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님의 감사

2019-11-17 61회

동문교회
031-701-0691 / 경기도성남시분당구야탑동 523번지
손세용 목사님

마태복음 26장 26~30절

설교요약 :

"우리 주님의 감사"
2019년 11월 14일 추수감사절
마태복음 26 : 26 - 30 ; 시편 50 : 14 - 15


아들이 아빠에게 묻습니다. "아빠, 기억이 뭐야?" 아빠는 아들이 유치원에 다니더니 어휘가 늘고, 생각의 폭이 커지는 것이 대견하여 흐뭇한 낯으로 대답했습니다. "기억이 뭐냐하면… 예전에 아빠랑 강가에 놀러가서 공놀이하다 공 빠트렸던 거 생각나지?" "응, 그때 초록색 공이었잖아." "그렇지. 그렇게 예전에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내는 것을 기억이라고 하는 거야." "응, 그렇구나, 그럼 아빠, 니은은 뭐야?"^^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며 잊지 않고 기억해야할 것이 있고, 완전히 잊어야할 것도 있습니다. 시인 류시화는 그의 시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에서 잊으려는 마음을 노래합니다. "세상을 잊기 위해 나는/산으로 가는데/ 물은 산아래// 세상으로 내려간다/ 버릴 것이 있다는 듯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는 듯/ 나만 홀로 산으로 가는데// 채울 것이 있다는 듯/ 채워야할 빈자리가 있다는 듯/ 물은 자꾸만/산아래 세상으로 흘러간다/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눈을 감고/ 내 안에 앉아/ 빈자리에 그 반짝이는 물 출렁이는 걸/ 바라봐야 할 시간"


어느 날 화재가 발생하여 소방관들이 출동했습니다. 불난 집안에 사냥개로 유명한 도베르만이 발견됐는데, 마구 짖어댑니다. 불길이 휩싸인 위급한 상황에 도베르만의 신경이 날카로워졌을 거라는 생각에 소방관은 쉽게 다가갈 수 없었지만 생명을 구하지 않고 지나칠 수 없어 불 속을 뛰어들어 도베르만을 품에 안고 집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현장에 달려갔는데 화재는 마침내 진압되었고 소방관은 지쳐 땅바닥에 주저앉아 한숨돌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옵서버 신문사 사진기자가 도베르만이 멀리서 소방관을 바라보는 것을 보자, 기자는 궁금해하며 카메라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도베르만은 화재를 진압하느라 온몸이 그을린 소방관에 다가가 얼굴을 핥는 것이었습니다. 그 도베르만은 임신한 상태였는데, 자신과 뱃속의 새끼들을 구해준 소방관에 다가가 감사의 의미로 이렇게 키스를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11월 11일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젊은이들은 '빼빼로데이'로만 알지만 우리 쌀로 만든 가래떡을 먹는 '농민의 날'이고, 또 '턴 투워드 부산(turn toward Busan)의 날'로서, 전 세계에서 자유와 평화를 위한 희생과 헌신에 감사하는 사람들이 이날 오전 11시에 2,300분의 한국전쟁 전몰장병이 안장된 부산유엔기념공원을 향해 엄숙한 추모묵념을 올리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 행사는 캐나다에서 한국전쟁에 참전한 '빈센트 커트니' 씨가 2007년 "대한민국과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다 소중한 생명을 바친 전사자들이 안장되어 있는 세계 유일의 유엔묘지를 향해 추모하자"고 발의하여 매년 진행되고 있는데, 아쉽게도 이 중요한 행사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적은데, 대한민국을 위해 희생한 분들의 희생을 잊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스티브 브라운(Steve Brown)은 성찬에 대해 "세상은 잊기 위해 마시지만, 성도는 기억하기 위해 마신다(The world drinks to forget; the Christian drinks to remember)고 말했습니다. 세상은 공허함이나 고통을 잊으려고 마시지만, 성도는 주님의 사랑과 희생을 깨닫고 이를 잊지 않으려고 마십니다. 성찬은 주님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식탁을 나누게 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과 교제를 갖게 해줍니다.


