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30 74회
"한 해의 경점에 서서"
2018년 12월 30일 송년주일
디모데후서 4 : 6 ∼ 8 ; 전도서 12 : 1 - 2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개신교 목사님들이 천주교 신부님들보다 종말신앙이 투철하다. 사실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닌가? 결혼하지 않은 신부님들이 어떻게 지옥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덧붙이자면, 가정을 모르니 천국도 알겠는가!
이솝우화에 보면, 사자와 나귀와 여우 셋이서 사냥한 다음, 사자가 나귀에게 "네가 한번 공평하게 나눠 보라"고 하자 나귀는 곧이곧대로 사냥한 것을 똑같이 삼등분 합니다. 사자가 "내가 제일 많이 수고했는데 공정하지 못하다"고 화내며 나귀를 잡아먹고서, 여우에게 공정하게 분배해보라고 합니다. 여우는 사자 몫을 자기보다 훨씬 많이 주니 사자가 공평하다고 만족해하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느냐?"고 묻자 여우가 말합니다. "나귀 죽는 것을 보고 생각했지." 남이 죽는 것을 보고 내 죽음도 생각할 줄 알아 종말에 대비할 줄 아는 여기에 지혜가 있습니다.
독일에 내려오는 전설입니다. 어느 마을에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큰 컵이 있는데, 그 컵에 사람이 들어가 컵을 돌리면 돌리는 만큼 그 사람이 젊어지는 신비한 컵입니다. 어느 할머니가 오래 살 수 있도록 컵을 많이 돌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컵을 돌리는 이가 할머니에게 "할머니 소원대로 젊어는 지겠지만, 그러면 지금까지 할머니가 살아온 대로 다시 살게 된다"며 서약서에 사인하라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젊어지는 것을 취소하겠다고 되돌아갔습니다. 끝이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쓸데없이 오래 살려거나 계속 젊어지겠다고 몸부림치지 맙시다. 여기까지 잘 왔는데 왜 되돌아갑니까? 생의 종말이 있어 끝이 있다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여기에 승리와 영광이 있는데 문제는 그 끝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미국의 한 대형호텔에서 화재가 났는데, 미처 대피하지 못한 200여 명의 투숙객들이 절체절명의 순간 가까스로 구조되었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 한 연구소가 당시 구조된 사람들을 일일이 추적하여 사건 이후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조사했습니다. 당시 그 호텔에 투숙할 정도면 사회적으로 높은 명망과 재력의 소유자들이었는데, 놀랍게도 그들 대부분이 완전히 다른 새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장애자를 돕거나, 말기 암 환자와 친구 되거나, 거리의 노숙자들에게 빵을 나누어주고, 또 빈민 지역에 들어가 무료진료 활동을 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화재 현장이라는 그 생지옥에서 이미 종말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조된 이후의 삶은 덤으로, 선물로 얻은 것임을 깨닫고서, 그들은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올바로 이해하면 세상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무서운 파국에 대한 예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새 삶에 대한 희망입니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가고 새 해가 옵니다. 어떻게 맞으시겠습니까?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인생의 마지막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로마감옥에서 이제 머잖아 순교하게 될 것을 이미 감지했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순교한 로마에는 작은 성당이 지어져있는데, 거기에는 둥근 나무토막과 절구통 같은 모형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도마로 삼아서 사도 바울의 목을 올려놓고, 도끼로 내리쳐서 단번에 목을 베었다고 합니다. 그때, 바울의 목이 떨어져 떼굴떼굴 세 번 굴렀다고 하는 곳에 샘물이 나왔다는데, 지금도 그곳엔 샘터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순교할 것을 내다보면서, 이제 멀지 않은 죽음을 생각하며 이 편지를 썼습니다.
