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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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세용 목사님

마태복음 26장 36~46절

설교요약 :

"나와 함께 깨어 기도하라"
2018년 2월 18일 주일예배
마태복음 26 : 36 - 46 ; 시편 73 : 27 - 28


어떤 부부가 부부싸움을 심하게 하고 나서 서로 토라져 1주일이 넘도록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의 때문에 아침 일찍 출근하게 된 남편은 하는 수 없이, 화해를 가장해 쪽지를 적어 아내에게 건네 주었습니다. "여보, 나 내일 회사 일찍 가야하니까 5시에 깨워줘요." 그러고는 안심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시계가 벌써 8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당황한 남편이 헐레벌떡 준비를 서두르는데, 침대 머리맡에 웬 쪽지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여보, 5시예요. 일어나세요."


모 여고에 '스스로 깨면 병아리, 남이 깨면 후라이'란 급훈이 있는데, [줄탁동시]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쪼을 줄(口卒), 쫄 탁(啄),한 가지 동(同), 때 시(時)'란 사자성어인데,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선 새끼와 어미 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상적인 사제지간을 비유하거나, 서로 합심하여 일이 잘 이루는 것을 뜻합니다. 송나라 때 고전 [벽암록]에 실린 이 말은 병아리의 부화를 뜻합니다. 병아리가 부화되는 기간은 21일쯤 되는데, 어미 닭이 알을 품고 18일쯤 지나면 알속의 병아리가 밖으로 나오려고 반응을 시작합니다. 이때 어미 닭은 알속의 병아리가 알을 쪼는 소리를 듣고, 밖에서 부리로 함께 알을 깨는 일을 돕습니다. 이 때 병아리가 혼신의 힘으로 안의 껍질을 깨지 않으면 어미 닭 역시 밖에서 도와주지 않습니다. 어미 닭은 험한 세상을 스스로 살아가야 된다는 신념을 출발부터 길러주는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우리는 매일 아침 알람시계가 우리를 깨운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를 깨우는 분은 신이다"라고 했는데, 신이 깨워도 일어나지 않으면 죽고 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즉각 응답해야 우리는 살게됩니다.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주재 일본총영사가 동경에 보고한 정기보고에는 진주만에 주둔한 미 해군전함의 동태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비밀 내용을 탐지한 FBI는 긴급히 당국에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진주만 근처를 배회하는 일본 어선들은 스파이선이므로 절대 경계를 요망함." 그러나 미 정부당국은 그 긴급보고서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냥 흘려버렸습니다. 또한 당시 선교사로 나갔다가 돌아온 월터 저드 박사도 '일본이 지금 전쟁 준비에 광분해 있다'고 거듭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정치를 모르는 선교사의 노파심으로 치부하여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12월 7일 월터 저드 박사는 미네아폴리스의 한 교회에서 중에 또 다시 경고하고 돌아오는데, 자동차 안에서 일본이 선전포고도 없이 하와이 진주만을 무차별 공격했다는 가슴 아픈 뉴스를 듣게 됩니다. 수 차례 경고를 무시한 정부 당국은 그 때서야 서둘러 대응했지만 이미 너무도 많은 군인과 전함을 잃고 난 후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직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다른 제자들은 쉬게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 때 마음을 공동번역에는 '지금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순간에도 누구와 함께 이 고통을 나눌 수만 있다면, 그 고통의 많은 부분을 덜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고통을 누군가 이해해주고, 그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하셔서, 그 동안 가장 믿고 사랑하셨던 제자들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에게 세 가지 당부를 하십니다. 첫째, '나와 함께 있자'는 당부입니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26:38).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에게는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36절)며, 어느 정도 떨어져 있게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가까이 데리고가셔서 '나와 함께 있자'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가장 신임 받던 자들로서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목격했는데(마17:1), 주님은 가장 사랑하는 저들로 하여금 당신의 '고민과 슬픔'을 목격하게 하시며, 당신의 고통의 자리에도 함께 하게 하셨습니다.