헨리 나우엔은 [나의 사랑하는 자요]라는 책에서, 성찬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상징이라며, 본문 26절의 네 개의 동사를 가지고 설명합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마26:26). 여기 나오는 네 개의 동사는 '가지사'(take/took)와, '축복하시고'(blessed), 그리고 '떼어'(broke)와 '주셨다'(gave)라는 단어입니다. 나우엔은 이 네 개의 동사를 근거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먼저 '선택받은 자'이며, 다음은 '축복 받은 자'이고, 그리고 '상처받은 자'이며, '나누어주는 자'라고 말합니다. 성찬식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자리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확인하는 자리라고 나우엔은 강조합니다.


십자가를 지실 때가 다가오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월절을 준비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만찬자리에서 주님은 제자 중 한 명이 자신을 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에 제자들은 각기 매우 근심스레 "주여, 저는 아니지요?"라고 묻는데, 가증하게 가룟 유다도 "랍비여, 저는 아니지요?"라고 묻습니다. 스승을 배신하고 죽음에 넘겨준 가룟 유다는 타락한 인간의 전형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양의 피를 통해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로서, 유월절 양의 피는 구원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양으로 오셨고, 인류를 구원하려고 십자가를 지십니다.


주님은 성만찬의 의미를 설명해주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축사하신 후 "이것은 내 몸이라"며 나눠주셨고, 포도주를 주시며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고 말씀하십니다. 양의 피로 맺은 옛 언약은 주님의 피를 통해 맺어질 새 언약의 상징으로, 참된 구원은 양의 피가 아닌 주님의 피로 이뤄집니다. 양의 피는 죄 사함을 상징할 뿐 인간의 죄를 씻지 못합니다. 타락한 양심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행할 수 없으나, 주님의 피는 인간의 죄를 씻어 양심을 깨끗케 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케 합니다.


성만찬을 행하며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해야만 합니다. "이 놀라운 구원이 내게 온 것은, 주님이 나를 위하여 흘리신 그 보배로운 피 때문입니다. 내가 그것을 내 몸으로 마십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내 중심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육체가 세상의 양식으로 살아지는 것처럼,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생을 살겠습니다. 산 떡이신 주님으로 인하여 내가 살기에 내가 이 떡을 받습니다."


그런가하면 성찬은 구원의 보증입니다. 성찬을 믿음으로 온전하게 받는 사람은 장차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여 구원의 기쁨을 현실로 누릴 날이 올 것입니다. 성찬은 사랑의 잔치로서, 영원히 천국에 함께 살 형제자매들과 함께 영광의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 떡을 뗄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사랑을 나누는 잔치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최후를 준비시켜주는 잔치입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11:26). 주님 오실 때까지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전할 것입니다. 주께서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마26:29)는 말씀대로, 우리는 또 천국에서 영원한 잔치를 누릴 것입니다.


예수님은 곧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텐데, 지금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는 자리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마26:26). 여기서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에서 '축복하셨다'는 말씀은 마치 '오병이어'에서처럼 감사와 찬양의 평이한 식기도가 아니라, 유대인의 유월절식탁의 전통적 관례에 따라 감사를 드린다는 뜻입니다. 이때 아마 예수님은 유월절 식사에서 전통적으로 쓰이던 공식 문구인 '우리 주 하나님, 우주의 왕이시여, 땅에서 떡을 내신 당신께 영광이 있기를'과 같은 말로 축사하셨을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하시며, '떡'을 곧 죽게 될 예수님 자신의 몸과 나란히 연관시키십니다. 이로써 19절에서 암시했듯이, 주님은 유월절의 희생양이 되어 그들을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는 새로운 구속사가 시작될 것을 시사하셨습니다. 즉 떡이 여러 조각으로 떼어진 것처럼 예수의 몸도 찢어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마26:27)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잔을 가지고 감사 기도하셨다'라고 했는데, 성서학자들은 "오, 우리 주 하나님, 우주의 왕이시여, 포도의 열매를 창조하신 당신에게 영광 돌리렵니다"라고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기도했을 것으로 봅니다. 한편 여기 '감사 기도하다'는 말의 원어 '유카리스테사스'는 '감사'를' 뜻하는 '유카리스테오'의 분사로서 여기서 '성만찬'을 뜻하는 '유카리스트'(Eucharist)라는 말이 파생되었습니다. 주님의 성만찬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서 어떤 경우에 감사할 것인가를 살펴봅니다. 예수님처럼 세 가지 경우에 감사할 것입니다.


