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28 101회
"내일을 준비하는 지혜자의 삶"
2018년 10월 28일 주일예배
전도서 12 : 1 - 2 ; 누가복음 16 : 1 - 13
어떤 부자가 있는데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도록 청지기를 한 명 고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부자의 귀에 한 소문이 들렸는데 그 소문의 내용은 자신이 고용한 청지기에 대한 평판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주인이 자기가 고용한 청지기가 사람들의 입에 어떻게 오르내리나 귀를 기울여서 들어보니
아니 글쎄 자신의 소유를 낭비하고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낭비란 단어의 헬라어 원어는 헬라어 용법상 현재분사인데 현재분사는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행동이 계속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청지기는 부자가 고용하여 자신의 재산을 맡긴 이후로 한결같이 꾸준하게 부자의 재산을 자신의 마음대로 유용하여 낭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재산을 믿고 맡긴 청지기로부터 처음부터 철저하게 배신당하고 있던 주인은 청지기를 불러서 책망합니다. “자네를 믿고 재산을 맡겼건만, 내 재산을 유용하여 낭비하고 있다는 말이 들리니 이 어찌된 일인가!” “말미를 줄 테니 이제까지 관리하던 재산의 장부를 정리하여 넘기고 자네는 일을 그만두도록 하게”
주인의 책망 가운데 청지기의 직책과 특권을 박탈당하게 된 청지기는 큰 고민에 휩싸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청지기는 지금의 월급사장 다시 말해 한 기업의 CEO입니다. 나름 성공했다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공금유용이란 명목으로 불명예 퇴직자가 되면 소문이 동네방네 금세 다 퍼지고 말것입니다.
그런데 창피한 것도 창피한 것이지만 퇴직 후를 생각해 보니 어떻게 먹고 살지가 막막해졌습니다.
왜냐하면 공금유용으로 퇴직당한 월급사장이 좋은 직장에 재취직 될 수 없는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막노동은 어떨까 생각해보니 땅을 파서 먹고사는 것이 육체노동이라 힘이 있어야 하는데
앉아서 펜만 굴리던 사람이라 육체노동을 어떻게 해야할지 도무지 감당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노후를 걱정하며 혹시 퇴직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할 때 자주하는 말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시골에서 농사나 짓자!”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농사 아무나 질까요?
남자라면 누구나 다 가는 군대에 농번기가 되면 군인들은 주위 농민들을 돕기 위해 대민지원을 나가게 됩니다. 군인이라면 부대 안에서 체력단련을 하는지라 몸도 건강하고 힘도 제법쓰지만 대민지원을 나가면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모릅니다. 하루종일 땡볕 아래서 허리를 숙이고 고추따고 감자캐면 허리가 아파서 어쩔줄 몰라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평소에 지나다니며 마주쳤던 힘없고 약해 보였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농사짓는다고 농사가 쉽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큰 오산입니다.
이렇게 막노동으로도 돈벌이를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자 청지기는 암울해지고 위축됩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인간으로도 취급하지 않았던 거지가 자신의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퇴직후에 가지고 있는 돈을 다 쓰고 없으면 자신도 거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지가 되어 땅바닥에 엎드려서 누더기 옷을 입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한푼줍쇼! 한푼줍쇼!” 구걸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존심이 있는데, 차마 빌어먹는 거지 생활은 죽어도 못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도 한때는 돈 펑펑 잘 쓰는 월급사장 CEO였는데, 어떻게 사람들에게 채이고 손가락질 당하고 인간취급도 못받는 거지생활은 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저렇게 자신의 은퇴 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걱정하고 고민하던 청지기의 머리에 기가막힌 아이디어가 딱 떠오릅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주인과의 채무가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일이 연락하여 전부 부릅니다.
그리고 6절과 7절을 보시면 채무가 있는 사람 중 대표적으로 두 사람의 예를 들어서 청지기가 어떻게 채무를 처리해 주었는지를 말씀하시는데,
청지기는 기름 100말을 빚진 자에게 대출증서를 가져가 50%를 삭감해 주고는 50말이라 증서를 조작해줍니다.
또 밀 100석을 빚진 자에게 대출증서를 가져다가 20%를 삭감해 주고는 80석이라 증서를 조작해줍니다.
