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29 68회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2019년 9월 29일 주일예배
마가복음 8 : 14 - 21 ; 시편 49 : 20
건망증과 치매의 차이를 아십니까? 건망증은 어떤 사실을 잊어버렸다가 누군가 일깨워주면 '아, 그랬지'하고 기억나는 것이고, 치매는 그 사실을 말해줘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건망증과 치매는 임상적 차이는 이렇습니다. 배우자의 생일을 잊어먹는 것은 건망증이고, 얼굴을 잊어버리면 치매랍니다. 남자가 볼일보고 지퍼를 안 올리면 건망증이고, 지퍼를 안 내리고 볼일 보면 치매랍니다. 건망증에 걸린 본인은 걱정이 되는데, 치매 걸린 사람은 아무 걱정 없답니다.
세상에 이런 기상천외한 일도 있습니다. 2013년 8월 11일 로이터통신의 보도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스페인 남동부 알리칸테에서 높이 약 200m, 47층의 주거용 아파트 'InTempo'의 건설이 진행되고 있지만, 거의 완성에 이르러서야 21층 이상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문제가 되고 있다고 12일 영국 언론이 전했다. 이 고층 주택은 당초 20층으로 계획된 후에 47층으로 변경. 이 때, 설계자가 증축 분의 엘리베이터 설치를 잊고 아무도 이 결함을 깨닫지 못한 채 공사가 진행되었다. 내부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원래는 2009년에 오픈 할 예정이었지만 국가의 깊은 경기 침체로 미뤄지다 올해 12월 완공 예정이다. 높은 200m의 이 건물은 완공이 되면 유럽에서 가장 높은 주거건물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20층 건물을 47층으로 바꾸려면 건물 위에 건물을 올리는 일이 아니라, 기초부터 모두 다시 해야하는데, 엘리베이터가 빠진 것도 모르고 공사했다니 상상이 안됩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지만 그 실수를 되돌리는 데는 큰 대가가 요구됩니다.
그런데 기억이란 무언가 입력된 정보가 있어야 그걸 다시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 만약 들은 것이나 배운 것이 없다면 아무리 명석한 머리를 가진 사람일지라도 어떤 것도 기억하거나 생각해낼 것이 없습니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의 작가 레오 버스카글리아는 어렸을 때부터 지닌 습관은 잠자리에서 '오늘 뭘 배웠지?'라고 스스로 묻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습관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배웠는데, 그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5학년 밖에 못 배웠지만 '세상이 곧 학교다. 아침에 일어나 아무 것도 배우지 않고 잠드는 건 죄악이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아버지는 저녁 식탁에서 가족 모두에게 물었습니다. "오늘 네가 배운 건 뭐지?" 그러면 아이들은 한 가지씩은 꼭 대답해야했는데, 만약 배운 것이 없다고 하면 어떤 한 가지를 알아오기 전엔 식사를 못했습니다. 배운 것은 학문적인 지식뿐 아니라 그 날 겪은 경험도 포함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경험에 대해 칭찬도하고 어떤 때는 꾸짖기도 하여 무서움을 느꼈지만 마음에 점차 올바른 가치관이 싹텄습니다. 아버지가 "인간의 수명은 한계가 있지만 배움은 끝이 없단다. 인간은 무엇을 배우느냐에 따라 달라진단다"고 일러줬습니다.