첫째, 예수님처럼 날마다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감사해야 합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마26:26, 27). 우리는 식사 전에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갖습니까? 신앙인으로서 그냥 습관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감사의 기도를 하십니까? 세계적으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는 사람이 일년에 2천만 명이나 됩니다. 하루에 3,5000명, 1분에 24명이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습니다. 주님은 최후 만찬석상에서 감사기도를 하시고 떡과 잔을 나누셨습니다. 이것은 최후 만찬 때만이 아니라 오병이어의 기적 앞에도 먼저 하늘을 우러러 감사하셨는데, 주님의 감사는 일상적인 습관이셨습니다.


영국의 작가 길버트 K. 체스터턴은 말했습니다. "식사 전에 감사기도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나는 연극과 오페라를 감상하기 전, 음악회와 무언극이 시작되기 전, 독서하기 전, 스케치나 색칠, 수영, 펜싱, 권투, 걷기, 놀기, 춤추기 전과, 펜을 들어 잉크에 찍기 전에도 감사기도를 한다." 오프라 윈프리가 그 바쁜 중에도 날마다 쓴 [감사 일기] 내용입니다. "오늘도 거뜬하게 잠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어서 감사하다. 유난히 눈부시고 파란 하늘을 보게 해주셔서 감사하다. 점심 때 맛있는 스파게티를 먹게 해주셔서 감사하다. 얄미운 짓을 한 동료에게 화내지 않았던 참을성에 감사하다. 좋은 책을 써 준 작가에게 감사하다." 모든 일에 감사해야합니다.


고훈 목사님의 [목회일기]에 실린 간증입니다. "신학생 담임전도사 시절 눈은 온통 땅 위에 쌓이고 쌀은 떨어지고 나무도 다 땠다. 저녁밥을 굶고 나니 첫 아이 갖고 배부른 아내가 가엾고, 왠지 무능한 사람 같아 서글퍼졌다. 40일도 금식한다던데 눈오고 날씨 찬데 돈 꾸러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결혼반지 팔아 쌀 팔아 먹을 수도 없고…. '한끼 굶자' 신앙으로 합의하고 누웠다. 밤 10시가 다 되가는데 계시 받고 온 사람처럼 집사님이 쌀 한 말과 나무를 가지고 와서 부엌에다 놓고 간다. 늦은 밤 저녁상 앞에 놓고 감사 기도하다가 '우리에게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오니 감사하나이다'하는 대목에 나는 울었다. 예수 믿는 날부터 수천 번을 주기도를 외웠으나 이제야 그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밥 한 그릇 얼마나 귀한 것인가! 주님은 날마다 일용할 양식 달라고 기도하시라니…." 일용할 양식에 감사해야합니다.


둘째, 우리는 예수님처럼 축복 앞에서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주님이 식사 전에 '감사하셨다'는 말을 '축사하시고'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감사'와 '축복'이 거의 동의어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아무리 초라한 것이라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은 축복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식사 전 '감사기도'를 하시면서, 그 축복이 다시 나눠지길 원하시며 드린 '축복의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축복기도는 오병이어 기적처럼 다시 축복을 나누는 기적이 되었습니다.


