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23 78회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
2018년 9월 23일 주일예배
창세기 2 : 18 - 25, 마태복음 19 : 4 - 5
시어머니가 아들과 며느리의 방에서 이런 대화가 저녁에 들려옵니다. 며느리가 "자기야,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하고 묻자, 아들이 "그야 물론 자기지~"라고 대답하니, 며느리가 "그 다음은?"하고 묻는 말에, 아들이 "우리 이쁜 아들이지~"라고 말합니다. 며느리가 "그럼 세 번째는?"하자, 아들이 "그야 물론 이쁜 자기를 낳아주신 장모님이지~"하니, "그럼 네 번째는?"라고 묻는 말에 "음, 우리 집 강아지 둘리지!"합니다. 며느리가 "그럼 다섯 번째는?"라고 묻는 말에 "우리 엄마!"라고 합니다. 다음날 아침 시어머니가 밖에 나가시면서 냉장고에 이런 메모지를 붙여놓았습니다. "1번 보아라. 5번 노인정 간다." 이런 시어머니의 모습이 참으로 쿨합니다.
월간 [좋은 생각]에 실린 '모두가 행복해지는 최선의 방법'이란 제목의 건국대 최명덕 교수 글입니다. - 탈무드에는 누구부터 도와야하는가 그 순서가 정해져 있다. 1번은 아내다. 남을 돕기 전에 혹 아내가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통 당하지 않는지 살펴야한다. 2번은 성인이 되지 않은 자녀다. 3번은 부모님이다. 부모님은 고통 당하고 있는데 부모님을 외면하고 남을 돕는다는 것은 위선이다. 4번은 경제 행위가 가능한 성인 자녀다. 다음은 형제, 삼촌, 사촌 그리고 가까운 친척 순이다. 다음은 같은 동네에 사는 이웃에서 더 먼 동네로 확장된다. 다음은 그가 현재 사는 나라의 사람, 다음은 고향인 이스라엘에 사는 유대인, 그 다음은 전 세계 사람이다. 단순한 것 같지만 많은 연구 끝에 얻어낸 결과다. 유대인은 이 순서를 따라 남을 돕는다.
여러분, [싫존주의]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기존의 '실존주의'는 개인으로서의 주체적 존재성을 강조하는 말인데, 요즘 신조어 '싫존주의'는 '내가 싫어한다는 것을 존중받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싫모'도 생겼는데, 이들은 '냉면에 들어간 오이도 참을 수 없다, 오이향이 싫어 오이 비누도 못쓴다, 숫자 5와 2도 싫다'며 자기가 싫은 것을 분명히 합니다. 요즘 저성장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내가 싫으면 안 하겠다며, "어른들은 '노력하면 잘살 수 있다'고 가르쳤지만, 요즘은 그 믿음 자체가 깨졌는데도 기성세대들은 젊었을 때 기준으로 현세대를 평가하려고 할 때마다 화난다"고 말합니다. 김희삼 교수는 '청년의 성공 요인에 관한 인식조사'에서, 성공의 요인을 재능으로 꼽은 대학생이 22.1%, 노력은 9.0%에 불과한 대신, 성공요인 1순위는 부모의 재력(50.5%)으로 꼽는다고 했습니다. 어른들은 이런 세대를 나무라기보다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물론 지금의 기성세대는 6.25전쟁과 산업화를 겪으면서 갖은 고생 다하면서도, 부모를 모셨고, 또 자식들을 키워내고도 이렇다 할 대우도 받지 못한 '낀 세대'이지만, 그래도 이런 젊은 세대의 아픔과 힘든 사정을 이해하고 품어줄 수 있어야 진정한 어른입니다.
내일은 우리 민족 최대 명절인 추석입니다. 이런 명절이 되면, 많은 가정이 고향에 가서 부모님을 찾아뵙고, 차례를 지내거나 조상의 묘소에 가서 성묘를 하고, 가족 간에 우의를 다지고 오게 됩니다. 그런데 모처럼 좋은 마음으로 가족 친지가 모였다가, 사소한 말실수나 의견대립으로 서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받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선 어느 한쪽만이 아니라, 모두가 조심하고 서로가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장 갈등이 생기기 쉬운 관계가 바로 고부관계로서,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서로 각별하게 말조심을 해야 합니다.