본문 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딤후4:6). 여기 '떠난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날루시스'인데, 이 말은 소나 나귀에게 달구지나 쟁기를 끌게 하려고 멍에를 씌웠다가, 일이 끝난 다음에 '멍에를 벗긴다'라는 뜻입니다. 또 천막을 쳤다가 다른 곳으로 가려고 '천막 줄을 푼다'는 뜻이 있고, 또 정박했던 배가 출항하기 위해 '닻줄을 푼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지금이 정말로 기나긴 인생의 길을 마치고, 이제 장막 줄을 풀고, 멍에를 벗는 그런 순간입니다. 여기서 바울의 멋진 인생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지금 지난 과거를 돌아보면서, 다시 앞에 있는 미래를 전망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바울의 종말에 대한 자세를 통해 우리의 삶에 대한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첫째, 바울은 종말을 염두에 두고 살았습니다. 본문 6절입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딤후4:6). 바울은 자기에게 다가올 그 죽음을 지금 의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생명을 그리스도께 바쳐진 제물이라고 합니다. 여기 '전제란 '스펜도'라고 하여, 포도주를 제물과 제단에 부어드리는 제사입니다. 바울은 포도주를 제단에 붓듯이 자기 피를 하나님께 드리는 순교의 제물이 되고자 생각했던 것입니다. 눈물과 땀과, 피와 모든 생명의 기력을 다 쏟아서 그리스도를 위해 제물로 드려질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시작이 있으면 또한 끝이 있고, 태어나는 일이 있으면 또한 죽는 일도 있습니다. 앞날에 대해 그 누구도 확실하게 예언할 수 없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살아있는 것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세상엔 이런 기본적인 것을 모르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죽는 것이 확실하지만, 그 죽을 시기를 모릅니다. 올 땐 순서대로 오지만 갈 때는 순서도 없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에, 우리는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미국에 윌리암 헐스트라는 부호가 나이 60세가 되었을 때, 자녀들과 친척과 친구들을 불러놓고 "앞으로 내 앞에서는 농담이라도 절대로 죽음이라는 단어는 입밖에도 꺼내지도 말라!"고 엄명을 내렸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토록 컸던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 로마의 한 황제는 신하들이 아침마다 자기를 알현할 때, "폐하시여! 죽음을 기억하십시오"라고 인사하도록 명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윌리암 헐스트는 죽을 때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가 죽었는데, 이 로마의 황제는 아주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죽음은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만 승리와 안식과 참된 평안을 줄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이 수요예배를 드리면서 설교를 여느 때와 같이 거의 끝내고 있는데, 어쩐지 모여 있는 성도 중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다음 주일에는 참석할 수 없는 사람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느끼는 대로 이렇게 말했답니다. "여러분들 중에 다음 예배 시간에 나오지 못할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도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도록 오늘 회개할 것은 모두 회개하여 깨끗한 심령으로 돌아가셨으면 합니다." 이렇게 말하고서 한 10분 동안 길게 회개하는 통성기도를 하고 예배를 마쳤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사람들이 일어서서 나가는데, 결혼한 지 1년밖에 안 된 23세 된 부인이 갑자기 "쿵!"하고 쓰러졌습니다. 모두 놀라서 업고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이 일로 이 목사님은 단에 설 때마다 다음 예배 시간에 나올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설교하라는 음성이 들려오더랍니다. 여러분 기회가 내일 또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맙시다. 오늘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며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종말 앞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 바울은 종말을 의식하면서 자기 살아온 삶을 뒤돌아볼 때, 지금까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 종말 앞에 후회가 없다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살아온 삶을 세 단어로 표현합니다. 먼저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말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그는 '인생이나 신앙생활은 하나의 싸움'이라고 말하면서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초긴장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싸우는 사람처럼 항상 긴장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대장 되신 그리스도께로부터 부름 받은 군인입니다.