그때 주님의 심정은 '고민하고 슬퍼하셨다'(37절)고 했습니다. 여기서 '고민'이란, 극심한 불안과 근심을 뜻하는 말이며(빌2:26), '슬퍼했다'는 말은 마음에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의 깊은 애통을 의미합니다. 바야흐로 예수의 수난의 고통이 실제적으로 시작되고 있는 이때, 예수님은 육체적 고통은 물론이고, 그보다도 스스로 인류의 죄를 지고 죄인이 되어(고후5:21)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으셔야 했습니다(갈3:13). 이 고통이야말로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27:46)라는 그 절규에서 그 고통은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이토록 괴로웠기에, 가장 사랑하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향해 '나와 함께 있으라'고 가까이 불러 같이 있기를 당부하신 것입니다. '나와 함께'라는 말은 스승과 제자사이의 긴밀한 관계성을 보여 줍니다. 예수께서는 비록 제자들이 자신의 고난에 본질적으로 참여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지금 당장의 외로움과 슬픔을 달래기 위해 제자들이라도 곁에 있어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슬픔을 나누면 슬픔은 반감(半減)되고, 기쁨을 나누면 기쁨은 배가(倍加)된다"는 말대로, 주님은 이 힘든 시간에 사랑하던 제자들이 당신의 고난의 현장에 함께 있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와 늘 함께 하길 원하시는데 우리는 얼마나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바쁘다는 핑계로 주님을 제쳐놓은 채 그냥 나 혼자 돌아다니고 있진 않습니까? 이런 글이 있습니다. "월요일, 주님은 내 집에 오셨지만 문간에서 돌아가 버리셨다. '네 마음은 아들딸들로 가득 차서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구나.' 화요일, 노크만 하시다 주님은 발길을 돌리셨다. '네 집은 돈으로 가득 차 발 디딜 틈도 없구나.' 수요일, 나를 부르시던 주님은 슬픈 낯이 되었다. '세상 재미에 귀가 먹어 내 음성을 못 듣는구나.' 목요일, 주님은 화를 내셨다. '내가 찾아왔는데 피곤하다고 인사도 안 해?' 금요일, 주님은 우셨다. '뭣이? 날 보고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히라고?' 토요일, 거센 노크와 함께 주님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이젠 문도 안 열어주느냐!' 주일, 교회에 갔더니 주께서 반갑게 맞아 주셨다. '날마다 네 집에 가도 들어갈 자리가 없었는데 그래도 잊지 않고 잠깐 들러주니 고맙다.'" 우리는 예수님을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가정과 일터에도 모셔들여야 합니다. 주님과 겟세마네와 골고다에 함께 할 때, 주님과 더불어 부활의 자리에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John Wesley)는 영국의 영웅들이 묻혀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어 있고, 그의 기념비엔 그가 남긴 세 마디 말이 새겨져있습니다. "세계는 나의 교구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을 땅에 묻으시나 당신의 일은 계속해 나가신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그는 임종 직전 팔을 높이 들고 승리의 목소리로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라고 외쳤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깨어 있으라'고 당부하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에게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38절)고 당부하시고는 조금 떨어진 곳(39절)에서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는 '돌 던질 만큼'(눅22:41)이라고 했는데, 아마 30-50m 정도의 짧은 거리로, 깊은 밤중에 극한 심적 갈등을 겪으시며 간구하셨던(히5:7) 예수님의 기도 소리는 제자들의 귀에 또렷이 들렸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당부하신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현재형 동사로서 계속적으로 잠에서 깨어 있으라는 의미이며,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니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는 경계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마26:40)는 말씀을 보면, 저들은 그냥 쿨쿨 자고 있었습니다. 얼마전 주님과 함께 죽겠다고 맹세했었는데, 그들은 주와 함께 깨어 있지도 못하고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실로 예수께서는 마지막 그 외롭고 고통스러운 순간까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홀로 외로이 서야 하며 홀로 결정해야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저들에게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하신 말씀은 문자적으로 정확히 1시간을 뜻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 '한 시간'은 제자들이 충분히 감당해낼 수 있는 적절한 시간입니다. 정녕 '깨어 있음으로써' 오는 시험을 이길 수 있는데, 저들은 피곤하단 이유로 쿨쿨 잠에 빠져있었습니다. 이 '깨어 있으라'는 명령은 이미 24장에서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24:42)하셨고, 25장의 열 처녀 비유에서도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25:13)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찰스 린드버그가 역사상 최초로 대서양 횡단비행을 할 때, 가장 어려웠던 일은 졸음을 참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졸음이 밀려와 자꾸 눈이 감기는데 이 역사적 비행의 중요성과 졸면 죽는다는 심각성 때문에 그는 끝까지 눈을 뜨고 조종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고 경고하셨는데, 이 마지막 때 우리 영혼이 잠들면 죽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 코넬 대학교의 실험실에서 개구리 한 마리를 차가운 물이 담긴 비커에 넣었습니다. 비커 밑에는 분젠 등으로 1초에 화씨 0.017도씩 물이 데워지도록 불꽃을 아주 작게 해 놓았습니다. 온도가 서서히 높아지기에 개구리는 온도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하여, 마음만 먹으면 금방 비커에서 뛰쳐나갈 수 있었지만, 그냥 태평스럽게 앉아 비커 속에서 빠져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두 시간 반쯤 지난 뒤 개구리는 자기도 모르게 뜨거운 물에 푹 삶아져서 죽어 있었습니다. 자기가 죽어 가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가 그대로 삶아진 것입니다. 우리는 편안할수록 더욱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지금은 자다가 깰 때'라고 했습니다. 영혼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 주님과의 교제를 새롭게 하며, 더욱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기도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26:41). 여기,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는 말씀은 '깨어 기도'해야 할 이유입니다. 여기 '마음'은 뒤에 나오는 '육신'과 반대개념으로, 인간에게 주신 신의 형상인 '영혼'과 사리를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을 뜻합니다. 진정 '육신'적 유혹과 충동은 이 '마음'의 선한 의지를 무참히 짓밟아 버릴 수 있는 인간이 지닌 유약성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통보다도 제자들의 위험을 염려해 주셨습니다. 실로 마음으론 원하지만 육신의 본성을 지닌 인간은 당면한 시험을 이기지 못하기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깨어 기도하는'길 뿐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아프리카 산골 작은 마을에 복음이 들어와 마을사람 거의 모두가 예수를 믿게 되자, 그들은 선교사가 가르쳐준 대로 기도의 삶을 생활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을사람들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숲 속에 저마다 자기의 기도처를 만들고 하루에 두 번 이상 정기적으로 그 기도처를 찾아 기도했습니다. 마을에서 그 기도처에 이르는 곳까지 여러 개의 기도길이 생겨 마을 사람들은 그 길을 각자의 기도길(prayer path) 혹은 '나의 생명 길'(My life way)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기도를 게을리 하고 기도처를 찾지 않으면 풀이 자라납니다. 그러면 신앙의 친구가 조용히 찾아가 이렇게 말해줍니다. "형제님, 생명길에 풀이 많이 자랐어요." 그래도 변화가 없으면 그의 친구 몇 사람이 함께 대신 그의 기도처를 찾아가서 기도해준 다음 그들의 친구를 다시 찾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님, 우리가 형제님의 생명길을 닦아놓았어요. 주님이 거기서 형제님을 기다리시는데 저희가 함께 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며칠 간 그 형제와 함께 그 길을 동행하며 기도의 회복을 도왔다고 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여러분의 기도의 길은 어떠합니까? 언제 그 길을 걸었는지 몰라 잡초만 무성하지 않습니까? 이제 날씨도 풀리고 만물이 깨어나는 봄철인데, 우리의 영혼도 깨어 기도함으로 기도의 길을 닦아야 하겠습니다.