몇 해 전에 신문에 '명절 때 시어머니에게 듣기 좋은 말과 듣기 싫은 말'이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먼저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듣기 좋은 말들'을 보면 첫째, 명절 전에 전화가 와서 하는 말이 "올해 명절에는 안 와도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친정어머니 기다리시겠다. 빨리 친정에 가봐"라고 배려해주는 말입니다. 셋째는, 남편 몰로 용돈을 주면서 "아가, 수고했다. 옷이라도 사 입어라"며, 수고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와 달리 '듣기 싫어하는 말들'은 첫째, 마음이 친정에 가 있는 며느리에게 "이따가 시누이 오는데 보고 가라"며 친정에 늦게 가길 원하는 시어머니 말입니다. 둘째는, 며느리가 조금 피곤한 기색을 보여도 "요즘 명절은 참 간소해졌다. 우리 때는 더 힘들었어"라며 고생한 건 전혀 알아주지 않는 시어머니의 말입니다. 셋째는, 음식을 할 때마다 "전은 한 번 뒤집는 거야." "사과는 얇게 깎아야지"라며, 사사건건 훈수하는 시어머니 말이 며느리가 싫어하는 말로 꼽혔습니다.
이와 반대로 '시어머니가 며느리로부터 듣기 좋은 말과 싫은 말'도 있습니다. 먼저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앞으로 자주 찾아뵐게요"라고 말하면, 빈말이라도 기분 좋게 들린답니다. 둘째는, "용돈 필요하시죠?"라고 얼마라도 용돈을 드리면, 많지 않아도 자식이 주는 용돈이 기분 좋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어머니가 듣기 싫은 말'은 첫째, 오랜만에 왔는데 "차 막히니 빨리 갈게요"라며, 일찍 간다는 말이 서운하다고 합니다. 둘째는, 점점 늙고 약해지는 모습을 보이기 싫은데, 눈치 없이 "왜 그렇게 늙으셨어요?"하는 말이 듣기 싫은 말이랍니다. 서로가 말조심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그 지으신 것을 보실 때, 모든 것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31)고 창세기 1장 31절에서 말씀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로지 한 가지 좋지 않게 보신 것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창2:18)이었습니다. 희랍의 철인 플라톤은 말하기를 "사람은 본래 현재의 크기의 두 배였는데, 너무 크고 교만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절반으로 떼어버리심으로 남녀가 됐다. 그러므로 다시 완전해지려면 자기의 분신을 찾아 결합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또 스틸 테리는 "남자는 그의 옆구리에서 빠져나간 갈비뼈를 잃고 있는 동안에는 안정을 찾지 못하며, 여인은 그가 취해진 남자의 팔 안에 들어가기까지는 쉬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모든 화가가 그린 그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그림 중 하나는 아마도 존 프랑소아 밀레가 그린 '만종(晩鐘)'이 아닐까 합니다. 끝없이 넓은 들판에 해가 저물어 가고 있는데 온종일 열심히 수고와 땀을 흘리면서 일했던 부부가 수고의 손을 거두고 집으로 돌아갈 무렵, 멀리서 교회의 저녁 종소리가 은은히 울리고 있습니다. 부부는 잠시 머리를 숙이고 두 손 모아 하루 동안 수고의 땀을 흘리게 해주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이 그림의 원제는 '안젤루스(Angelus)', 즉 '기도'라는 뜻으로 여기에는 부부가 열심히 함께 일하는 노동의 신성, 그리고 가족이 함께 손을 모아 같이 기도하는 가정의 신성, 저녁 노을 멀리 있는 예배당에서 들여오는 저녁 종소리에 맞추어 기도하는 신앙의 신성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고 보면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온 가족이 함께 하나님을 섬기고, 모두 열심히 일하며 살아갈 때, 그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두 사람을 만나게 하셔서 가정을 이루게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22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창2:22)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두 사람이 세상의 많고 많은 사람 중에 누구와 결혼할까 자기 짝을 찾아 헤매다가 '야, 이 사람이구나!'하고 찾아내어 스스로 선택하여 결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와를 아담에게 이끌어 오셔서,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신적인 섭리가 있음을 말씀합니다.