그 기적의 현장을 보십시오.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마14:19). 당시 무리들은 2만 명 가량이었는데 한 아이가 가져온 점심은 겨우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였지만, 그것을 감사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의 정체는 바로 '감사의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글이 있습니다. -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 당신의 몸이 건강하다면 당신은 이번 주를 넘겨 살지 못하는 이 세상의 백만 명보다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한번도 전쟁의 위험이나 수용소의 외로움이나 고문의 고통이나 굶주림의 쓰라림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당신은 5억 명의 사람들보다 더 나은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체포, 협박, 학대, 고문, 그리고 죽음의 두려움 없이 교회를 나갈 수 있다면 당신은 이 세상의 30억의 사람들보다 축복 받은 사람이며, 만일 당신의 냉장고 안에 음식이 있다거나, 당신의 몸에 옷이 걸쳐져 있다거나, 머리 위에 지붕이 있고, 잠 잘 장소가 있다면, 당신은 이 세상 인구의 75%보다 더 부유한 사람입니다. 통장이나 지갑에 돈이 있거나, 집 어디인가 작은 그릇 안에 남는 동전들이 있다면, 당신은 이 세상 8% 상위권 안에 드는 부유층이며, 두 부모가 아직 살아 계시고 아직 이혼하지 않으셨다면 보기 드문 축복을 입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고개를 들고, 얼굴에 미소를 띠고 감사할 수 있다면.. 당신은 그야말로 놀라운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이 그렇게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의 손을 잡아주거나, 안아주거나, 누군가의 어깨에 손을 얹어 준 그것 역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에게서 치유가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를 읽고 있는 당신은 이미 두 배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당신 아닌 누군가가 당신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 세상의 20억이 넘은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 속에 당신이 속해 있지 않은 까닭입니다. - 우리는 모두 큰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셋째, 우리는 예수님처럼 삶의 위기 앞에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마26:27). 예수님은 일상적인 생활에서 감사하셨고, 하나님의 축복을 아시고 감사하셨으며, 위기 앞에서도 감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죽음 앞에서도 감사하십니다. 주님은 이 만찬이 끝나면 체포당하여 십자가를 지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주님이 지금 나누시는 떡은 잠시 후 십자가에서 부서져야할 당신의 몸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지금 나누시는 잔은 잠시 후 십자가에서 흘려야할 당신의 피입니다. 주님은 본문 28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 예수님은 자신의 인생 최대 최후의 위기인 죽음의 위기 앞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메데 왕국에서 다리오 왕의 총애로 총리가 되자, 이를 시기한 방백들이 다니엘을 제거하려했으나, 아무 책을 잡을 수 없어 30일 동안 왕 이외에 어떤 신이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지는 법을 세웠습니다. 다니엘은 이 일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6:10)며, 위기 중에도 하나님께 감사하자, 하나님은 그를 건지시고 더 높이셨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부딪히는 모든 역경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오늘은 보이지 않고 이해도 안 되지만 내일 드러나고 이루어질 그 선하신 뜻을 믿고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감사가 기적을 낳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 하나님의 주권을 수용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은 어떤 역경에서도 감사함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부시가 미국 대통령이 되면서 최초의 흑인 국무장관이 된 뉴욕빈민가 출신 콜린 파월 장관의 이야기입니다. 아르바이트하는 공장에서 어느 날 그는 다른 인부들과 함께 도랑을 파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한 사람이 삽에 몸을 기댄 채 회사가 충분한 임금을 주지 않는다며 불평하고 있었습니다. 그 옆에서 한 사람은 묵묵히 열심히 도랑을 파면서, 그는 불평하기보다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몇 해가 지난 후 다시 그 공장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을 때, 여전히 그 사람은 삽에 몸을 기댄 채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지만, 열심히 일하던 사람은 지게차를 운전하고 있었습니다. 또 여러 해가 지나 그곳에 다시 갔을 때 삽에 기댄 채 불평만 하던 그 사람은 원인을 모르는 병으로 장애인이 되어 회사에서 쫓겨났는데, 열심히 일하던 그 사람은 그 회사 임원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례가 파월의 인생에 큰 교훈이 되었다고 합니다. 불평을 일삼는 사람은 결국 스스로 그 불평의 열매를 따먹게 마련입니다. 반면 감사는 그에 상응하는 열매를 가져올 뿐 아니라, 그 자체로 행복을 증가시켜줍니다. '행복은 감사에 비례한다'는, 이런 서양 속담이 있습니다. "행복은 언제나 감사의 문으로 들어와서 불평의 문으로 나간다." "조심하라. 불평의 문으로 행복이 새나간다." 기억하십시오! 감사의 문으로 행복이 들어옵니다. 감옥과 수도원의 공통점은 세상과 고립돼 있다는 점인데, 다른 게 있다면 불평하느냐, 감사하느냐의 차이 뿐입니다. 감옥이라도 감사하면 수도원이 될 수 있습니다. 감사는 희망의 언어로서, 감사는 역경을 벗어나는 인생의 출구입니다.


