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교회
031-701-0691 / 경기도성남시분당구야탑동 523번지
손세용 목사님

히브리서 12장 1~3절

설교요약 :

"지쳐서 낙심치 않기 위해"
2018년 2월 25일 주일예배
히브리서 12 : 1 - 3 ; 이사야 40 : 31


결혼한 지 10년 된 사람이 결혼상담소를 찾았습니다. "갓 결혼해서는 행복했어요. 회사에서 고된 하루를 마치고 집에 오면 강아지가 달려와서 짖어대고 마누라는 슬리퍼를 갖다주곤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딴판입니다. 집에 오면 슬리퍼를 갖다주는 건 강아지이고 짖어대는 건 마누라랍니다." 그러자 상담소 사람이 말합니다."두 가지 서비스를 여전히 받고 있으면서 뭐가 못마땅하다는 건지 알 수 없군요."


2016년 6월 27일자 한겨레신문에 '잠 못 자는 한국인 하루평균 6.3시간 아태지역 최하위'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었습니다. AIA생명이 아태지역 15개 국가를 상대로 설문 조사한 결과, 한국인의 실제 수면시간은 아태지역 평균 수면시간(6.9시간)보다 0.6시간 가량 적었고, 매일 아침 식사를 거르는 한국인은 31%로, 아태지역 평균(15%)보다 2배나 높았습니다. 그리고 스트레스 지수도 6.6점으로 아태지역 평균(6.2점)보다 높게 나타났습니다. 2013년에는 수면과 체중, 식습관, 스트레스 지수 등 건강 수준을 종합한 건강생활지수는 57점으로 최하위였습니다. 한국인은 잠도 잘 자지 못하고, 아침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가장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말을 타고 10시간에 가던 것을 자동차가 1시간에 가게 되자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9시간의 시간 여유가 생길 것이라고!' 세탁기가 보급되자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하루 3시간의 여유가 찾아들 것이라고!' 컴퓨터가 생기자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마침내 사람들이 일로부터 해방되는 때가 왔다고!'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여유가 아니라 더 많은 일들로 인해 더 바쁘고 더 피곤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얼 위해 사는 것인지도 잊어버린 채, 목표도 없는 길을 맥없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도종환 시인의 시 [귀가] 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지쳐있었다./모두들 인사말처럼 바쁘다고 하였고/헤어지기 위한 악수를 더 많이 하며/총총히 돌아서 갔다./그들은 모두 낯선 거리를 지치도록 헤매거나/볕 안 드는 사무실에서/어두워질 때까지 일을 하였다./부는 바람 소리와 기다리는/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지는 노을과 사람의 얼굴이/제대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밤이 깊어서야 어두운 골목길을 혼자 돌아와/돌아오기가 무섭게 지쳐 쓰러지곤 하였다./모두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라 생각하고 있었다./우리의 몸에서 조금씩 사람의 냄새가/사라져 가는 것을 알면서도/인간답게 살 수 있는 터전과/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간을/벌기 위해서라 믿고 있었다./그러나 오늘 쓰지 못한 편지는/끝내 쓰지 못하고 말리라/오늘 하지 않고 생각 속으로 미루어둔/따뜻한 말 한마디는/결국 생각과 함께 잊혀지고/내일도 우리는 여전히 바쁠 것이다./내일도 우리는 어두운 골목길을/지친 걸음으로 혼자 돌아올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12:3)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삶의 실존은 '피곤'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낙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여기서 '피곤'이란 '몸과 마음이 지치고 고단함'을 뜻하는 말로서 몸과 마음에 모두 해당된다면, '낙심'이란 '바라던 일이 이뤄지지 않아 맥이 풀리고 마음이 상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우리 마음이 의욕과 용기를 잃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때로 믿음의 경주에서도 자칫 피곤에 지쳐 맥이 풀리고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낙심하고 슬럼프에 빠져 모든 봉사를 내려놓고, 교회생활조차 포기하고 떠나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다시 힘을 얻고, 어떻게 일어서서 앞으로 전진할 수 있을까요?


