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02 241회
"우리의 믿음도 자라야 합니다"
2020년 8월 2일 주일예배
베드로후서 3 : 14 - 18 ; 사무엘상 2 : 26
여자들의 남자에 대한 평가기준을 보면, 1위는 '키도 커'인데, 이 말은 '돈도 많고 키도 크다'는 말이랍니다. 2위는 '키는 커'로서, '돈은 없지만 키는 크다'는 뜻이고, 3위는 '키만 작아'인데, '돈은 있고 키는 작다'는 뜻이며, 4위는 '키도 작아'로서 '돈도 없고 키도 작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키가 가장 중요한 평가의 기준인가 봅니다.
2016년 7월 26일 MBC '이브닝 뉴스 터치'에 의하면, 한국인의 평균신장이 지난 100년 사이 크게 성장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영국 가디언에 의하면, 임페리얼 칼리지 연구팀은 전 세계 200개 국가 남녀평균신장이 1914년부터 2014년까지, 100년 사이의 변화를 분석했습니다. 이 기간 한국여성 평균키는 142.2cm에서 162.3cm로 20.1cm 커져 조사대상 국가 중에 가장 큰 성장을 보였고, 일본여성은 16cm, 중국은 9.5cm, 미국은 5cm에 그쳤습니다. 한국남성은 이란과 그린란드에 이어 3번째로 100년 사이 15.1cm 커졌는데, 100년 전엔 200개 국가 중 150번째였는데, 이젠 51번째로서 100계단을 뛰어올랐습니다. 식생활의 개선이 가장 큰 요인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큰 키는 높은 선반 물건을 내릴 때 외엔 별 도움이 없다고 합니다. 등소평의 키는 150cm였지만, 12억이나 되는 중국을 그 극심한 도탄에서 건져냈습니다. 모택동이 어느 날 중국 공산당 정책위원회에서 중요한 결의를 할 때, 만장일치로 결의하면서 "우리 모두 기립하여 찬성을 표하십시다"하여, 다 일어섰는데 등소평은 키가 작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만있자, 다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데요?"하니까, 등소평씨가 의자 위에 올라서서 "저도 일어섰습니다"라고 외쳤답니다. 우리는 외형에만 치중하여 크고 화려한 것만 추구하는데, 이런 것이 과연 본질일까요?
[우리 시대의 역설]이란 글입니다.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다. 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 집은 커졌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다. 더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모자란다.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졌고,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생활비를 버는 법은 배웠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렸고, 인생을 사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넣는 법은 상실했다. 달에는 갔다 왔지만, 길을 건너가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다. 외계를 정복했는지 모르지만, 우리 안의 세계는 잃어버렸다. 공기 정화기는 갖고 있지만, 영혼은 더 오염되었고, 원자, 분자는 쪼개지만 편견은 부수지 못한다. 유혹은 늘었지만, 열정은 줄어들었다. 키는 커졌지만 인품은 왜소해지고, 이익은 더 추구하지만, 관계는 나빠졌다. 빨라진 철도, 편리한 일회용품들, 그러나 양심은 줄어들었고, 행복은 느끼기 어려워졌다."
우리는 지금 일년 중 가장 무덥고, 습도까지 높은 장마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서 이 무더위가 지나가고 시원한 날씨에 하늘이 청명한 가을이 왔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고온 다습한 기후야말로 식물의 성장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입니다. 푹푹 찌는 무더운 여름철이 없으면, 가을에 아무 거둘 것이 없습니다. 견디긴 힘들어도 비 오는 무더운 날씨가 있어야, 모든 식물이 무성하게 자라 풍성한 결실을 기대할 수 있기에, 이 무더위도 마다할 수 없습니다.
이런 식물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성장해야 할 때 성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장 큰 비극입니다. 어떤 가정에 어린아이가 태어나 모두들 크게 기뻐했는데, 이 아이가 돌이 되어도 서지도 못하고, 그저 누워서 멀거니 천장만 쳐다보고 있거나, 나이가 열 살이 되고 스무 살이 되어도, 지각이 발달하지 못하여 사회생활을 하지 못한다면, 부모의 가슴에는 못 박는 큰 고통이 되고 말 것입니다. 뉴맨이란 목사님의 "성장은 생명의 유일한 증거다"라는 말처럼, 살아있는 존재는 곧 성장해야만 합니다.