이태리 속담에 '고독은 심지어 낙원에서도 견딜 수 없다'는 말처럼, 인간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이 고독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진정으로 고독한 인간이 있었다면 그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이름 없는 목수의 아내에게서 태어나 서른 살까지 목공방에서 일했고, 그 후 3년 간 순회 전도자가 되어 집이나 가족조차 가져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가 활동할 때 일반의 중론은 그에게 적대적이었고, 마지막엔 그의 제자들은 모두 달아나 버렸고, 제자 중 하나는 그를 반역하여 원수들에게 돈을 받고 팔아먹었습니다. 강도들 틈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달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절규하며, 평소에 의지했던 분에게도 버림받은 채 고독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 분은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열두 제자 중에 가장 믿을 만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26:38)고 부탁하십니다. 복음서를 보면, 주님은 수없이 고통 당하고 슬퍼하는 자들을 찾아 위로하고 함께 하셨지만, 당신은 단 한 번도 제자들이나 그 누구에게도 아쉬운 말씀이나 개인적 부탁을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참혹한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있자'고 부탁하시는데, 오늘 본문 짧은 11개 절에 '함께'란 말이 36, 38, 40, 46절에 무려 네 번이나 반복되고 있어, 주님께서 얼마나 제자들과 함께 있길 원하셨는가를 확연히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 '함께 있자'는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까? 첫째, 일상 속에서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는 생활을 통해서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마26:40-41). 신앙생활은 마치 자전거 타기와 같습니다. 자전거는 가지 않으면 쓰러지기에 계속 페달을 밟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속적인 믿음의 삶을 위해선 기도와 말씀을 페달을 계속 밟아야 합니다. 페달을 멈추면 자전거는 쓰러지듯, 기도를 멈추면, 우리의 믿음은 쓰러지고 맙니다.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우리는 하루 하루의 일상생활 속에서 날마다 쉬지 말고, 기도하고 돌아서면 또 기도하고, 말씀보고 일어서면 또 말씀을 보며, 앞으로 달려야 합니다.