이 부분이 아리송합니다. 청지기가 누구는 50%를 누구는 20%를 차등하여 삭감해 준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이 당시 감람유의 이자율은 100%였고, 밀의 이자율은 20%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청지기가 삭감해 준 것은 주인이 원래 가지고 있는 원금이 아니라 받을 이자를 탕감해 준 것입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 당시의 거래가격이 기름 100말의 가격이 1000데나리온이고, 밀 100석의 가격이 2500데나리온이었는데, 경감된 이자율을 통해 감액해준 가격을 계산해 보면 기름은 100데나리온의 50%인 500데나리온, 밀도 2500데니리온의 20%인 500데나리온을 탕감해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탕감해주더라도 누구는 많이 탕감해주고, 누구는 적게 탕감해주면 적게 탕감해준 사람은 고마운 마음도 있지만 나는 왜 이렇게 적게 깍아주었나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이 청지기는 자신이 청지기로서 마지막 장부를 정리하고 그만두어야 하는 이 급박한 상황 가운데서도 깍아주는 돈의 액수까지 공평하게 맞추어줄 정도로 아주 치밀하고 빈틈없게 그리고 신속하게 일을 진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이자는 탕감해 주었지만 이스라엘의 법이 자국민끼리는 원금만 받을 수 있음으로 주인의 재산인 원금은 전혀 손해나지 않도록 함으로 인하여 주인에게 책잡힐 일도 없이 깔끔하게 장부를 정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자를 탕감해준 청지기는 은혜를 받으면 반드시 갚아야 하는 이스라엘의 통념상 퇴직후에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일하지 않아도 자신이 이자를 탕감해준 자들에게 가서 자신이 이자를 탕감해준 만큼의 은혜를 되받으며 풍족하고 평안한 퇴직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의 말씀은 참으로 재미있고 재치있고 우리의 흥미를 끄는 말씀이었는데
이어 계속되는 8절의 말씀은 이 비유의 말씀을 과연 어떻게 해석하고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한 것인지 우리의 머리를 헷갈리게 만듭니다.
8절을 보시면 이제까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하였고, 심지어는 그만두는 과정 가운데서 또다시 주인에게 큰 손해를 입힌 이 불의한 청지기를 주인이 지혜있다고 칭찬하였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왜 청지기를 칭찬하였을까요?
주인이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한 이유에 대하여 몇몇 해석이 있습니다. 그중에 많은 지지를 받는 해석 하나를 소개해 드리자면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의 명예를 높였기 때문이라 풀이하는 해석이 있습니다.
아까 전 기름과 밀을 빌려간 사람들을 보면 이자가 붙어 있는 것을 볼 때 이 주인은 돈이나 땅이나 재화를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대부업자였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그런데 이 청지기가 채무자들의 빚을 탕감해 주었을 때 이 탕감받은 사람들은 대부업자인 주인께 감사드리고 주인의 선행을 찬양했을 것입니다.
유대인은 명예가 생명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청지기는 빚을 탕감받은 자들을 통하여 주인의 명예를 높였고, 또한 주인의 재산의 원금은 보호하였음으로 일을 지혜롭게 처리한 청지기는 주인에게로부터 칭찬을 받은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성경의 말씀이 불의한 자를 칭찬하는 다른 경우가 없기 때문에 무리가 있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인은 왜 청지기를 칭찬하였을까요?
제가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저의 둘째 누나는 슬하에 3남매를 두었습니다. 아들이 첫째인데 어려서부터 유별난 소문난 장난꾸러기입니다. 조카들은 가끔 할아버지네 집에 놀러오는데, 무조건 놀이터에 가서 힘이 빠질때까지 1시간은 뛰어다녀야 합니다. 힘이 다 빠지면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는데 그냥은 못 돌아가고 무조건 입에 아이스크림 그것도 빠삐코를 하나 물어야 집에 갑니다.
조카들 입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려주고 집에 들어갔는데, 마침 어머니께서 저녁을 차려놓으셔서 바로 밥을 먹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조카들에게 먹던 아이스크림을 주면 냉장고에 넣었다가 저녁먹고 나서 바로 꺼내서 주겠다고 걷는데, 동생들은 저에게 바로 아이스크림을 건내준 반면 첫째는 조용히 방안으로 사라지더니 조금있다 나와서 아이스크림을 건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런 생각없이 받아서 냉장고에 넣고 저녁을 다같이 맛있게 먹었습니다.