C.S 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에서 고참 사단이 조카 사단에게 그리스도인을 유혹하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환자(그리스도인)의 관심을 내면 생활에 집중시켜라. 그의 회심이 자기 내면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 자신의 심리상태에 관심이 쏠려있다. 이런 현상을 부추기도록 하라. 가장 기본적인 의무는 등한시한 채 가장 어렵고 영적인 의무에만 마음쓰게 하라. 다른 사람은 훤히 다 알고 있는 결점인데도 정작 본인은 한 시간이나 자기성찰을 하고서도 깨닫지 못하는 수준까지 끌어내려야 한다." 루이스는 영적 침체는 자기 집착현상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영적 폐쇄상태에 빠진 것이 영적 침체입니다. 현대인들이 병적으로 '자기'에게 애착하는 자아 열중이 바로 영적 침체의 원인입니다. 이런 영적 침체를 극복하려면 자기에게서 관심의 방향을 외부로 돌려야 합니다. 곧 하나님, 이웃, 세상을 향해 방향을 돌리면 생명의 빛이 비추게 됩니다. 영적 침체를 극복하는 길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향상하고, 이웃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섬김의 생활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즉, 영적 침체를 극복하려면 병적 자아 추구를 중단하고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추구할 때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다음은,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말합니다. 이 '달려갈 길'에 해당하는 '드로몬'이란 단어는 마라톤경기에서 정해진 경주코스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맡기신 사명'을 뜻하며, 바울이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애쓰며 살아온 전 생애를 말합니다. 그리고 '마쳤다'는 말은 바울이 경주에서 승리했다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달린 것을 말합니다. 그는 향방 없이 가지 않고 목표를 따라 갔고, 생명을 다해 그 길을 끝까지 달렸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하는 자세로, 생명을 다해 그 길을 달려갔습니다.
아시시의 성자 프란시스의 죽음이 가까웠을 때, 그의 의사 친구 조바니에게 물었습니다. "친구여,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 것 같소?" 조바니는 그를 안심시키며 대답했습니다. "형제여,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병은 곧 물러갈 것입니다." 그러자 프란시스가 말합니다. "내게 진실을 말해주시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소쩍새가 아니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만이 내 소원이라오. 나는 성령의 은혜로, 살든지 죽든지 어느 것에나 만족할 만큼 하나님과 일치하고 있다고 생각하오." "형제여, 그렇다면 내가 말하리이다. 의학상으로 볼 때 형제의 병은 불치의 병이오. 금년 초가을까지 살 수 있을 것 같소." 그러자 프란시스는 두 손을 들고 형언할 수 없이 기쁜 낯으로 외쳤습니다. "오라, 나의 죽음의 잠이여! 나의 육체의 죽음에 의해 당신은 찬송 받으소서. 이 땅에서 한번 삶을 누린 자라면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 죄 중에 죽는 자는 재앙이로다. 그러나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며 세상을 떠나는 이, 그는 행복한 자가 아닌가?" 그는 죽기까지 믿음의 경주를 달려갔습니다.
그 다음은, 믿음을 지켰다고 말합니다. '믿음을 지켰으니' 이 말은 주님께 대한 충성을 지켰다는 뜻과 함께, 청지기로서 악조건 속에서도 주님께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쉽고 필요할 땐 주님을 찾다가, 조금 편해지면 쉽게 주님을 멀리하며, 신앙생활을 기분과 감정에 따라 변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처음 주님을 만난 후,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끝까지 주님께 대한 믿음과 충성을 지켰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1:19). 우리는 착한 양심을 가지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이어지는 말씀 10절과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딤후4:10-11). 