두 남녀가 만나 결혼하는 일에도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 마음도 못 믿는데 어느 누구를 믿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생을 같이하기로 약속을 하고 결혼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한번 실수해야 결혼을 할 수 있다'고도 말했습니다. '저 남자에게 내 운명을 맡기겠다'라는 생각은 대단한 모험입니다. 제정신으로 하는 생각이 아니라, 홀렸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의지가 아니라, 무엇엔가 붙들린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랑도 내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엔가 마음이 끌려서 되고, 또 누군가 운명처럼 만나서 되는 것입니다.
제게 결혼식 주례해달라고 찾아와 인사하는 예비 신랑 신부에게 언제나 강조하는 말이 있습니다. "너희 둘이 결혼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셔서 된 것임을 잊지 말아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결정하신 것이다. 그렇기에 결혼하게 되면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서는 안 된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이 결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셨다고 하는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죽자고 따라다녀서 결혼해줬다'라는 마음이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이래서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결정한 일이면 얼마나 불안합니까? 나를 아시고 또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이 사람을 만나게 하셔서 배필이 되었다고 믿어야합니다.
내일이면 결혼할 신부가 주례해주실 목사님께 찾아와서 눈물로 하소연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일 결혼하게 될 남자를 내가 알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 사람에게 내 일생을 건다는 것이 너무나 두려워 도저히 결혼할 없을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듣고 목사님이 이렇게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그 누구도 자기 배우자를 다 알아서 결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은 처음부터 남자를 믿고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하나님이 그를 내게 짝지어 주셨다는 믿음으로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조언해 주었다고 합니다. 내가 찾아 헤맨 끝에 만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와를 아담에게로 이끌어오셨듯이, 나의 배우자도 하나님께서 만나도록 섭리하셨습니다.
내가 찾아서 선택한 것이라면 참으로 불안하기 짝이 없지만, 내 삶을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만나도록 섭리하시고, 이렇게 하나되게 해주셨다는 그 믿음을 갖게 될 때, 우리는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만남이 사람의 선택뿐이라면 언제나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막10:9)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의 결혼이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결혼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두 사람의 하나됨이 절대적인 것입니다.
둘째, 남편과 아내의 최우선의 책임은 자기 아내나 남편이라는 사실입니다. 본문 24절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 두 사람의 온전한 결합은 그 부모로부터 온전히 독립함으로 이뤄집니다. 이것은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부모의 보호나 도움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자기 가정을 책임질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시집온 색시가 계속 친정만 생각한다든지, 결혼한 남자가 마마보이처럼 자기 아내를 보호하지 못하고, 언제나 부모의 그늘과 간섭아래서 눈치본다면 두 사람의 하나됨은 요원해집니다. 대체로 부부간의 불화는, 남편들은 아내가 자식들에만 매여서 남편에게 무관심기 때문이고, 아내들은 남편이 부모에게 매여서 스스로 가장 구실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두 사람이 성년이 되어 결혼하였으면, 명실상부한 어른으로서, 스스로 자기 삶을 책임지고, '내 남편과 내 아내를 지켜주고 책임져 줄 사람은 온 세상에 나 한 사람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각자가 남편과 아내 된 도리를 다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가정의 중심을 부부에 두고 있기에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부모를 무시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지만 자식이 장성하여 결혼하게 되면 부모를 떠나야 하고, 또 떠나게 해주어야 합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으로 키운 자녀가 어느 날 배필을 만나 사랑하면서 부모를 잊어버리게 될 때 어느 부모가 섭섭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정말 사랑한다면 놓아주어야만 합니다. 마음껏 자기 아내와 남편을 사랑할 수 있도록 인정해주고 축복해 주어야만 합니다.