오늘 성경에는 참으로 답답한 제자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시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을 때,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제자들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축사하셔서 갑자기 불어난 떡과 물고기를 군중들에게 날라준 제자들은 참 신이 났을 것입니다. 이런 기적이 한 번만이 아니라,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4천 명을 먹이신 사건이 한번 더 있었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엄청난 사건이었는데, 그러나 그 사건이 지나고 나니 사건은 사건으로 지났을 뿐, 제자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깨닫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아마 4천 명을 먹이신 사건이 있었던 바로 그 다음날로 보입니다.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호수를 건너가시며 제자들에게 경계하시기를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막8:1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누룩'이란 말씀에 대뜸 생각하기를 '아마 떡이 없는 것을 아시고 저 말씀을 하시는가 보구나'며 먹을 것을 걱정하면서 저희들끼리 그 문제를 가지고 수군거렸습니다. 베드로는 "가룟 유다야, 네가 회계를 맡았으니 네가 준비했어야 했지 않느냐?"고 책망했을 것이고, 유다는 "베드로 네가 우리 중에서 대표라면 네가 미리 이 일을 누구에게 시켰어야 하지 않았느냐?"며, 서로 다투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으신 예수님은 참으로 답답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막8:17-18)하시며 탄식하십니다. 참으로 한심한 제자들입니다. 주님이 지금 신령한 이야기를 하고 계신데, 제자들은 먹을 것 걱정이나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누룩'이야기를 하시니까, 기껏 생각하는 것이 '떡' 생각밖에 못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은 깨달음이 없는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막8:7). 여기 '알지 못한다'는 말은 이해력의 결핍을, '깨닫지 못한다'는 말씀은 통찰력의 부족을 지적하는 말씀이며, '마음이 둔하다'는 책망은 진리에 접근하기 위한 지, 정, 의의 활동이 마비된 상태입니다.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막8:18)는 책망은, 그들의 육체의 눈은 열렸으나 영의 눈은 감겨있어, 육체의 소리는 들으면서도 주님의 말씀은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시편에는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49:20)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말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교만과, 잘못된 선입견과, 편견과, 이기심과 회개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지식을 수용하는 만큼 발전합니다. 대개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무식한 것 같습니다. 평생을 배워도 늘 자기 생각만 옳고 남의 말을 들을 줄 모릅니다. 평생 듣고 살아도 정작 듣는 것이 없습니다.
[숨바꼭질]이란 정을순 할머니의 시입니다. "오만데 다 한글이 숨었는 걸 팔십 넘어 알았다. 낫 호미 괭이 속에 ㄱㄱㄱ, 부챔개 접시에 ㅇㅇㅇ, 달아놓은 곳감에 ㅎㅎㅎ 제 아무리 숨어봐라 인자는 다 보인다". 낮에는 농사일에 매진하고 밤에는 문해(文解) 교실에서 주경야독한 정을순 할머니가 80세를 넘겨서야 한글을 배우고 쓴 시입니다. 단 한 개의 글자도 읽지 못했던 세월 끝에 글을 배우고 주변을 바라보니 한글에 둘러싸여 살아왔음을 깨닫게 된 감동과 기쁨이 절묘하게 표현된 이 시는 국가평생교육진흥원에서 실시한 대국민 투표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왜 두 번이나 기적을 체험하고도 예수께서 '누룩'에 대해 말씀하시자, 금방 '떡 걱정'을 했을까요? 첫째는 그들에게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17절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십니다. 깨달음이 없는 자에게 사건 자체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인간의 경험은 그 의식 속에 있는 것이지 물리적 경험은 사실상 경험이 아닙니다. 깨닫고서 비로소 경험이 경험되기에, 정신병자에게는 경험이 없다고 합니다. 다리가 부러지든, 손이 불에 타든 그것이 그에게 아픈 기억으로 남지 않기에, 그에겐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보는 것, 듣는 것이 경험이 되는 줄 알지만, 깨닫지 못하는 자에겐 아무 의미 없는 사건으로 지나갑니다.