첫째,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2절 전반 절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a). 간혹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다가 그만 믿음을 버리고 그냥 세상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그가 그동안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고, 또 봉사활동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과연 그에게 믿음이 있었나?'하는 의구심이 들곤 합니다. 여러분은 '믿음이 타락했다'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믿음의 타락이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종교생활로 교회에 좀 다니다 교회출석은 그만뒀다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예수를 믿었다면 결코 믿음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다가 타락했다고 여기지만,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야심과 욕망을 이루려고 예수님을 따르다가, 그 기대가 어긋나자 예수님을 버린 것이지, 그는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이 아니었음은 성경이 증거합니다.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요6:64).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처음부터 당신을 믿지 않았고, 그가 당신을 배신하여 팔 자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진정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믿었다면, 어떻게 자기 영혼을 영원한 파멸에 처하도록 믿음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처음부터 믿지 않고 따랐기에 그 길이 마음에 들지 않아 포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본문 2절은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먼저 '믿음의 주(主)'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란 말은 '믿음의 인도자' 또는 '믿음의 개척자'라는 뜻으로,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가 위험을 무릅쓰고 살길을 찾는 자'라는 뜻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올바른 길을 찾아 주시기 위해 자기 자신이 친히 생명을 버리시고 인생의 갈 길을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친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온전하게 하시는 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믿음의 길의 목적을 달성시켜 주시는 분임을 뜻합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예수님께서 우리의 믿음의 길을 처음 열어주셨고, 그가 최종 목표 자체가 되시며, 그 최종 목표로 인도하여 주시는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위에서 믿음의 길을 걸어서 우리 믿음의 표본이 되어 주셨고, 그가 또한 믿음의 완성의 길을 보여 주셨으므로, 우리는 다만 그를 바라볼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예수만을 바라보자"고 권면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권면보다 더 우리 자신에게 책임성을 갖게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오직 우리 믿음의 대상이시며, 우리를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게 하실 예수님을 바로 알아야만 가능합니다.


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작사가이자 목사인 뉴턴(J. Newton)을 볼 때,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그를 부르셨음을 알게 됩니다. 그는 본래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잡아다가 팔아먹는 노예상인이었습니다. 그는 입으로 하나님을 저주하고 부인하면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면 내가 이처럼 심한 고생을 할 리가 없다'고 말하면서, 스스로 죽으려고 술을 마시고 바다로 뛰어들었는데 옷이 나무에 걸려서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패륜아를 살려주셨으나 그는 더욱더 난폭하고 악해지려고 애썼습니다. 그 후 존 뉴턴은 노예선을 타려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그 배를 놓쳤습니다. 얼마 후 그 배가 폭풍으로 침몰하여 단 네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바다에 빠져 익사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이 말할 수 없이 악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신가?'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진심으로 지난날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고서,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그는 평생을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라고 그 크신 은혜를 찬송하며 살았습니다. 뉴턴은 죽기 전, 자신의 묘비에 남길 말을 스스로 썼습니다. "존 뉴턴, 그는 한때 방탕에 빠진 노예상인이었으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았다." 참으로 은혜 깨달은 자의 간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존 뉴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속엔 하나님의 구원을 믿지 않고 세속적인 욕심대로 살려는 생각이 근본적으로 깔려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조명을 받아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이 믿음 가운데 살게 되었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여전히 불신 속에서 세상과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찰스 콜슨은 감옥에서 믿음을 갖고 말했습니다. "실패를 통해 승리를 얻게 되고, 깨어짐으로 나음을 얻게 되고, 나를 잃어버림으로 나를 찾게 되었다." 믿음은 인생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둘째, 믿음에 대한 보상과 보람을 알아야 합니다. 2절 후반 절 말씀입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b). 예수님은 십자가 저 너머에 있는 승리와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시고 온갖 십자가의 수모와 고통을 견뎌내셨습니다. 그리고 끝내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뮤지컬 [Jesus Christ Superstar]에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장면에, 예수님의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정말 내가 죽어야 합니까? 내일 아침 이렇게 십자가에서 달려 죽어야만 합니까? 이렇게 죽고 나면 내게 주시는 보상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억울하게 이렇게 모순되게 이렇게 죽어가고 말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렇게 부르짖다가 마침내 이런 고백을 하십니다. "좋습니다. 내가 죽겠습니다"라며 순종하는 결단이 나옵니다. 문제는 보상입니다. 내가 희생한 것, 내가 헌신한 것, 내가 고난을 당한 것 보다 더 큰 보상만 있다면, 그 고난과 희생이 문제될 것 없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1770년 9월 29일, 전도집회를 마치고 보스턴으로 돌아가던 중에 그는 엑스터라는 작은 마을을 통과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몰려드는 바람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군중들은 그에게 설교를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들판에 임시 강단이 마련되었습니다. 그가 강단으로 다가가려고 하자 그를 지켜보던 어떤 노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선생님, 당신은 설교하는 것보다 침대에 가서 눕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그만큼 그는 지쳐 있었고, 환자나 다름없어 보이는 병약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휫필드는 강단에서 눈을 감고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 예수님, 저는 주님의 일에 지쳐 있기는 하지만 그 일에 싫증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제가 아직 갈 길을 다 가지 못했다면 저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들판에 서서 주님의 복음을 말하게 하시고 주님의 진리로 모든 사람의 마음에 앉히게 하옵시고, 그 다음에 죽어 본향으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그는 기도를 마친 후 혼신의 힘을 다해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통해서 은혜를 받았던지, 그 날 그가 전한 메시지는 그의 평생을 통해 증거했던 말씀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설교중의 하나였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 다음날이 주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서 그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미 잠자다가 평안히 주님의 부름을 받아 천국으로 떠난 뒤였습니다. 그의 나이 56세, 오래 사는 사람에 비하여 조금 빨리 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참으로 기막히게 멋있고 보람 있는 인생을 살다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7-8).