저녁을 다 먹고난 뒤 아이스크림을 꺼내주었는데, 아이스크림을 받고 방에 들어간 아이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가서보니, 껍질을 까놓은 빠삐코의 크기가 제각각 달랐는데 첫째가 들고 있는 빠삐코의 크기가 가장 컸고, 나머지 두 개 중 하나는 유독 조금 남아있었는데 동생 둘이 저 작은 것은 내 것이 아니라며 서로 싸우고, 오빠한테 가서는 그 큰 것이 자기것이라고 싸우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알고보니 첫째가 냉장고에 넣기전 자기걸 거의 다 먹고 껍질에 싸서 냉동고에 넣고는 어린 동생이 많이 못먹고 남겨놓은 것을 자기것이라고 들고가 먹으려고 머리를 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첫째 조카의 간계를 본 후 그 누구도 먼저 혼부터 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대신 이 첫째의 꾀를 보고 감탄했습니다. 이 어린아이가 그 작은 머리로 낸 이 간계가 얼마나 기발한지
감탄한 것입니다.
주인이 이 청지기를 칭찬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청지기의 이 간계가 놀라운 정도로 기발하기 때문에 주인은 청지기의 이 기발한 간계만을 칭찬한 것입니다.
그리고 8절 후반부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에 나온 청지기에 대하여 평을 하시는데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에서 ‘세대’란 ‘아이오노스’로 ‘세상’을 말하고, ‘아들들’은 ‘휘오스’로 ‘상속받는 법적인 신분을 갖은자’를 말합니다.
빛의 아들들에서 ‘빛’은 ‘포토스’로 ‘그리스도 안에서 구현된 구원의 진리’를 말합니다.
따라서 이 세대의 아들들이란 세상의 것을 상속받을 자들이고, 빛의 아들들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에 참여하게 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은 자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지혜란 미래에 대한 준비를 뜻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전달하시고자 하는 뜻은
내세가 있음을 알고 따라서 천국에 갈 준비를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과 같이 세상의 앞날만을 준비하는 제자들에게, 그리고 천국을 향해 힘써 준비하며 나아가야 하지만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거나 태만하게 있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하물며 내세를 몰라 덧없는 이생의 미래만을 준비해야하는 세상 사람들도 저렇게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하여 힘써 준비하는데
“왜, 너희는 천국을 갈 준비를 하지 않느냐!”고 책망하시고, “적어도 세상사람들이 미래를 준비하는 노력만큼은 천국을 준비하는 노력을하여라”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을 준비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것일까요?
9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미래에 대한 준비로서 제자들을 향하여 불의의 제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의란 세상의 도나 정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7편 11절에서 ‘하나님께서 의로운 재판장이 되신다’고 다윗이 고백한 말씀처럼 이 의는 바로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의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불의의 제물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반대로 사용되는 세상의 뜻대로 쓰여지는 세상의 재물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제물을 세상의 뜻이 아닌 친구를 사귀는 용도로 사용하라 하십니다.
친구를 사귄다는 뜻은 마가복음 12장 31절에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라고 말씀을 통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는데, 친구는 가난한자들 혹은 가난한 동료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고, 사귄다는 것은 그들을 돕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불의의 제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은 세상의 제물을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천국을 위한 준비가 되는 이유는
이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재물을 사용할 때,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 즉 천국으로 영접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도움을 받은 친구들이 사람일진데 어떻게 천국으로 인도하게 된다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5장 40절에서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대로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사랑으로 돌본 것은 예수님께 충성한 것이고, 천국으로 인도할 자도 이웃이 아닌 예수님께서 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 충성한 자를 예수님께서 천국으로 인도하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웃에게 도움을 준 청지기와 이웃을 도운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결과적으로 이웃에게 도움을 준 것은 맞는데 둘 사이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주인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청지기의 주인은 자기 자신입니다. 설령 청지기가 재물을 사용한 것이 주인의 뜻대로 이웃을 사랑한 결과를 주었다 하더라도 재물을 사용함에 있어서 자신이 주인이 되어 그렇게 한 것이기 때문에 청지기는 주인의 재물을 유용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9절의 ‘너희’라고 지칭되고 청지기와 대조되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는 명령을 듣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자들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명령을 듣고 행하는 것이기에 참된 청지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장황했던 9절의 말씀의 해석에서 내일을 위해 지혜롭게 준비할 첫 번째 핵심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지혜냐면 누구를 섬기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갈 길이 갈라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살아갈 때 제아무리 자신의 미래를 위해 덕을 쌓고, 재물을 쌓고, 선을 쌓는 특별한 준비를 하였다 하더라도 이 준비 중 어느것 하나도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에서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은 단 한가지도 없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오직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자만이 천국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 10-11절까지 내일을 위해 지혜롭게 준비할 두 번째가 무엇인지 말씀해주시는데 그것은 주인되신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은 ‘불의의 재물’과, ‘큰 것’은 ‘참된 것’과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작은 것’은 ‘재물’이고, ‘큰 것’은 ‘천국이자, 하나님께서 맡기실 큰일’을 말합니다.