아무리 귀한 선물을 받았어도, 고마움을 못 느끼면 그 선물은 의미가 없습니다. 종은 때려서 울려야 종인 것처럼, 복은 그 마음에 부딪치는 감사와 행복이 있어야 복입니다. 기쁨과 감사가 없다면 그것이 축복일 수 없습니다.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고 깨달음에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이에 대한 감사가 없이 불평과 원망뿐이면 그 소유에 치어 죽어도 그는 불행합니다. 지혜롭고 행복한 사람은 적은 것이라도 그 가치를 알고, 그것을 크게 생각하여 행복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비슷한 사건을 두 번씩이나 경험해 놓고도 왜 이토록 깨달음이 없었을까요? 15절에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씀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계하십니다. 여기서 '누룩'이란 빠른 속도로 널리 퍼지는 영향력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나쁜 영향력은 무엇입니까?
먼저 바리새인의 영향입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에 대한 누가복음 말씀입니다.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눅12:1). 여기서 주님은 '바리새인의 누룩'을 '외식'(外飾)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외식'이란 '겉만 꾸민다'는 뜻입니다. 실질적인 내용은 없이, 겉만 꾸미고 바깥에만 관심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주의라면 '외식주의' 혹은 '형식주의'라고 정의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로 이런 외식주의를 경계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의 성향을 주님은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24). 바리새인들은 안식일과 십일조 등, 외적으로 드러내는 종교적인 관습에는 그토록 열심이었으나, 이보다 중요한 신앙의 핵심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지키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순종하려는 의지는 없이, 종교의 형식을 수호하는 데만 열심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신앙에 깨달음이 없었던 이유는 그들의 관심이 바로 바리새적인 영향을 받아 말씀에 대한 순종보다는 외식적인 겉치레에만 익숙해 있었기에, 아직까지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1453년 회교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을 때, 발칸인들이 앞으로 수세기 동안 기독교의 지배를 받느냐, 회교의 지배를 받느냐는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사제들은 성모 마리아상의 눈의 색을 무슨 색으로 할 것이냐, 천사는 남성적이냐 여성적이냐, 성수(聖水)에 파리가 빠져 죽었는데 성수가 오염됐느냐, 파리가 성화(聖化)됐느냐하는 문제로 싸웠습니다. 제정(帝政) 러시아가 망할 당시에도, 교회 지도자들은 성직자의 옷의 단을 빨간색으로 할 것이냐 황금색으로 할 것이냐는 문제로 열흘 동안이나 싸우는 사이 볼셰비키는 여섯 명이 모여서 당을 조직하고 마침내 '공산혁명'을 일으킴으로 러시아제국은 망하고 교회도 다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의식주의에 매여 쓸데없는 것에 신경 쓰느라 본질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음은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막8:15)는 말씀을 마태복음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마16:6)며, '헤롯'을 '사두개인'이라고 합니다. 헤롯과 사두개인은 한 통속이었습니다. 헤롯은 로마에 많은 돈을 주고 팔레스타인을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얻어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바리새인들과 함께 쌍벽을 이뤘던 사두개인들은 제사장 출신으로, 그들은 로마와 결탁하여 친 로마적인 태도를 취하며 헤롯왕가와 어울리렸습니다. 종교인이면서도 관심은 종교보다는 돈과 권력이 그들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헤롯과 사두개파들은 세속주의, 혹은 물질주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바리새주의와 함께 헤롯주의의 영향을 주의하라고 경계하십니다. 사두개인과 헤롯의 영향이란 세속주의와 물질주의를 뜻하는데, 제자들은 주님의 능력을 보고도 그 신앙적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누룩'이야기만 해도 금방 '먹을 것'을 걱정했습니다. 그들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 것은, 굶주린 자에게 하늘의 능력과 사랑으로 먹여주신 주님의 마음보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양을 만들어낸 그 물질에만 관심을 쏟은 때문입니다.