1세기 문서들을 보면, 로마에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가 일어나니까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데마도 박해의 시간이 길어지자, 땀흘려 주를 섬기던 봉사적 신앙에서부터 쉽고 편하게 믿으려는 현실 타협적인 신앙으로 변질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이 땅에서의 마지막 모습은 너무 쓸쓸하고 외로웠을 텐데, 다행히 11절에 보면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데마가 떠나감으로 바울의 왼팔이 잘라졌으나 그의 오른쪽에는 경건한 지성인 의사 누가가 있었습니다. 배울 만큼 배웠던 누가는 그의 의술을 통해 치부할 수 있었음에도 바울 곁에서 그를 도우며 믿음을 지켰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신실한 자세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셋째, 사도 바울은 저 앞에 있는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바라보았습니다. 본문 8절입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8). 바울은 지금까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고, 이제 오직 남은 것은 '면류관'을 기다리는 일뿐임을 고백합니다. 우리도 죽음을 내다보며,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면류관'(스테파노스)이란, 당시 운동 경기의 승리자에게 수여했던 것으로, 월계수나무, 상수리나무 등의 잎을 엮어 만들었는데, 왕이 쓰는 왕관과는 달랐습니다. 주석가 트렌치(Trench)는 '왕관'이 그리스도께 합당한 것이라면, '면류관'은 성도들에게 합당한 것으로, 이 면류관을 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며 다스리는 특권을 얻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9:27). 성도들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군사요, 믿음의 경주자로서 주님께 충성을 다할 때, 의로운 재판관이신 주님은 충성된 종들에게 의의 면류관을 주리라고 약속합니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라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종말을 맞느냐에 따라 그의 일생의 성패가 결정됩니다. 마지막날 주님께로부터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받아 쓸 것인가, 아니면 무서운 진노와 심판을 받게 될 것인가를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바울은 지금 눈앞에 종말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결승점을 넘어 저 앞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자기를 위해 예비해놓은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 앞에 면류관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사도 바울이 임종 직전에 가진 자기의식이었습니다. 여러분, 성공과 실패가 무엇입니까? 많은 재물을 모으고, 높은 자리에 올라 출세했으면 이것이 성공입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참된 성공은 주님 앞에 서는 날 주님께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신앙인의 성공입니다.
전남 순천에 한 가난한 농부가 소작농으로 힘겹게 살다가 예수 믿고 나서 주님께서 인생의 주인으로 늘 함께 하심을 믿고, 아무리 힘들어도 새벽기도와 십일조 등의 헌금생활을 분명히 하여 교회에서도 신앙으로 인정받아 장로님이 되셨습니다. 장로 임직을 받고 주일예배 때 대표기도 하려고 단에 오르는데 목사님이 장로님을 말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정장을 입으신 분이 기도를 해주세요." 정장을 못한 장로님은 강단에서 내려와 맨 뒷자리에 앉아 눈물 흘렸습니다. 농사로 9남매 가르치다 보니 넥타이와 양복은 엄두도 못 냈습니다. "하나님, 내 자식들에게만은 이 가난을 물려주지 않게 하소서." 장로님은 어느 추운 겨울 빙판에 미끄러져 강물에 빠지자 집에 돌아와 옷 갈아입고 새벽기도 나갔습니다. 9남매를 통해 얻은 104명의 후손은 매년 1월 1일은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성경을 가장 많이 읽은 가족에게는 상을 주었습니다. 그 자녀들은 모두 교회 중직이 되었는데, 장남 김홍규 장로는 매산 고등학교 교장, 둘째는 육군 대령으로 전역했고, 셋째가 대기업 사장, 넷째 김명규 장로는 14, 15대 국회의원으로 국회조찬기도회 부회장을 지냈고, 다섯째 김승규 장로는 법무부장관을 거쳐 법무법인 로고스 대표이며, 4명의 딸과 사위도 교회 중직자로서 새벽기도로 키운 9남매가 신앙의 명가를 이룬 분이 바로 고 김응선 장로님입니다.