재물을 지극히 작은 것이라 말씀하신 이유는 이 세상에서 재물이 아무리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재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조금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재물은 단순히 재물 그 자체가 아닌 우리가 재물을 얻기까지의 시간 노력 마음 열정등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쓴다는 것은 우리의 시간과 열정과 마음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이자
하나님께 시간과 열정과 마음을 다해 충성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또한 재물은 자신의 뜻대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의 범위를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돈으로 안되는 것이 없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세상에서의 돈은 권력이며, 세상에 돈으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재물로 충성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전반에 걸쳐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도록 만들어 드리고
나의 의지까지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충성을 하지 않고 재물에 충성을 합니다.
재물을 버는데 온 신경을 다 쓰고 인생의 시간을 투자하고, 그렇게 벌게된 재물을 쓰는데 나머지 시간을 소비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전부 재물에 투자하는 재물에 충성을 하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왜 재물에 충성할까요? 왜냐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이 바로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청지기는 자신이 맡은 주인의 재산이 영원히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해서 계속해서 주인의 재산을 자신의 뜻대로 유용하고 낭비하였고.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재산이 영원히 자신의 것인냥 착각해서 재물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렇게 착각하고 있는 그들에게 결산의 때, 다시 말해 인생에 있어서의 죽음 혹은 최후의 심판의 때가 반드시 찾아오게 됩니다.
12절에서 내일을 위해 지혜롭게 준비할 세 번째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는데 그것은 결산의 때를 준비하는 삶의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결산의 때에 자각하게 되는 것은 두가지 입니다. 첫 번째는 내가 가지고 있는 재화가 내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내가 나의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해 준비해야 할 것은 세상의 노후준비가 아니라 내세를 위한 준비라는 사실입니다.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이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재물로 하나님께 충성하는 삶을 살지 못하면 이란 뜻입니다.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라는 말씀에서 ‘너희의 것’은 ‘아직 소유하지 못했지만 내세에서 받게될 천국의 상급’을 가리키고, ‘너희에게 주겠느냐’는 이 세상에서 위탁된 것을 충성되게 관리하지 않으면 우리 각자의 몫으로 할당되어진 천국의 상급도 결국 받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내일을 위한 지혜자는 과연 어떤 삶을 준비해야할까?’에 대한 종합결론이 바로 13절에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진정한 지혜자가 내일을 준비하는 방법은 바로 하나님만을 섬기며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충성하는데 있어서 강력한 적을 재물이라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재물을 나타내는 원어 마모나는 부의 신 맘몬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재물이란 단어를 왜 맘몬에서 갔다 썼을까 생각해보면 재물의 그 장악력 때문일 것입니다.
누구나 재물은 자신의 통제범위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통제당하는 것은 재물이 아닌 바로 내가되고 맙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을 보시면 “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돈은 내가 아무리 통제하려고 하지만 돈이 승리하여 나를 통제하게 되고 결국은 우리의 인생이 돈을 섬기는 인생으로 전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도 미혹하여 뺏어와 돈을 섬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지 501년이 되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는 비텐베르크의 성교회의 교회정문에 면죄부를 파는 가톨릭의 부정에 맞서 95개조 반박문을 써붙입니다.
면죄부란 죄가 사면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교황의 이름으로 발행한 증서입니다.
그러나 면죄부가 발행된 것은 죄를 사하여주겠다는 의도로서 발행된 것이 아니라 교황 레오 10세가 로마의 성 베드로성당을 건설할 자금을 모으기 위해 발행된 것입니다.