지난 2018년 2월 14일, 설 무렵에 문화일보에 [명절 시집살이는 옛말.. 젊은 시어머니들 '시송합니다']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작은 제목으로는 '내 代서 며느리 고통 끊을 것' 여행가라고 100만원 주기도, '설날 아침 모여 아침만 먹자' '어지간한 건 아들에게 시킬 것'이라는 소제목을 붙였습니다. 그 기사 내용은 이렇습니다. - 경기 광주시에 사는 4년 차 시어머니 박선자(63) 씨는 14일 아들에게 100만 원을 송금했다. 설 연휴 기간 부부끼리 여행이라도 가라는 뜻에서다. 그동안 박 씨는 시어머니가 살아 계셔서 명절 때면 차례상이 필수였지만, 지난해 돌아가신 뒤 '내 대에서 며느리 고통은 끊어야겠다'고 결심한 뒤 처음 맞이한 이번 설부터 실천에 옮겼다. 박 씨는 "아들은 처가에 가면 사위라고 맛있는 음식이라도 얻어먹고 오는데, 며느리는 어찌 됐든 밥 차리고 설거지하느라 고생하지 않느냐"며 "자기들끼리 속 편하게 놀고 쉴 시간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시댁에 가서 며칠 간 고생하다 연휴 막판에야 친정에 잠시 들르거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던 며느리들은 누구나 공감할 명절 스트레스가 옛말이 될 새로운 풍속도가 생겨나고 있다. 여전히 명절 기간 시댁에서 고생하는 며느리가 많지만, 상대적으로 젊은 시어머니들 사이에서는 '명절 스트레스'를 며느리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분위기가 계속 확산하고 있다. '시송합니다(시댁이라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다.
광명시에 거주하는 김예환(여·59) 씨는 아들 부부에게 이번 설에는 "설날 아침에 들러 밥만 같이 먹고 가라"고 선포했다. 지난해 5월 며느리를 본 뒤 첫 번째 맞은 명절인 지난 추석 때 며느리에게 "첫 명절이니 전날 내려와서 같이 음식을 준비하자"고 했다가 아들로부터 핀잔을 들었던 김 씨다. 이후 친구들에게 속상한 속마음을 꺼냈다가 되려 "그거 요새 갑질이다" "정신 차려라"는 말을 들은 뒤에 일어난 변화다. 의정부시에 사는 김모(여·58) 씨는 지난 주말 교회에서 만난 아들에게 "설거지를 내가 하면 며느리가 눈치 보느라 자기가 하겠다고 나설 테니, 무조건 네가 나서서 하라"고 아들에게 말해 다짐을 받았다.
명절이면 엄청난 교통 체증과 인파를 감수하고라도 고향에 내려가 북적대는 연휴를 보내는 모습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최대 10일 연휴였던 지난해 추석 때는 해외여행객이 급증하는 모양새였지만 4일에 불과한 올해 설 연휴에는 집이나 인근 호텔에서 머무는 '스테이케이션'이 인기다. 인터파크투어가 1월 24∼29일까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설 연휴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응답자 중 65%가 국내여행을 하겠다고 답했다. 국내여행의 목적 중 힐링·휴식이라는 응답이 49%, 호텔에서 휴가를 보내는 '호캉스'라는 응답이 20%였다. - 세상이 변하고 있습니다. 유교적 형태의 가정은 부자관계가 우선이지만, 성경적인 가정 형태는 부부관계가 우선입니다. 이것을 자식이 부모에게 주장하기보다, 부모가 먼저 배려해주는 모습이 더 아름답습니다.
셋째, 하나님이 가정의 주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에 18절과 19절, 21절과 22절 등, 네 번이나 반복해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주어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가정을 세우시는 분이 하나님이고, 그래서 가정의 주인도 하나님이란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가정이 든든히 서려면 남편이나 아내, 또 부모, 자녀 모두가, 그 가정을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에만, 그 가정이 온전하게 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풀러 신학교에서 가족사회학을 가르치는 잭 볼수윅 교수는 이 시대의 가정을 '전통적인 가정', '현대적인 가정', '성경적인 가정', 이 셋으로 나눠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유형의 가정은 '누가 가정의 주인이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합니다. 전통적인 가정은 부모나 남편이 가정의 주인이고, 현대적인 가정에는 주인이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통적인 가정은 엄격한 질서가 있지만, 통제와 학대가 있습니다. 반면 현대적인 가정에는 자유가 있지만, 무질서와 혼란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적 가정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주인인 가정은 질서와 자유가 공존하는데,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고, 성경의 진리는 우리를 자유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생텍쥐페리는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보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사랑한다는 것은 오로지 상대방을 주시하고 그에게만 집중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부부가 서로에게만 집중하다보면 어느 땐 좋아서 죽고 못 살 것 같아도, 어느 땐 상대방의 약점과 허물이 드러나 실망과 회의가 생깁니다. 