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가 있다면, 아마도 이런 세 가지로 그 저주가 나타날 것이다. 그 첫째는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불신앙이다. 하나님을 아무리 믿어보려 해도 믿어지지 않는 것, 그것은 분명 버림받은 심령입니다. 둘째는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는 것이다. 성경은 이 세상에 지식적인 책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와야 됩니다. 설교말씀을 듣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내 귀에 들려와야 구원도 받고 은혜도 받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이 안 들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입니다. 셋째는 감사가 없는 마음이다. 그는 전쟁이나 질병이 저주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 감사와 기쁨이 없는 마음, 그래서 그 생각이 원망과 불평뿐인 이런 마음이야말로 저주받은 불행한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착한 사람이 죽어 천국에 갔더니 천사가 뭔가 열심히 포장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궁금하여 "천사님! 무얼 그렇게 열심히 포장하고 있습니까?"하고 묻자 "예, 사람들에게 전해줄 행복을 포장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포장을 왜 그렇게 단단하게 하세요?" "사람들에게 전해주려면 멀기도 하고 시간도 많이 걸려서 튼튼하게 포장하고 있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그 포장지는 무엇으로 만들었나요?" "예, 행복을 감싸고 있는 포장지는 '고난'이랍니다. 이것을 벗기지 않으면 행복이란 선물은 받을 수가 없답니다." 그 사람은 천사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천사님, 그러면 그 고난이라는 단단한 포장은 무엇으로 열 수 있나요?" 천사가 대답합니다. "고난이라는 포장을 열 수 있는 열쇠는 바로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름답게 살아가면 고난이라는 포장을 열고 행복이라는 선물을 받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을 남긴 채 천사는 사라졌습니다.


미국에 '스탠리 탠' 박사는 회사를 크게 세우고 돈을 많이 벌어 성공한 사업가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1976년 갑자기 척추암 3기 진단을 받았는데 수술로도, 약물로도 고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절망에 빠졌을 것으로 여겼는데, 몇 달 후 그는 병상을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출근했습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아니 어떻게 병이 낫게 된 것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스탠리 탠은, "예, 저는 하나님께 감사만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제 병을 고쳐주셨습니다"라고 대답하더랍니다.


노숙자들을 섬기는 산마루교회에 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중년의 곱고 기품 있는 모습의 부인이 햅쌀 20킬로 네 포대를 가지고 오셨기에, 이주연 목사님이 '참으로 감사합니다'하고 인사를 드렸더니, 그분이 말없이 눈물짓더니 하는 말이 "남편이 세상을 떠나서 올해 그이가 들었어야 할 쌀을 가져왔습니다." 80킬로 햅쌀보다 천 배 만 배 무거운 사랑의 무게에 목사님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독교 3대 신비주의자 중의 하나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는 "당신이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기도가 '감사합니다'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했습니다.


송명희 시인의 시 [하소서]입니다. "감사하게 하소서/ 원망이 감사를/ 이기지 못하게 하소서// 기뻐하게 하소서/ 슬픔이 기쁨을/ 죽이지 못하게 하소서// 사랑하게 하소서/ 미움이 사랑을/ 누르지 못하게 하소서// 평안하게 하소서/ 불안이 평안을/ 엄몰치 못하게 하소서// 찬양하게 하소서/ 사단이 찬양을/ 빼앗지 못하게 하소서."


라인홀드 니이버는 "크리스천의 세 가지 덕목인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 외에 하나를 더 넣어야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4-15). 십자가를 앞두고도 감사 드리신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도 어떤 상황에도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6~30절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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