셋째,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나도 주님을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3절입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12:3). 예수님은 죄인들이 당신에게 그토록 거역하고 대적했음에도 참고 도리어 저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그 극심한 고통 중에도 주님은 하나님께 그들을 용서해주시길 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르고 대적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을 위해 기도해주신 주님의 은혜로 우리는 주님 앞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고난 중에도 주님을 따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달려갈 힘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곧 사랑이신 우리 주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 대륙의 전도 책임자로 있을 때, 그는 가끔 전도를 희망하는 후보자를 면접하였습니다. 한번은 봉사하기로 결심한 한 사람을 만나 "왜 당신은 해외 선교사로 가기를 원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선교사 후보는 대답하기를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 세계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가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다른 한 명은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리스도 밖에서 타락하고 있기 때문에 선교사로 나가기를 원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때 허드슨 테일러는 말하기를 "그 모든 동기들은 좋지만 시험과 시련 그리고 고생, 심지어 죽음의 순간을 당할 때, 그것은 당신을 구하지 못합니다. 단지 한 가지 동기가 당신을 어려운 시험과 시련에서 견디게 해줄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아프리카에 있는 선교사가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 진실로 좋아서 합니까?" 그의 대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아닙니다. 나와 처는 먼지와 이 고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초라한, 냄새가 나는 이런 오두막에서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주님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우리는 가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만이 지치지 않는 힘을 공급해줍니다.


우리가 지쳐 낙심치 않도록 우리를 응원하며 격려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1절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히12:1). 여기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란, 히브리서 11장에서 소개한 믿음의 증인들로서,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 기생 라합과,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로서,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며, 의를 행하고,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고, 희롱과 채찍질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 중에도,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하여 승리한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입니다.