그렇기에 상대방에게 집중하기보다는, 두 사람이 가정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 집중할 때, 두 사람 사이도 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20세기 대표적 기독교 철학자로서 라브리운동을 이끌었던 프랜시스 쉐퍼 박사는 현대인들이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절망의 선'을 넘어섰다며, 인류역사상 가장 위험한 변화가 그때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19세기만 해도 신자든 불신자든 공유할 수 있는 절대적 가치관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십계명중 5계명 이하(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를 말하면, 믿지 않는 사람도 '그것은 맞는 말이다'라고 동의하였습니다. 이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도덕적 교훈과 가치를 유교적 전통이 지금까지 감당해 왔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소위 포스트모던 시대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그런 절대적 가치관을 포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결혼을 남자와 여자 사이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남자, 혹은 여자와 여자 사이에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위기는 바로 이런 시대적 경향에 그 근본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사회나 가정의 회복은 가치관의 회복에서부터 이뤄져야 합니다. 단순히 경제나 정치적 환경을 바꾸고 조직을 바꾸는 정도로는 결코 이뤄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가정의 주인으로 모셔들여야만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최명덕 교수가 주례해줄 예비 신랑신부가 찾아왔을 때, 이런 대화를 했습니다. "앞으로 신랑이 가져야할 관심의 우선순위에서 아내는 몇 번이지요?" "1번입니다." "그럼, 신랑 어머님은 몇 번인가요?" 신랑은 "음, 어머님이요? 3번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맞아요, 3번입니다. 잊지 마세요. 아내의 번호가 모든 번호를 우선합니다. 이 번호가 바뀌면 가정생활에 어려움이 생깁니다. 오해 마세요. 불효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켜야할 원칙이 있습니다. 1번과 함께 효도하세요. 그러면 제대로 효도할 수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아, 나는 1번이구나'하고 느끼면 모든 일이 잘 풀리면서, 남편이 효자된 것을 고마워합니다. 친정 부모님에게도 똑같이 효도할 길이 열리기 때문이지요." 이번엔 예비신부에게 물었다. "자녀는 몇 번이지요?" "2번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맞습니다. 2번인 아이를 1번으로 착각하여 남편보다 아이중심으로 오냐오냐 키우면 아이 망칩니다. 부부중심으로 살아야 아이가 올바로 큽니다. 아이가 아버지를 소홀히 여기면 어머니가 꾸짖고, 어머니를 소홀히 하면 아버지가 꾸짖어 서로 귀하게 여기면 아이는 부모를 공경하게됩니다. 그리고 아이들 앞에서 부부를 서로 세워주고 자녀 앞에서 배우자를 비난하지 마세요." 예비신부에게 또 물었다. "1번 남편과 2번 아이들과 함께 시부모님께 효도하겠습니까? 새로운 가정이 가장 마음써야할 곳은 양가 부모입니다. 양가 부모님께 최선을 다하세요. 부모에게 불효하고 자식에게만 정성 쏟으면 자식농사 망칩니다. 효도하는 모습을 자식에게 보여주세요. 그것이 자식에게 효도를 가르치는 방법입니다. 그럼 시부모님께 효도하겠습니까?" "네, 효도하겠습니다." "그럼 예비신랑은 장인장모님께 효도하겠습니까?" "네."하고 예비신랑이 대답했다. 이틀 후 주례를 부탁한 예비 신랑의 어머니가 인사차 연구실로 찾아오셨다. 그분이 농담 삼아 "선생님, 제가 3번이라고요?"하고 물으셨다. 예비신랑이 이야기한 모양이다. "네, 3번 맞습니다. 아들 며느리 두 사람 사이에 개입하지 마세요. 두 사람의 행복을 지켜주세요"하고 말씀드렸다. 지혜로운 어머니는 이를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아들의 결혼을 축복하셨다. 당신의 결혼생활에서 얻은 지혜가 이 같은 이야기를 쉽게 받아들이도록 한 것 같았다. 결혼식 후 고맙다고 연거푸 인사하시고, 다음 날 또 전화와 문자를 보내셨다. 아들을 위해 3번이 되기로 결심하는 어머님의 마음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없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마19:4-5). 해리슨은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는 교회와 가정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행복하기 위해 성경의 원리대로 가정을 이루고, 이들이 하나 되어 부모와 자녀에 대한 도리를 다할 때, 하나님은 이런 가정 안에 거하시면서, 그 가정을 돌보시고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