연세대 소아과 김동수 교수의 간증입니다. 그는 학교 장학금으로 미국 유학을 갔습니다. 처음에는 논문을 위한 실험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자신만만했는데 일 년 반이 지나자 그만 탈진했습니다. 돌아갈 날이 6개월 남았는데 아무리 실험해도 실패의 반복이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예배당에 엎드려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더 이상 기도할 힘도 없습니다. 주님의 뜻을 알게 해 주세요." 무심코 성경을 펼쳤는데 하박국 3장 17절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그때 마음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너는 그 잘난 실험 문제로 그렇게 기도하고 있느냐? 여기 하박국 선지자는 이 세상에 아무 것 없어도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겠다는데 과연 너는 세상의 아무 것도 없어도 너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만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느냐?" 그 순간 크게 깨닫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구원을 주신 하나님만을 인하여 기뻐하겠습니다. 실험이 성공하지 못하고, 논문을 못 써도 '나는 구원을 얻었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겠습니다. 이제 실험 문제는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그의 눈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 후 마음에 깨달음과 평안이 생기자 제자리를 걷던 실험이 놀랍게 진행되고, 그 후 6개월 간 실험에서 무려 네 편의 논문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 하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을 믿고 말씀으로 살아갑니다.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5병2어의 기적을 행하신 주님이 함께 하신다면 뭐가 문제입니까?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가 말씀하시면 천지는 변할 수가 있고, 세상은 새로워 질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들을 귀가 없고, 주님을 볼 수 눈이 없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십니다.
둘째는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8절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십니다. 모처럼 귀한 경험을 통해 깊은 깨달음이 있었는데, 이것을 곧 잊어버리면 이것도 큰 문제입니다. 우리는 귀한 깨달음과, 소중한 경험은 오래도록 간직해야합니다. 많은 값을 치르고 얻은 경험을 일생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감격을 오래오래 지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성령은 알게 하고, 깨닫게 하고, 감당하게 하고, 그리고 기억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객관적 사건에 대한 주관적 인식, 주관적 체험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공부하는 학생이 밤새워 공부했어도 정작 시험장에서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효입니다. 우리는 말씀의 은혜를 깨달았으면 이제 생활 현장에서 순간 순간 필요한 말씀이 기억나야 그 말씀이 효력이 나고, 삶을 새롭게 하는 생산적인 힘이 됩니다. 신앙의 건망증 환자는 부득불 자주 매를 맞고 자주 당하면서 반복되는 사건으로 계속 시달리고 말 것입니다.
망각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애초에 기억이 '제대로' 저장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첼로 연주자인 요요 마는 1999년 뉴욕에서 공연을 마친 뒤 250만 달러의 첼로를 택시 짐칸에 넣은 것을 잊어버리고 내렸습니다. 잠시 뒤 '아차, 첼로!'하고 떠올렸으나 이미 택시는 떠난 뒤였습니다. 다행히 그는 택시비 영수증을 보관하고 있었고 몇 시간 뒤 첼로를 무사히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망각은 특히 반복적으로 하는 익숙한 행동을 할 때, 제대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때 잘 일어난다고 합니다. 모든 경험이 뇌에 기억으로 남는 것은 아닙니다. 주의를 기울여 외우지 않으면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뿐 제대로 저장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셋째는,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9절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이 직접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진 않았지만, 이것을 자신들의 경험으로 삼아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경험까지 나의 경험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다른 사람이 겪은 사건까지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여 은혜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꼭 자기가 경험해야만 한다고 하지만, 산부인과 의사라고 자기가 아기를 낳아봐야만 해산의 이치를 아는 것이 아니듯, 다른 이의 경험을 통해서도 배울 것을 배워야 합니다.