성장의 문제는 우리의 신앙에도 중요합니다. 교회에 나와 예수 믿고 세례도 받고 직분도 얻었는데, 개인적 안일과 세상에 대한 애착으로 믿음의 성장을 기피한 채, 유아기적 신앙의 자리에 머문다면, 하나님 아버지는 얼마나 마음 아파 하실까요? 이런 분들일수록 대체로 보면, 신체적 성장이나, 지식의 성장, 그리고 세상에서 어떤 지위의 상승과 경제적 발전에 대해선 남다른 열망이 큰데, 영적인 성장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자녀가 공부하는 것이 귀찮고, 이 사회의 성숙한 시민으로 자라서 국민 된 책임을 지는 것이 싫어, 공부를 멀리하고 도덕과 교양의 훈련을 기피한 채, 그저 놀기만 하고, 쾌락을 즐기는 일에만 관심을 갖으면서 지적으로나 인격적인 성장을 거부한다면, 이런 모습을 보며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신앙인의 성숙은 어떤 모습입니까? 빌립보서는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2:4). 먼저, 스스로 자기가 해야할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자기 일을 스스로 하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유치한 사람은 대접받는 일에는 나서고, 힘든 일이 있으면 뒤로 빠지면서, 다른 사람에게 짐을 지우고 떠넘기면서, 아무 일에도 자신이 책임지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모든 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이 일에 내가 무엇을 해야할까,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를 생각하여, 자기가 감당해야할 자기 책임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누가 가장입니까? 가정을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누가 회사의 주인입니까? 끝까지 그 회사를 책임지는 사람이 그 회사의 주인입니다. 모든 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자기 일을 스스로 하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다음으론 다른 사람의 일까지 돌보는 사람입니다.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자기만 알고 자기 좋을 것만 찾던 아이가 자라서 성년이 되면, 이제는 다른 사람 입장도 살피고, 다른 이를 배려할 줄도 알게 됩니다. 조지 워싱턴 카버는 말합니다. "당신이 얼마나 인생을 잘사느냐는 젊은이에게 친절하고, 늙은이들에게 인내하며, 고민하는 이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약하고 강한 자를 참아내는 데에 달렸다. 왜냐하면 인생을 살다보면 당신도 이 모든 상황을 접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입니다.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어떤 여인이 자신의 지난 삶을 돌이켜보았습니다. 그녀는 아버지를 무척 좋아하고 따랐는데,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며 아버지와 나눈 대화를 생각했습니다. 어린 소녀 시절, 아침마다 아버지에게 물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아빠, 오늘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시겠어요?" 그리고 꼬마 숙녀가 되었을 때, 아버지에게 "아버지, 오늘 우리가 함께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묻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그러나 이제 서른 살이 넘어 어엿한 성인이 되자, 그녀는 아버지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제가 아버지를 위하여 무엇을 해드릴까요?" 이제는 어떻게 하면 아빠를 기쁘게 할까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3:18)하신 말씀을 통해 우리의 영적 성장의 길을 생각해봅니다. 첫째, 주님과 깊은 결속으로 믿음의 뿌리를 견고히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벧후3:17). 당시 거짓 교사들은 거짓된 교리로 성도들을 미혹하여 믿음에 떠나게 했는데, 그들의 유혹을 흔들리지 않도록 믿음의 뿌리를 견고하게 해야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2:6-7). 뿌리가 견실하지 못하면 나무는 잘 자라지 못하듯 우리 믿음도 그리스도께 대한 확고한 믿음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작은 유혹과 세상의 풍조에 휩쓸려 넘어지고 실족하게 되고 맙니다.
우리는 나무를 심을 때 기름진 땅을 찾지만, 프랑스의 한 마을에서는 포도나무를 심을 때 일부러 척박한 땅에 심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포도나무는 토질이 좋은 땅에 심으면 탐스런 포도가 열리긴 해도 땅 표면의 영양분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병충해도 많고 기온변화에 민감하며 자연재해에도 약하여 결국 포도의 품질 지속성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척박한 땅에 심으면 더디게 자랄지라도 땅속 깊게 뿌리를 내리기 때문에 포도 맛이 더 깊고, 품질의 변화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도 어려운 중에 주님께 뿌리를 깊게 내려 신앙의 깊은 맛을 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교제를 떠나서는 우리 믿음은 결코 자랄 수 없고, 유지할 수도 없습니다. 세상의 헛되고 거짓된 가르침에 의해 주님께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늘 끊임없는 주님과 교제 속에 살아야합니다. 여러분은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얼마나 됩니까? 주님께 매이기 위해 공식예배마다 참석하고, 힘써 봉사합니까? 아니면 기분대로 신앙생활 하십니까?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는 말씀대로 주님께 뿌리를 깊이 내려 주님과 연합된 삶을 살아야만 믿음이 자랍니다.