정채봉님의 글입니다. - 상처를 입은 젊은 독수리들이 벼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날기 시험에서 낙방한 독수리, 짝으로부터 따돌림을 받은 독수리, 윗 독수리로부터 할큄을 당한 독수리,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들만큼 상처가 심한 독수리는 없을 것이라고들 생각했다. 그들은 사는 것이 죽느니만 못하다는 데 금방 의견이 일치했다. 이때, 망루에서 파수를 보고 있던 독수리 중의 영웅이 쏜살 같이 내려와서 이들 앞에 섰다. "왜 자살하고자 하느냐?" "괴로워서요,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것이 낫겠어요." 영웅 독수리가 말했다. "나는 어떤가? 상처 하나 없을 것 같지? 그러나 이 몸을 봐라." 영웅 독수리가 날개를 펴자 여기저기 빗금 진 상흔이 나타났다. "이것 날기 시험 때 솔가지에 찢겨 생긴 것이고, 이건 윗 독수리한테 할퀸 자국이다. 그러나 이것은 겉에 드러난 상처에 불과하다. 마음의 빗금 자국은 헤아릴 수도 없다." 영웅 독수리가 조용히 말했다. "얘들아, 일어나 다시 날자꾸나. 상처 없는 새들이란 이 세상에 나자마자 죽은 새들뿐이란다. 살아가는 우리 가운데 상처 없는 새가 어디 있으랴!" -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모두 상처가 있었으나 승리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때로 지치고, 괜히 피곤해 지고, 쉽게 낙심이 찾아 올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식물이 태양을 등지면 시들고 말 듯, 우리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으면 우리는 힘을 잃고 지치고 낙심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까지 참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을 조용히 있는 시간을 마련하지 못해서 놓치고 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혼자 조용히 예수님을 앙망하며 그분의 사랑을 묵상할 때, 위로부터 놀라운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한신대학교 목회상담학 교수 정태기 목사님은 인생의 위기를 만난 사람들에게 상담을 통해 용기와 희망을 주고 스스로 자기 나아갈 길을 찾아 갈 수 있도록 카운슬링 해주는 상담가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40대 후반의 어느 해 가을 갑자기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몰려왔습니다. 가정에는 아내와 자녀들도 있었고, 학교에는 그가 사랑하는 제자들과, 교회에는 그를 아껴 주는 교우들도 있었는데도 그는 외로웠습니다. 결국 우울증에 빠져 모든 일에 의욕을 상실하여 만사가 짜증스럽고 귀찮아 신경질만 내자 아내가 "당신은 아무 부족한 게 없는 사람인데 왜 그렇게 불평 불만이 많아요?"하고 묻습니다. 이래선 안 될 것 같아 기도원에 가서 소리도 질러 보고 열렬히 기도도 했으나 여전히 마음은 공허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소록도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결단을 내리고 찾아갔습니다. 소록도의 어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 후 통성기도 시간이 되어 조용히 기도를 하는데 뒤에서 이런 소리가 들립니다.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놀라운데 제가 그 은혜를 어떻게 갚겠습니까?"하는 소리가 감격의 울음과 함께 계속되었습니다. '누가 얼마나 은혜를 받아서 저렇게 감격스럽게 기도를 할까?' 궁금하여 뒤돌아보았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그 사람은 코도, 귀도, 팔목도 없는 문둥병자로서, 남은 눈은 일그러지고 입은 한쪽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차마 눈뜨고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노인 문둥병자가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놀라운데 제가 어떻게 그 은혜를 갚겠습니까?"하는 기도를 눈물 흘리며 연신 되풀이하는 모습에 이 목사님은 그 할아버지 앞에 고꾸라져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감동으로 끊이지 않는 눈물을 흘리며 한참을 울고 있는데, 그 할아버지가 "일어나세요. 예배가 끝났어요."하고 깨우고는 일어나 나가기에, 그는 할아버지를 뒤따라가 어깨를 두드리며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뭐가 그리 감사하세요?"하고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활짝 웃으며 "감사하고 말구요. 내가 문둥병에 걸렸다고 내 고향이 나를 버렸습니다. 내 친척도, 심지어는 내 가족도 나를 버려 이곳 소록도에 쫓겨왔는데, 이곳까지 나를 찾아와 이 엄청난 기쁨과 평안을 주신 분이 계시니 이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누가 찾아오셨는데요? 할머니가 찾아오셨나요?"하고 물으니 "아니요. 예수님이 찾아오셨지요"라고 대답하며 환히 웃었습니다. 그 날 저녁 소록도의 어느 목사님과 기거하기로 한 약속을 취소하고 그 할아버지와 함께 닷새 동안 두 평도 안 되는 방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할아버지는 팔목도 없는 팔로 그 목사님을 감싸안고 눈물로 기도해주었습니다. 그때 지난 10년 동안 이 목사님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무겁게 짓누르던 우울증은 사라져 버렸고, 새로운 기쁨과 감격으로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아무 것도 부족할 게 없는데도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느 것 하나 없이 어렵게 살아도 행복한 사람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그에게 계시는가 안 계시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니던 때 추운 겨울 난방도 들어오지 않던 강의실에서 생소한 언어인 히브리어의 학점을 미리 따겠다고 윈터 스쿨에 등록하여 힘겹게 씨름했었는데, 늦깎이 신학생들이 모두 힘들어 하나 하나 윈터 스쿨을 포기하던 때, 교수님이 들려준 한 마디가 제게 큰 위로와 용기가 되었습니다. "우리 깡다구로 하지말고 은혜로 합시다."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은혜와 그 선하신 섭리를 믿을 때, 그 안에 '나'라고 하는 존재의 긍정이 있고, 이 믿음 안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의 피로와 고난도 이겨낼 지혜와 능력을 얻게 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40:31). 우리는 인생의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죄와 무거운 것들을 벗어버리며, 앞에 있는 상급을 바라보며 끝까지 인내로 경주할 때, 주께서 독수리가 창공을 향해 솟구쳐 오르는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3절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관련영상
31:45
동문교회 특별영상
2019.12.15.
01:05:56
등촌제일교회 주일낮예배
2020.03.15.
56:43
구리지구촌교회 주일설교
2012.09.09.
36:45
등촌제일교회 주일낮예배
2014.01.26.
32:44
구리지구촌교회 수요설교
2013.07.17.
01:16:03
등촌제일교회 주일낮예배
2020.03.29.
38:59
등촌제일교회 주일낮예배
2014.12.28.
29:24
신촌아름다운교회 새벽예배
2014.11.05.
01:02:50
월산성결교회 주일예배
2014.06.22.
31:47
구리지구촌교회 수요설교
2014.09.24.

© Copyright 2011 - 2024 쉐마TV. All Rights Reserved
Serviced by 루트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