둘째, 주님의 임재를 가장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성전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주님은 친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2:49). 바쁜 도시생활 속에서 많은 분들이 1주일에 주일 낮 한 번 교회에 나오는 것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어떤 믿음이 좋은 믿음입니까? 간단히 말해서 교회에 잘 나오는 믿음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다 해도 교회에 멀어지면 믿음도 식어집니다. 별 볼일 없어도 자주 교회에 들르십시오. 시장에 다녀올 때든지, 직장의 퇴근길에도 잠깐이라도 들러 기도하고 교회 한번 둘러보고 가십시오.


셋째, 주님 일에 함께 하십시오. 주님은 졸고 있던 제자들을 깨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마26:46). 주님은 이제 십자가를 향해 가십니다. 혼자 지기엔 너무나 외롭고 고통스런 곳에 제자들이 함께 있어주기만이라도 원하셨습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원하실 때 외면하면, 여러분이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랄 때 어떻게 주께서 같이 해주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게으름의 궁극적인 원인은 빗나간 자기 사랑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게으른 사람도 자기가 좋아하는 일은 열심히 합니다. 온종일 빈둥대며 TV만 보는 사람이 그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TV가 고장났다면, 아마 그는 벌떡 일어나 신속하게 그 텔레비전의 수리를 위해 움직일 것입니다. 고장난 TV가 그를 각성시켜 정신차리게 한 것이 아닙니다. TV를 고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 순간에도 그는 게으른 사람이었으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위해 잠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자기 중심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무리 바쁘게 보내고 있다하더라도 그는 게으른 사람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바쁘게 살아갑니까?