한 소년이 역사에 남을 사람이 되길 원하여 목사님을 찾아가 "훌륭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묻자, 목사님이 말해줍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잡아야 한다. 하루에 15분씩 기도하고 15분씩 성경을 묵상하여라. 그리고 15분씩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을 이야기하는데 쓰고, 15분씩 사랑을 실천하는데 써라. 그러면 분명히 하나님이 쓰시는 일군이 될 것이다." 이 소년은 매일 한 시간의 기회를 그렇게 사용하였습니다. 훗날 이 소년은 미국의 많은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한 부흥사 빌리 선데이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제 맘대로 살다가 나이가 들어 더 이상 기력이 없게 되자, 과거를 후회하며 회개합니다. "하나님, 이제부터 열심히 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그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됐네, 이 사람아! 이제 그만 올라오게."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어떻게 사용하며 살고 있습니까?
둘째, 주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3:18). 식물은 햇볕을 받아야 자라듯, 우리의 영혼도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 속에 살아야 우리 영혼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이 강단 위에 관목을 들여놓으면 나무가 오래가지 못하고 잎이 시들어버리는데, 그렇게 시들던 나무도 밖에 내놓고 햇볕을 쪼이면 금방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식물도 햇볕을 받아야만 잘 자라듯, 우리의 심령도 하나님의 은혜의 햇볕을 받아야만 제대로 자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향해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골1:6)며, 은혜를 깨달아야 열매를 맺고 자란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성장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자라게 됩니다. 사람은 '보람을 먹고살고, 자랑을 먹고살고, 사랑을 먹고산다'고 합니다. 사랑을 받지 아니하면 성장이 정지되고, 성장이 정지되면 죽습니다. 우리 영혼은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아들이는 만큼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알고 보면,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도 사랑을 느낍니다. 꾸중도 사랑이요 칭찬도 사랑이요, 매를 치는 것도 사랑이요, 성공도 실패도 다 사랑입니다. 성장하고 보면 다 하나로, 다 은혜로 수용되고 소화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어느 마을 모든 교인들이 한 교회에서 함께 성찬식을 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집례하고, 다른 교회 장로님들이 성찬위원을 하는데, 그중 한 장로님이 판사를 지낸 분이었습니다. 이 분이 성찬기를 들고 회중석을 돌다가 한 성도를 보고 깜짝 놀라 발걸음이 멈췄습니다. 이유는 이 장로님이 아주 유명한 살인사건을 재판했었는데, 그때 그 살인범이 형을 마치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워낙 유명한 사건이었기에 성찬을 집례하던 목사님도 그 모습을 보고 알아차렸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목사님이 장로님에게 "장로님, 하나님의 참 은혜가 놀랍지요?" 그러자 장로님이 말합니다. "목사님은 저분이 그런 삶을 살던 분인데, 이제 예수 믿고 나와서 성찬에 참례하여 놀라셨겠지요?" "예, 그럼요." "저도 놀랐는데 저는 그분에게 떡과 잔을 드리며 문득 다른 것을 생각했습니다." "무얼 생각했습니까?" "제가 그 사건을 잘 아는데, 사실 그분 입장에 제가 섰다면, 아마 저도 살인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살인자가 안되고 이렇게 주님 섬기는 사람이 된 것을 생각해보니까, 그것이 제게 하나님의 은혜더라구요." 우리가 이미 지은 죄를 용서받는 것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지만, 우리가 죄 짓지 않고 날마다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또한,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 없이는 믿음의 성장이 불가능하기에 날마다 주님의 은혜를 깨닫고 누리며, 매일 이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야합니다. 그러면 어떤 마음이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일까요? 한 설교가는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은 다음 세 가지라고 했습니다. 그 하나는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이미 베풀어진 은혜를 깨닫고, '아, 주님께서 이렇게 은혜를 베풀어주셨구나'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날마다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주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알고, 그 은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마음입니다. 세 번째는 기대하는 마음입니다. 주님을 통해서 더 큰 은혜를 받을 것을 기대하는 마음, 이것이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의 토양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고든 코스비가 워싱턴 구세주교회 목사로 시무하던 때, 여섯 명의 자녀를 간신히 먹이고 입힐만한 수입 밖에 없던 어느 과부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녀는 그런 상황에서도 매주 4불씩 변함 없이 헌금했습니다. 한 집사가 코스비에게 그녀가 그 돈을 헌금하는 대신 가족을 위해 쓰도록 말해주라고 제안했습니다. 코스비는 그 집사의 권고를 그대로 전했다가 크게 후회하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나의 품위를 지키게 하고, 삶의 의미를 알게 하는, 내게 남은 단 하나의 일마저 빼앗아가려고 하는군요"라고 그녀가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 있다는, 베풂의 진수를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궁핍한 이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는 일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들도 주는 것이 받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할 것입니다. 베푸는 일은 마치 새나 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되새기게 됩니다.
