 약해 보여, 험하고 귀찮은 일을 맡아 하면서도, 그 수고에 대한 인정을 못 받는 사람이 하나님께는 더 귀하고 필요한 존재입니다.


뿔이 크고 아름다운 사슴이 어느 날 샘물을 마시려다가 물에 비친 자신의 뿔을 보고 흐뭇했으나 다리를 보니 영 볼품이 없어 투덜거리는데, 갑자기 사냥꾼의 총소리를 듣고 놀라 펄쩍펄쩍 며 도망갔습니다. 이때처럼 튼튼하고 날쌘 다리가 고마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나뭇가지에 아름다운 뿔이 걸려 꼼짝 못하게 되자 사냥개가 달려와 물어 사슴은 피를 흘리니 중얼거립니다. '뿔만 없어도 살 수 있었을 텐데...' 정말 소중한 것은 별로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제 역할을 다하는 것입니다.


넷째, 몸의 지체는 그 기능보다도, 그 존재 자체가 더 소중합니다. 설사 몸의 어떤 부분이 제 기능을 못하더라도, 그 부분이 몸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지체는 소중합니다. 교회의 지체된 신자는 각기 자기 맡은 일을 감당해야 하지만, 어떤 사정으로 그 일을 잘 못하더라도 그가 몸의 지체라는 사실만으로도 없어서 안 됩니다. 이것은 곧 일보다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 때문에 '일'이 있지 '일' 때문에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는 일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그 일 때문에 한 지체가 상처받고 시험 든다면, 그 일이 무슨 의미 있습니까? 일은 못하더라도 사람이 잘못돼선 안되고, 일은 그르치더라도 사람을 잃어선 안됩니다.


손가락 다섯 개가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뽐내는데, 엄지는 자기가 으뜸이라고 하고, 검지는 자기는 모든 것을 지시하니 자기가 제일 잘났다고 합니다. 가운데 손가락은 자기가 가장 길다고 자랑하고, 넷째 손가락은 자기에게만 반지를 끼우니 자기가 가장 귀하다고 자랑하는데 새끼손가락은 제일 작고 끝이라서 무엇도 자랑할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손가락이 말합니다. "너희들 나 없으면 병신이야!" 새끼손가락 하나만 없어도 장애이듯이, 교우 중 하나라도 없으면 그 몸은 장애가 됩니다.


[올 세인츠](All Saints)라는 영화는 미국 테네시주 스머나에 있는 성공회 계통의 교회 실화로서, 성도가 12명밖에 남지 않아 파산에 내몰려 정리될 교회를, 마이클이란 신참 목사와 성도들이 다시 살려내는 내용입니다. 미얀마 카렌족난민 십여 명이 그 교회에 찾아오는데, 그들 리더가 교회를 정리하는 위원회에서 교회의 필요성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농부였고 군인이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땅과, 우리 국민을 위해서 밀림과 산에서 싸웠습니다. 정부군은 우리 마을을 불태워 많은 사람이 죽고 실종됐습니다. 딸들은 어머니 죽음 앞에서 울고, 아버지들은 아들의 죽음 앞에서 울었습니다. 수많은 가족이 해체되고 망가졌어요. 그곳에서 쫓겨나 태국에 있는 난민촌에 갇혔습니다. 아이들이나 남자들 모두 할 일이 없이, 그냥 기다리기만 했습니다. 사람들은 밤이면 싸우고 울고 비명 지르며 젊은애들은 나쁘게 변해갔어요. 훔치고 거짓말하고, 여자 애들은 성폭행 당했고, 어떤 땐 남자애들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원래 쌀 창고로 쓰는 막사 교회에서, 쌀자루 위에 앉아서 찬송하고 기도했어요. 그 교회에서는 성경구절을 나누고 얘기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죽고 실종되고 많은 가족이 망가졌는데, 교회 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두 한 가족이 되었어요." 이것이 교회의 존재이유입니다. 영화의 대사 중에 "인생은 함께 하는 것이다. 모든 걸 혼자 짊어지지 마라. 교회 안에서는 모두가 한 가족이다"라는 말이 영화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드러냅니다. 교회는 우리 주님 안에서 맺어진 한 가족입니다.


마더 테레사는 평생을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과 함께 보낸 후에 다음과 같은 통찰을 얻었습니다. "오늘날 가장 큰 재앙은 나병이나 결핵이 아니라 소속되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우리 사회에서 고독이라는 병은 유행병처럼 되었습니다. 우리는 소속되기를 애타게 열망하면서도, 우리에게 주어진 소속을 나와 상관없게 여기기도 합니다. 내 집을 '내 집'이라 생각해야 소속감이 생깁니다. 내 집을 '옆집'이나 '남의 집'으로 생각하면 소속감이 생길 리 없습니다. 떠돌이나 이방인은 소속감이 없습니다. 자기 자리에 닻을 내리고, 뿌리를 박고, 최선으로 사랑할 때, 비로소 소속감은 깊어집니다. 교회는 나의 집일 뿐 아니라, 바로 우리 주님의 집이라는 사실입니다.


LA에서 사역하는 멕시코계 여 목사님이 어느 날 환상 중에 예수님이 로마 병정들의 채찍이 내려쳐질 때마다 채찍 끝에 있는 쇳조각에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끔찍함에 흐느끼는 그녀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뜯겨진 내 살점처럼 나와 떨어져서 살겠니, 아니면 여전히 채찍에 맞아 고통스러워하는 내 몸에 붙어 살겠니?" 그녀는 고백했습니다. "주님, 평생 주님께 접목되어 살겠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생명이 상실된 살점처럼 살지 않겠습니다. 주님의 몸에 붙어 고통을 함께 느끼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진정으로 연합하기 위해 채찍에 맞으시는 예수님의 몸에 접목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물으십니다. "얘들아, 뜯겨진 내 살점과 같이 되겠니, 아니면 여전히 고통스러워하는 내 몸에 붙어서 살겠니?"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의 몸에서 뜯겨져나간 살점이 되겠습니까, 고통스러워도 주님의 몸에 붙어 있는 살점이 되겠습니까? 몸에서 어느 살점이 뜯겨져 나가면 그것이 곧 죽음이듯이, 우리도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나가면 그것이 곧 우리의 영혼의 죽음인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애니 존슨 플린트의 시입니다. "그리스도는 손이 없습니다/우리의 손이 바로 그의 사역을 행할 유일한 손입니다/그분은 발이 없습니다. 우리의 발이 곧 그의 길을 인도해야 할 발입니다./그분은 혀가 없습니다. 우리의 혀가 곧 그의 죽음을 증거할 유일한 혀입니다./그런데 그리스도의 사역말고 다른 일로 내 손이 바쁘다면 어찌할꼬/죄가 유혹하는 길로 내 발이 걸어가면 어찌할꼬/그분이 꾸짖을 수치스런 말을 토한다면 어찌할꼬/이런 손과 이런 발과 이런 혀로 어찌 그분을 섬길 것인가/어찌 그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릴까!" 교회는 주님의 몸이요,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입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133:1). 주님의 몸인 성도의 공동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모임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순간 주님의 교회의 지체된 영광과 특권과 책임을 동시에 지녔습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해 '내 교회', '내 목사', '내 사명'이 있어야한다고 합니다. 소속을 분명히 하고, 충성을 다할 때, 여기에 평안과 하나님의 축복과 보장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2~27절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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