김응국 목사의 [십자가]란 책에 실린 '가슴을 치는 구원의 출발'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 내가 잘 아는 후배가 있다. 부부가 모두 엘리트이다. 그 부인은 젊은 시절부터 직업전선에서 항상 바삐 지냈고 그러다 보니 드링크 종류의 각성제를 항상 끼고 살았다. 몸이 조금만 불편해도 약을 먹었다. 그런데 임신한 줄도 모르고 감기약을 먹고 말았다. 그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때 낳은 아들이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다. 엄마, 아빠의 보살핌이 없이는 생활하기 곤란한 아이로 인해 엄마는 계속 눈물지었다. 왜 그런가? 자신이 약을 함부로 먹는 바람에 아이에게 병이 생겼을지 모른다는 자책감 때문이다. 눈물로 아이를 뒷바라지하지만 엄마는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는다. 그만큼 연약한 자식에 대한 자책과 안타까운 눈물이 안에서 치솟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에 대해서 자책감이 없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란 자신이 예수님을 죽였다는 자책감과 죄의식을 항상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죄책감과 동시에 그 죄를 용서받았다는 은혜를 같이 품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자책감을 안고 사는 사람은 평생 은혜를 머금고 살아간다. 우리는 지적인 동의만으로 구원받았다고 착각한다. "예수가 내 죄를 위해 죽었다더라"하는 지적인 수긍은 절대 구원이 아니다. 내가 예수님을 죽였다는 자책감으로 가슴을 치고 슬퍼하는 것이 구원의 출발이다. 이 믿음이 없이는 헛것이다. -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려는 유혹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모든 말씀은 바로 나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 준행할 때, 오늘의 은혜가 은혜 됩니다. 성경에 나타난 사건이나, 다른 사람이 경험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현재의 나의 사건으로 받아야 합니다. 과거에 있었던 단순한 역사적 사건만이 아니라, 바로 오늘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여, 내게 적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그 사건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느낌 없는 책 읽으나 마나, 깨달음 없는 종교 믿으나 마나, 진실 없는 친구 사귀나 마나, 자기 희생 없는 사랑 하나 마나'라는 말처럼 아무런 깨달음과 실천이 없다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중공의 모택동이 통치하던 시절, 극동방송국에 동경의 극동방송을 경유하여 중국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왔습니다. 당시 중국은 문화혁명으로 성경을 모조리 불살라버려 중국의 지하교회 성도들은 성경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극동방송은 밤 자정부터 성경을 중국어로 읽어주었습니다. 방송국으로 온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저는 방송을 들으며 열심히 성경말씀을 받아 적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까지 다 받아 적었으나 사무엘상 15장을 읽을 때는 방송상태가 고르지 못해 잘 받아쓰지 못하였으니 죄송하지만 그곳을 다시 읽어주실 수 있을까요?" 너무나 감격한 중국어 아나운서는 그 날 방송을 통해 편지를 잘 받았다는 이야기와 몇 월 몇 일 그곳을 다시 읽어드릴 테니 준비하고 기다려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방송했습니다. 그 날이 되었습니다. 아나운서는 보통 때보다 더 천천히 그곳을 읽었습니다. 한 달 후 그 성도로부터 한 통의 이런 편지가 왔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요청 드린 성경말씀을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 말씀을 받아 쓴 후 너무 감사하고 감격하여 한동안 울었습니다. 저도 이젠 성경책 한 권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 성경은 한 짐 잔뜩 됩니다. 붓으로 적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너무나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몇 권씩 가지고 있으면서 얼마나 읽고 있습니까?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Newton, Isaac)은 노년에 건망증으로 자기 이름도 잊어버렸고 제자들도 분간 못하는 모습에 제자들이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선생님, 그렇게 다 잊어버리셨다면 이제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이 있습니까?"하고 물어보았습니다. 뉴턴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님이 내 구주라는 것만은 알고 있지"라고 대답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잊어도 예수님이 구주 되심을 잊지 않았던 것은 구원은 놓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지난날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까? 아니면 은혜를 받은 사건이 부족합니까? 우리는 대개가 이미 만족할 은혜가 있었으나 깨달음이 부족했고, 또 깨달은 은혜를 귀하게 간직하지 못한 까닭에 쉽게 잊어버려 그 소중한 은혜를 간직하지 못하여 메마르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깊이 깨닫고 간직하여 오늘의 은혜로 삼음으로 승리케 하시는 능력으로 살아갑시다.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