셋째,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야 합니다.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3:19). 여기 '안다'는 말은 피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그분과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서 아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안다고 할 때, 그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내가 서로 알면서 교제하는 사이를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을 안다는 것은, 주님과 내가 서로 아는 사이를 말합니다. 주님과의 교제는 성경 말씀과 기도를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받고, 또 주님께 나의 소원과 중심을 아뢰는, 이러한 주님과의 교제의 관계가 계속될 때, 우리의 믿음은 점점 자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에는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어려운 말씀은 기도하며 기다리면 머잖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한 젊은 시인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마음속에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해 인내하라. 아주 낯선 방언으로 씌어져서 이해할 수 없는 책들을 대하듯 의문 그 자체를 사랑하려고 애써라. 당장 답변을 얻으려고 하지 말라. 답변되지 않는데는 이유가 있다. 지금 답변을 듣지 못하는 이유는 혹 알려주더라도 그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의문을 던지며 사는 것이다. 지금은 의문과 더불어 살라. 그러면 서서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해답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 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벧후1:8). 우리가 열매 맺는 신앙이 되려면 주님을 아는데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해야 합니다. 어떻게 주님을 알 수 있습니까? 주님을 아는 방편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을 얻게되고, 기도를 통해 주님과 직접적인 교제를 하며 개별적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말씀 없는 기도는 주관적인 오류에 빠질 위험이 있고, 기도 없는 말씀은 체험 없는 피상적인 지식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D.L. 무디는 우리의 믿음이 어디서 오며, 또 어떻게 성장하는가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나는 믿음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고 어느 날엔가 벼락이 떨어지듯, 내 마음속에 갑자기 믿음이 오리라고 생각했으나, 그 믿음은 내게 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로마서를 읽던 중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는 로마서 10장 17절 말씀을 읽고, 내 자세가 잘못된 것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는 기도하기 전에 먼저 성경을 펴고 읽으면서 하늘로부터 오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내게 믿음이 생길 뿐만 아니라, 그 믿음이 나날이 자라 감을 알게 되었다." 말씀과 기도로 믿음이 자라게 됩니다.
어느 일간신문에 [134cm의 거인]이란 제목으로 실린 김해영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김해영 선교사는 5남매 중 첫째로 건강하게 태어났는데, 태어나자마자 딸이란 이유로 만취한 아버지가 내던져 척추를 다쳐 평생 불구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결국 자살했고, 어머니는 정신질환으로 그녀는 14살에 남의 집 가정부로 일했습니다.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가정부로 하루하루 힘들게 지내던 어느 날 무료직업학교 훈련생 모집광고를 보고, 기술을 배우면 가정부보다 나을 것 같아 직업학교에 들어갔다가, 독실한 기독교인 선생님을 만나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가난과 절망, 불구와 장애로 평생 동안 원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인생이 예수님을 믿고 완전히 달라져, 불구인 자신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임을 깨닫고, 낮에는 기술을 배우고 밤에는 검정고시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척추손상으로 그녀의 키는 134cm에서 멈추어, 조금만 걸어도 힘들어서 몇 번씩 쉬어야 했고, 통증으로 허리에 복대를 13년 동안 감고 다녀야 했고, 앉아있는 게 힘들어서 늘 엎드려서 책을 보고 공부했는데,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전국장애인기능대회 편물분야 금메달을 땄고, 1985년 콜롬비아에서 열린 세계장애인기능대회에서 우승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인 보츠와나에서 직업학교의 편물교사 모집광고를 보고 그녀는 6개월 단기선교에 지원하여 1990년 보츠와나로 떠나 사막에 있는 직업학교 아이들을 보며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이곳 아이들이 지난날 저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저를 가난과 고통, 사회적 편견에서 벗어나 강하게 만들어주신 하나님을 이 아이들에게도 만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14년 동안 그곳에서 머물며 아이들을 섬기다 2004년 39살에 뉴욕 나약 칼리지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2009년 콜럼비아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현재 국제사회복지사로 일하며, [청춘아 가슴 뛰는 일을 찾아라]란 책을 썼습니다. 134cm의 작은 키, 척추장애, 불편한 두 다리, 이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일어나게 한 그 힘은 어디서 왔을까요? 그것은 끝까지 사랑하고 동행해주시는 신실하신 분에 대한 확고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희망과 용서와 감사를 주셨고, 꿈과 비전을 키워주셨습니다. 155cm의 단신 나폴레옹은 말했습니다. "내 키는 땅에서 재면 작지만, 하늘에서 재면 크다." 우리의 모든 불리한 조건도 믿음 안에서는 위대한 조건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믿음의 성장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주님의 엄숙한 명령입니다. 우리는 이 무더운 여름철에도 우리 믿음이 크게 자라도록 주님께 뿌리를 깊게 내려야 하겠습니다. 어린 사무엘은 우리 주님의 어리셨을 때 모습을 우리에게 연상시켜 줍니다.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삼상2:26). 우리의 몸과 마음, 그리고 믿음까지도 아름답게 자라고 성숙하여,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은총과 귀중히 여김 받는, 참되고 신실한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