심지어는 독일에서 면죄부를 판매하던 테첼이란 수도승은 면죄부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
‘면죄부를 산 돈이 금고에 떨어지는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면죄부를 산 본인은 물론, 부모 친지의 영혼까지 곧 연옥의 불바다를 튀어나와 천국에 가게 된다’는 식의 선전까지 하였습니다.
누구보다 하나님께 가장 큰 충성을 받쳐야할 성직자들의 마음과 시선이 재물을 향하자
재물은 성직자들을 미혹했고, 결국 성직자들은 돈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마치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포장하여 돈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일어난지 500년이 지난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재물을 섬길것인가라는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여전히 갈등하며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온전히 충성할 것인가의 문제는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때부터 시작된 인류의 기원에서 시작 되었지만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충성하기 위한 이 문제는 청지기가 주인과 계산을 마쳐야할 날이 다가올 때 현실을 직시하여 모든 재물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을 때에야 비로서 재물을 섬기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의 살길을 모색하였듯이 하나님의 백성도 이 세상에 모든 시선과 마음이 빼앗긴 상태여서는 절대 재물의 유혹과 섬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 죽음과 최후의 심판이 놓여있음을 바라볼 수 있는 종말론적 시각이 있어야만 우리는 재물의 소유가 내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재물의 유혹과 재물을 섬겼던 것에서 놓여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마태복음 25장 1-13절에 나오는 신랑이 언제올지 몰라 기름을 준비해간 슬기로운 처녀와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기름을 준비해가지 않은 처녀는 이 세상만을 바라보고 내세를 준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내세를 준비하고 바라보지 않으면 내일을 준비하지 않는것입니다. 그리고 기름을 준비해가지 못한 처녀들이 혼인 잔치에 참여하지 못했듯이 내일을 준비하지 못한자는 열린 지옥을 향하여 걸어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 1절을 다시 보시면 주인에게 충성하지 않는 청지기의 삶은 낭비의 삶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내가 이생에서 재물을 통하여 부귀영화를 얻고, 명예를 얻고, 선한일을 해서 칭찬을 받고, 노후준비를 철저히 했더라도 그것에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하나님의 뜻이 없다면 그것은 그저 인생을 낭비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전도서 12장 1절을 보시면 청년의 때에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청년의 때는 인생의 황금기입니다. 신체도 건강하고 자신감이 차있어 무엇이든 자신의 힘과 지혜로 스스로 이룰 수 있을것이라 생각되는 때입니다. 하지만 이 청년의 때는 속히 지나가고 곤고한 날 아무낙이 없다고 할 노년의 때가 오게 됩니다.
시간은 젊은이의 생각만큼 무한정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생각한 것보다도 더 빨리 지나가 버리고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없이 그 빠른 세월을 보내고 나서 인생을 회고하게 될 때 자신의 인생은 그저 곤고하고 아무낙이 없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황금기인 청년의 때부터 하나님을 기억함으로 인하여 참된 인생의 의미를 찾으라 말씀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덧없이 보낸 세월을 노래한 곡이 있습니다.
백발의 머리와 흰 수염이 멋진 김도향 가수가 부른 바보처럼 살았군요라는 곡입니다.
어느날 난 낙엽 지는 소리에
갑자기 텅 빈 내 마음을 보았죠
그냥 덧없이 흘려버린
그런 세월을 느낀거죠
저 떨어지는 낙엽처럼
그렇게 흘려버린 내 인생을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살아간 무의미한 인생은 그저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잡고 하염없이 지난날을 후회하며 큰소리로 인생을 낭비해 버린 자신을 자책하는 노래나 부르는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사람들이 한 번뿐인 인생을 내 맘 대로 즐기면서 살아야한다고 했을때
반대로 꿋꿋이 하나님께 충성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인생의 시간들이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차오르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생의 죽음을 넘어 부활을 꿈꾸고 내세의 천국을 바라보며 소망과 희망이 넘치는 삶을 살게됩니다.
내일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혹시 지혜롭게 내일을 준비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미래를 대비하고 계시진 않으신지요!
잠언 9장 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고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짜 지혜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천국을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미래를 위한 최고의 준비가 바로 하나님께 충성하며 사는 삶이라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모두 하나님께 충성하시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천국의 상급을 다 받으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언합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