미국의 인디언선교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죽어 가는 영혼을 구할 수만 있다면, 어디를 가든, 어떻게 살든, 무엇을 참아내야 하든 상관이 없다. 꿈속에서도 그들을 생각하고 깨어있을 때에도 가장 먼저 그들을 떠올린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욕구만 위해 살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은 목숨(召命)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바 있는 영화, [어둠 속의 댄서](Dancer in the Dark)는 미국의 한 체코 이민자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주인공 셀마는 선천적 질환으로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그 아들 역시 엄마의 질병을 유전으로 물려받아 수술시기를 놓치면 앞을 못 보게 될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민 온 것은 돈을 벌어 아들의 눈을 수술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거의 맹인 수준이 될 만큼 병은 깊어가고 있었지만 아들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밤늦게까지 셀마는 공장에서 일합니다. 결국 보지 못하는 것이 발각되어 공장에서 쫓겨나고 그때까지 모은 돈은 2천 56달러 10센트였습니다. 수술비로는 부족하지만 나머진 차차 갚겠다고 사정할 작정이었습니다. 경찰인 집주인 빌은 아내의 사치와 소비벽 때문에 이혼의 위기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어느 날 빌은 자신의 트레일러에 세 들어 사는 셀마를 찾아와 자기 고민을 털어놓는데, 셀마도 미국에 온 이유와 아들의 수술을 앞두고 있는 사정을 말합니다. 돈이 있다는 것은 안 빌은 돌아가는 척하며 문소리만 내고 셀마가 돈을 넣어두는 곳을 알아내려고 가지 않고 서있는데, 빌이 돌아간 것으로 알고 책장에 숨겨놓은 캔 뚜껑을 열어 그 날 벌어온 돈을 넣었습니다. 해고되고 돌아온 날, 언제나처럼 셀마는 통을 열었을 때 돈이 없어진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빌의 짓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셀마는 자기 돈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지만 빌은 한 달만 쓰고 갚겠노라고 설득하려 하는데, 아들의 수술을 눈앞에 둔 그녀에게 그 설득이 통할 리 없었습니다. 빌의 가방을 더듬거리며 자신의 돈을 꺼낸 셀마에게 빌은 총을 겨누고, 서로 돈을 뺏으려고 실랑이 벌이다가 총이 오발되어 빌은 복부관통상을 입게 됩니다. 빌은 숨을 거두고 셀마는 울먹이며 돈을 들고 병원으로 달려가 의사에게 수술비를 주며 아들의 치료를 잘해달라고 부탁한 후 경찰에 체포됩니다. 영어도 서툰 이민자이며 성의 없는 국선변호사로 인해 재판은 그녀에게 불리하게 되어 결국 사형이 선고됩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셀마에게 형 집행유예의 기회가 주어지지만 아들의 수술비가 새 변호사에게 변호비로 지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포기합니다. 그녀의 친구는 아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엄마'라며 설득하지만 아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미래'라며 울음을 터뜨립니다. 사형 집행장에서 셀마는 아들에게 남기는 유언을 노래로 부르지만 그것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형은 집행됩니다. 아들의 눈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한 어머니의 이름은 셀마 제스코바입니다. 그래서 모성애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닮았다고 했던가? 우리는 이 놀라운 하늘의 사랑이 부어지는 사순절을 맞았습니다.


어떤 이는 사순절을 (사)랑하며 (순)종하며 (절)제하는 절기라고 말합니다. 이해인 수녀는 말했습니다. "묵은 달력을 떼어내는 나의 손이 새삼 부끄러운 것은 어제의 시간들을 제대로 쓰지 못한 나의 게으름과 어리석음 때문이네. 우리에게 늘 할 말이 많아 잠들지 못하는 바다처럼, 오늘도 다시 깨어나라고 멈추지 말고 흘러야 한다고 새해는 파도를 철썩이며 오나 보다." 봄처럼 우리도 깨어나야 합니다.


목사님도 장로님도 없는 초라한 시골교회 뒷면에 "깨어 기도하라"는 글귀가 써 있습니다. 교회는 그것이면 됩니다. 우리 신앙도 깨어 기도하는 삶입니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시73:23-25). 늘 깨어 기도하며 주님과 함께 하면, 주께서 붙드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며, 영광 중에 맞아주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36~46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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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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