우리에게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언제라도 하늘에서 우리를 부르시면 우리는 의로우신 재판장 앞에 서야할 사람들입니다. 주어진 시간, 주어진 기회, 주어진 생명을 가지고 맡겨진 직무에 최선을 다하며, 영광스러운 종말을 위하여 오늘의 성실을 다해야만 합니다. 오늘 내가 건강하다고 해서, 이 건강이 언제까지나 내게 있을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내가 젊다고 해서 이 젊음도 잠시 후면 지나갑니다. 우리의 생명이 언제 끝이 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이미 흘러간 시간은 깨끗이 잊어버리고, 오직 오늘이라는 주어진 시간을 통하여 영광스러운 내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내게 맡겨진 본분 앞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신학자 마티(Martin Marty)는 한 교회의 종말을 관찰하고 [Context]지에 소감을 썼습니다. 도박장이 허용된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에 116년 역사를 가진 성 야고보 교회는 교인이 너무 적어 1986년에 문을 닫았습니다. 마지막 예배에는 단 세 명만 출석했을 뿐이었습니다. 레셀 게일 신부는 이렇게 마지막 설교를 했습니다. "도박장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눈을 반짝이고 밤을 새워가며 온 정신과 있는 돈을 다 털어놓았듯이, 사람들이 자신의 귀중한 영혼과 영원한 생명을 위해 정성을 기울였다면 이 교회는 문을 닫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람들로 차고 넘쳤을 것입니다."우리도 인생의 도박장 테이블에 앉아 썩어지고 없어질 것들을 위하여 눈을 번쩍이며 정신을 쏟으며 작은 수입의 증가에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게 살면 짓다가 만 망대, 살아보지 못한 인생으로, 처참한 후회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1995년 1월 17일, 일본 고베에 진도 7.2의 엄청난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사망자가 6,370명에 이르고, 건물 10만 채가 파손되었습니다. 일본의 자존심이던 한신 고가 고속도로가 붕괴되었고, 총 피해 규모는 1,400조 원에 이르렀습니다. 각 방송사는 생방송으로 그 처절한 현장을 중계했습니다. 그때 방송 중에 이런 장면이 나왔습니다. 망연자실해 있는 70세가 훨씬 넘은 한 노인을 리포터가 인터뷰했습니다. 그 노인은 어린 시절부터 그의 일생을 빌딩하나 세우기 위해 보냈다고 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을 아끼며 60년 동안 수고하여, 지진이 일어나기 하루 전날에 비로소 12층 건물을 준공했습니다. 그 건물은 자기 평생을 두고 수고한 결과였기에 주변 사람들을 초청하여 축하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새벽에 지진이 덮쳐 그 건물은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미처 보험을 들지도 않아 한 줌의 먼지만 남았습니다. 세상적인 야망만 위해 살면 결국에는 이처럼 허탄하게 끝나고 맙니다. 그러나 영원한 나라를 위해 살면 잠시 고난과 시련이 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보상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승리와 패배는 하나님께서 내리십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듀퐁 가든'이란 아름다운 정원은 듀퐁 백작이 자기 아내를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듀퐁 백작이 이 정원을 완성하고 개원식을 할 때, 유명 인사들을 초청해서 파티를 열면서 이런 인사말을 했습니다. "이 정원은 제가 아내를 위해 만든 것입니다. 함께 기뻐해 주시는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저만큼 기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정원에는 저의 눈물과 정성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내를 위해 직접 이 정원에 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고 가꿨기에 이 정원을 볼 때마다 제 안에 큰 기쁨이 있습니다." 듀퐁 백작의 이야기를 들으면 "이 땅에서 주님을 섬기기 위해, 교회를 위해 눈물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사람들은 천국에서 보면 참 기쁘고 즐겁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수고하고 눈물 흘린 만큼 우리는 그 기쁨과 영광을 주님 앞에서 누리면서 즐거워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한 해의 종말 앞에 서 있습니다. 오늘이 벌써 금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우리는 천국의 군인으로서 충성은 다했는지, 경기자로선 열심히 달려왔는지, 이 종말적 시간에 우리 앞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심판입니까, 징계입니까, 아니면 면류관입니까? 저 앞에 있는 소망의 세계를 밝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전도자는 권면합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12:1-2). 그리고 그 날에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전12:14)고 경고합니다. 그 날이 언제 오든 우리는 언제나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 앞에 영광스럽게 설 수 있도록 하루 하루를 깨어 대비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